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53화 (53/307)

# 53

& 스포일러 천리안

천리안은 로말테 포구에 앉아 있었다.

크림힐트 후작이 당분간 머무는 남쪽 해안이다.

물론, 다시 이동할 것이다.

금은보화를 다 싸 들고나온 데다가 블랙 라이어드 상단과 손발을 맞췄다.

바로, 다 무너져가는 가이더의 보물도 긁어서 나온 것이다.

덕분에 크림힐트는 선대를 통틀어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이렇게 보면 그녀가 앞으로도 승승장구할 거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천리안은 그걸 알고 있었지만, 그녀에게 이야기해주진 않았다.

왜냐면, 자신이 비참하게 죽냐고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리안의 생활방식은 아주 간단했다.

계속 감옥 같은 공간에 갇혀 있다가, 한 달에 한 번 예지력으로 그녀의 질문에 대답해 준다. 그리고 그 보상으로 짧은 외출을 즐길 수 있었다.

지금처럼 말이다.

그래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갈매기를 바라보며 낚시를 즐기고 있는 시간이 참 소중했다.

물론, 거리를 두고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무장한 남자들은 ‘저러고 싶을까?’라는 눈치였다.

그들이 보기에 한 달에 한 번 외출하는데, 고작 낚시라니.

기가 찰 법도 하다.

외출 내내 고기가 안 낚이면 공치는 거 아닌가?

그래서 이렇게 물어오기도 했다.

“고기를 낚을지, 안 낚을지 다 아는데 이러고 싶으세요?”

“점쟁이라고 하면 모든 걸 다 맞추나? 그러면 신이지 굳이 왜 점쟁이라고 해? 내가 고기도 아닌데, 미끼를 물지 안 물지 어떻게 알아?”

“….”

그렇게 쏘아붙인 천리안은 낚시와 바다를 즐겼다.

솔직히 그의 입장에서는 따로 즐길만한 것도 없었다.

인간은 가끔 각성을 하고 그렇게 특이한 능력을 얻는다.

드물지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가이더의 국왕도 크림힐트가 각성자를 숨겨놨다고 했을 때 웃음으로 넘어간 거고.

뭐 국가의 이익을 위해 썼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크림힐트라는 인간을 알지 않는가?

각성자가 되면 능력을 얻는 대신 원래의 자아가 남아있다고 보기 어려웠다.

좀 더 우월하달까?

피도 상위적인 상태로 거듭나는 대신, 원래의 인격과 신분이 부서진다.

그의 아내는 남편이 각성하자마자 이혼했다.

당연한 일이다.

이제 남편의 몸 안에는 타인이 들어선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더불어 천리안은 크림힐트의 특별한 방에 갇혔고, 그녀의 이익을 위해 호화로운 수감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수호자란 명예를 얻으며 말이다.

그는 각성하면서 모든 사회적인 지위와 호의적인 인연을 잃었다.

아 하나 빼고.

“많이 잡으셨어요?”

그 유일한 한 명이 지금 곁에 와서 앉았다.

세리스였다.

세리스는 매우 수척해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국이 망한 마당이다.

잠도 못 자고 끼니도 걸렀다.

그래도 천리안을 향해 웃어줄 줄 아는 아이였다.

그녀는 천리안이 혈연관계상으로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모른다.

그러니 이건 순수한 호의였다.

“하나도 못 잡으셨네.”

세리스는 그 말을 끝으로 천리안의 곁에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힐끔 보니 바다 너머의 고국을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천리안은 당연히 세리스의 미래도 알고 있었다.

바뀌지만 않는다면, 아니 바뀌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너무 큰 줄기니까.

역사의 큰 줄기를 이루는 미래는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굳이 육체적으로 딸이라서가 아니라…. 아쉽다고 생각했다.

세리스는 착하고 좋은 아이였다.

크림힐트 같은 경우는 이해할 수 있어도, 세리스의 미래는 용납하기 힘들다.

“세리스.”

“네.”

“정말로 내게 세계수를 구경시켜 주려고 했나?”

“네.”

“왜?”

“세계수를 구경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그게 아니라 내게 왜 그런 호의를 베푸냐고. 우린 남인데.”

그녀가 천리안이 자신의 핏줄인 걸 알아도, 부녀 관계로 돌아가기는 어려웠다.

각성자는 솔직히 인간이라 보기도 어려우니까.

세리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남이라서 호의를 베풀지 않아야 한다는 당신의 생각은 잘못된 거예요. 게다가 우린 남도 아니에요. 친구니까요.”

