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51화 (51/307)

# 51

& 검은 왕 (6)

오크 두 마리를 순식간에 죽여 버리고, 세인은 굴드 앞에서 다른 오크의 목을 졸랐다.

우드득 거리는 소리와 함께 오크의 목이 부러지자, 축 늘어진 오크의 시체를 짐짝처럼 버렸다.

그리고 그는 오크들이 뒤로 물러선 것을 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그래서 투구를 벗었다가 다시 썼다.

그때 잠시지만 오크들의 눈이 커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찰나지만 오크들은 많이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세인은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보여준 셈이 되었다.

오크들은 어쨌든 상대가 인간이라는 것에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다.

“그래, 이래야 재미있지.”

생각해보면 성안에 가득 찬 오크의 숫자를 볼 때, 처리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면 세인에게도 결코 좋지 않았다.

부활은 이번에 그가 계약의 조건을 내건 딱 한 번이었을 뿐, 마검은 다시 인간을 살려 줄 수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부활한 자들이 오크의 인질이라도 되면?

여기에서 되살아날 사람 중에서는 아주 어린 소녀도 있었다.

세인은 상황을 불리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도발을 했고 그것이 먹힌 것이다.

상황 파악보다는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든 오크들은 무기를 집어 던졌다.

세인은 한쪽 팔을 비스듬히 올려 들었고, 날아든 창이 불똥을 튀기며 그의 요골을 지나갔다. 다른 창의 날카로운 끝이 상완골을 채 지나기 전에 그는 창대를 잡아챘다.

몸을 한 바퀴 돌린 그는 그대로 창을 집어 던졌다.

그러자 바람 소리를 내며 날아간 창이 오크의 몸통에 박혔다.

그 힘에 밀려 몇 차례 뒷걸음질 치던 오크는 뒤로 쓰러져 버렸다.

어느덧 빗발치던 창의 빗줄기는 멈춰있었다.

투창 세례가 멈춘 까닭은, 그런 세인의 뒤로 다가온 굴드가 공격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는 뒤에서 세인의 목을 팔로 휘감았다.

그리고 목뼈를 부러뜨리겠다는 듯 무서운 힘으로 조여왔다.

세인은 뒤로 손을 뻗어 일그러진 굴드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굴드의 얼굴을 잡고 찢었다.

“아아악!”

굴드의 비명과 함께 오크의 얼굴이 짓이겨졌다.

세인은 자신의 머리 위에서 흘러내리는 굴드의 피를 느끼며 웃었다.

현재 그는 마검 오버 더 데스의 힘을 완벽히 다룰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같이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그에게는 전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힘을 느끼게 해주었다.

전까지는 지금 여기 있는 오크들의 사냥감에 불과했다면, 이제는 거꾸로 그가 포식자였다.

세인의 손아귀를 피하려고 굴드가 피 칠갑이 된 머리를 저어댈 때, 그의 팔이 느슨해졌다.

세인은 팔꿈치로 굴드의 복부를 찍어버리고 굽혀지는 그의 상체에 두 손을 올렸다.

굴드의 머리를 붙잡고 앞으로 넘겨 버린 그가 오크의 가슴에 발을 올려놓았다.

가끔 사랑이 초월적인 성향을 띄듯이, 진심도 생명의 종을 떠나 통하기 마련이다.

장애와 장벽을 넘거나, 허무는 마음에서 느낄 수 있는 진심이 존재했다.

그런 진심을 담아 세인은 말했다.

“너희들을 증오하고 증오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 증오하겠다.”

그리고 그의 발이 굴드의 몸체를 뚫고 아래로 들어갔다.

굴드가 그때 지른 비명은 산천초목을 흔들리게 할 정도였다.

주위의 오크들은 굴드의 처참한 모습에 몸을 떨었다.

분명 갑옷 안에 있는 것은 인간인데, 겉모습은 분명 그들이 아는 군단장이었다.

허공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비명은, 세인이 발을 들어 굴드의 머리를 밟아 버리자 뚝 끊겼다.

세인은 적극적으로 도발하는 의미에서 갑옷을 해제했다.

그러자 손에 칠흑과도 같은 검날을 가진 장검이 드러났다.

한눈에 봐도 극도로 불길한 기운을 띄고 있는 물건, 마검 오버 더 데스였다.

세인의 모습을 본 오크들이 무기를 들고 달려왔다.

그들의 발이 지면을 두드릴 때마다 진흙이 튀고 쌓여 있는 시체들이 흔들렸다.

진흙탕물 위에는 둥그런 파문이 번졌다.

하지만 기세 좋게 달려오던 선두의 오크는 그 자세 그대로, 몸을 낮추며 주먹질한 세인에게 얼굴을 맞아 뒤로 반 바퀴를 굴렀다.

피를 입으로 토해내며 쓰러진 오크의 목을 장검이 거꾸로 찍는다.

