# 60
& 세계수 (5)
다크 엘프 왕의 중개로 세인을 만나러 온 코볼트는 걸어 다니는 늑대에 가까웠다.
회색빛 털을 가진 늑대는, 키가 훤칠한 편인 소년 세인보다 약간 작았다.
그리고 털이 북슬북슬했다.
늑대 특유의 머리만 아니면 곱슬 개처럼 보일 정도로 통통해 보이고 말이다.
그는 초록색 망토와 옷. 그리고 담요를 덮은 채 커다란 보물상자 위에 앉아서 다가오는 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세인을 만나게 된 경위는 이렇다.
코볼트는 기형적인 마법사였다.
마법사들이 흔히 세상의 진리를 탐구하는 학자라면, 그는 오히려 마법을 공격 쪽으로 특화해 버렸다.
원래 재능도 엄청났지만, 전투에서 엄청난 힘을 발휘하니 왕들도 그를 쉽게 대하지 못했다.
게다가 자신들에게 유용한 상품도 파니까 적대할 이유는 없다.
다만 성질이 고약한 게 흠이지만, 그것도 강자에게는 흔히 있는 결함이다.
그는 다크 엘프 왕의 부름을 받고 달려왔다.
코볼트 앞에는 거대한 나무가 왕좌에 앉아 있었는데, 그 나무는 아주 늙어서 주름이 가득했다.
하지만 주름 사이의 눈은 인자함과 총명함이 가득하다.
트렌트라 불리우는 엘프들의 왕 앞에서, 예의상 머리를 숙여 보인 코볼트는 입을 열었다.
“뭐야? 왜 바쁜 나를 불러? 그나마 당신이니까 와준 거야.”
“친구여. 소개해줄 손님이 있네.”
“나는 왕하고만 거래를 해. 그걸 모르지는 않잖아. 지금 여기의 왕들이 다 떠나고 있는데, 누구랑 거래를 하라는 거야?”
그렇다. 지금 대륙은 괴물들의 진격에 의해 몸살 중이고, 세계수의 왕들은 그 기세에 힘입어 하나둘씩 이곳을 떠나고 있었다.
모두 중앙으로 모이려는 것이다.
가이더는 지금 괴물들의 이동으로 인해 다시 유린당하고 있는 판이다.
그래 봤자 이미 인간들은 거덜 난 상태라 자연만 다시 무너지는 꼴이지만.
“그는 대단한 힘을 지닌 자로서. 엘릭서의 주인이네.”
코볼트, 스톰은 몸을 흠칫 떨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이걸 누구에게 말했나?”
“아무에게도, 자네에게만 처음으로 말해주는 걸세.”
스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가 괴짜라는 것이 여기에서 드러났다.
“대단하군. 감탄스러워. 엄청난 힘을 지닌 자라는 자네 말이 맞아. 하지만 최강의 전사라고 해도, 전사는 전사일 뿐이야. 세상을 거덜 낼 수 있는 힘이 있고, 누구나 죽일 수 있는 자라 해도 상관없어. 나는 격이 맞는 자들하고만 거래한다. 그게 내 상점의 규칙이야.”
“….”
“내가 평소 왕들을 맹인이라고 놀렸지? 정말 그렇군. 내 말이 맞잖아. 멍청한 놈들! 지척에 절대의 힘이 있는데 아무것도 몰라. 집 안에 있는데도 말이야.”
그러면서 미친 듯이 웃는 코볼트였다.
그는 과하게 웃어댔다, 아주 즐겁다는 듯이….
그러자 트렌트는 상체를 약간 숙였다.
그래서 미약한 지진이 일어나며 천장이 흔들거렸다.
다크 엘프들은 이런 상황에 익숙한지 밖에서 안으로 들어와 보지도 않았다.
스톰은 그런 트렌트를 보면서 ‘몸 좀 줄이지 올려다보기 귀찮네.’라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는 왕이네. 그것도 내가 보증하는 왕.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약자를 그 칼날로 협박하거나 업신여기지 않았네. 하물며 대척점에 선 엘프에게도 수치를 주지 않았어. 자신의 백성이 소중하듯, 남의 백성도 소중한 줄 알아. 자네는 커다란 힘을 가지고 겸손하기는커녕 실컷 남을 깔보는 자니까.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겠지?”
그런 트렌트의 말에 스톰은 웅얼거리듯이 말했다.
“아니…. 뭐 나도 그렇게 약자를 괴롭히진 않아….”
트렌트는 그의 변명을 끊으며 말했다.