결국, 크게 한숨을 내쉰 천리안은 낚싯대를 걷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도 네게 호의를 베풀마.

너도 그랬으니까.

나도 그래도 상관없겠지.

그래야 공평하니까.

그렇게 핑계를 댔다.

크림힐트의 운명은 간단했다.

천리안을 찾아온 괴물 때문에 아주 엄청난 고문을 받다가 죽는 운명이었다.

정말 개처럼 울부짖다가 비참하게 죽는다.

그게 바로 크림힐트 여 후작의 미래다.

미래가 약간 바뀐다고 해도 절대 좋은 꼴을 보긴 힘들었다.

죽는 것이 나은 정도의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어찌 보면, 나라를 버린 벌을 받는 꼴이다.

지금이라도 천리안을 버린다면 혹시 모르겠지만, 그녀가 미쳤다고 천리안을 버리겠는가?

아마 사실을 말해줘도 믿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문제는 애꿎은 세리스도, 망하는 크림힐트의 가문에 딸려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아주 큰 곤욕을 치르게 된다.

천리안은 세리스에게 말해주었다.

그녀의 정체를….

“세리스. 너는 라이트닝 블러드다.”

“예. 그렇군요.”

세리스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물었다.

“그런데 그게 뭔데요?”

천리안은 세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라이트닝 블러드와 엘릭서에 대하여, 그리고 이 말도 덧붙였다.

“네가 보통 사람과 다른 특별한 힘을 가진 것도 그 때문이야. 하지만 네가 검은 왕처럼 반려자를 만날 가능성은 없어. 왜냐면 하나의 시대에 하나의 엘릭서가 강림하는 게 규칙이거든. 라이트닝 블러드는 여러 명일 수도 있어. 시대가 끝나면 다른 엘릭서가 강림해야 하니까. 그 날을 준비하는 거지. 하지만 엘릭서는 오로지 그를 필요로 하는 시대에 하나만 눈을 떠.”

예정된 미래라면 천리안을 손에 넣기 위해 다가온 괴물들이, 세리스를 고문하는 과정에서 그녀가 그토록 고대하던 라이트닝 블러드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녀를 이용해 절대적인 힘을 손에 넣으려 한다.

원래의 계획을 포기하고 말이다.

그건 결과적으로 헛짓거리였다.

왜냐면 이미 검은 왕의 오버 더 데스가 눈을 떴으니까.

그놈들 입장에서 세리스를 활용하려면, 엘릭서는 시대에 하나뿐이라는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그러려면 일단 마검을 시대에서 제거해야 하는데, 그걸 누가 할 것인가?

죽으려고 환장한 놈들 아니면 말이다.

하지만 눈앞에 놓인 세리스.

그녀의 절대의 힘이라는 과실이 너무 달콤하니까.

억지로 세인을 어찌 해보려다가 뭐….

“너는 홀리 디스트로이어의 짝이야. 물론 네가, 네 권리를 찾으려면 검은 왕을 물리쳐야 해. 하나의 시대에 하나의 엘릭서만이니까.”

“당신의 상상력은 익히 알았지만, 지금 설정에는 모순이 많은 것 같은데요. 시대가 필요해서 하나만 내놓는다는데 말이죠. 필요하니까 나온 거겠죠. 그걸 왜 방해해요. 그리고 절대적인 힘인데 제가 어떻게 죽이나요.”

세리스는 보통 헛소리를 하며 노는 천리안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심드렁하게 받아들였다.

그냥 우울한 자신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이러나 싶었다.

그런 것 치곤 썩 재미는 없었지만.

천리안은 세리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진지한 눈빛으로 많은 말을 했다.

그중에는 이런 말도 있었다.

“네가 만난 세인이라는 자는 사악한 사람이야. 너는 그에게 끌렸겠지. 같은 라이트닝 블러드니까. 그 의미가 너희를 서로 끌어당긴 거야. 그는 지금 북부 쪽에서 생존하고 있다. 그리고 미친 듯이 사악한 짓을 저지르고 있지. 입에 거품을 물고 말이야.”

세리스의 표정이 굳었다.

내용이 너무 구체적이고 심상치 않았다.

이름까지 지명하니까.

“그는 악마 같은 자들과 결탁하여 지금 난민들을 사냥하고, 피를 마시며 괴물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빙글빙글 춤을 추면서….”

그다음부터는 그냥 천리안의 상상 행진이었다.

