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 트리엔 (2)
재칼은 여전히 고민중이었다.
결국, 이건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차이인데.
괜히 귀족의 기분을 거스를 필요가 있을까?
당장 더이스나 윌 같은 기사에게 말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인상을 귀족들에게 각인시키고 싶은 남자였다.
기사들이 자신의 말을 무시할 수도 있었고.
그는 결국 결정했다.
말하는 거로….
그는 코다로를 찾아가 말했다.
“코다로님.”
“응? 왜?”
팔자 좋게 상의를 탈의하고 그림을 그리던 코다로는, 자신의 예술 작업이 방해받자 약간 짜증 내는 말투였다.
움찔하는 재칼이었지만 이왕 내친걸음이다.
그리고 그는 이걸 보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원수가 틀립니다.”
그리고서 코다로의 기색을 살펴보았다.
코다로는 인상을 쓰지 않고 뚱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아차 실수했구나 싶었는데….
코다로는 천천히 붓을 내려놓았다.
“네 성격에 당연히 확인은 충분히 했겠지?”
“물론입니다, 열 번은 했을 겁니다.”
그러자 코다로가 웃었다.
그는 인원수가 어떻게 틀렸는지 먼저 물어보지 않았다.
보통은 그게 궁금할 만도 한데 말이다.
다만 이렇게 말하며, 무엇보다도 먼저 재칼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래. 알려줘서 고맙다. 잘했다.”
재칼의 험상궂은 얼굴에 함박웃음이 걸렸다.
매일 아침과 저녁에 인원수를 확인한다.
그런데 한 명이 더 많았다.
모자란 것도 아니고 한 명이 더 많았다.
이미 올 사람은 한 달 전에 끝났는데 말이다.
누가 실종된 것도 아니고 고작 한 명이 늘어난 거다.
하지만 코다로는 그것을 다른 영주에게도 알렸다.
그는 성격이 좋다고는 할 수 없는 남자지만, 기본적인 책임감은 있는 남자였다.
그리고 당연히 비비안과 세인은 그 소식을 듣고 고민에 빠졌다.
생각해보면 누가 지금 이 시점에 첩자를 들이겠는가?
나라가 결딴난 상태다.
그리고 굳이 왜 들이겠는가?
뭘 노리고?
아마 보통 귀족들 같으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착오라고 여기면서 말이다.
알아도 뭘 어쩔 수도 없고.
하지만 여기 있는 이들은 나이를 떠나 전쟁을 경험해본 자들이었다.
“어떻게 하죠?”
“생각 중입니다.”
세인은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갑자기 생각이 난 듯이 코다로에게 말했다.
“코다로님의 부하가 보고했다면서요?”
“예 그렇습니다.”
“과연. 인품에 맞는 좋은 부하를 두셨군요.”
코다로의 어깨가 활짝 펴졌다.
이건 경계의 문제다.
경계의 개념은 작은 일도 소홀히 하지 않으며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래서 작은 신호를 무시하지 않는다.
방어란 그런 거니까.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숫자도 그렇지만, 무려 세 영지에서 모인 사람들이다.
번우드 마을의 사람들도 섞여 있었고 말이다.
가려내기는 어려운 문제였다.
게다가 출발이 코앞이고 말이다.
이 와중에 대체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그래도 재칼은 사람들이 보는 데서 상을 받았다.
* * *
그리고 드디어 사람들이 출발했다.
마차와 수레.
살아남은 말들과 아주 적은 수의 소들이 움직였다.
정든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아무런 슬픔도 없었다.
인원의 3분의 2 정도가, 이미 아레이즈의 영지민이 아니었고, 고향이라는 감수성도 상태가 멀쩡할 때 작동되나 보다.
곳곳에 오크 피가 묻어 있는데 남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게 힘들었다.
기사들과 용병들은 움직이는 사람들의 주변을 호위했다.
세인은 검은 말을 탔는데, 그가 탄 말은 좀처럼 지치지 않았으므로 도중에 지쳐 보이는 남자가 있으면 위에 태웠다.
그리고 뒤에서 오히려 긴장해서 부들부들 떠는 것을 보고는 그냥 내려준다.
남자는 가시방석에 앉아 있느니 차라리 살았다는 표정을 하고 멀어져 간다.
비비안은 마차에 타고 있었는데 한 달 동안 수리한 마차였다.
