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 세계수 (4)
기사들은 머리 두 개 달린 개의 가죽을 벗겼다.
아주 두꺼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얇았는데, 잘 발라낸 종이 한 장 두께랄까.
그걸 본 맥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거 옷으로 만들어 입을 수 있겠지?”
“질기고 안 뚫리는 데요. 쓸 만할 거 같습니다. 가볍고 좋네요.”
검 끝으로 찔러보던 다른 기사가 대답하자, 그제야 안심한 표정을 짓는 맥이었다.
벗겨낸 가죽은 수레에 실렸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이동한다.
지도에 표시된 검은 부분에 들어갈수록 괴물들이 나타났다.
세계수에 기대어 사는 검은 정령들이 들러붙은 존재였다.
늪 속에서 꿈틀대는 물고기도 있었고 커다란 나무에 거꾸로 붙어 있는 박쥐도 있었다.
기사들을 보고 떨어져 내린 박쥐는 날아다니는 게 아니라, 바닥을 발톱으로 긁으며 기어 다녔다.
그러면서 입에서 독을 뱉었다.
그것을 방패로 막은 맥이 검으로 방패를 치면서 시선을 돌리자. 뒤에서 행크가 달려들었다.
그의 도끼질에 비명을 지르는 박쥐가 날개를 휘둘렀는데, 맥의 검이 그 공격을 분쇄했다.
기사들은 박자를 척척 맞추며 괴물들을 사냥했다.
외침도 필요 없었고 눈빛만으로 협공할 수 있었다.
어차피 들고 있는 장비를 보면, 움직임에 대한 견적이 나온다.
선두에는 방패.
뒤에는 검이나 창.
가장 뒤에는 활.
나중에는 정 필요하면 휘파람 소리 냈고, 그 외에는 호흡을 아꼈다.
세인은 뒤에서 뒷짐을 지고 그들의 전투를 구경했다.
원래는 그게 맞는 거다.
사실 주둔지에서 아예 안 나오는 게 더 좋지만….
그를 옆에서 호위하던 윌은 검 잡은 손을 빙빙 돌리면서 팔의 긴장을 놓지 않았다.
수레에는 박쥐의 발톱이 실렸다.
작고 날카로운 발톱은 독을 머금고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단검으로 쓰면 좋을 것 같았다.
“언제 나올 거 같아? 머리 세 개인 개는?”
“정찰자도 깊게는 못 들어가 봤습니다. 봉우리 위에서 본 게 전부입니다.”
맥은 대답하는 더이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여기를 한두 명이 돌아다닌다는 건 미친 짓이지.
그들은 현재 물이 가득한 계곡에서 발을 씻고 있었다.
장화를 벗고 발을 담그자 얼음장처럼 시원했다.
목과 얼굴에 묻은 땀을 씻고 있는데….
물의 중앙 부분.
돌출된 바위에서 뭔가가 슬금슬금 움직였다.
같은 회색빛 바위인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양쪽으로 집게를 뽑아낸 게가 옆으로 걸어가다 멈춘다.
“저거 먹을 수 있을까요?”
“바위 아냐? 속은 돌로 가득 차 있을 거야. 먹어봐야 얼마나 맛있겠어? 가재도 아니고.”
다들 팔자 좋게 앉아서 조금씩 옆으로 움직이던 게를 구경하고 있는데, 더이스가 윌에게 말을 걸었다.
“머리를 길러보시는 게 어떨까요?”
“예?”
윌은 얼굴이 유난히 긴 기사를 보며 의문을 표시했다.
“경의 잘생긴 얼굴에는 긴 머리가 어울릴 것 같아서 말입니다.”
“글쎄요. 머리가 길면 적에게 잘 잡힐까 봐.”
“그 잘생긴 얼굴에는 호색한 느낌으로 좀 더 머리를 길러 보시는 게 아주 좋을 거 같아요. 실례지만 애인 있으십니까? 긴 머리의 미남이라면 여자들이 아주 좋아할 거 같은데요.”
“호, 호색한요?”
“예, 좀 더 호색한 느낌으로 말입니다. 그래야 뭔가 완성된 느낌. 지금은 미흡해요. 아쉬워요. 음….”
더이스는 자신의 말에서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는 채 눈가를 좁히며 열심이었다.
손을 이리저리 뻗어 윌의 얼굴에 더해보았다.
맥은 몹시 당황해하는 윌의 뒤에서 혀를 찼다.
