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
& 세계수 (1)
달빛 아래의 그림자는 바닥에 아비게일을 내려놓았다.
그 움직임에 적어도 맹렬한 적의는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달려오며 외친 말이 화근이었다.
“이 괴물!”
휘두른 것이 날붙이가 붙어 있지 않은 봉이었으니 레인저도 커다란 적의는 없었다.
말만 그렇게 한 것이다.
하지만 그 말에 성질이 난 첩자는, 몸을 옆으로 움직여 봉을 가볍게 피한 후 땅에 닿은 봉을 타고 올라갔다.
그 움직임은 주변 레인저들의 입을 벌리게 할 정도로 민첩했다.
어어 하는 순간 그, 아니 그녀의 무릎이 소리친 레인저의 턱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쳤다.
덜컥, 하는 소리가 난 것만 같았다.
레인저의 움직임을 보면 말이다.
뒤로 천천히 쓰러지는 레인저의 모습에 다른 이들은 침을 삼켰다.
긴장한 것도 있었지만, 달빛 아래에 드러난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도 자극적이었기 때문이다. 격렬한 움직임에 후드가 뒤로 젖혀지며 긴 은발 머리가 춤을 추었다.
그리고 드러나는 아름다운 얼굴.
긴 속눈썹과 날카로운 눈매.
보라색 입술을 가진 여자는 바로 다크 엘프였다.
이런 상대가 행렬에 있었다면 왜 몰랐지?
육감적인 몸매 주위에서 펄럭이던 망토는 달빛을 받아 색을 변화시켰다.
검은색에서 파란색으로….
그리고 그 끝자락이 가라앉기도 전에 그녀가 바람처럼 움직였다.
동시에 그녀의 노란색 안광이 길게 선을 그었다.
하나의 레인저 앞에 붙었다 싶었을 때,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가 살짝 뒤틀리며 가공할 발차기를 뻗었다.
그 발차기는 팔을 올려 방어하던 레인저의 방어를 뚫고 들어갔다.
빗맞았지만 레인저는 허공에서 몇 바퀴나 돈 뒤 바닥에 쓰러졌다.
“잡아!”
그 소리가 무색하게 순식간에 세 명을 더 쓰러트린 다크 엘프는, 후드를 두 손으로 눌러쓰며 자신의 혀로 입가를 핥았다.
그녀의 손톱은 입술과 마찬가지로 보라색이었다.
거친 숨소리도 내지 않고 고양이처럼 움직이며 레인저들을 쓰러트리기도 잠시.
벌써 여섯 명이나 바닥에 구른 상태였다.
멀리에서 머독이 뛰어오는 것이 보인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도착한 상대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멀리에서도 소란을 느끼고 달려온 세인이었다.
그는 얇고 검은 옷에 검은색 건틀릿을 낀 상태였다.
그것도 한쪽 팔에만 말이다.
그것을 보자 후드의 그림자에 가려진 다크 엘프의 한쪽 눈이 빛났다.
한눈에도 심상치 않은 물건인 것을 알아본 것 같았다.
그녀가 허리 뒤쪽에서 날렵하게 구부러진 카타나를 꺼낼 때, 세인은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비게일은 그냥 기절해 있었다.
그리고 레인저들도 신음과 함께 구르고는 있지만 죽진 않았다.
‘손에 사정을 두었군.’
상대는 굉장히 강해 보였다.
진작 마음만 먹었으면 포위한 사람들을 순식간에 다 죽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전의 세인이었다면 그도 당할 수 있었겠지.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다크 엘프가 망토를 휘날리며 다가왔다.
그리고 매섭게 카타나를 휘둘렀다.
건틀릿으로 그걸 방어하자, 건틀릿 표면에서 하얀 선이 곡선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아주 일순간이지만 세인과 스쳐 지나간 여자는 서로 등을 맞댄 상태가 되었다.
그가 다른 손을 뻗어 망토 끝을 잡으려고 했는데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도망가려는 것인가?
황급히 뒤를 돌아보는데, 그녀의 발차기가 가슴으로 날아왔다.
바위를 박살 내는 힘이었지만, 세인은 뒤로 물러나지도 않았다.
