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48화 (48/307)

# 48

& 검은 왕 (3)

아레이즈 쪽으로 향하고 있던 군단장은 부하가 보낸 전갈을 받았다.

그리곤 세인이 있는 쪽으로 이동해 왔다.

그는 골드 힐을 빠져나가는 코다로에겐 신경도 쓰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군단장의 관심사는 오로지 세인이었다.

“잘 버티고 있군. 어떤 희생을 치러도 상관없으니 야금야금 힘을 빼면서 몰아라.”

그의 명령을 이해하지 못한 부하는 무심코 질문을 던졌다가, 머리가 박살 나서 죽었다.

그 시체 앞에서 군단장은 으르렁거렸다.

“잔말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해. 그렇지 않으면 다 죽여 버리겠다.”

군단장이 부하들을 시켜 포위망을 일부러 느슨하게 만드니, 세인은 고민이 되었다.

더 시간을 끌어야 할까?

그러나 이렇게 퇴로가 열렸는데….

억지로 여기를 고집한다면 바로 사지가 될 것이었다.

“….”

결국, 그는 천천히 아레이즈로 후퇴하는 길을 택했다.

적들은 서두르지 않고 그런 세인을 따라오며 몇번의 전투를 벌였다.

세인으로서는 당연히 적의 속내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들과 몬스터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적이었는데, 상대가 그것 외에 다른 의도가 있는 것처럼 굴어대니 종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군단장은 손가락으로 지도를 일일이 짚어가며 모든 상황을 조율했다.

그 모습을 보면 군단장은 매우 흥분해 있는 것처럼 보였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런데 이 순간만을 고대해 왔던 군단장 입장에서는 자기 자신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어쩌면 평정심을 잃고 본색이 드러난 것이었다.

드디어 보물이 손안에 쥐어지려는 순간이었고….

이 순간 그와 세인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는 너무 기뻐했다.

여기는 그만의 극장 안이었고, 막은 그의 지휘 아래 훌륭히 올라가고 있었다.

이제 모든 게 그의 뜻대로 이루어질 일만 남은 것이다.

*  *  *

바다 위로 커다란 배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수로의 장점은 자고 있어도 이동하며, 지형지물과 고저의 장애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태풍 같은 복병을 만나면 심히 고약해 지지만, 그건 자연의 이치라 어쩔 수 없었다.

육로보다 빠르긴 한데, 크림힐트 후작은 뱃멀미가 심했다.

지금은 죽고 없는 유모의 증언이 있었듯, 그녀는 아기 때부터 누가 잡고 흔드는 건 질색이었다.

“우웩! 우웩!”

“어머니! 괜찮으십니까?”

“이거 놔라! 아이고 내 팔자야. 조국이 망한 것도 모자라 손녀년 때문에 이게 무슨 낭패냐!”

자식들이 몰려들어 그녀를 부축했지만, 크림힐트 후작은 그걸 뿌리치며 역정을 냈다.

그의 손녀인 세리스는 자꾸 고국에 남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영지에 동료를 두고 왔어요. 그리고 조국이 위태로운 상태입니다. 제가 남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가족들의 선택을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제 선택도 존중해 주십시오.”

당연히 크림힐트는 평소 세리스의 성품이 그러니, 당연히 이렇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이건 성인이라고 해서 놓아둘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죽고 사는 문제였다.

그래서 가주로서 강제령을 내렸다.

반지의 권위를 앞세워 그녀를 강제하고 포박하게 했다.

물리적으로 그걸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해도, 그런 명령에 정면으로 대치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면 가주의 권위가 깨지니까.

그렇게 크림힐트는 시간을 벌었다.

크림힐트는 가족을 불러 세리스가 딴짓 못 하게끔 감시하게 했다.

그것도 모자라 도망갈까 봐 이렇게 배로 이동하는 것이다.

크림힐트는 계속 감금실에 갇혀있는 세리스를 욕했다.

하늘이 빙빙 돌았기 때문이다.

자식들이 계속 어찌할 줄 모르는 가운데, 그녀는 비틀거리며 걷다가 천리안 옆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말했다.

“자네는 멀미 하나 안 하는군. 누가 보면 뱃사람인 줄 알겠어.”