그 안에는 아이들이 잔뜩 타고 있다.
보통 때엔 그렇게 해주고 싶다 해도 어림도 없는 일이다.
과거에 비해 세 영주는 변한 것 같았다.
코다로도 전보다는 용병들과 잘 지내는 듯싶다.
야트막한 능선을 건너가고 있을 때 멀리에서 말을 타고 있던 정찰병이 다가와 뭔가를 보고했다.
그러자 코다로가 외쳤다.
“사냥이다!”
그러자 용병들이 덩달아 외친다.
“우와아아!”
누가 말리기도 전에 그들이 대열을 이탈했다.
옆으로 달리니 검은색의 두꺼운 가죽을 두른 소들이 수십 마리 이동하고 있었다.
이마 앞에는 휘어진 뿔이 달려 있다.
전화에도 불구하고 용케 살아남은 녀석들이다.
뒤져보면 이런 녀석들이 더 있겠지.
용병들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이 강해져서가 아니라, 이골이 난 솜씨로 그들을 사냥했다.
달리는 놈들을 한 마리씩 떼어놓고 투창을 한다.
활을 쏜다.
정신이 없다.
그중 몇 마리가 말의 옆구리를 들이받으러 달려왔지만, 오히려 길게 도는 말 위의 용병에게 다리를 내주었다.
뒷다리에 화살을 맞은 소가 쓰러지자, 피어오르는 먼지 앞에서 말이 앞다리를 들어 올린다. 그 다리가 땅에 착지할 때 용병이 창을 던지며 확인 사살을 했다.
결국, 차례대로 몸을 뉜 소들이다. 용
병들은 그제야 말에서 내려 소들을 해체했다.
고기와 가죽을 분리해 내고 토막 치는데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길들일 수 있는 녀석들이라면 좋았을걸.”
“그러게. 짐도 많은데 말이야.”
“짐은 빨리 줄어들 테니 걱정하지 마. 사람들이 하루에 먹는 양이 있어.”
세인은 뒤늦게 고기와 가죽을 가지고 합류한 그들을 나무라지 않았다.
여정은 길 테니 중간중간에 이런 활력소도 필요하다.
고기는 식량을 취급하는 마차로 옮겨졌고, 마차 중간중간에 가죽이 널렸다.
움직이는 마차 위에 올라탄 노인 중에서는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도 있었다.
여행길을 재촉한 속도는 빠듯하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은 오히려 북부 위쪽에 몬스터가 드물다.
“서두를 것 없다. 천천히 가자.”
피리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잡담을 나누는 사람들이 걸었다.
그들과 짐승들, 수레바퀴가 움직인 후에는 바퀴 자국이 남았다.
그리고 비가 오고 다른 동물이 짓밟는 진창이 되었다.
언젠가 그 위를 몬스터가 다시 밟을까?
그렇게 되겠지.
하루….
이틀….
일주일….
이주일이 지나고 또다시 일주일이 지났다.
먹이를 찾아 수면 위로 내리꽂히는 바위 새처럼.
내일을 찾듯이 산에 내리꽂히는 해.
석양이 움직이는 사람들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신이 이미 빚은 인간의 얼굴에, 자연이 2차 가공을 하는 돋을새김이다.
코를 따라 길게 늘어나는 그림자는 흘러내려 땅바닥에서도 길게 옆으로 이어진다.
밤이 되자 커다란 솥이 걸리고 국이 펄펄 끓었다.
거기에다가 채소를 마구 넣고 고기를 숭덩숭덩 넣어 푹 끓였다.
살코기는 물론 비계가 흐물흐물 해져 둥둥 떠다닐 정도로 말이다.
뽀얀 국물이 우러나오자 그릇들이 앞다투어 달려든다.
나무를 깎아 만든 그릇이건, 찌그러진 그릇이건 국을 가득가득 담아 갔다.
빵도 나왔다.
그리고 남자들에게는 많이는 아니지만 조금씩 술이 주어졌다.
낮에 걷느라 수고했다는 의미다.
불침번을 서는 사람에게는 특별히 반 컵 정도 더 주어진다.
별이 하늘에 뜨자, 땅에서 커다랗게 솟아 나온 바위 곁에 잠자리가 만들어졌다.
바람을 피하고자 함이기도 하고, 주변에 바위가 꽤 있어 천막을 지지하는 줄을 묶어 놓기 위해서였다.
