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
& 검은 왕 (5)
하늘에서 눈이 펄펄 날린다.
그 하얀 눈은 자신의 색깔로 땅 위를 온통 물들였다.
눈이 부실 정도로 가득 찬 설원 속에서 소년은 홀로 앉아 있었다.
눈으로 덮인 땅 위는 오로지 어둠뿐이었다.
그 어둠이 하얀 설원과 대비되어, 더욱 검고 짙게 존재감을 뿜어냈다.
그의 검은 머리 위에는 하얀 눈이 수북이 쌓였다.
미형의 얼굴에 박힌 검은 눈이 반짝였다.
입술은 보라색으로 질렸고, 곧 파란색이 될 조짐을 보였다.
소년.
세인은 커다란 바위 위에 올라가 있는 상태다.
여긴 어디지?
어디선가….
언젠가….
아니 익숙한 광경이었는데….
어디였지?
그는 언젠가.
이런 곳에 있었고, 꿈속에서도 봤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지쳐있어, 그런 기억을 떠올리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이대로 얼어붙어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간격을 두고 그 휘파람 소리에 화답하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왠지 모르게 익숙하군. 그러나 저 소리는 지금 나의 것이 아니야.’
저 교감은 지금 앉아 있는 세인의 것이 아니다.
그때 그런 그의 생각을 부정하듯이 멀리에서 다가오는 검은 점이 보였다.
그 점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더니 세인의 앞에 다다랐을 때 한 남자의 형상이 되었다.
그는 성큼성큼 세인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시선을 아래로 주었다.
그들은 눈이 펑펑 내리는 어두운 세상에 있었다.
그들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세상.
마치 죽음처럼 정적에 잠겨있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반대로 호의를 베풀지 않는 고독한 세상.
“….”
세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남자의 음성이, 가라앉고 얼어붙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세인을 찾아 얼마나 헤매고 다녔을까?
하지만 미안함 같은 것은 없었다.
반대로 그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 그런데 이 사람은 누구였지?
“….”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자꾸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귀까지 얼어붙은 건가?
모든 걸 떠나, 세인은 솔직히 상대가 귀찮았다.
상대가 자신을 내버려 두었으면 했다.
남자는 세인이 미동조차 하지 않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바위를 타고 올라가 세인의 앞에 섰다.
그때.
그의 목소리가 뚜렷이 들려왔다.
“세인님. 일어나셔야 할 시간입니다.”
“….”
적어도 여기서 일어나는 것만은 스스로 해야 한다.
“일어나셔야 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당신은 일어나야만 합니다.
아무리 괴롭다 해도….
일어나 주세요.
우리를 위해서….
남자의 그림자 속에서 빛이 보였다.
그것은 세인이 생각하기에 남자의 눈빛 같았다.
그 눈빛은 세인을 포용하고 있었다.
그의 실수.
그의 비탄.
그의 모자람.
그의 자책과 죄책감.
울음.
그 모든 것을 끌어안고 있었다.
그리고 믿고 있었다.
- 당신은 기필코 그 좌절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
그 항거불능의 확신에, 세인의 눈가에서 화답이 일어났다.
가슴 아픈 곳에서 새어 나온 피눈물이 주르륵하고 흘러내렸다.
그 두 줄기의 피눈물 사이에서 이가 악물려졌다.
오냐, 내가 너희들을 위해서 일어나마.
얼마든지 일어나 주겠다.
이 모든 것을 감당하고… 책임져 주겠다.
결국, 그는 비틀거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 오듯이 쏟아지는 눈 사이에서 소년은 몸을 일으켰다.
그가 그렇게 허리를 꼿꼿이 세우자, 만족한 듯 앞에 서 있던 남자의 형체가 사라졌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래간만이다, 라이트닝 블러드. 너는 마검 오버 더 데스를 휘둘러야만 한다. 그것이 이 시대가 너에게 부여한 사명이다.”
