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 세계수 (3)
세인이 사냥 준비를 지시하자 기사들은 무기들과 방어구를 점검했다.
물론, 영지민은 하던 대로 생업에 종사하면 되었다.
전투에 관한 건 기사와 병사들의 일이니까.
점검해보니 이가 빠진 무기들이 많았고, 촉이 헐거워진 화살들도 많았다.
연이은 전투와 이동 중에 관리가 힘들었던 탓이다.
소모품의 수도 적었고 개인이 열심히 신경 쓰긴 했지만 우그러진 채로 방치된 갑옷이 많았다.
하지만 대장장이는 몇 안 될뿐더러, 모두 영지 기틀을 만드는데 총동원되고 있었다.
여기에서 무기나 방어구를 수리하라고 하기에는 무리였다.
보통 이럴 때 영주라면 당연히 무기부터 대장장이들에게 안겨줬을 것이다.
그러나 세인은 달랐다.
영지 기본을 만드는 작업에 해가 돼서는 안 된다.
뭐든 기본을 튼튼히 빨리 만들어야 디딤돌 삼아 멀리 뛸 수 있고, 그 안정감이 사람들의 심리적 지지대가 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
“강해진 육체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은 지났지만 활발한 전투를 한 건 아니야. 병사들은 훈련시키고, 기사와 그 종자들 같은 숙련자만 데리고 사냥에 나간다.”
세 영지의 기사들이 모이니 그 수가 그래도 좀 되었다.
용병대장들도 노련한 전사들이었기 때문에 무력으로는 기사로 쳐도 되었다.
군장 검사를 하며 둘러보던 세인에게 윌이 다가와 물었다.
“깃발은 세 영지 중 어떤 것으로 할까요?”
“비비안 님에게 묻도록 해.”
“비비안 님에게요?”
“우리가 쓰던 깃발은….”
쓸 수 없다는 말을 하려던 세인이 침음성을 흘렸다.
비참했다.
그리고 이 비참함을 사람들에게 안겨준 건 바로 자신이다.
가이더와 관련된 상징은 이제 포기해야만 했다.
하지만 감상은 집어치우자.
영지민에게 필요한 건 감상에 빠져 속죄하는 영주가 아니니까.
“비비안님이라면 알아서 해주실 거다.”
비비안은 세인의 말을 전해 듣고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그냥 하얀 깃발로 정했다.
“주변에 다른 인간들도 없을 테니. 항복의 백기라고 오해받는 일도 없을 거예요. 당분간은 그냥 하얀 바탕을 써요. 이 여백에 뭔가를 채워 넣는다는 마음으로.”
그래서 하얀 깃발이 깃대 위에 나풀거리게 되었다.
병사들의 훈련을 위임받은 머독이 단상에 올라섰다.
레인저와 세 영지의 병사를 합치니 수가 어마어마했다.
게다가 이들의 충성심은 이미 증명되었으며, 사선을 넘나든 용사들이나 마찬가지였다.
머독은 여자 레인저들을 모른 체하고 입을 열었다.
“여기에서 예쁜 여자 싫어하는 남자는 손들어 봐라.”
“….”
아무도 없었다.
또 그게 아니더라도, 머독은 손든 이가 있다면 때려죽일 분위기였다.
그만큼이나 근엄한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는 검지를 들어 올렸다.
“내 규칙은 간단하다. 여자는 이쁘면 되고. 남자는 싸움을 잘해야 한다. 훈련받다 아무리 지치고 죽을 거 같아도, 내게 왜 강해져야 합니까? 라고 물어보지 마라. 그건 여자가 왜 이뻐야 합니까? 라고 물어보는 것과 똑같다. 그러니까 후레자식 티 내려는 거 아니면 회의 자체를 느끼지 말란 말이다. 그냥 머리를 비우고 죽어라 굴러라. 너희들의 운명 속에서!”
여자 레인저들이 우우, 하고 격렬한 야유를 보냈지만… 머독은 콧방귀도 끼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근엄하고 진지했다.