다른 건 제쳐두고 더이스가 남의 외모에 대해서 충고를 하고 있는 이 상황이 기가 막힐 뿐이다.
“이봐! 그럼 나는 어떤 거 같나?”
그때 더이스의 등을 손바닥으로 팍하고 친 행크가 물어왔다.
턱을 들고 얼굴을 이리저리 돌리는 행크 앞에서, 더이스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그걸 왜 나에게 묻냐는 얼굴이었다.
“얼굴을… 옷깃으로 많이 가리시면 좋을 거 같은데요. 아무래도 많이 가리는 게, 남들에게 유익하지 않을까요….”
“뭐? 신비 이미지로? 비밀적인 느낌?”
“예… 뭐, 그것도 비밀이라면 비밀인 거겠죠. 모두에게 유익한 비밀이에요.”
“음, 그렇군.”
끄덕인 행크는 나름 진지하게 옷깃을 올려보았다.
쉬는 시간이 지나 잡담이 끝나고 기사들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전진을 계속했다.
절벽이 가로막고 있는 막다른 곳에 이르러, 머리가 세 개인 개를 볼 수 있었다.
세인이 손가락으로 몸을 일으킨 그놈을 가리키자, 기사들이 몸을 아끼지 않고 달려들었다.
망토를 휘날리며 방패를 앞세우고 말이다.
개가 무서운 힘으로 앞발을 휘두르면 그것에 맞은 기사는 제자리에서 버티지 않고 뒤로 굴렀다. 그러면서 가능한 충격을 분산했다.
소리를 내며 주위를 빙빙 도는 기사가 목숨을 걸고 시선을 끌었다.
개의 머리 중 하나가 움직일 때 선두의 행크가 도끼를 휘두른다.
가죽이 얇을 것을 알고도 양손으로 휘두르는 일격이었다.
공격에 집중했으므로, 방패를 든 기사들이 그의 옆에서 공격을 대비해 보조했다.
행크의 공격에 아랫배를 얻어맞자, 광분한 개는 일어나 이리저리 날뛰었다.
흙바닥이 일어나며 기사들의 시야를 막았고, 한두 명은 개의 이빨에 망토를 낚아채여 바닥에 쓰러졌다.
끝을 보려는 개의 얼굴에 화살이 튕겨난다.
그리고 검이 날아와 비스듬히 흔적을 남겼다.
물론, 피는 아직도 보이지 않는다.
사상자는 없었지만, 위험한 분투가 이어지자.
윌은 허락을 구하듯이 세인을 바라보았다.
자기 한 몸 정도는 당연히 지킬 수 있는 세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윌이 그를 떠나 달려나가며 검을 휘둘렀다.
시원한 원들이 허공에 꼬리를 무는 가운데 개의 꼬리가 채찍처럼 여러 가닥 날아왔다.
그리고 윌의 앞에서 불꽃을 튀겼다.
윌은 능숙하게 검을 휘두르다가 여유까지 부리며 그 꼬리를 잡아챘다.
아주 약간 미미하게 개의 균형이 한쪽으로 쏠리자, 행크와 맥이 달려들었다.
도끼가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며 드디어 처음으로 피 맛을 보았다.
맥의 철퇴가 그런 행크의 어깨를 물려는 머리를 무겁게 옆으로 후려쳤다.
그리고 꼬리를 재빨리 놓고 달려온 윌이 합세했다.
3시간이 지나서야 전투는 막을 내렸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기사들 앞에서 검은 개는 숨을 거두었다.
기사들이 앉아서 잠깐 쉰 후 다가가 가죽을 벗기기 시작했다.
이번 가죽은 머리 두 개인 개와는 차이가 있었다.
얇고 질긴 건 여전했는데 병기를 써도 잘 잘리지 않았다.
가죽을 벗기는 데 훨씬 애를 먹었지만, 기사들은 흡족한 얼굴이었다.
“이 정도면 아주 쓸 만할 것 같은데?”
“어서 벗기고 물러나자고.”
얼굴에 묻은 개의 피를 닦으며 맥이 행크의 어깨를 툭 하고 쳤다.
행크가 뒤를 바라보니 검은 개의 고기를 노리는 여우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그들은 기사들이 떠나면 첫 번째로 포식할 생각이다.
그다음은 나무에 매달려 있는 벌레였다.
수레에 가죽을 잔뜩 싣고 떠나가는 그들을, 말보다 더 큰 여우들은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개에게 달려든다.