천리안은 끝없이 펼쳐져 있는 푸른색 수평선만을 보고 있을 뿐이다.

그런 그의 옆에서 크림힐트가 투덜거렸다.

“좀 미리 알려주지 그랬나.”

“물어보지 않았으니까.”

“융통성 없기는.”

생각해 보면 언제나 나라가 위기 상황이었는데도 크림힐트는 가문의 이익만을 물어보았다.

그걸로 매달마다 소중한 기회를 썼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세리스가 가문의 은인이긴 하지, 그 애의 질문 때문에 우리가 살아날 수 있었으니까. 하긴 착하던 애가 강짜를 부렸을 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어. 기특한 애이긴 한데….’

크림힐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쓴 입맛을 다셨다.

천리안은 그런 그녀의 옆에서 물었다.

“소원이 뭔가?”

“뭐?”

“들은 그대로네. 이렇게 생존을 추구할 정도면, 구체적인 소원을 가지고 살아갈 것 아닌가? 설마 소원이 없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소원 하나 정도는 안고 살지. 그 수가 적냐, 많냐일 뿐.”

“당신 손녀도 소원이 있겠지. 그 소원은 아주 간절할 거야.”

크림힐트는 지금 그의 말을 듣고, 세리스의 소원이 고국에 남고 싶은 것이라 알아들었다.

“간절하다고 다 이루어지면 그게 소원인가? 소원은 꿈과 비슷한 거야. 극소수만 그걸 이루지. 100개의 소원이 있다면 1개 이루기도 벅차.”

“만약 당신이 100개의 소원과 1개의 소원 중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면 어떤 걸 선택할 건가?”

크림힐트는 투덜거렸다.

“산수 못해? 당연히 100개지.”

천리안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그렇군. 내 소원은 고통 없이 죽는 거라네.”

안물어 봤는데?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린 크림힐트의 옆에서 천리안은 생각했다.

세리스.

100개의 태산 같은 소원과 깃털 같은 소원 하나 중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선택할 테냐?

*  *  *

세인은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땀에 젖어 있었다.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한 그는 고개를 든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벌판이었고, 병사들은 몬스터의 추격으로 인해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다. 그래도 귀환의 막바지에 이르러 있었으므로 검은 기사의 등 뒤로 아레이즈 성이 보였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어마어마했다.

등 뒤의 검은 망토가 역류하며 하늘로 치솟는다.

힘이 유형화가 되었는지, 망토 위쪽에 아지랑이가 생겨나며 성의 모습이 일그러졌다.

“오 나의 라이트닝 블러드.”

“네가 나를 여기로 유도 한 거냐? 넌 대체….”

누구냐, 라고 물으려던 세인은 자신의 착오를 깨달았다.

바보같이.

지금 적에게 답을 기대하고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데스 나이트는 친절하게도 바로 시인해주었다.

“그래 내가 너를 이곳으로 끌어들였다. 신경이 많이 소모되었지만 상관없어. 봐라, 그 증거로 네가 이렇게 내 앞에 있잖나.”

그리고서 그는 크게 웃었다.

아주 기분이 좋다는 듯이 말이다.

그 모습은 나르시시즘에 도취한 정신병자를 떠올리게 했다.

그런 기사 앞에서 세인은 뒤로 잠깐 물러났다.

지금은 상황 파악보다 성이 먼저였다.

그가 앞으로 달려가며 검을 휘두르자.

엄청난 소리가 나고, 기사의 투구가 약간 비스듬히 기울었다.

강력한 일격을 그냥 얼굴로 받아낸 것이다.

“칭찬해 주마.”

그의 손이 세인의 검을 잡아가는데, 손가락들이 독사처럼 움직였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검날이 부러져 버렸다.

부서지며 반짝이는 쇳조각을 받아낸 검은 기사의 몸이 세인을 향해 다가간다.

그의 발차기에 복부를 정통으로 맞은 세인은 뒤로 굴렀다.

“크윽.”

말도 안 되는 힘이었다.

눈 트롤이 여기에 있었다 해도 박살 나서 사방으로 흩어졌을 것이다.

물론, 데스 나이트는 세인이 충분히 견뎌낼 줄 알고 이런 일격을 선사한 것이었다.