오히려 걷어찬 그녀가 막힌 발차기의 충격을 줄이려 허공에서 뒤로 한 바퀴 돌았을 뿐이다.
다가간 세인이 손을 뻗었을 때, 그녀도 카타나를 휘둘렀으므로 엄청난 굉음이 주변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터져 나가는 빛.
세인의 건틀릿이 그녀의 새하얀 목덜미를 잡았다.
고개를 젖혀 카타나 끝을 피하고 말이다.
“굳이 죽이고 싶지 않아. 항복해라.”
세인이 차갑게 말하자 다크 엘프의 한쪽 눈이 그를 담았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안대를 하고 있어서 한쪽 눈밖에 보이지 않는다.
곧이어 카타나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양손을 들어 올린 그녀를 레인저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줄로 묶는다.
거칠게 일으켜지는 그녀를 일별한 후 몸을 돌리자, 머독이 서 있었다.
“이게 다 무슨 난리입니까?”
“저도 아직은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그보다 오래간만입니다.”
머독은 고개를 숙여 보았다.
그런 머독을 보며 세인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숨소리 하나 거칠어지지 않은 세인 앞에서, 머독은 자신도 저런 게 가능할까 생각해보니 불가능할 것만 같았다.
저 다크 엘프의 무력은 상식을 넘어섰다.
좀 있다가 깨어난 아비게일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냥 굉장한 충격을 받은 얼굴로… 구토를 했다.
그리고 …울었다.
머독은 충격을 받은 얼굴로 말했다.
“뭐야. 자네 지금 우는 건가? 대체 왜?”
뒤로 약간 물러나는 머독에게 부관이 말했다.
“뭔가 사연이 있나 보죠.”
“그, 그런가…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이봐. 숨기지 말고 말해보게. 저런 존재와 어떻게 알게 된거야? 처절한 뭔가가 있나? 가문이 몰살이라도 당했어?”
취조 아닌 취조가 시작되자.
아비게일은 자신의 처지가 너무 기가 막혀서 흐느끼며 세리스를 욕했고 말이다.
“세리스? 세리스가 누구야? 아까 그 다크 엘프가 세리스야? 역시 이름을 아는군.”
“이봐! 솔직하게 이야기해봐! 당신 때문에 몇 명이나 이 난리를 떨었는지 알아!? 사정을 들어야 할 게 아니야! 우린 그걸 요구할 권리가 있어! 당신의 납치를 막아줬다고!”
결국, 화가 난 다혈질 레인저들은 아비게일의 멱살을 잡기도 했다.
그런데 아비게일은 진짜 왜 납치 기도가 있었는지 모른다.
그의 입장에서는 진짜 생각할수록 세리스만 악마였다.
* * *
세인은 다크 엘프의 앞에 앉아 있었다.
상대의 힘을 고려해서 직접 취조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천막 안은 취조라고 믿기 힘든 분위기였다.
아비게일이 울면서 레인저들의 욕 받이가 되고 있을 때, 다크 엘프는 묶이지도 않았다.
게다가 뜨거운 차까지 권해 받았다.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상대를 보면서 다크 엘프는 이상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앞에 앉는 그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려는 거지?”
“트리엔.”
행렬 안에 있었으니 모를 리는 없을 텐데, 굳이 질문한 다크 엘프를 보며 세인은 장단을 맞춰 주었다.
그가 추리할 수 있는 것은 다크 엘프의 합류 시점 정도뿐이었다.
아비게일이 정찰 나갔을 때가 딱 좋은 투입 포인트였다.
적어도 그 후에 흘러들어온 거겠지.
아마 인원 보고가 틀린 그 날일 거다.
그렇다면 정말로 아비게일만 목표라는 이야긴데….
“바보 같군. 당신은.”
다크 엘프가 약간 쉰 목소리로 세인에게 말했다.
그런데 세인은 그 말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아비게일을 왜 납치하려 했는지 알고 싶었지만, 손가락 몇 개 뽑는다고 말해줄 것 같지가 않았다.
생각해보면 아비게일은 이 정도 강자가 달려드는 엄청난 일에 휘말렸다는 소리다.
“왜 포박을 풀어 준거야?”
