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 다시 열리는 턴 테이블
결국, 가이더는 몬스터들에 의해 무너졌다.
처음부터 가망이 없는 전쟁이었다.
그들의 군대는 처음엔 잘 버티는 듯하더니 연전연패했고, 나중에 가서는 국왕이 자진하기에 이르렀다.
국왕은 출전을 피하지 않았지만, 사로잡혀 수치를 당하는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전장 한복판에서 단검으로 자살했다.
그래도 중부와 남쪽의 나라들은,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 가이더가 초반에 잘 버텼다고 놀라워했다.
그 덕분에 밑에 위치한 나라들은 좀 더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가이더 쪽이 아닌 다른 방향의 나라들은, 가이더보다 더 빨리 멸망했다.
그곳의 난민들은 고향을 잃고 이리저리 떠돌게 되었다.
중남부의 나라들은 이들을 수용하는 한편, 전쟁에도 힘써야 하는 괴로운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더 뒤쪽의 나라들이 군대를 모집하고 힘을 받쳐주기 위해 결집하고 있지만, 당장 바람 앞에 등불 신세인 나라들이 적지 않은 형편이다.
“으음….”
코다로는 눈을 감은 상태로 베개에 볼을 비볐다.
흔히 하는 잠꼬대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위쪽을 보았다.
천막의 천이 보인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배 쪽으로 가져다 댔다.
멀쩡했다.
오히려 전보다 울퉁불퉁한 근육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몸에 힘이 철철 넘친다.
벌떡 일어난 그는, 그 후로 1시간 동안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코다로 안의 본능이 이제 그가 더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게다가 그 정체성은 어둠처럼 느껴진다.
이건 받아들이기에 따라 굉장한 고통이 될 수도 있음이다.
그는 몬스터에 맞서 신념까진 아니더라도, 적어도 책임감을 가지고 싸웠다.
그런데 그런 자신이 이제 마물에 가깝다니….
하지만 한 시간 후의 코다로는 머리를 흔들면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미 한번 죽은 몸이다.
그건 뇌가 생생히 기억한다.
이제 와서 머리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기엔, 그가 살아온 날이 만만치 않았다.
그런 건 그가 순수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잠깐, 그가 순수했던 시절이 있긴 있었나?
휘파람을 불며 자신의 곡도를 챙긴 그는 천을 걷고 바깥으로 나왔다.
그러자 바로 햇빛이 그를 반겨 주었다.
움찔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햇빛은 그가 느끼기에 따스했다.
나른한 기분에 그는 하품까지 해야만 했다.
코다로가 누워 있던 커다란 천막 옆으로 급조된 천막들이 줄을 이뤘다.
그리고 천막들은 점점 옆과 앞뒤로 불어나 공터를 가득 뒤덮고 있었다.
창백한 안색의 수많은 사람이 그사이를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다.
그들은 피부만 창백할 뿐, 움직임은 오히려 활기가 넘쳐 보였다.
전과 다른 강한 힘이 몸속을 돌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산한 주변을 살펴보던 코다로는 긴 한숨 소리에 문득 옆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웬 남자가 정말… 말도 안 되게 우울한 얼굴을 하고, 나무판자 위에 앉아 있었다.
정말 세상의 고난과 고통을 다 버무린 표정이었다.
코다로는 이 자리에서 자신의 캔버스가 없는 게 그렇게나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저 표정은 황당함의 극치였으며 고뇌의 끝판이었다.
‘허리에 곡도가 아니라 붓을 차야 했는데.’
‘대체 어떻게 저런 표정이 나올 수 있을까?’하고 바라보니 금방 이해는 갔다.
상대의 옷차림을 보니 신부였다.
그런데 보라.
지금 상태가 언데드에 가까우니… 지금 저치의 심정은 어떤 심정일까?
‘술 마시고 내연녀랑 밤에 같이 잠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장모랑 같이 누워 있는 느낌?’
코다로는 급기야, 신부가 불안 증세를 보이며 다리까지 덜덜 떠는 것을 보았다.
아이고 아무리 그래도 저건 아니지.
‘이 사람아 그만두게. 그러다 진짜로 신에게 버림받겠네.’
못 볼 걸 본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그에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용병대장 중 하나인 재칼이었다.
과거 인연으로 인해 관계가 두터워진 그는 코다로와 자주 말을 섞곤 한다.
“죄송합니다. 이런 노출된 곳에 모셔서.”
“괜찮아. 상황이 여의치 않은데, 눕는 자리까지 따질 수는 없지.”
그가 건네주는 호피 외투를 받아드는데, 갑자기 재칼이 고개를 숙이며 황급히 뒤로 물러나는 것을 보았다.
왜 그런가 하고 반대편을 봤더니, 비비안이 걸어오고 있었다.
코다로는 반사적으로 비비안의 목에 시선이 쏠린 것을 필사적으로 참아내야만 했다.
보면 안 돼.
보면 안 돼.
그건 실례야.
아 천막을 나오자마자 곤란한 상황의 중첩이구나.
“코다로님. 일어나셨습니까?”
