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 검은 왕 (4)
데스 나이트는 완전히 세인을 가지고 놀았다.
그러다가 충분히 시간이 지났을 때 그를 놓아주었다.
계속된 구타로 본능만 남은 세인이 피투성이가 된 채 기어갔다.
아레이즈 쪽으로 말이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일어나 절뚝이며 걸었다.
얼굴과 몸은 피투성이가 되어 버린 지 오래였고, 고통 때문에 당장 쓰러져서 기절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영원히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데스 나이트는 그가 쉽게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라이트닝 블러드니까.
그걸 아는 그가 세인의 옆에서 끊임없이 이죽거렸다.
“이 굼벵이 같은 속도로 저기까지 언제 도착할래?”
데스 나이트가 가리킨 성은 지금의 세인에게는 너무나도 멀어 보였다.
그러나 세인에게는 그들의 마지막을 챙겨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런 의지가 결국 그의 발을 계속 움직이게 했다.
가끔 데스 나이트가 발을 걸어 넘어뜨리면 세인은 땅바닥을 굴렀다가 다시 일어났다.
아주 느릿느릿 걸어가는 세인의 옆에서 보폭을 맞추는 데스 나이트는 기다렸다.
세인이 말을 걸어주기를….
적어도 넌 누구냐? 라든가.
왜 이런 짓을 하냐?
원하는 게 뭐지, …등등 있잖은가?
이 상황에 어울리는 말.
하다못해 저주라도 퍼붓거나 성을 낼 줄 알았다.
그러나 세인은 침묵을 유지했다.
그 밋밋한 반응에, 오히려 곁에서 집요하게 괴롭힌 군단장은 김이 빠질 정도였다.
몸이 정상적이었을 때에는 그 짧은 거리가, 오늘의 그에게는 정말 지독히도 먼 여정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
세인은 힘겹게 걷고… 걸어서 결국, 성에 도착했다.
가물가물한 시야에 잡힌 성문부터 엉망이었다.
내려앉은 벽들과 부서진 채로 뒤섞여 있는 성문은 다시는 제구실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아레이즈 성을 불태우는 불길 속에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 불길은 쌓여 있는 시체들을 먹이 삼아 연신 고약한 냄새를 풍겼고 말이다.
오크들은 세인을 발견하고는 달려들려다가 그들의 군단장을 보고는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세인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군단장이 방해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발을 질질 끌며 걸어가는 이 순간이….
세인에게는 태어나서 느끼는 가장 큰 고통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더 지독한 고문은 없었다.
괴물들의 조롱 섞인 눈빛을 받으며, 그는 죄인처럼 걸었다.
부모 앞에 자식들의 시체를 보여주는 것처럼, 영지민의 시체가 가득 쌓아져 있었다.
산처럼 높게 올린 정상에서, 세인을 바라보던 오크가 웃으며 횃불을 시체에 가져다 대었다.
옷가지에 불이 옮겨붙는 것을 보며 세인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세인의 얼굴을 바라본 오크들은 시체 더미 위에서 낮게 웃어댔다.
그 들썩임에 얼굴이 난자된 맥의 시체가… 같이 움직였다.
거기에서 조금 더 떨어진 장소에서는….
달려가다가 흉기에 맞은 듯, 마플의 시체가 조각나 진창에 처박혀 있다.
세인은 수많은 창에 찔려 비스듬히 무릎을 꿇고 있는 시체를 보았다.
코다로의 시체였다.
‘이미 알고 있었잖아.’
그거야 그랬다.
인간들은 다 알고 있었다.
모두가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는 걸 말이다.
부모도.
형제도.
자신도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결코, 기다리진 않는다.
또 안다고 해서 슬픔이 희석되는 것도 아니었다.
머리로 맞이하는 죽음은 제각각이지만, 가슴으로 맞이해야만 하는 죽음은 한가지 대답만을 내놓을 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슬픔이다.
죽어있는 코다로의 부릅뜬 눈이 마치,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세인을 책망하는 것만 같았다.
앞으로 뻗었다가 축 늘어졌을 그의 오른손은 힘없이 무릎 위에 늘어뜨려져 있었다.
그는 죽어서도 바닥에 눕지 못한 채 이렇게 조롱거리로 끝나 버렸다.
성벽 안쪽에 찍힌 무수한 손바닥 자국들이 눈에 들어왔다.
핏자국으로서 무수히 찍힌 그 자국들은 뒤늦게 온 영주를 통렬하게 꾸짖는 것만 같았다.
죽은 자들의 눈물 자국을 산 자에게 대변해주는 것만 같았다.
이들은 얼마나 몸부림쳤을까?
광기 어린 학살에서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애타게 신과 가족을 찾았을까?