“마음먹으면 주변을 지옥도로 만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납치만 해가려 했으니까. 레인저들이 달려들어도 죽이지 않았으니까. 힘이 있으면서도 배려를 해준 상대를 포박할 이유가 있나? 고의로 모욕을 주자는 의도가 아니라면.”
다크 엘프는 세인의 얼굴을 전보다 노골적으로 바라보았다.
“우리들을 증오한다고 들었는데?”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세인은 애써 자제력을 발휘하며 말했다.
“정말 우리가 맞나? 오크랑 네가 ‘우리’야? 내가 오크 같은 놈들이나 고블린 같은 놈들의 생리를 좀 알아. 그래서 묻는 거야.”
다크 엘프가 입을 다물 때, 레인저가 양해를 구하고 들어와 세인에게 귓속말을 하고 나갔다.
세인은 피곤하다는 듯이 미간을 검지와 엄지로 누르며 중얼거렸다.
“당신 이름이 세리스라고 하는군.”
“….”
솔직히 말하면 세인의 입장에서는 북쪽의 주민들은 다 싫었다.
왜 아니겠는가?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다크 엘프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칼과 창을 맞대지 않았어도 드는 거부감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생각할 줄 아는 동물이다.
그리고 그 집단의 우두머리였다.
“나는 당신이 어리석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아니군. 당신은 문전박대당할 걸 알면서도 트리엔으로 향하는 거야. 당신 외에 다른 영주도 그런가?”
“대놓고 이야기하지는 못하지만 다들 그럴 거야.”
“….”
“앞으로 당신에게 무릎 꿇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보내주는 거야. 그때 잘 보여야 하니까.”
그렇게 말하며 세인은 의자를 끌며 옆으로 물러났다.
나가라는 표시였다.
아비게일을 계속 노릴 거냐고도 묻지 않았다.
어차피 고문할 수 없다면 그녀가 뭘 이야기하든 믿을 수 없었다.
다크 엘프는 일어났다.
그리고 세인을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내가 당신이라면 힘으로 모든 걸 해결했을 거야. 그렇지 않은 이유는 당신이 가식적이거나 진짜 밑의 사람들을 책임지려 하지 않는 거지. 필사적인 게 아니니까.”
세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힘으로 해결하는 게, 바로 지금 당장 당신의 옷을 벗기는 거야.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짓을 실컷 해대는 거지. 그리고 당신에게 말하겠지. 네 힘이 약한 게 죄라고. 나는 아무 잘못도 없다고. 바로 그게 지금 당신이 내게 하는 말이야.”
세인은 다크 엘프에게 적대감을 드러내고 싶은 것을 참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바깥쪽을 가리켰다.
그녀가 나간 후 시간이 지나고 코다로가 들어왔다.
그는 평소처럼 가벼운 얼굴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크 엘프를 놓아준 그를 탓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격려하는 눈빛이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차라리 잘 되었군요. 그나마 상종할 만한 존재 같아요.”
“이상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서 세인은 다크 엘프에게 권했던 식은 차를 마셨다.
그런 그에게 코다로가 물었다.
“왜 우리 쪽 사람을 납치했는지도 모르는데, 묻어둬도 될까요?”
“저는 그런 부류에게, 애초에 기대감이 없어서 그런지 납치도 뭐 그냥 그러려니 합니다.”
“그건 그렇군요.”
코다로는 세인의 옆으로 다가와 차를 따라 마셨다.
* * *
근거지로 돌아간 다크 엘프는 그녀의 왕을 만났다.
임무에 성공했느냐고 묻자, 그녀가 고개를 젓는다.
“굉장히 강한 존재가 있었어요. 그렇게나 강할 수 있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습니다.”
왕이 더 따져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놀란 얼굴로 말했다.
“아는 존재입니까?”
“너도 짐작하고 있겠지만 머지않아 그가 접촉해 올 것이다. 그에게 수치를 주지는 말아라. 접촉 그 자체가 그에게는 오욕일 테니까.”
“제가 바보도 아니고 왜 저보다 강한 자에게 수치를 주겠습니까?”
딴말을 하는 왕에게 그녀가 말하자, 왕이 다시 대답했다.
“너는 그가 자신의 백성을 위해 어떤 모욕이라도 기꺼이 감수할 걸 아니까.”
“그에게만은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농락할 수 있는 적인데도 함부로 굴지 않았습니다.”