“예 보시다시피.”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다시 살아난 사람들도 그렇지만, 죽음을 같이 겪고 깨어난 그들의 유대가 전과 같을 수는 없었다.
엄청나게 견고해졌다.
그것도 그럴 것이 무려 죽음을 공유한 사이니까.
그들은 따르던 사람들이 무참히 죽는 것을 보았고, 자신의 마지막을 기억했다.
그러고 나니 몸과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비비안이 다짜고짜 걷자.
코다로는 옆에서 나란히 걸으면서 그녀의 목 언저리를 힐끔 보았다.
아주 깨끗했다.
오, 감쪽같군.
코다로는 이상한 것에 감탄해 버렸다.
뒷짐을 지고 힐끔힐끔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비비안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되살아난 사람들이 아레이즈에 몰리고 있었으므로 아주 북적댔다.
‘언데드’라고나 할까?
인간이 아닌 몸이 되어 버렸지만, 햇빛 아래에서도 멀쩡했고 식욕도 그대로였다.
그래서 냄비와 냄비 걸이를 들고 움직이는 사람들이 자주 보였다.
그때 갑자기 비비안이 입을 열었다.
주변에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았기에, 음성을 크게 하면서 말이다.
“코다로님. 이렇게 급하게 찾아뵌 까닭은…. 지금 세인 영주님이 건물 안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않고 있어서입니다.”
“음….”
“아무래도 우리가 찾아가 뵈어야 할 거 같아서 말입니다.”
“비비안님.”
“예?”
“저는 이제 세상에서 당신과 세인님을 신뢰합니다. 우린 목숨을 걸고 싸운 동지니까요. 난 당신의 진심을 보았고, 다시 당신의 죽음을 지켜보았습니다.”
“….”
“그래서 이제 당신이 존경받을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최근 깨닫게 된 당신의 훌륭함과는 별개로, 당신에게도 사적인 시간이 필요하겠죠? 저 역시 제 상태가 혼란스러우니까요. 세인 영주님도 그럴 겁니다. 우리가 그의….”
코다로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의 인생에 있어 정말 낯선 단어를 꺼내기 위해서였다.
“…친구라면, 기다려야 할 줄도 알아야만 합니다. 그의 사정도 헤아려야죠.”
비비안은 그러나 고개를 저었다.
“나오지 않은 지 사흘이 넘었습니다. 그분도 힘들겠지만, 이 사람들을 보세요. 이 사람들을 위해 그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우리 영지민을 챙길 수 있을 테지만, 그분의 사람들은요? 그분은 의외로 많이 상심한 것 같아요.”
벌써 사흘이나 되었나.
자신이 그렇게나 오래 누워 있었단 말인가….
그제야 코다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신부도 다리를 떠는 판이니…. 이 판국에 뭐, 사람마다 삭히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겠죠. 그래도 사흘은 좀 걱정스럽긴 하네요.”
그러자 비비안이 참지 못하고 눈을 흘겼다.
의도적이라기보단 본능적인 행동이다.
그 눈빛은 마치 불한당을 보는 것만 같다.
하긴 저급함을 떠나 농담 대상이 한참 잘못되었다.
그럼 그렇지, 사람의 인간성이 어디 가나.
다시 태어나도 마찬가지지.
그런 의미가 내포된 시선을 받으며, 코다로는 정말 억울한 심정이 되었다.
“아니 정말입니다. 제가 봤다고요. 아까 제 옆에 못 보셨어요? 보셨을 텐데? 안 보이셨습니까?”
“그만두세요. 지나칩니다.”
“아니….”
억울한듯 가슴을 쳐대는 코다로를 남겨두고, 비비안은 발놀림을 빨리했다.
상종 못 할 사람.
* * *
세인은 무너진 도서관에 홀로 있었는데, 그가 사흘 동안 무엇을 고뇌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걱정스러운 표정의 마플이 오가며 식사를 가져다주면, 묵묵히 식사할 뿐.
그는 대개의 시간을 멍하니 앉아서 보냈다.
잠도 자지 않는 것 같았다.
도서관 안의 난로는, 도서관 전체를 데우지 못했다.
한쪽이 무너져 내려서 바람이 솔솔 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계속 멍하니 불길을 바라보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코다로와 비비안이었다.
“마침 잘 왔습니다.”
“이게 뭡니까?”
혼자 있고 싶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세인은 의외로 무언가를 둘에게 내밀었다.
그건 바로, 뭔가를 깨알 같은 글씨로 적어 놓은 종이였다.
“제 입으로 이야기하기 부끄러운 치부를 적어 놓았습니다. 이번 일에 대한 설명이 되어 있으니. 그걸 읽고 자의적으로 판단하신 후에 원하신다면 영지민에게….”
그러나 그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시선을 교환한 둘은 그것을 주저하지 않고 난로에 던져 버렸다.
불이 붙는 종이를 보며 드물게 세인의 말이 막혔는데, 그때 비비안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았다.
세인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작고 연약해 보이는 소녀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세인님.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우리를 감싸고 있지만, 그것에 당신이 연관되어 있다 해도…. 지금은 누군가를 탓하는 시기가 아닙니다. 나라가 무너졌습니다. 그건 틀림없을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쨌든 죽은 후 다시 살아났습니다.”
