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54화 (54/307)

# 54

& 트리엔 (1)

*  *  *

“어머! 너 어디 갔다 왔니? 한참이나 못 봤는데?”

머플러와 외투, 장갑으로 중무장을 한 마플은 호들갑을 떨며 쪼르르 달려오는 검은 강아지를 안아 들었다.

검은 강아지는 눈을 빛내며 헥헥댈 뿐이었다.

“어디 갔다 왔어? 엉? 이 아줌마에게 말해봐! 어서!”

하녀들이 뒤에서 피식거렸지만, 이건 모르는 일이었다.

누가 아는가?

이 강아지도 변해서 사람 말을 할 수 있을지?

마플이 기대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강아지는 큰 눈망울을 반짝이며 마주 보고만 있었다.

에라이, 김샜다.

게다가 근처에서 세인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머쓱해진 마플은 강아지를 땅에 내려놓았다.

“그 강아지랑 같이 다녀. 선물이야.”

“원래 이 강아지는 성을 누비고 다녔다고요. 이미 있던 걸 주는 게 선물이에요?”

그래 그게 문제였지… 라고 중얼거리며 들어가 버리는 세인의 뒷모습을, 마플은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아레이즈 성터는 지금 아주 분주했다.

기사들은 멀리까지 나가 돌아다니며 변한 사람들을 여기로 인도했다.

그러면서 혹시나 해서 여러 곳으로 정찰병을 보냈지만, 나라는 망했고 변화한 것은 레인저들뿐이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힘이 강해지고 민첩해진 것에 불안해하기보다는 그냥 기뻐했다.

심각한 정체성의 고민.

그런 것을 하기에는, 밥 짓는 것도 그렇고 털실 짜는 데 하등 도움도 안 된다.

당장 죽은 돼지와 닭들이 문제인데 말이다.

아줌마들의 수다거리로는 등장했지만, 어차피 원인을 모르니 상상의 나래만 펼쳤다.

골드 힐에서 식량을 다 쓸어모아 왔고, 돈이 될 만한 물건은 모조리 챙겼다.

예를 들어 은과 금.

보석 같은 것은 어딜 가도 대접받는다.

용병들은 저희끼리 상의를 거쳤지만, 계속 따라다니는 것 말고는 답이 없었다.

“솔직히 살아있다는 거에 감사해야해. 그렇다고 피를 빨거나 하는 습성은 없잖아. 뱀파이어는 아닌 것 같아.”

그렇게 중얼거린 그들은 아주 처참하게 죽어 있는 오크들에게서 갑옷을 벗겨냈다.

척 봐도 아주 좋은 갑옷이었는데, 박살이 나 있는 게 많았다.

어느 세월에 녹이고 다시 제작하랴.

그나마 멀쩡한 거 수거해서 수레에 챙긴다.

마음 같아서는 굴러다니는 무기를 다 챙기고 싶지만, 쇠붙이는 무거워서 이동에 많은 부담이 되었다.

게다가 종자가 될 곡식이나 가재도구도 많이 실어야만 했다.

그렇다.

그들은 이동 준비 중이다.

전에 턴 테이블에서 비비안이 말했다.

“당연히 아래쪽으로는 내려가긴 힘들 거에요. 난민들이 우릴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그리고 여기에 남거나 자리를 잡는다 해도 시한부에요. 길게 보면 계속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코다로가 그 말을 받았다.

“지도에 우리 위치가 떡하니 표시되어 있으니까요. 당연히 나중에 누군가가 오게 되겠죠. 시간이 지난다면 몬스터든 인간이든, 아무리 무너져도 여기는 잘 닦인 터니까요.”

세인은 지도를 뒤적이며 대륙의 위와 옆을 살폈다.

“세계수 지역은 어떻습니까?”

“현시점에서는 마지막 선택지죠.”

이들은 모르지만, 세계수에는 몬스터의 왕들이 모여 있었다.

확률이 희박하다 해도 굉장히 위험한 조우 요소가 분명 존재한다.

“어차피 여기는 적의 진격로입니다. 가이더 전체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죠. 중부로 통하는 관문이니까요. 위험요소를 배제 못 해요. 그렇다면 차라리 국경을 넘어 험한 지대로 갑시다. 종단 말고 횡단하는 거죠.”

어차피 좋은 곳만 찾을 수는 없다.

다 장단점이 존재한다.