생태계는 가끔 불공평하다.
여우들은 기사들에게 관람료를 내는 대신 배를 실컷 채웠다.
“영주님. 이런 게 나왔습니다.”
세인에게 다가온 윌은 뭔가를 보여주었다.
그의 손 위에서 빛나는 것은 검은색 돌이었다.
그런데 인위적으로 가공한 것처럼 면이 직각이었다.
받아드니 보석처럼 빛을 반사한다.
무게는 아주 묵직했다.
세인은 그것을 위로 던졌다가 받기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말했다.
“모두 수고했다.”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오히려 영주님이 고생하셨죠. 여기까지 나와 보시느라.”
세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 * *
다크 엘프들은 인간들과 얼굴을 맞댈 대리자를 지정해 주었다.
늪이 바다처럼 펼쳐진 가운데, 낙엽이 가뜩 쌓인 섬 같은 곳이 있었다.
짙은 안개 아래, 다리 달린 생물체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그 섬 앞의 돌다리만이 유일했다.
세인은 두건을 내린 채 그 다리 위를 걸었다.
눈앞의 작은 섬이 점점 가까워지자 위에 있는 것이 뚜렷이 보인다.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 앞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하얀 곱슬머리를 양쪽으로 내린 늙은 남자는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그 남자는 노쇠한 눈을 들어 다가오는 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인은 그의 앞에 다다르러 작은 의자에 엉덩이를 걸쳤다.
작은 의자가 그의 몸무게에 삐걱거리는 소리를 낸다.
“당신이 엘프들의 중개인입니까?”
“비슷하오. 그런데 왜 내게 하대하지 않으시오? 난 당신을 멀리에서 봤을 때, 당연히 상인인 줄 알았지. 그런데 눈빛을 보니 그게 아니로구먼.”
세인은 그가 누군지 다 알면서 의뭉을 떨고 있는 노인의 머리 쪽을 가리켰다.
손가락이 아니라, 손바닥으로 공손하게.
“그것이 저를 당신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만듭니다.”
“이것? 아 이것. 그러고 보니 이런 게 있었지.”
노인은 자신의 머리 위의 관 같은 것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은 공손한 분이군. 충분히 오만할 법도 한데.”
머리에 관을 쓴다는 것은 어떤 부류든 무리를 이끌고 있다는 의미다.
세인은 그 의미를 잘 알았다.
그리고 그 무게도….
그는 말을 아끼며 퀘스트를 달성한 종이를 꺼내 보였다.
그리고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노인에게 보여준다.
세인은 모르지만, 눈앞의 노인은 다크 엘프인 엘라이저가 왕이라고 부르는 존재였다.
즉 괴물들의 왕 중 하나다.
정체를 안다면 이가 갈리는 상대인 것이다.
노인이 퀘스트가 적힌 종이를 뒤적이며 세인에게 물었다.
그의 주름진 손에는 어느새 검은 돌이 들려져 있었다.
“이 검은 돌은 무엇이오?”
“개에게서 나왔습니다.”
“힘이 느껴지는데 이걸 굳이 내게 줄 필요가 있소? 당신이 챙겨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것이오.”
“엘프들에게 이미 은혜를 받았습니다. 최대한 보답하려 합니다. 이걸 말도 없이 챙기는 것은 그런 의도에 반하는 길입니다.”
“당신은 괴물을 싫어하지 않소?”
세인은 잠시 눈을 감았다.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철저히 증오했다.
그의 얼굴이 아주 복잡하게 일그러졌다.
“이제는 제가 바로 그 괴물입니다. 인간이 아니죠.”
노인의 탄식 속에서 그가 말을 덧붙였다.
“저희는 호의를 받았습니다. 그걸 갚는데 상대가 누구냐가 중요합니까?”
노인은 세인이 뭔가 말을 더 할 것으로 생각하며 돌을 갈무리했다.
이런 교류라는 게 그렇다.
하나가 가면 다른 하나를 요구하는 식이다.
그러나 세인이 이제 떠나려는 듯 몸을 일으키자 그가 말로서 잡았다.
“왜 다크 엘프들이 당신의 백성 중 하나를 잡아가려 했는지 궁금하지 않소? 난 다크 엘프가 아니며 그들의 편도 아니니, 그 정도는 몰래 말해줄 수도 있소만.”
퍽이나 그들 편이 아니겠다.