별다른 저항감 없이 오크의 목을 관통하고 나온 검날에 잠시 피가 맺혔다.

그리고 그 피는 옆으로 휘둘러지는 운동에 의해 허공에 방울로 뿌려졌다.

그 핏방울은 방금 목이 날아간 오크 뒤로 달려온 동료의 얼굴에 촥 하고 뿌려졌다.

그들의 시야를 가린 핏방울 때문에 눈을 깜박인다.

그 깜박이는 찰나, 세상이 잠깐 어둠에 잠겼다가 다시 빛과 함께 드러났다.

세상은 떼구르르 하고 한 바퀴를 굴렀다.

세인이 뒤따라온 오크의 목을 날려버린 것이다.

오크의 머리는 빙글빙글 돌며 진창에 처박혔다.

비웃는 것인지 이를 드러낸 세인은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런 그의 앞에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달려온 오크들이 잔뜩 나타났다.

아직은 시간을 조종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의 도움이 아니어도 마검 자체가 그에게 전달하는 힘이면 충분했다.

스피드와 파워가 무섭게 늘어난 세인은 오히려 힘 조절을 해가며 검을 휘둘렀다.

공기 속에서 마찰한 검날이 무섭게 타오를 때, 오크들의 몸이 조각났다.

그 토막 난 육편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세인이 스쳐 갔다.

상대를 가리지 않는 폭력이 다시 전장으로 변한 성내에 몰아쳤다.

다만 그 주체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영지민의 처참한 죽음을 보상이라도 받아내겠다는 듯이 세인은 폭풍처럼 몰아쳤다.

압도적인 힘으로 오크들을 박살 내고 숨통을 끊어 버리는 그의 모습은 잔인함 그 자체였다.

이럴 때는 좀처럼 후퇴하지 않는 오크들의 습성이 덫이 되어 그들의 발목을 잡게 된다.

공포를 느끼면서도 악착같이 세인에게 달려든 오크들은 비명을 뿌리며 뒤로 날아갔다.

그리고 성벽에 부딪혀 푸들거렸다.

등뼈라도 부러졌는지 꿈틀대던 오크에게 다가간 세인은, 그의 목을 잡고 위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검으로 몸을 찌르고 다시 찔렀다.

그 잔혹한 행위에 붙잡힌 오크가 비명을 지를 때, 마검이 오크의 턱을 뚫고 들어가 정수리 쪽에서 나왔다.

검날이 속을 관통하고 지나간 것을 잠시 감상하던 세인이 번개같이 뒤로 돌며 돌진해온 오크의 목을 날려 버렸다.

그리고 다른 오크들에게 말했다.

“죽어라.”

그 명령에 저항하고 싶다 해도 오크들은 이제 모두 그 뒤를 따를 것이다.

오크들이 뭉개지는 가운데 피구름처럼 파괴가 일어났다.

그 안에서 세인이 웃었다.

*  *  *

그 시각, 세리스는 감금된 거나 마찬가지인 상태로 자신의 방에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예고도 없이 방문이 벌컥 열렸다.

이렇듯 노크도 없이 세리스의 방문을 열 수 있는 자는 정말 몇 명 되지 않았다.

초췌한 안색의 세리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바로 크림힐트였다.

그녀는 세리스 앞에 펼쳐져 있는 책을 보더니 혀를 끌끌 찼다.

세리스는 여제에 대한 책을 읽던 중이었다.

고대의 영웅, 고대의 황제이자 최강의 검사, 최강의 전사.

인간들의 빛이었던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보던 중이다.

고개를 돌리며 말도 하지 않으려는 세리스의 곁에 크림힐트가 앉았다.

그러자 세리스는 바깥쪽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좁은 선실에서 그렇게 떨어져봤자 얼마나 떨어지겠는가?

크림힐트는 은근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그래. 네가 화가 나 있는 것을 나도 잘 안다. 하지만 대체 거기에 남아서 네가 뭘 할 수 있다는 거냐? 네가 거기에 남으면 가문의 어른들은 그저 구경만 할 수 있을까? 네가 남게 되면 여러 목숨이 같이 날아간다는 것을 왜 모르니?”

“….”

“세리스. 넌 네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크림힐트의 말에 세리스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그러나 아직도 입은 열지 않은 상태다.

세리스의 눈빛에 찬 원망을 읽으면서도 크림힐트는 단호하게 말했다.

“고대의 여왕. 그래, 좋지. 그녀는 분명 대단하고 엄청난 인물이었을 거야. 신화 속에서 시대를 주무른 인물 아니더냐? 같은 인간이라면 경외심을 가질 수밖에 없지. 하지만 그녀처럼 산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

“세리스, 착각하지 말아라. 너는 그런 인물이 아니며, 될 수도 없고 닮을 수도 없어. 넌 네가 대의를 위해 사는 것 같니? 무형의 가치를 위해 정말 네 목숨을 버릴 수 있을 것 같니? 천만에, 네 혈관 속에는 나와 닮은 피가 흐르고 있다. 세리스, 너는 전설 속 영웅보단 나에게 가까운 거야.”