“그와 눈빛을 공유해 보게. 그럼 그가 무서운 마검 오버 더 데스, 신의 분노를 다루는 자여서가 아니라. 동격으로서 좋은 인연을 엮어 볼 수도 있을 걸세. 그가 표리부동한 자라면 그때 내게 와서 나를 탓하게.”
“….”
늑대 입장에서는 오래 산 나무와 말을 섞는다는 거 자체가 힘든 일이었다.
말에서 밀린다.
* * *
그리하며 스톰은 세인의 앞에 섰다.
그리고 위아래로 그를 훑어보더니 침 뱉듯이 말했다.
“내 이름은 코볼트, 스톰. 나랑 거래 하고 싶은 게 있나?”
“뭘 팔지?”
스톰이 반말을 하니, 세인도 반말을 했다.
스톰은 세인의 반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생각하는 늑대의 얼굴로 자신의 목을 긁었다.
“뭐 거의 모든 걸 팔지. 돌부터 시작해서 무기라든가. 옷이라든가. 물질적인 걸 판다. 내가 받는 화폐는 바로 마정석이야. 검은 돌 알지? 그 힘을 받고 내 물건을 주는 거야.”
세인은 끄덕이며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돌 세 개를 그에게 건네주고는 이걸로 뭘 살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스톰은 불이 꺼지지 않는 램프를 추천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무서운 침입자 세 마리를 죽이고 얻은 돌로, 고작 불이 꺼지지 않는 램프라고 한다. 혼란스러운 얼굴의 세인에게 스톰이 달래듯이 말했다.
“이봐. 내 생각에는 네가 원하는 것을 말하는 게 나을 거 같아. 나는 네게 비싼 거래가를 적용할 거야. 왜냐면 쉽고 빠르게 구하지 못한다는 점도 작용하거든.”
그러자 세인은 세 개의 돌을 다시 받아들고 일단 돌아갔다.
그 뒤 가끔 코볼트 스톰과 퀘스트 용지를 주느라 만나면서 질문을 던졌다.
그러다 보니 점차 개념이 잡혀갔다.
“더 많은 대가를 주는 대신. 가지기 힘든 물건.”
스톰은 상상했다.
세인이 원하는 것을 말이다.
부하들을 무장시킬 엄청난 무기?
혹은 갑옷, 금과 은, 등등.
그러다가 너무 늘어지는 것 같아 슬쩍 미끼도 흘렸다.
“나는 골렘을 팔아서 노동력에 도움을 줄 수도 있어.”
“골렘?”
“낮에만 움직이고 느리지만 지금 네게는 쓸 만할걸? 돌 열 개당 하나씩이야.”
미친 가격이었지만, 반영구라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세인은 다가와 진지하게 코볼트에게 물었다.
이것을 팔 수 있냐고.
그러자 코볼트는 그의 상상력에 피식 웃었다.
“어디 보자…. 가능하겠군. 그런데 왜?”
이유는 뻔했다.
세인이 팔아달라는 것이 머리를 탁 치게 하는 물건도 아니었다.
스톰은 눈을 가늘게 뜨며 세인을 그저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너도 뭐 별수 없는 놈이란 뜻이었다.
트렌트가 말한 격이 겨우 이 정도인가?
그런데 세인은 뜻밖의 이유를 댔다.
그 이유를 다 듣기 위해 스톰은 귀를 기울였다.
세인의 설명을 듣고,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눈빛은 진지해져 있었다.
“너는 정말 왕의 재목이 맞구나. 나는 감탄했다. 하지만 네가 사고 싶은 것을 사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준비는 되었느냐? 정말 그걸 실행할 용기? 내가 무엇을 바랄지 상상을 해봐라.”
너는 정말로 네 힘과 수고를 기꺼이 그런 일에 쓸 테냐?
코볼트 스톰은 눈을 강렬하게 빛내고 있었다.
그는 값을 후려치는 자다.
세인이 말한 것은 가치가 작지 않았다.
그러니 대가로 엄청난 것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살수만 있다면, 나는 당연히 정당한 대가를 치른다.”
“좋아. 아주 좋아.”
코볼트의 손아귀에서 검은 돌이 부서져 나갔다.
이미 검은 돌이 오가는 문제가 아니었다.
“증명해 봐라. 네게 내 퀘스트를 주마.”
세인은 준비 후에 알려준 그곳으로 가겠다고 말하며 떠났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본 스톰은 엘프의 왕인 트렌트를 방문했다.
팔짱을 낀 코볼트 스톰은 늑대임에도 불구하고 대마법사의 위엄이 느껴졌다.
그는 트렌트 앞에 버티고 섰다.