아주 멀리에서 그런 머독의 연설을 듣던 코다로가 감명받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치도 제정신은 아니군. 좋아. 난 저런 미친 게 마음에 들어.”
단상에서 내려온 머독은 밑에서 기다리고 있는 재칼을 향해 말했다.
“당신 정도 되는 사람이 왜 이런 훈련을 받으려는 거요? 병력을 이끄는 자들이 받는 훈련이 아니오.”
그러나 재칼은 굳은 결심을 했는지 부동자세로 대답했다.
“기본부터 쌓고 싶어서입니다.”
머독은 ‘흐음’이라는 소리를 내더니 자신의 턱을 쓰다듬는다.
“그런 모습을 누구에게 보여주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난 적당히 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난 당신을 한계까지 끌어올릴 겁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머독은 그의 어깨를 쳐주고 걸어 나갔다.
“그럼 시작하지.”
일단은 구보였다.
그리고 고통이었다.
여기에는 여러 사람이 섞여 있었다.
그들을 한데 묶어주려면 고통을 주면 된다.
함께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냈다는 추억을 만들어 공감대로 묶는 일.
사람들의 지구력은 비약적으로 올라가 있었다.
순발력과 힘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외모는 아름다워져 있었지만, 창백하고 하얀 살빛과 너무 지나치게 검은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음울한 아름다움이 사람들의 저변에 깔려 있었다.
낯선 변화다.
그런 변화에 익숙해지는 것엔 고통만큼 좋은 게 없었다.
짐을 메고 공터를 한참이나 돈 병사들은 전력 질주와 느리게 뛰기를 반복했다.
그 느리게 뛴다는 것도, 보통 인간 기준에서는 입에 거품 물고 빨리 뛰기나 마찬가지였다.
머독은 일어나는 먼지구름 속에서 양팔을 벌리고 기분 좋다는 듯이 외쳤다.
“주변에 산이 많아서 참 좋다!”
어느 정도 몸에 열이 나자 산악 구보가 시작되었다.
무거운 짐을 메고 박수를 쳐가면서 레인저의 노래를 부르게 했다.
대충 독사들이 흙탕물을 마신다는 내용이었다.
그들은 위로 미친 듯이 올라가고 내려갔다.
“주변이 절벽이 많아서 참 좋다!”
그리고 병사들은 미리 절벽에 매달아 놓은 밧줄을 잡고 올라갔다.
구간마다 맨손으로 올라야 하는 곳도 있었으며 짐은 언제나 함께였다.
그리고 하나의 구간을 마치면 여러 가지의 운동을 해야만 했다.
팔굽혀 펴기 정도는 운동으로 쳐주지도 않았다.
“호수가 있어서 참 좋다!”
호수를 헤엄쳐서 횡단한다.
“길이 많아서 참 좋다!”
그리고 1시간 재우고 야간행군을 했다.
머독은 병사들을 쉴 새 없이 몰아쳤다.
일단 한 덩이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우수한 병사였다.
그건 이미 사선을 넘나들며 입증되었다.
정신력도 훌륭했다.
하지만 한 덩이를 만드는 작업은 또 달랐다.
“다 알겠지만, 전우를 만들어야 한다. 과거에 번우드에서 치안대를 맡았든. 레인저의 명궁이든. 종자 후보에 올라가 있는 병사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옆을 봐라! 너 대신 화살 맞고 죽을 놈이 같이 있다. 앞을 봐라! 너 대신 죽어줄 놈이 같이 있다! 그놈들이 없다면 넌 철저히 혼자고 비참하게 죽을 것이다!”
구르고 달리고.
앉았다가 위로 뛰고, 앉은 자세로 무거운 것을 들고 산을 올랐다.
밤에는 산을 탔으며 공터에 먼지구름이 가라앉을 새가 없도록 훈련을 받았다.
“기사님들이 강하다고, 영주님들이 강하다고 기대어 징징거리지 마라. 자기 몸은 자기가 지키는 거다. 네 목숨을 지키는 정도가 인간이다. 남을 지키는 정도가 성인이다. 그 공동체 전부를 지키는 정도가 바로 병사다. 너희들은 누구냐?”