처음으로 세리스의 입이 열렸다.

“저는 평생을 수치 속에서 살아갈 거예요. 자기 합리화도 해보겠지만, 그렇다고 제가 고국의 위기 때 몸을 빼낸 배신자라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아요.”

“오 세리스, 세리스. 제발! 네 정체성을 부정하지 말아라. 또 그게 아니더라도 사람은 살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해야 해. 또 그건 아주 기본적이고 정당한 일이다. 누가 너에게 위인처럼 살지 못하면 그 자체로서 죄악이라고 말하든?”

세리스는 크림힐트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모두가 할머니처럼 살지는 않아요.”

그러자 크림힐트가 웃었다.

“너는 너를 잘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래 봐야 네가 너를 알기 시작한 시간은 잠깐뿐이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그런 너의 탄생부터 지금까지 쭉 지켜봐 왔어. 그리고 네가 절대 알 수 없는 모습을 제삼자로서 관찰해 왔지. 네가 잠잘 때도. 평가받을 때도 그래왔어.”

“….”

“역사속의 위인을 생각하지 말아라, 아가야. 여제 같은 인물은 그야말로 꿈같은 존재야. 꿈을 꾸는 건 좋지만, 집착할 필요는 없어. 네 발은 땅을 디디라고 있는 거니까. 난 너를 안다. 세리스, 너는 큰 뜻보다는 작은 하나의 대상에 만족하는 아이야.”

“저는 할머니처럼 속물이 아니에요! 할머니가 제게 무엇을 박탈했는지 아세요? 그리고 제게 무엇을 선물했는지 아세요? 저는 이 죄의식을 버리지 못할 거라고요.”

세리스가 낮게 소리치자, 그 모습이 오히려 마음에 든다는 듯 크림힐트가 웃었다.

“그래. 여자는 아주 예민하고 섬세한 동물이지만, 오히려 종종 그런 자신을 망각하곤 하지. 넌 나중에 분명 나에게 감사하다고 말할 날이 올 거다.”

*  *  *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세계수와 몬스터들이 완전한 한편인 것은 아니었다.

몬스터들은 세계수의 반쪽에 의지하면서도, 나머지 반을 혐오하고 두려워했다.

그들에게 있어 애증의 존재라는 말만큼, 세계수와의 관계를 잘 설명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이런 연유는 인간들에게 잊힌 역사와 관련이 되어 있었다.

세계수 지역의 아주 깊은 곳.

어둡고 무거운 기운이 깔린 심처에는 한 존재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녀가 있는 곳은 습하고 바닥이 끈적거렸다.

그 위를 돌아다니는, 물기에 젖은 뱀이 구불구불하다가 배를 뒤집어 까는 것을 보면 독기도 꽤 있는 것 같았다.

생명체라면 덮어놓고 접근을 꺼리는 곳에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죽일 운명이 멀리에서 잉태되는 것을 느꼈다.

그 탄생이 반갑기도 했고 두렵기도 했으며, 기대가 되면서도 증오스러웠다.

상반되는 감정으로 뒤범벅이 된 세계수는, 눈을 반쯤 감고 침묵을 유지했다.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 속에서 평온을 유지하기 위해 숨을 골랐다.

그녀의 숨결에는 지독한 악취가 뒤섞여 있었다.

만약 여기에 인간이 있었다면, 그녀의 존재를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미쳐버리거나 탈진해 쓰러져 버렸을 것이다.

두렵고 불가사의한 존재가 바로 그녀였으니까.

그때 멀리에서 새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 울음은 인식의 끝에서 맴돌다가 착각이었던 것처럼,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린다.

그 여운을 느끼며 세계수는 눈을 완전히 감고 입을 열었다.

그리고 노래를 부른다.

그녀의 음성은 아주 낮고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위태위태했다.

그 노래 안에는….

별을 헤아리는 밤.

흐린 하늘 아래 머리를 뒤덮는 눈.

광활한 밤 아래 느끼는 감정.

하얀 설원 위에 찍히는 발자국.

공포에 유린당하는 삶들이 있었다.

빗방울처럼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그들은 가슴의 불씨를 지키려 서로 끌어안았다.

피의 계절이 어서 지나가기를 소원했다.

어떻게 해서든 지키고 싶었던 시대 아래.

희망을 품고 싶었던 사람들의 만가(輓歌)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억되지 않는 자가 수면 아래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 노래를 부르는 세계수가 추억하고 싶은 것은 그녀의 형제다.

가파르고 위태롭게 이어지던 그녀의 노래가 끝난 후.

그녀는 깊은 생각에 잠겨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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