그도 자신의 운명과 크림힐트에게 시달리다 보니 정상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뭐 어쨌든 지금은 세리스를 빼내기 위한 작업이다.

“무너진 가이더에 죄책감을 느끼니? 얼굴에 눈물 자국이 얼룩져 있구나. 그렇다면 행동하거라. 그를 죽인다면 속죄가 될 것이다. 그는 장차 엄청난 짓을 세상에 저지를 거야.”

세리스는 과거에 천리안이 스쳐 지나가듯이 검은 왕이 위대하며 강하다고 그녀에게 말한 것을 기억할 리가 없었다.

현재 천리안의 진지한 눈빛에 곤혹스러워 할 뿐.

지금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어야 하는 걸까?

“새, 생각해 볼게요. 시간을 가지고. 솔직히 지금은 당신이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 뭔지 모르겠어요. 라이트닝 블러드라는 것도 생전 처음 들어보고요. 홀리 디스트로이어는 당연히 들어 보았지만.”

“내 친구 세리스. 난 네가 결국 움직일 거라는 걸 안다. 넌 그런 사람이니까. 이런 회개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지.”

“그런데 정말 그 세인이라는 분이 아직 살아있고, 지금 그렇게나 악마 같은가요?”

“그럼, 엄청나게 타락했거든. 검 이름이 왜 마검이겠니. 아마 지금쯤 몬스터들을 제조하고 있을 거야. 빵 찍어 내듯이 펑펑 말이야. 그러면서 신의 이름으로 날뛰겠지. 네가 그를 죽이고, 성검을 들고 세상을 구하렴. 어떻게든 해봐. 넌 할 수 있을 거야. 정의는 승리하기 마련이거든. 안 되면 되게 해. 왜냐면 여긴 너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니까.”

“….”

이렇게 장난처럼 말하니 이거야 원….

“난 네가 더 힘들어질까 봐 이런 말을 안 하려 했는데, 어쩔 수 없구나. 이게 네 죄책감을 청소하는 일이 될 거야.”

혼란스러워하는 세리스의 곁에서 천리안은 평소 그답지 않게 빙그레 웃었다.

가문에 얽매이지 마라, 세리스.

자신도 그렇지만 크림힐트는 인간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크림힐트는 자신의 안위와 이익을 위해서라면, 같은 인간이 어떻게 되던 아랑곳하지 않을 사람이다.

그리고 그걸 이미 증명했다.

조국인 가이더를 떠나 옴으로써….

*  *  *

머독은 담배를 피우면서 자신의 얼굴을 놋쇠 주전자에 비춰 보았다.

“이래서야 탈영하라고도 못 하겠군.”

그런 그의 말을, 보고서를 들고 들어오던 부관이 들었다.

그는 소리 나게 문을 닫으면서 말한다.

“부대원들에게 탈영을 권장하려고요? 그게 할 소리십니까.”

“지킬 나라가 없어졌으니까.”

그래도 정말 할 만큼 했다.

목숨까지 바쳤던 마당에 더는 할 수 있는 게 없을 거 같다.

아니 이제는 오히려 목숨을 지키기 위해 피난을 가야 하는 건가.

놋쇠 주전자 대신 작은 거울을 놓아준 부관은 보고서도 같이 내려놓았다.

그걸 집어 든 머독은 지나가듯이 물었다.

“그래. 지금 상태에 상심해서 자살하려는 놈들은 없던가?”

“면담해주시려고요?”

“멀리 나가서 자살하라고 그러려고. 시체 치우기 귀찮잖아.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이제 어쩌죠? 애도식도 끝났는데. 지금 부대 전체를 소집해서 너무 바글바글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뭉쳐야 해. 국경을 지킬 필요도 없는 지금, 흩어져 있어서 좋을 게 뭐 있어?”

머독은 부대장들과 어젯밤 상의했던 내용을 부관에게도 들려주었다.

“믿을만한 동료를 찾아갈 거야. 이미 전령도 보내놨어. 일단 살아야지. 그게 답이고 최선이야. 그러려면 뭉쳐야 하고 커져야 해. 그렇다고 어중간한 놈 곁에 있다가 배신당하는 건 피해야지.”

“그렇게 보자면 우리가 어려울 때 여기까지 와서 보급품을 주었던 분이 있죠. 한때 전우였기도 하고요.”

“그래. 네가 기억하는 그 사람이 맞아. 그리고 우리와 같은 꼴이라고 하더군.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원….”

그러면서 머독은 오늘의 타로점을 보기 위해 카드들을 집어 들었다.

그는 은근히 미신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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