아이들이 천막 안에서 떠드는 가운데, 영주들도 각자 자신의 마차로 들어갔다.
세인의 마차는 낡았지만, 대신 아늑했다.
보온을 위해 푹신한 털가죽들이 여기저기 깔려 있었다.
그리고 중앙에 작은 탁자가 있다.
탁자 위에 발을 올려놓은 그는 램프를 켜고 책을 펼쳤다.
그리고 영지의 도서관에 남겨두고 온 책들을 훗날 인간이 발견하고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몬스터라면 불쏘시개로 쓰겠지.
비비안은 세인이 좀 무리해서 그것을 다 가져와도 아무도 말리지 않을 텐데 놓고 오는 것을 봤다.
그래서 지금 세인이 읽는 책을 보곤 눈을 빛냈다.
무게를 생각하면 양보해야만 했던 일이지만….
책의 내용은 60살까지 여자 손을 잡아 본 적 없는 솔로몬이 신부를 찾아 열사의 사막을 건넌다는 이야기다.
그러다가 사막 비단뱀을 만나는데, 그 비단뱀은 네 인생이 불쌍해서 결혼해 줄 테니 수수께끼 하나를 맞춰보라고 했다.
그러자 솔로몬은 열의를 불태우며 승낙한다.
그 뱀은 자신을 일자로 만들더니 말했다.
손대지 않고 나를 짧게 만들어 보라.
아니 솔로몬이 마법사도 아니고 어떻게 짧게 만든단 말인가?
그것도 손도 안 대고.
그래서 결국 잡아먹혔다는 소리다.
세인은 책장을 덮으며 중얼거렸다.
“뱀의 정면에서 누우면 되지 멍청아.”
그럼 상대적으로 뱀의 길이가 작아 보이니까.
그리고 램프를 껐다.
다들 잠든 밤에 달만 이쪽에서 저쪽으로 이동한다.
처음 위치에서 아주 많이 움직였을 때, 부스럭거리면서 천막에서 누가 나왔다.
요의를 느껴 일어난 아비게일이었다.
눈을 주먹으로 비빈 그는 신발을 신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불침번들은 꾸벅꾸벅 조는지 그런 그를 제지하지 않는다.
귀뚜라미들도 날개를 비비는 것에 지쳤는지 소리를 내지 않는 가운데, 허리끈을 풀고 풀 앞에서 바지를 내리려고 할 때였다.
“흡?”
누군가가 그의 뒤에서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 목에 칼을 가져다 댔다.
물론 협박은 덤이다.
그는 위협적으로 속삭였다.
“저항하면 몸에 칼집을 내주겠어.”
그런데 그런 협박은 아비게일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이다.
이 심약한 남자는 벌써 기절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는 제아무리 고도로 훈련된 첩자라도 당황할 수밖에.
‘뭐야? 이 녀석 지금 기절한 거야?’
뭐 소리를 지르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그렇다고 기절이라니.
첩자는 투덜대면서도 아비게일을 업었다.
그리고 빠르게 움직인다.
아비게일을 업은 그의 몸이 야영지에서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그리고 점점 바깥쪽으로 더 이동한다.
사람들이 자고 있는 지역은 중앙이 아래쪽으로 들어간 분지였기 때문에 첩자는 경사를 타고 올랐다.
그리고 얼마나 앞으로 갔을까?
그는 갑자기 덜컥 멈춰선다.
“대단하군.”
솔직히 약간 감탄했다.
그는 멈추고 싶어서 멈춘 게 아니라 포위되어 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멈췄다.
포위망이 너무 넓어서 행렬 안에 있을 때는 시력이 아무리 좋아도 알 수가 없었다.
바깥쪽에 긴 띠를 만들며 포위한 쪽은 바로 레인저들이었다.
고심한 세인은 합류예정인 레인저들에게 서신을 먼저 보냈다.
그리고 이런 일을 벌인 것이다.
고작 오류였을지도 모를 인원수 하나 때문에….
엄청난 수의 레인저들은 아주 멀리에서 원을 그리며 행렬과 함께 이동하고 있던 거다.
이런 짓을 하려고 한다는 거 자체가 황당하고 어이없긴 했다.
그래도 어쨌든 결과적으로 잡혔지 않나.
이렇게 말이다.
무기를 든 레인저들이 아비게일을 업은 첩자를 향해 슬금슬금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