“미안하다. 고통을 주고 싶지는 않지만 너를 여기에 붙잡아 놔야만 해서 말이다.”

“….”

그의 말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은 세인이 황급히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리고 눈이 묻어나는 그의 얼굴이 경직된다.

아무래도 아레이즈 쪽이 심상치 않았다.

*  *  *

“활 따위를 들지 마라. 그럴 필요도 없다. 수치스럽게 단검 따위를 들지도 마라. 길이가 아깝다.”

오크, 굴드는 외눈을 번쩍이며 성질을 못 이긴 듯 자신의 가슴을 팡팡 쳐댔다.

건틀릿과 흉갑이 맞부딪히며 번쩍번쩍 거린다.

그의 앞에는 엄청난 크기의 오크들이 늘어서 있는 상태였다.

그들은 피에 굶주려 있었고 흉포하기 그지없었다.

일반 오크와는 다르다.

이들은 고통의 용광로에서 녹여낸 역작이다.

그야말로 그 무서운 마법 생물에 가까운 것이다.

“포로 따위를 생각하지 마라. 배를 채우지도 마라. 죽이고 죽인다. 뒤에 거슬리는 것들을 남겨 놓기엔…!”

굴드는 자신의 머리를 양손으로 마구 쳤다.

아 아, 흥이 솟구친다.

지금 이 순간이 즐겁다.

“우리의 갈 길이 멀다!”

오크들이 무기들을 들어 올리며 함성을 질렀다.

그 함성은 먼 곳에 있는 데스 나이트와 세인에게도 들릴 정도였다.

아레이즈 성의 지붕이 들썩일 정도였고 말이다.

마법 생물이란 얼마나 강한 놈들인가.

그런데 이 오크들은 그런 상태에 도달하기 직전이었다.

땅을 박차고 달려나가는 그들의 뒤로 흙먼지가 일어났다.

눈덩이들이 패이고 드러난 검은 흙이 터져나갔다.

쿵쿵쿵쿵!

쿵쿵쿵쿵쿵!

땅이 울리는 가운데 날아온 화살들이 그들의 몸을 맞혔다.

그러자 오크 중 한 놈이 씩씩거리며 웃었다.

손으로 얼굴만 가린다면, 그들은 화살에서 무적이었다.

마법 갑옷은 괜히 걸쳤겠는가?

굴드가 가장 선두에서 도끼를 휘둘렀다.

바람 소리는 낸 도끼가 그대로 비스듬히 성문을 찍었다.

믿을 수 없게도 성문이 뒤흔들린다.

나머지 오크들은 같이 성문에 붙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런 굴드의 뒤쪽에서 주춤거리며 거리를 유지했다.

굴드는 함성을 지르며 마구 도끼를 휘둘렀다.

두꺼운 나뭇조각들이 그의 몸을 쉴새 없이 때렸다.

파편들이 그의 몸에 맞고 옆으로 튕겨져 나갔다.

엄청난 힘이 성문을 때리고 있었다.

그 순간에도 빗발치듯 쏟아지는 화살들은 그들에게 있어 허구 같았다.

전혀 타격을 주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외눈을 반짝이던 굴드가 힘껏 풀 스윙하듯 도끼를 휘둘렀을 때, 성문에 균열이 일어났다.

가슴을 탕탕 친 굴드는 그대로 앞으로 돌진했다.

퍽, 퍼퍽!

쾅!

그 무식함에 성문 아래쪽이 박살 나며 오크를 통과시켰다.

나머지 오크들은 그때야 함성을 지르며 뒤따라 간다.

그들의 눈으로 긴장한 빛이 역력한 사람들이 보였다.

코다로가 멀리에서 뛰어나오고, 아레이즈 성의 수비 병력이 몰려왔다.

그러나 이들은 마법 생물에 가깝다.

애초에 이건 상대가 되는 전투가 아닌 것이다.

게다가 숫자도 한둘이 아니다.

굴드의 근처에 있던 오크가 성벽에 너무 가까이 붙은 바람에 위에서 펄펄 끓는 기름 물을 제대로 맞았다. 그 오크는 김만 모락모락 날 뿐, 아무 탈 없이 숨을 들이쉬고 있었다.