“병사입니다!”
“목소리가 작다. 너희들은 누구냐? 남보고 지켜달라고 질질 짜는 애송이들이냐?”
“병사입니다!”
사람들은 악에 받쳐 고함을 질렀다.
계속되는 채찍질에는 장사가 없었다.
아무리 엄청난 체력을 가지게 되었어도 계속 시달리게 하는데, 지구력은 무한이 아니다.
한 달여가 지나고 다들 기진맥진했을 때 머독은 눈을 빛냈다.
“좋아. 이제부터 사탕발림은 끝내고 본격적인 훈련을 시작하지.”
“….”
예? 잘 못 들었습니다?
* * *
기사단 이름을 다시 정해달라는 청에 세인이 말했다.
“코다로 님께 부탁해봐.”
그래서 기사단의 이름은 트리니티가 되었다.
이름은 하나로 통일되었지만, 그들이 입은 갑옷도 그렇고 망토까진 아직 통일되지 않았다.
여기저기 기운 망토는 좀 안쓰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이 수준에서 정체될 생각은 없었다.
점차 나아질 것이다.
말이 다칠 수도 있는 험지로 가야만 하므로, 말을 탄 인원은 극소수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커다란 수레 네 대를 끄는 튼튼한 소가 함께한다.
기사들은 세인에게 말을 탈것을 권유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인간들이 터를 잡은 곳에서 며칠 정도 걸려 걸어 나가면, 지형의 변화가 극적인 곳이 주를 이루었다.
갑자기 깎아지른 절벽이 나타나기도 하고, 웅장한 폭포가 앞을 가로막기도 했다.
끝을 알 수 없는 웅덩이가 파인 있는 곳도 보였다.
식물의 변화도 갑자기 폭발하는 느낌이었는데, 끝도 없이 뻗어 올라간 거인 나무가 빽빽이 서 있기도 했다.
그들은 그런 곳을 걸어 다녔다.
가끔 시계가 탁 트이는 곳에 서면, 아주 멀리 하늘 쪽으로 뻗어있는 기둥이 보인다.
그것이 바로 세계수였다.
저기까지 갈 생각도 없지만, 실제로 도착하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 일이다.
일행 중 가장 앞에 나가 있던 더이스는 등 뒤의 방패를 팔로 옮겼다.
전방에서 나뭇가지를 밟아 부서지는 소리가 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무 사이에서 안개가 미친 듯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나머지 사람들도 방패를 꺼내 든다.
후미 쪽에 있던 세인도 옆의 기사에게 방패를 받아 들었다.
말에 탔을 때 하반신을 가리기 용이하게 생긴 카이트 실드는 뾰족한 역삼각형 모양이었다.
회색으로 빛나는 방패를 들고 세인은 앞으로 나갔다.
검은 머리카락에 하얗고 준수한 얼굴.
그리고 역시나 검은 옷을 입었다.
버클과 장갑은 은색이었다.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어느덧 선두에 선 그는 실드를 앞으로 세우며 계속 나아갔다.
안개가 그의 힘을 느꼈는지 미약한 저항을 보이다가 양 갈래로 흩어졌다.
더이스는 다가오는 영주님을 보았다. 그래서 자신이 막겠다는 내용의 말을 하려 입을 벙긋했다.
그러나 세인은 고개를 저었다.
“처음이니 사기는 내가 세워주지.”
자신을 지나쳐가는 세인을 본 더이스는, 문득 그가 방패밖에 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허겁지겁 자신의 무기를 건네주려 했다.
하지만 세인은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안개가 흐트러지는 곳의 정점에는 검은 바위가 위로 솟아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 바위는 양쪽으로 흔들거리며 움직였다.
스윽하는 소리와 함께 위쪽에서 두 갈래의 기둥이 가지를 쳤다.
그리고 아래로 내려온다.
세인은 으르렁거리며 머리를 들이미는 개를 보았다.
그 개의 콧잔등은 축축이 젖어 있었고 입김은 지독했다.