트렌트는 평소 그가 가진 보물을 눈치 채고 있었다.
“어떤가? 스톰. 그는 정말로 왕이지?”
트렌트 앞에서 스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청맹과니들만 가득한 세상이라면, 나는 무리하게 보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촉각에 상상을 입혀 편견으로 살아가는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마음이 있다. 그 날개는 무한하며 모든 것을 감싼다. 그것으로 남을 감싸 안을 때의 네가 누구인지를 느껴라.”
트렌트가 대답했다.
“홀리 크라운이 한 말이지. 그 천사는 우리에게 이미 답을 안겨 줬었어.”
“볼 수 없다면 차라리 선의라는 마음으로 진실을 만들라. 그런 마음으로 만든 결과라면 설령 허구일지라도 신은 용납하실 것이다. 나는 세상이 평온해지는 데 관심 없어. 평온은 주관적인 거야. 평화롭다고 말해도, 그 평화로운 세상에서는 고통받는 자가 태반이야. 반면 전쟁 중이라고 해도 행복한 자는 있을 수 있지.”
코볼트는 계속 말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나는 그게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한다. 행복의 열쇠는 아름다움이라는 자물쇠와 연결되어 있다. 내게 있어 가장 큰 아름다움은 바로 선의다. 그것이 허구일지라도, 그것을 왕홀(scepter) 삼아 휘두를 수 있다면 그가 바로 인정받을 만한 왕이야.”
트렌트는 스톰의 가치관에 굳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동의해서가 아니다.
그는 그래도 세상이 평화로웠으면 했다.
평화로우면 더 많은 존재들이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럴 가능성이 있을 텐데, 그냥 트렌트는 스톰의 생각을 그 자체로서 인정했다.
자신과 다르다고 배척하지 않았다.
지금 그들의 공통점은… 각기 가치관은 달랐지만, 세인을 왕으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트렌트는 왕으로 생각한 세인에게 인연을 베풀었다.
현명한 왕의 방식은 대부분 그런 것이다.
트렌트 왕과 달리 대마법사인 스톰은 그만의 방식대로 왕인 세인을 인정했다.
* * *
영지민 입장에서 열심히 밭을 갈고 있던 아비게일은 어느 날 더이스의 방문을 받았다.
더이스는 맨손으로 온 게 아니라 질문을 들고 왔다.
“이봐 아비게일.”
“예. 말씀하십시오.”
“혹시 요리할 줄 아나?”
“예? 요리요?”
아비게일은 눈을 크게 떴다.
남자라도 노숙하다 보면 요리 정도는 할 줄 알아야만 한다.
그런데 그는 책을 좋아하는 학자에 가까웠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데요.”
“단 한 번도?”
“예.”
더이스는 뭔가 곤란한 듯 얼굴을 찡그리며 자신의 목을 북북 긁어댔다.
그리고서 말했다.
“내가 어떤 높으신 분이… 아니라, 흠흠. 그냥 어떤 분에게 들은 말인데…. 자네가 요리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어 보인다는군. 그러니까 좀 해보는 게 어떤가?”
“예?”
아비게일은 정말 어리둥절했다.
일단 자신이 한 요리의 맛을 봐야, 그 사람이 알더라도 알 거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알아, 그걸?
요리한 적이 없는데?
자신도 모르는 재능을?
“아, 젠장. 그러니까. 내가 강요하는 게 아니라. 재능이 있다면, 있으니까 싹 틔우는 게 좋지 않겠냐 이거야. 아깝잖나. 진짜 엄청난 재주가 있는데 본인이 모르고 썩히는 건 말이야.”
더이스는 짜증을 내다가 그냥 그에게 도마와 생선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어쨌든 자네를 위한 거니까, 한번 해봐. 내가 설명해줄게.”
“아이고 왜 이러시는 겁니까? 기사님.”
“아니 호의로 이러는 거야 호의로.”
그러면서 진짜 더이스는, 아비게일이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란 의미에서 요리를 시켜 보았다.
영주님인 세인은 허튼소리를 할 분이 아니셨다.
세인에게서 귀띔을 받은 더이스는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이다.
이름하여 아비게일 개척자.
그리고 아비게일은 그 생선을 잡는 과정에서 생선 눈깔과 마주치자, 놀라서 기절하고….
비늘에 칼을 들이밀다가 삐끗해서 울고, 손을 살짝 베였다고 다시 기절했다.
더이스는 그 옆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중얼거렸다.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야.
기절해서 도마에 머리 찧고 뒤로 넘어가는 아비게일을 받쳐 들며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아비게일의 재능은 도저히 발굴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