“넌 누구냐.”
차가운 세인의 목소리에 상대가 잠시 머뭇거렸다.
다시 한번 세인이 묻자 비로소 상대가 대답했다.
“마검의 초자아다.”
가지가지 하는군.
시리즈별로 있다며 비아냥거리고 싶었지만, 세인은 말을 아꼈다.
지금은 길게 대화 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세인에게 자각이 이루어졌다.
갓 태어난 생물일지라도 언젠가,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처럼….
날개를 가진 생물이 깨닫는 무언가처럼, 비슷한 작용이 세인에게도 있었다.
어떤 시인이 나타나 세인의 가슴 속을 바라볼 수 있다면, 가슴 안에 가득 찬 것을 가리켜 운명이라 부를 것이다.
이런 그의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상대는 언젠가 꿈속에서 세인이 들었던 말을 반복했다.
“소원을 말해라.”
“소원?”
“너의 정당한 권리이다. 라이트닝 블러드. 계약에 따라 힘을 휘둘러야 하는 네가 받아야 할 선물이다. 소원을 말해라.”
그 말을 듣고, 결정하여 입으로 토해내는 것은 3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들을 살려내.”
“….”
“그들을 살려다오. 죽었던 그들을 살려줘. 내 앞에, 살아있게 해줘.”
짧은 침묵 후에 오버 더 데스가 말했다.
“부활은 홀리 디스트로이어가 완벽히 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녀는 아무런 대가 없이 그것을 해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파괴와 학살의 상징이다. 내게 어울리는 것을 말해 다오. 누군가를 죽여 달라고 한다면 기꺼이 해주겠다. 나라를 멸망시켜 달라고 한다면 순식간에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다.”
“검이 내 손에 쥐어진다면 그 정도는 나 스스로 할 수 있어. 소원이라며? 소원을 들어준다며? 네 소원이란 것은 고작 조건부였나?”
그의 비아냥 뒤에는 간절함이 숨어 있었다.
그 간절한 호소를 눈치챈 오버 더 데스는 망설이다 대답했다.
“좋다 최선을 다하겠다. 하지만 너도 헛된 생각은 하지 말고, 사명에 따라 네 힘을 휘둘러 다오. 네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라. 그러다 언젠가 갈림길이 나타나면, 사유하고 선택하길 바란다. 그게 바로 나의 바람이다.”
그리고 어둠과 빛이 교차한 공간은 서서히 부서져 나갔다.
세인의 영혼은 그 부서지는 공간 속에서 풀려나 밖으로 나왔고 말이다.
* * *
약속한 존재는 세인의 소원대로 죽은 자에게 다시 생명을 불어넣었다.
거기에는 살리는 자의 자의적인 해석이 곁들여 있었다.
대부분 다시 살아난 자들은 세인과 관계가 깊거나, 몬스터에게 죽임을 당한 자들이었다.
헤매고 있는 영혼들을 불러와, 재가공 된 육신에 쑤셔 넣었다.
그런 부활은 북의 허리띠 지역부터 세인이 사는 지역까지 순차적으로 이루어질 것이었다.
그 첫 수혜자는 머독이었다.
“….”
눈을 깜박인 머독은 자신의 두 손을 폈다 쥐었다 해보았다.
“뭐야?”
살아있는 건가?
그런데 몸이 좀 이상했다.
활력이 넘치는데, 좀… 몸이….
그는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려 보았다.
지나치게 피부가 희었다.
그리고 좀… 좋지 않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살아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어리둥절해 하는 머독이 일어나자, 주변에서 몸을 일으키는 레인저들이 반색했다.
그리고 그 기적은 점점 아래로 내려가 세 영지로 향한다.
재구성한 육체는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지만, 마검의 힘이 작용한지라 더는 평범한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어두운 분위기를 끊임없이 풍겼고, 전보다 미형이 된 외모였다.
그래도 인간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단지, 같은 인간에게 이질감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할 뿐….