다만 그중 가장 덜 나쁜 곳을 선택하는 거지.

“트리엔과 미얄로페 중에 골라야 하겠군.”

굳이 따지자면 트리엔이 조금 더 가까웠다.

트리엔으로 정한 그들은 깃발 문제나 문장에 대해서 상의했다.

기사들은 한 덩어리로 합쳐졌다.

물론, 병사들도 마찬가지다.

일단은 생존과 안전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것이다.

코다로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혹시라도 인간을 위해 싸우러 남쪽으로 진격할 장정이 있냐고 물었다.

당연히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는데, 그는 이렇게 못 박았다.

“원하면 혼자 걸어가라고. 난 이미 할 만큼 했다. 목숨까지 바쳤어.”

아이고. 창이 복부에 쑥쑥 들어오는데 얼마나 아프던지.

마지막 즈음에 합류한 사람 중에서는 대장간 소년인 잭과 아비게일도 있었다.

그들은 죽지 않았기 때문에 변하지 않았다.

잭은 망설이지 않고 마을 사람과 같이 움직였지만, 아비게일은 예외였다.

‘마족? 다 마족으로 변해 버렸잖아. 이게 대체 어쩐 일이지?’

그는 어찌할 줄 몰라 하며 사람들 사이에 서 있었다.

그렇게 있으면서, 정말 생각할수록 불쌍한 피해자는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세리스는 진짜 못된 여자였다.

“다 떠날 텐데 같이 갈 거요, 말 거요? 여자와 아이들은 수레에 타니까 걸어가야 해요. 따라서 올 거면 마음 단단히 먹고 오고.”

우리 정체를 어디에 가서 까발리면 죽이겠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인심 좋게 생긴 아저씨는 그냥 귀찮다는 듯이 아비게일에게 말했다.

“대체… 제게 선택의 여지가 있나요?”

그러면 혼자 여기에 남거나, 망한 도시로 돌아가란 말인가?

얼어 죽는 방법도 참 가지가지다.

게다가 운 없게 오크를 만나면 어떻게 되는 건데?

아저씨는 또 그게 무슨 생각할 거라고 한참 생각하더니, 침 뱉듯이 탁하고 대답했다.

“아니 없지.”

그리고 사라졌다.

아비게일이 신을 눈 신발을 만들러 말이다.

아비게일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리고 신음했다.

세리스!

세리스!

진짜 당신은 악마야!

내게 무슨 짓을 했는지 보라고!

마족들 사이에서 이러고 있다고!

이 망할 여자!

으흐흑! 진짜 당신은 악마야!

땅에 무릎을 꿇은 그가 등을 구부리고 몸을 들썩일 때, 어느새 잭이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아저씨. 설마 또 울어요?”

“….”

*  *  *

세인은 외진 곳에서 혼자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건틀렛 한 개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건틀렛의 안쪽은 붉은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어서 손을 넣어 달라는 듯이 말이다.

새 소리를 들으며 세인은 건틀렛을 주워 올렸다.

그리고 이리저리 살펴보며 중얼거린다.

“사용 설명서 같은 것은 없는 것인가.”

그의 농담에도 건틀렛은 끊임없이 유혹하듯, 안쪽에서 붉은빛을 뿜어냈다.

결국, 세인은 그 안에 손을 넣어본다.

검은 손가락들이 세인의 눈앞에서 차례대로 움직였다.

그 움직임을 보던 그는 자세히는 아니었지만, 건틀렛을 어떻게 활용할지 아는 것만 같았다. 그건 누가 일러줘서 아는 게 아니라, 본능적인 깨우침 같은 것이다.

네발짐승이 꼬리를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아는 것처럼….

물론, 마검은 꼬리를 흔드는 정도로 간단한 쓰임새를 가진 물건은 아니었다.

천천히 다가온 검은 손바닥이 세인의 얼굴을 덮자, 검은 연기가 뿜어지며 투구를 만들었다.

검은 부분은 얼굴을 통해 세인의 목과 그 아래를 뒤덮더니, 검은 기사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양손을 폈다가 쥐었다가 해보던 그는 비탈진 산길을 뛰어 올라갔다.

육체의 모든 부분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상태라서 말을 타고 달리는 속도를 방불케 했다.

나무들이 바람 소리를 내며 스쳐 지나가는 가운데, 어느덧 그의 몸은 산 정상에 올라 서 있었다.