그 입김의 수증기로 방패 표면에 물방울이 맺혀 흘러내릴 때, 개는 박치기를 해왔다.
“영주님!”
기사들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려 했지만, 세인은 방패로 흔들림 없이 공격을 막아냈다.
카이트 실드가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방패를 쥔 검은 건틀렛은 모든 충격을 흡수한다.
결국, 산들바람 정도의 느낌만 손목에 다가왔다.
세인은 두 개의 머리가 박치기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러다가 네 번째 충돌 즈음에 앞으로 나가며 카이트 실드를 밀었다.
짧게 한번.
그리고 길게 이어진 밀기에 개의 머리가 뒤로 물러났다.
세인의 눈이 방패 위에서 개의 전신을 훑었다.
머리가 세 개인 개는 아니었다.
세계수 영역 전체에는 침입자들이 출현한다.
자연적으로 생기는 마수일 수도 있었고, 다른 영역에서 일부러 보내는 말썽꾼일 수도 있었다.
그들을 처치하는 게 그 영역 전사들의 몫 중 하나였다.
엘프들은 거주자들이 허락받지 않은 방문자들을 처리해주길 원했다.
살해 퀘스트.
그 퀘스트 목록에 있는 대상 중 하나는 머리가 세 개 달린 개인데 이놈은 두 개다.
“그래도 검은 가죽이군. 나는 검은 색이 좋아.”
그 검은색 뒤에 숨으면, 인간이 아니라는 부끄러움도 가려질 수 있는 착각이 든다.
세인이 방패로 밀며 앞으로 나가자, 놀랍게도 굳건히 버티고 있던 커다란 개의 몸이 뒤로 밀렸다.
뒷발로 버티려 해보지만, 검은 진흙이 파도처럼 일어나고 죽죽 뒤로 밀린다.
견디다 못해 개가 크게 짖으며 앞발을 휘두른다.
쾅!
카이트 실드가 거칠게 흔들렸다.
다시 한 번 더 발이 날아오는데 방패를 뒤로 젖힌 세인이 그 발을 거칠게 때렸다.
꽝!
개가 구슬픈 비명을 지르고 두꺼운 앞발이 옆으로 튕겨나며 검은 피가 튄다.
세인은 전진하며 방패로 개의 몸을 후려쳤다.
그러자 그 충격에 뒤로 기운 개의 몸 경사를 타고 올라가 가슴 위에 오른다.
이 고약한 인간을 향해 양쪽에서 검은 기둥이 다가왔다.
두 개의 머리가 중앙의 그를 부수려 집게처럼 부딪혔다.
중앙에서 호두 신세가 된 세인은 그 충격을 버티고, 머리를 차례차례 방패로 후려친다.
그 힘에 카이트 실드는 너덜너덜해지다가 찢겨나가 파편이 퉁겨져 수목에 박혔다.
그래도 세인은 방패 휘두르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의 검은 망토가 이리저리 휘몰아치며 운동에너지를 표현했다.
그 난폭한 힘에 가열된 쇳덩어리가 개의 머리를 터뜨리고 튕겨냈다.
결국, 뇌진탕에 걸렸는지 완전히 뒤로 넘어가는 몸체.
세인이 기울어지는 검은 개의 몸집 너머로 사라지자, 제일 먼저 더이스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건너편의 세인은 땅에 가볍게 착지한 후 그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무심코 검을 던지려 하자 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 방패
그제야 알아들은 더이스가 방패를 던지자, 세인은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리곤 쓰러져서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개의 목을, 차례차례 방패의 날카로운 끝으로 찍어내렷다.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목이 떨어져 나간다.
데굴데굴 굴러간 머리는 나무 둥치 앞에서 멈췄다.
장난처럼 거대한 개를 해치우는 모습에 기사들이 멍하니 입을 벌릴 때, 세인은 볼에 튄 피를 닦으며 말했다.
“기억해라. 너희들은 나를 지키는 방패다. 적어도 이런 나보다 더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나보다 약한 방패 뒤에 숨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