과거 세인의 할아버지가 세인을 보고 느꼈던 몬스터에 대한 확신 같은 것이었다.
어둠과 닮은 검은 머리와 눈.
그리고 하얀 눈과 닮은 하얀 피부를 가지고,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은 몸에 흘러넘치는 힘에 의아해하면서도 자신들이 되살아났다는 것에 기뻐했다.
이렇게 퍼지는 기적이 마침표를 찍으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 * *
오랜 시간 존재하면서 자아를 갖게 된 외부의 존재.
마검에 기생하다가 엘릭서와 동화되었던 데스 나이트, 그는 멈춰진 시간 속에서 부활하는 세인을 보았다.
그의 피부는 전보다 훨씬 하얗게 빛났고, 창백하다 못해 괴기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의 눈동자와 머리카락은 이제 암흑의 징표처럼 어둡고 깊었다.
전후 사정을 모르던 데스 나이트는 이 불가사의한 현상에 의아해하면서도 매우 반가워했다.
“그럼 그렇지! 이래야지! 내 염원이 이대로 부서질 수는 없지!”
그때, 소리를 지른 검은 기사의 손을, 세인의 손이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의 하얀 손가락들은 데스 나이트의 팔목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진흙 인형을 쇠 집게로 짓누르는 것처럼….
그리고 놀랍게도 그 행위는 데스 나이트에게 고통을 주었다.
형용할 수 없는 고통.
힘을 섭식하는 고통.
“아아아악!”
데스 나이트가 비명을 지를 때 세인이 그에게 속삭였다.
“계집아이처럼 깜찍하게 비명을 지르는구나, 그래. 그렇게 입을 바보처럼 벌리고 네 절망을 맛봐라.”
세인은 팔을 몸체에서 뜯어냈다.
역겨운 소리와 함께 뜯긴 팔이 바닥을 구른다.
“네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지. 이제 내가 누구처럼 보이냐? 내가 여기에서 네게 왜 이러고 있는 것 같냐?”
그리고 세인은 주저 없이 그를 걷어찼다.
그 발차기 한방에 데스 나이트의 거대한 몸체가 뒤로 날아갔다.
쿵!
연기를 피워 올리며 성벽에 처박힌 그를 향해 세인이 중얼거렸다.
“죽은 자들이 깨어나기 전에 놀아 주마. 어서 일어나라.”
순간 뜯긴 팔에서 뭉클뭉클 피어오른 검은 연기가 줄처럼 세인에게 이어졌다.
그리고 그의 피부를 통해 흡수되었다.
하얀 피부가 일순간 검어졌다가 다시 본래의 색을 되찾는 것은 눈 깜짝할 새다.
쓰러진 데스 나이트는 상황의 반전보다도 당장 고통 앞에서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몸과 영혼이 뜯어 먹히는 느낌은 정말 당해보지 않으면 타인이 알 수 없었다.
세인의 신형이 허공에 선을 그으며 데스 나이트와 충돌했다.
멈춰진 시간에 금이 가며, 흔들릴 정도로 그의 몸짓은 아주 격렬했다.
그는 무자비한 주먹질을 데스 나이트의 몸에 선사했다.
그럴 때마다 검은 갑옷이 부서지면서도 세인의 몸에 연결 고리를 만들었다.
이제 검은 기운은 연기보다 짙은 농도를 가지고, 세인에게 흡수되는 중이다.
세인은 데스 나이트를 움켜쥐고 위로 들어 올렸다.
데스 나이트의 남은 한 손이 무서운 힘으로 세인의 얼굴을 후려쳤지만, 아무런 충격도 주지 못한 것 같았다.
“이걸 원했냐? 실컷 맛봐라. 네가 원하던 바로 그거다.”
그는 데스 나이트의 육체를 하나씩 찢어가며 괴롭혔다.
연기가 고체화되며 물질을 이루자, 손가락으로 얼굴 부분을 뜯어냈다.