최대의 힘을 내다 보니 그의 흉갑이 부풀어 올랐다가 수축하기를 반복했다.

거친 숨을 가누며 그는 산 아래를 바라본다.

주둔지와 산세가 한눈에 들어왔다.

세인은 낭떠러지로 가서 그대로 밑으로 뛰어내렸다.

거침없는 움직임 속에는, 밑에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군청색 호가 계산되어 있었다.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하얀 물보라 속으로 사라진다.

어둡게 아래로 가라앉는 세인은 고개를 들고 수면 위를 바라본다.

수면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파도치는 물결 위로 빛이 머무는 하늘이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점점 깊은 바닥으로 가라앉아 가는 그의 전신이 어둠의 손아귀에 들어갈 때.

그 모습은 현재 오버 더 데스 안에 들어 있는 그의 모습을 상징화해서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호의 밑바닥에 그의 발이 닿을 때, 어둠 속에서 붉은 눈빛만이 가시처럼 반짝였다.

땅바닥에 구렁이처럼 몸을 감고 드러누워 있던 물고기는, 불청객에게 지느러미를 흔들며 천천히 움직인다.

꼬리가 휙 하고 투구를 칠 듯이 스쳐 지나갈 때, 세인은 상대에게 관심을 거두고 자신을 관찰했다.

엄청난 힘이 그의 몸에 깃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그가 지닌 힘은 앞으로 무궁무진에 가까운 이능을 약속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사용법만 하나하나 깨우친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게 과연 기뻐해야 하는 일인가는 확신할 수 없다.

당장 그의 육신만 봐도 언데드에 가까웠다.

모든 것에는 대가가 뒤따른다.

운명은 그런 식으로 피조물들의 평등을 고집하려 한다.

그리고 강한 힘을 주는 까닭은, 그 힘을 휘둘러야 할 필연적인 상황이 요구되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이 개판이긴 하지.”

그가 입을 열자, 투구 속에서 물방울 몇 개가 양쪽으로 흘러나온다.

세인은 뱀장어가 있었던 자리에 주저앉았다.

웅크린 자세 그대로 손바닥에 턱을 받치고 생각에 들어가는 그였다.

*  *  *

사람들이 다 모인지는 한 달여가 되었다.

그리고 서서히 준비는 끝나가고 있었다.

보통 두 영지의 물건 정리하는 게 한 달 만에 가능하다고 하면, 어렵게 느껴지겠지만.

이들은 엄청나게 늘어난 체력으로 부지런히 일했다.

그런 진행을 원활히 관리하는 것은 아무래도 용병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코다로의 눈에 든 재칼은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는 기사가 되는 게 꿈이었는데, 너무 가능성이 낮아서 조심스럽게 가슴에만 품어 두고 있는 사람이다.

세인이 준 다이아몬드는 언젠가 세인에게 강한 인상을 주기 위해 다시 돌려줄 생각이었다.

돈보다 기사라는 지위에 목숨 걸고 있다는 소리다.

그는 기사가 꿈인 사람이었으므로 매사에 열정적으로 임했다.

작은 것 하나도 허투루 대하지 않았다.

야망이라는 원동력은 언제나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부하들은 작작하라고 혀를 내둘렀지만, 이런 기본도 안 돼서야 언제 기사가 될 것인가?

재칼에게 있어 출세를 위한 부단한 노력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출발 직전에 가까운 날.

다들 영지를 떠난다는 마음에 기분이 심란해져 있을 때.

재칼은 인상을 쓰며 이마를 긁어댔다.

그는 나무판을 들고 다시 캠프를 한 바퀴 돌았다.

시간이 두 시간 정도 걸렸다.

그리고 다시 나무판을 보는데.

“또?”

이런 소리를 하며 다시 돌았다.

그건 자정까지 계속되었고, 같이 도는 부하들은 볼멘소리를 했다.

“대장님. 제발, 그냥 가자고요. 저녁도 못 먹었습니다. 착오가 있었나 보죠. 별거 아닐 거예요.”

그날 밤 잠을 설친 재칼은 아침 일찍 다시 확인해 보았다.

그런데 이번에도다.

그는 여기에서 고민해야만 했다.

이를 어쩔 것이냐.

알릴 것이냐 말 것이냐.

아주 사소한 착오일 수도 있었지만, 말이다….

어떻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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