얼마나 울고 애원했을까?
살려달라고….
살려달라고 빌고, 웅크리고.
또 몸부림쳤을까?
그러면서 얼마나 짓밟혔을까?
흐느끼는 대신 고통에 마비된 가슴을 안고, 그는 계속 걸었다.
그리고 무참하게 짓밟힌 인간들의 잔해를 지나.
시체 더미 위에 앉아 있는 굴드 앞에 다다랐다.
엄청난 크기의 오크다.
살 떨리는 투기가 전해져, 살갗을 따끔거리게 했다.
정수리에서 시작해 목덜미를 지나 등까지 이어지는 갈기를 뻣뻣하게 세운 굴드는,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앉아 있었다.
그런 그의 앞에는 목이 잘린 소녀의 시체가 놓여 있었는데….
바로 비비안의 시체였다.
그녀의 가슴 위로 비스듬히 찍혀 있는 도끼, 그곳에는 선명한 피가 묻어 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는 몸에서 벗어나 놀이 공처럼 땅바닥 위를 구르고 있었다.
모든 게 악몽처럼 철저했고, 한 줌의 자비 없이 잔학무도했다.
그리고 이게 바로 몬스터의 광기 어린 본성이었다.
이죽거리는 오크의 얼굴을 바라본 세인은 천천히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굴드는 점점 다가오는 군단장을 보고도 미치기라도 했는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굴드는 그럴 수가 없었다.
다른 오크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시간이 멈췄으니까.
세인은 가까이 다가오는 데스 나이트를 보았다.
멈춘 시간 속에서 그의 갑옷이 요사스럽게 빛났다.
이놈은 대체 누구인가?
몬스터들의 왕인가?
그래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인가?
군단장들은 다 이런 힘을 가지고 있는 걸까?
“….”
그동안 당당하게 서 있던 나날들이 다 거짓말이었던가.
무너져 내린 검은 성의 형체가, 다가오는 데스 나이트의 배경이 되었다.
“어떠냐? 라이트닝 블러드. 네 고통과 절망을 맛본 느낌이.”
데스 나이트는 오늘 라이트닝 블러드라는 말만 한 수십번은 했을 것이다.
그가 생각하기로, 이 정도쯤 되면 세인도 장단에 맞춰줘야만 했다.
그리고 분노를 토해내야만 했다.
그리고 그게 바로 데스 나이트의 계획이었다.
그는 세인이 분노하고, 다시 분노하다가. 결국, 역류한 절망과 원한을 세상에게 토해내길 바랐다.
그게 바로 지금 데스 나이트가 세인을 도발하는 이유였다.
그러나 피범벅이 된 얼굴로 세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사라지는 신기루가 아니라, 현실은 참혹했다.
시체 위에 서 있는 오크들은 특히, 어떻게 하면 다양하고 잔인하게 인간을 죽일 수 있을까를 연구하는 놈들 같았다.
그런 오크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숨결이 느껴질 만큼 검은 기사가 가까이 접근했다.
그의 뻗어진 검은 손이 세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앞뒤로 흔든다.
그 힘 때문에 세인의 머리는 인형처럼 맥없이 앞뒤로 흔들렸다.
“물어봐라, 라이트닝 블러드. 네가 뭔지. 내가 누군지. 어서 물어봐라. 왜 네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물어보란 말이야. 난 아까부터 이 순간을 재촉해 왔다. 그런데 너는 벙어리처럼 구는구나. 어서 입을 열고 내가 원하는 것을 토해 내 다오. 내가 원하는 공포와 멸망의 열쇠를 내놔. 그리고 네가 패자임을 인정해.”
그러면서 데스 나이트의 다른 손이 자신의 투구를 잡았다.
우두둑, 하는 소리가 나며 이음새가 비명을 질렀다.
잠깐 버티려고 하던 이음새는 서로 떨어져 나가며, 참으로 오랜만에 안을 노출했다.
데스 나이트는 투구를 천천히 위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힘껏 뒤로 던져 버렸다.
거친 쇳소리가 나며 검은 투구가 바닥에 뒹군다.
세인은 투구를 벗은 데스 나이트를 바라보았다.
투구를 벗어 던진 가슴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희미한 검은 연기만이 일렁일 뿐이다.
처음부터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데스 나이트는 세인의 무표정에 짜증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전의 머독도 그렇지만, 눈앞의 세인도 그의 행동에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정말 이놈들은 유머 감각이 없군.
여기에서 지금 나만 이렇게 신나 있는 거야?
이제는 없던 죄책감까지 생길 지경이다.
이 정도까지 애를 써줬으면 예의상 놀라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데스 나이트가 뭔가 더 말하려 할 때… 세인의 입이 열렸다.