데스 나이트의 고통이 메아리칠 때 그가 밝게 웃었다.
그 가학적인 웃음 앞에서 데스 나이트는 애원했고 말이다.
기고만장했던 상대의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만! 제발 그만!”
상대를 해체한 세인은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상대의 정체성을 하나하나 뜯어냈다.
어떤 저항감과 애원이 느껴지더라도, 이건 그의 정당한 권리였다.
오히려 이렇게 노리개가 되기 위해 접근해온 이놈의 저능함이 새삼 우스울 따름이다.
찢어진 조각들이 나뒹굴 때, 재를 흡수하는 자석처럼 세인의 몸이 그것들을 불러들였고.
그럴 때마다 그는 라이트닝 블러드의 권리를 획득해 나갔다.
결국, 마지막에는 그저 원시 생명체 정도의 지성만 남아 있던 데스 나이트의 조각만이….
뭉클뭉클한 하나의 조직만이, 세인의 손에 들렸다.
마치 심장처럼 검고 안쪽에서 붉은 보석처럼 빛나며 맥동하는 그것을, 세인은 주저하지 않고 입안에 넣었다.
그리고 이로 씹었다.
그의 입안에서 터져나갈 듯한 울음소리가 들려 나왔다.
그것을 음미하며 세인은 계속 씹었다.
그의 식도는 주저하지 않고 유린당한 자의 조각난 고통을 받아들였다.
마지막으로 세인은 퉤, 하고 침을 땅에 뱉었다.
상대의 마지막을 모욕하듯이….
그렇게 상대를 끝낸 세인이 움직일 때 사방이 물결쳤다.
그가 걸어가며 바닥에 나뒹군 투구를 들어 올려 머리에 뒤집어쓰자.
멈춰 있던 시간이 부서지며 풀려났다.
그리고 다시 태어난 데스 나이트.
공포를 종처럼 부리며 군림하는 자가 대지 위에 섰다.
오크들의 처지에서 보면 어느 순간 인간이 사라졌고 군단장만이 홀로 서 있는 셈이었다.
그런데 그 군단장은 평소보다 훨씬 사이하고 무서워 보였다.
근육은 물론이고 뼈까지 저릿저릿하게 만드는 살기를 줄기줄기 뿜어내고 있었다.
군단장의 투구에서 붉은빛이 선명하게 뿜어져 나왔다.
그러면서 공기를 달구는 착각을 일으켰다.
굴드는 눈을 가늘게 뜨며, 군단장 주변으로 굴절되는 풍경을 확인했다.
뭐지?
대체 뭐가 저분을 이렇게 화나게 한 거야?
그리고 시선을 아래로 내려, 덜덜 떨리는 자신의 양팔을 바라보았다.
한편 세인의 얼굴은 투구 속에서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인간이 아니었다.
죽음에서 풀려난 후로 인간의 규격을 벗어난 존재가 되었다.
그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그리고 지금부터 깨어나는 사람들은?
그러나 그걸 벌써 생각하기엔 너무나 두려웠다.
지금은… 그냥 움직일 뿐이다.
모두가 깨어나기 전에 끝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말이다.
투구의 붉은 불빛이 요사스럽다 못해 가시처럼 날을 세우며 턱 밑으로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의 등 뒤에서 망토가 죽음의 혓바닥처럼 일렁이며 춤을 추었다.
그 움직임은 살해를 고대하는 몸짓이다.
“기뻐해라. 오늘은 모두가 다시 태어나는 날이다. 그런 생일을 맞아, 나는 너희들을 고통 없이 죽여주겠다.”
악마가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오크들의 두개골을 흔들어 놓았다.
검은 형태가 바람처럼 달려나가며 전방의 오크를 덮쳤다.
고통 없이 죽여주겠다는 약속과는 달리, 폐부를 긁어내리는 듯한 끔찍한 비명이 무너진 성안에 메아리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