오히려 망치로 벽을 후려친 그 오크는 비명과 함께 떨어진 병사를 발로 걷어차 버렸다.

그러자 성벽에 핏자국이 크게 났다.

크게 웃은 굴드는 두툼한 손가락을 입에 대고 휘파람을 불었다.

무너져 내리는 성문 뒤쪽에서 수많은 오크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제히 가슴을 치며 걸어오는 오크들.

그들이 발하는 살기로 인해, 사람들의 안색이 파리하게 변해갔다.

“약한 놈들을 괴롭히고 기고만장했나? 진짜를 맛봐라.”

그리고 굴드와 오크들은 인간들에게 달려들었다.

세인은 아레이즈의 성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데스 나이트는 무기도 쓰지 않았다.

단지 세인의 검을 박살 내고는 육박전으로만 그를 상대했다. 그런데 힘과 속도, 모든 게 압도적이었다.

마치 신화 속의 전사가 뛰쳐나온 것만 같았다.

마기라고 표현하면 어울릴까?

이제 한껏 흥을 내는 그의 몸에서는, 어두운 기운이 가시화되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라이트닝 블러드! 넌 내 것이다!”

그리고 그는 미친 듯이 웃으며 세인을 농락했다.

바위 정도는 우습게 으깨어 버리는 펀치가 소나기처럼 세인의 등에 작렬했다.

그리고 무릎으로 세인을 올려쳐 띄운 데스 나이트는 어퍼컷을 그의 복부에 먹였다.

날아가는 세인의 몸을, 그의 망토가 마치 살아있는 생물의 손처럼 움켜쥐고 땅에 메다꽂아 버린다.

그가 특별한 인간이 아니었으면 진작에 핏물로 변해 사라졌을 것이다.

데스 나이트가 한발자국, 한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지옥 같은 압력이 몰아쳤다.

그가 움직이며 내는 힘의 흐름은 그야말로 끔찍했다.

전사와 아이가 벌이는 싸움처럼 격차가 났다.

얼굴이 피범벅이 된 세인은 일어나려 애를 썼다.

그는 지금 육신에서 느껴지는 고통보다 아레이즈의 상황이 너무나 걱정되었다.

늦기 전에 달려가야만 하는데, 데스 나이트는 그를 가지고 놀며 시간을 지연시키고 있었다. 대체 목적이 뭔가?

그의 그런 생각은 다시 시작되는 일격과 이격에 산산이 조각나버렸다.

“라이트닝 블러드, 넌 나의 것이다! 나만의 것이다!”

이 미친놈은 모든 상황을 일방적으로 끌어갔고, 특히 앵무새가 따로 없었다.

같은 이야기를 몇 번이고 계속한다.

“으아악!”

악을 쓰며 달려나간 세인의 얼굴을 능숙한 몸짓으로 데스 나이트가 후려쳤다.

그리고 휘청이는 세인의 몸에 가벼운 펀치가 몇 대 더 선사됐다.

그 가벼움이란 철판도 우그러뜨리는 힘이었다.

그리고 휘청이는 세인의 멱살을 잡고 위로 들어 올렸다.

피를 비 오듯이 쏟으며 헐떡이는 세인에게 데스 나이트가 짓궂게 말했다.

“시간이 다 되어 간다. 째깍째깍.”

한쪽 눈이 부어올라 제대로 뜰 수 없는 상황에서도 세인은 나머지 눈으로 아레이즈의 성을 확인했다.

검은 연기가… 더 많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위험하다.

저건 진짜 위험하다.

가질 수 있다면 지금이야말로 괴물 같은 힘이 필요할 때였다.

한때나마 의문을 접어두었던 그의 근원이 필요할 때였다.

데스 나이트의 다른 손이 세인의 입가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검은 엄지가 움직였다.

스윽하고 세인의 얼굴을 닦아내자, 맺힌 피가 뭉개지며 눈가에 묻어난다.

데스 나이트는 그의 투구를 세인에게 바싹 붙이며 속삭였다.

“이봐. 빅과 스몰 드래곤의 이야기를 알아?”

무슨 소리야. 이 미친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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