“….”
“당신은 절대 제 충고를 받을만한 사람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번만은 실례를 범하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단결해야 할 때입니다. 제게는 믿을 만한….”
비비안은 아까 코다로처럼 잠시 주저하더니.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잠깐 왜 거기서 눈을 감는 건데…?
그것도.
“코다로님 같은 믿을 만한 친구와.”
하필 그 대목에서.
코다로가 인상을 쓸 때 비비안은 말을 계속했다.
“당신 같은 친구가 필요합니다. 저는 목숨을 걸고 같이 싸워준, 코다로 님이나 당신을 믿으려 합니다. 제게는 당신이 필요해요. 코다로님이 필요해요.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 밑의 사람들에겐 당신이 필요해요.”
세인이 코다로를 바라보자, 코다로가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 원인을 찾을 때도 아니고, 누군가를 탓할 때도 아닙니다. 굳이 따져야만 한다 해도, 난 당신이라면 덮어놓고 용서하겠소. 왜냐면 나와 함께 목숨을 걸고 싸운 친구니까. 당신의 잘못이 아무리 크다 해도, 설마 내 목숨보다 중요한가? 나에게는 전혀 아닌데?”
거기에 비비안이 못을 박았다.
그녀는 한 번도 깜박이지 않는 눈동자로 세인에게 말했다.
“부디 내 곁에 서주세요. 당신의 곁에 나를 친구로 서게 해주세요. 목숨을 걸고 같이 싸워준 내 친구여. 우린 같은 길 위에 서있어야만 해요. 그래야 서로에게 어깨를 빌려줄 수 있을 테니까.”
그날 밤.
세 영주는 공식적으로 영지민 앞에 나섰다.
아레이즈를 중심으로, 이제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의심스러운 존재들이 모이고 있었다.
누가 어떻게 생각하든, 실제로 그러지 않든 그들은 스스로 인간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배척받더라도 그렇게 살아가려 한다.
그런데 그 길에는 구심점들이 필요했다.
목숨을 걸고 자신들을 지켜준 사람.
책임져준 사람.
비비안이 테라스로 나서자 디펜더스의 사람들이 함성을 질렀다.
몬스터들은 근방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 함성은 마음 놓고 채워진 불빛 사이를 빠져나갔다.
디펜더스와 비비안을 연호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들어 올려 보인 소녀가 뒤로 살짝 물러났다.
그리고 다음은 코다로가 나섰다.
용병들이 휘파람을 불고 박수를 치자, 그가 죽다 살아나서 술 실컷 먹었냐는 식의 농담을 던졌다.
그러자 용병들도 귀족이라는 상대 신분을 잠시 망각하고 껄껄 웃었다.
코다로는 노여워하지 않았다.
같이 이를 드러내며 웃어주었을 뿐이다.
그리고 뒤로 물러나며 비비안에게 속삭였다.
“봐요. 저기 보입니까? 저기 서 있죠? 바로 저 신부가 낮에 다리를 떤 신부요.”
그러자 비비안이 영지민을 향해 환하게 웃는 얼굴로, 입만 움직여 짜증을 냈다.
“작작 좀 하세요!”
“….”
마지막은 세인이었다.
그가 나서자 오히려 아레이즈의 사람들은 조용했다.
다른 영지의 사람들은 그 침묵에 당혹해하며 분위기에 눌려 동참했다.
세인은 잠시 가라앉은 눈빛으로 서서 자신의 영지민을 내려다보았다.
그건 영지민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말없이 올려다본다.
무슨 말을 할까?
사실 많은 걸 준비했다.
이제 가라앉은 나라에 대한 애도.
여러 희생에 대한 단상.
결합을 위한 연설.
웅변과 웅변.
또는 속죄?
그러나 세인은 갑자기 그들에게 한 번도 선물해주지 못한 것이 떠올랐다.
밑의 영지민은 두 손을 올려 자신들의 입을 가렸다.
황급히 입을 가리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렇지 않으면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두 손을 마주 잡고 자신의 영주를 올려다보았다.
세인은 억지로 그들을 향해 웃어 보였다.
하얗게 웃어 보이자, 그 웃음은 많은 사람의 가슴을 뒤흔들어 놓았다.
우리가 이제 누구인가는 나중 문제였다.
그것보다 이제 서로 웃어줄 수 있는 사이라는 게 중요하다.
필요에 의해 무서운 영주라고 할지라도… 그건 변치 않는다.
우리는 이제 그런 관계다.
저절로 터져 나오는 흐느낌을 지우려는 듯이, 누군가가 외쳤다.
영주님 만세….
영주님 만세.
그 소리는 물결처럼 퍼져나갔다.
세인은 그 소리를 들으며 어느덧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가장 처음에 외친 인물을 위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아스칼리온이었다.
그렇게 해서 세 사람은 다시 턴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들은 이제 하나의 공동체가 되었고, 앞날을 의논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맥과 윌은 물론 수많은 기사도 뒤에 자리했다.
자신들이 섬기는 사람.
그 든든한 등을 보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