“….”
* * *
시간이 흘러 일행은 트리엔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난민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었고, 소수 귀족만 어떻게든 해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땅을 빌려주십시오. 대가를 치르겠습니다.”
외모를 최대한 가리고 만났지만, 상대가 바보도 아니고….
말을 나누는 자가 인간이 아닌 상대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영토 안에 들어와서 살겠다는 상대가 아니냔 말이다.
세인은 공포에 질린 그들을 설득했다.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고개를 저었다.
어떤 귀족은 직접 만나보려고도 하지 않고 휘하 기사를 대신 보냈다.
“저는 미스틸 테인이라는 기사입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여기 나왔습니다.”
“….”
검도 차고 나오지 않은 기사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에게 있어 누군가에게 의기의 대상이 된다는 건 생소한 경험이었다.
어떤 여자는 응접실로 뛰쳐나와 소리를 질렀다.
보아하니 반쯤 미친 것 같았다.
“이 악마들아! 너희들 때문에 내 가족이 죽었어! 그런데 천연덕스럽게 나타나 이렇게 우리를 조롱하고 있구나!”
지금 문서로 만들어 승낙을 받지 않으면 두고두고 분쟁 거리가 된다.
그냥 허락도 안 받고 사는 방법은 해결책이 아니었다.
그래 봐야 어차피 분란이 일어나고, 그러면 머지않아 전쟁이다.
“….”
상대의 입장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
땅이 갖는 가치와 의미를 잘 아는 세인이었다.
만약 어느 날 어둠의 자식들이 그의 땅에 들어와 멀리에서라도 살게 해달라고 한다면, 자신은 어떻게 했을까? 칼을 뽑았을 것이다.
코다로나 비비안이 동행하겠다는 것을 말리고, 세인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중에는 영지가 박살 나서 산에 올라가 저항군처럼 사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땅만은 양보하지 않았다.
물론, 죽음을 각오하고 말이다.
“두고 보시오. 이 강산은 언젠가 수복될 거요. 그리고 인간의 이름으로 당신들에게 복수 하겠소.”
어떤 백작은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말했다.
피차 그렇게 마주 보며 앉아있는 건 서로에게 고문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인간에서 어둠의 자식으로 변했다고 해봐야….
이도 안 들어갈 말이다.
결국, 그들은 트리엔을 떠났다.
그리고 미얄로페로 향한다.
이번에도 서두르지 않았다.
서둘러 봐야 뭣하겠는가?
어느 날 머독과 함께 세인이 별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소란이 일었다.
앞을 보니까 병사들이 노인을 저지하고 있었다.
세인을 그들을 말리며 노인을 다가오게 했다.
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영주님. 이 미천한 것이 발을 씻겨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이 이야기를 두고두고 가문의 영광으로 삼고 싶어서 그럽니다.”
잠시 아스칼리온의 얼굴을 바라보던 세인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장화가 벗겨졌고 맨발이 드러났다.
그리고 아스칼리온은 그의 발을 정성스럽게 씻겼다.
머독은 약간 떨어져서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잠시 앉아 아스칼리온의 얼굴을 내려보던 세인은 작게 말했다.
“너희들에게 면목이 없구나.”
아스칼리온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는 듯이 말했다.
“그런 소리 하지 마십시오. 크고 든든한 성벽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아무것도 몰랐고, 불만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마음이 오히려 홀가분합니다. 그리고 앞에서 애쓰시는 영주님의 모습만이 보입니다. 오늘날의 고난은 필시 훗날 호사가들의 입술 위에서 대단한 추억이 될 겁니다.”
그리고 아스칼리온이 물러나자 머독이 다가와 말했다.
“역시 영주님과 합류하길 잘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도착한 미얄로페도 다를 건 없었다.
무서워서 차마 돌을 던지지 못하는 것뿐이었다.
다들 벌벌 떨었다.
그리고 세인이 협상 테이블에 앉아 입을 열 때마다 치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크림힐트 같은 작자가 북부에 넘쳐났다면 진작에 몬스터 천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북부에서 뼈대가 굵은 귀족들 대부분은 긍지를 가지고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려 했다.
나라가 어떤 상태든 충성심은 변함없었다.