그러나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는 세인은 ‘아비게일이 자신이 책임져야 할 자인가?’ 그걸 잠시 생각하고 있었다.
좀 애매했다.
머뭇거리는 세인을 향해 노인은 말했다.
“그 아비게일이라는 자는 각성자요. 보잘것없는 재주지만 분명히 각성자지. 다크 엘프들은 여기에서 다른 생명체들과 공존해야 하오. 그래서 그들의 일에 좋든 싫든 도움을 줘야 하지. 그래서 당신의 아비게일이 필요한 거요. 각성자를 잡아가는 게 다크 엘프들이 맡은 일이거든.”
“이미 도움을 주셨지만, 못되게도 더 바라건대.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각성자들의 피는 가치를 가집니다. 물론 그 가치를 잘 다룰 줄 아는 존재들에게만이요. 그 가치를 잘 다루며 원하는 게 여기의 왕들이고…. 그 왕들은 그래서 각성자를 원하고, 은밀한 일에는 다크 엘프들이 제격입니다. 그 다크 엘프들이 여기에서 생존하기 위해 당신의 각성자가 필요한 거요. 간단한 거라오.”
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는 각성자들이 존재한다.
크고 작은 재주를 가진 자 중 천리안도 끼어 있었다.
그는 미래를 본다. 물론, 크림힐트가 고문당하고 비참하게 죽는다는 것을 알았다.
즉 괴물들은 천리안을 잡아갈 운명이고, 그의 피를 쓰는 과정에서 크림힐트는 덤인 셈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세리스가 휘말리길 바라지 않는 거고.
천리안은 언젠가 자신의 소원을 말한 적이 있었다.
고통스럽지 않게 죽는 일.
그건 괴물들 손에서 덜 고문당하며 죽는 일이다.
“아비게일이라는 자의 재주가 궁금하니 가서 물어봐야 하겠군요.”
“요리일 거요.”
즉답이 나오자 세인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노인이 희미하게 웃었다.
“아까 말했듯이 재주가 필요한 게 아니라오. 재주를 가진 자들은 각성자들 말고도 많으니까. 피를 원하는 거요.”
“당신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괴물들이 피를 가지고 뭘 하냐고 묻기에는, 세인은 그 정도로 뻔뻔하진 않았다.
이 정도만 해도 노인은 엄청난 호의를 베푼 것이다.
그 후로 세인은 자주 노인에게 들렀다.
그러면서 기사들이 해치운 퀘스트 종이를 증거로 내밀었다.
임대인으로서 협력을 충실히 하고 있다는 표시였다.
거주지 안에 불안 요소가 적어지면, 다크 엘프들에게도 당연히 이익이다.
그들이라고 안정된 생활을 원하지 않을 리는 없을 테니까.
노인은 그가 가져다주는 돌을 계속 받았다.
솔직히 도중에 그만둘 줄 알았는데 세인은 계속 가져다주었다.
그러다 보니 노인은 의아해했다.
그 앞에서 세인은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언젠가 괴물을 싫어하지 않냐고 물으셨죠? 솔직히 적개심이 남아 있습니다. 이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하지만 별개로 은혜는 은혜입니다. 갈 곳 없는 저희에게 다크 엘프는 호의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다 속셈이 있어서 그랬던 거요. 아비게일이라든가. 지금 당신들 형편에, 정착지가 익숙해질수록 아비게일을 달라는 요구를 거절하기 어려울 테니까. 그러니 이건 그만 가져다줘도 되지 않소?”
그러나 세인은 말없이 돌아갔다.
기사들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침입자들을 처치하면서 얻는 물건도 많았다.
더 늘어나고 있고 말이다.
검은 돌이라는 탐욕까지 충족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선택사항이었다.
노인은 세인의 내면에 있는 일관된 소신을 보게 되었다.
어느 날.
노인은 세인이 건네는 검은 돌을 다시 돌려주었다.
한숨을 쉰 노인은 입을 연다.
“이제 되었소. 이래서야 어쩔 수 없군. 코볼트를 소개해 주리다.”
“코볼트요?”
“다크 엘프처럼 코볼트는 인간을 습격한 적이 없으니 부담 가지지 마시오. 당신이 일관적인 뜻을 보여줬으니, 나도 답례 정도는 하리다.”
“….”
“다시 만나서 반가웠었소.”
그리고 노인은 자취를 감추었다.
다음에 세인이 그곳을 다시 방문했을 때는 노인 대신 코볼트만 보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