“다행이다.”
“뭐?”
세인은 허리 쪽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시퍼렇게 날이 선 단검이다.
데스 나이트는 가소롭다는 듯이 그것을 바라보았다.
저것 가지고는 자신의 몸에 생채기도 내지 못할 테니까.
그때 세인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모두의 죽음을 지켜보고 죽는다.’
가장 먼저 전장에 달려나갈 것이며.
가장 늦게 죽겠다는 그의 맹세… 가 지켜졌다.
이제 남은 것은 모두의 고통을 끌어안고 종결하는 일뿐이었다.
세인은 자신의 목에 단검을 박아 넣었다.
전혀 주저하지 않고 마치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처럼, 너무나도 당연하게 이루어진 행동이었다.
당하는 쪽에서는 능청스럽다고나 할까?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앗! 하고 경악성을 터트릴 시간도 없었다.
데스 나이트는 어이가 없어서 그를 말리지도 못했다.
운명이란 게 있다.
신이 부여한 사명이란 게 있다.
그러니까 세인은 절대 죽지 않는다.
죽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데스 나이트를 비웃기라도 하듯, 검붉은 피가 울컥울컥 흘러내리며 세인의 옷을 적셨다.
말라가던 피로 인해 진흙탕을 뒤집어쓴 듯 물들던 옷에, 다시 뜨거운 피가 쏟아졌다.
“미쳤어? 이게 가능해? 이게 가능하다고? 이봐!”
기겁한 데스 나이트가 다른 손을 뻗어 세인의 목을 막았다.
마치 구멍이 난 물통을 막는 것처럼.
그의 힘에 세인의 몸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따질 필요도 없었고 절규할 필요도 없었다.
이런 끝은 오래전에 예상했었다.
이제 와 저항하고 싸워서 뭐할 것인가?
그의 소중한 것은 모두 사라져 버렸는데….
그를 지탱하고 집착하게 했던 것이 사라진 지금.
아무것도 의미가 없었다.
그의 분노마저도.
결국, 피를 흘리던 세인은 죽음을 맞이했다.
데스 나이트가 보기에 너무나도 허무하게 말이다.
데스 나이트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소리를 질렀다.
“안돼! 안돼에에에!!”
엘릭서.
마검, 오버 더 데스.
세계를 증오하며 파괴와 피로 물들이길 원하는 존재.
검은 갑옷으로 변해 있던 엘릭서는, 세인의 시체를 안고 울부짖었다.
“이건 불가능해! 불가능하다고!”
스몰 드래곤과 빅.
현명한 자는 술래의 가장 가까이 숨는다.
그리고 원하는 바를 취한다.
그가 원했던 것은 어둠의 세력 가까이에 달라붙어 피를 탐하면서도, 라이트닝 블러드를 찾는 것이었다.
어둠의 세력이 자신을 완전히 발견하게 되어, 그들의 도구가 될 생각은 없었다.
그의 바람은 라이트닝 블러드와 결합해, 완전한 힘으로 세상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남에게 종으로서 쓰이는 게 아니라, 파괴의 주체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누리고 싶은 것만 적절하게 누렸다.
자신을 찾으려는 술래와 한편인 척하며 그들을 농락했다.
문제는 훗날 라이트닝 블러드와 결합한다면….
그가 그 힘의 주인이 되는 게 아니라 거꾸로 종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마검에 들러붙은 임시 인격 같은 존재지.
결코, 마검을 휘두르는 주체가 될 수 없었다.
엘릭서와 동화되었기에, 한 몸인 동시에 엘릭서의 일부분에 불과했다.
과거 피와 살육을 즐기던 그는 한가지 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안에서 라이트닝 블러드가 중립이거나 선하다면, 도리어 이쪽에서 악으로 물들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악의 손길로 파멸을 유도하자고 생각했다.
라이트닝 블러드가 절망에 물들어 무제한의 증오를 쏟아내는 상태가 된다면….
광기에 가득 찬 그와 결합하여 통제권을 빼앗고, 세상을 뒤흔들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인간은 상황과 환경에 쉽게 조종당하니까.
그건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드디어 라이트닝 블러드를 찾아냈을 때 그는 환희에 몸을 떨었다.
그런데 도리어 상대가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데스 나이트.
군단장이자 마검인 오버 더 데스는, 덜덜 떨리는 손을 세인의 얼굴에 가져다 대며 울부짖었다.
“이럴 수 없어! 이건 불가능해! 네 사명은!”
검은 연기가 갑옷에서 미친 듯이 쏟아지며 사방을 뒤흔들어 놓았다.
뼈저린 절망을 주려 했던 자는 반대로 나락보다도 깊게 절망하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