“당신들이 눌러 앉겠다 하고 앉는다면 우리가 무슨 수로 말리겠소? 목이 잘려나갈 텐데. 마음대로 하시오.”
그렇게 말하는 어린 귀족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이제 겨우 13살도 안 되어 보인다.
괴물들에 의해 부모가 전사한 것이다.
그는 지하실 식량창고에 숨어 겨우 살아남았다.
크면 분명히 복수한다.
그 끝이 죽음일지라도….
결국, 그런 어린 귀족 앞에서 몸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만난 노인 앞에서 세인은 무릎을 꿇었다.
단둘만 있는 방이었다.
“나는 당신이 믿지 못할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밑의 사람들은 매우 지쳤습니다. 우린 그저 쉴 곳을 원할 뿐입니다. 담을 만들 땅 조금만 떼어 주신다면 이 은혜는 기필코 갚겠습니다. 어떤 것을 요구하든 두 배로 갚겠습니다.”
그 귀족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지금 사람이라고 말했소? 여기 사람이 나 말고 누가 있습니까?”
“….”
“죽일테면 죽이시오. 어차피 미련도 없소.”
일어선 세인이 나갈 때 그 노인은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당신들이 악랄한 건 알지만 이미 망국으로 만든 나라의 국기를 달고 움직이는 건, 정말 더러운 일이요. 적어도 인간 비슷하게 생긴데다가 말은 통하는 걸 보니 지성은 있는 존재인데, 아무리 서로 증오하는 사이라도 기본은 지킵시다.”
밖으로 나온 세인은 비비안과 코다로를 보았다.
코다로도 이럴 때만큼은 무기를 차고 있지 않았다.
“왜 굳이 혼자서 가십니까.”
내심 서운한 듯 말하지만, 그것보다도 너무나 미안한 눈치였다.
“나눈다고 괴로움이 줄어드는 일이 아니니까요.”
세인은 마차 위에 달린 가이더의 국기를 보았다.
하긴, 농락하는 꼴이겠지.
그는 사람을 시켜 모든 국기를 떼게 했다.
그리고….
마지막 선택지로 이동했다.
이번에도 사람들이 지치지 않도록 배려하면서 도착한 곳은 세계수가 있는 지역이었다.
눈의 허리띠 지역에서 머물기엔 그곳은 너무 춥고 모험의 여지가 많았다.
세계수 초입구에서 사람들을 쉬게 하며 영주 셋은 이야기를 나눈다.
“그 다크 엘프를 찾을 수 있을까요?”
“못 찾아도 할 수 없죠. 오크 놈들처럼 침략자는 되기 싫지만….”
침략자.
남의 땅에 욕심을 내고 칼과 도끼로 도둑질하려는 더러운 부류.
세상은 넓은데 침략자가 되고 싶지 않던 그들은 이리저리 떠돌아야만 했다.
그리고 마지막은 예상했듯이 세계수 앞이다.
그러나 세계수 지역도 분명 토착민들의 땅으로 빈틈없이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그때였다.
세 영주의 앞에 수많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 그림자들은 일렬로 늘어서며 주변을 가득 메웠다.
나무 위에서도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더니 공터에 앉아있던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놀란 이들이 분분히 일어나는데.
세 영주의 앞쪽에서 누군가가 몇 걸음 걸어 나왔다.
그녀는 은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다크 엘프였다.
노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고, 다른 쪽 눈에는 안대를 차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정식으로 소개했다.
“나의 이름은 엘라이저 티나스터. 검은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 노는 땅이 있어, 따뜻한 차를 대접해준 당신들에게 임대해 주고 싶습니다. 응하시겠습니까?”
세인이 말했다.
“전에 제가 말했던 대로, 제가 무릎 꿇기를 바라십니까? 원한다면 기꺼이.”
그리고 양옆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비비안과 코다로도 옆에 서 있었다.
다크 엘프는 모욕을 감수하려는 셋을 보고.
다음으로 그 뒤의 일어선 그들의 백성을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저는 받은 대로 돌려줍니다. 그것뿐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강함에도 불구하고 저를 무릎 꿇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저는 당신에게 수치를 요구할 자격이 없습니다.”
돌아서는 그녀는 작게 덧붙였다.
“세계수의 품에 잘 오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