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 검은 왕 (2)
“주인님. 약속해 주십시오.”
코다로는 침대 앞에 앉아 있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은 그의 집사였다.
땀 범벅인 집사가 손을 내밀자, 코다로는 그 손을 잡았다.
“뭐지? 말해 봐라.”
연로한 집사는 나이도 잊은 채 용병들을 거든답시고 돌아다니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
코다로는 집사의 상태에 관해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정도면 편안한 죽음이다.
적어도 침대 위에서 죽지 않는가?
“어차피 틀렸습니다. 그리고 이 정도면 최선을 다하신 겁니다. 지금도 제가 맡고 있는 냄새도 목전의 죽음 냄새가 아닌, 주인님의 피 냄새입니다. 이제 뒤로 물러나 영주답게 최후에 죽음을 맞이한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난 또 뭐라고… 알겠다.”
“주인님 성정을 아니 의자 위에서 독약으로 마무리해야 한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영주의 최후에 맞는 모습이 되어 주십시오. 이 늙은이의 마지막 부탁입니다.”
“알겠다고. 이제 한계라고 느끼는 중이었어. 마지막까지 이렇게 잔소리를 할 건가? 약속하겠다. 약속한다고.”
집사는 침대 위에서 코다로를 바라보았다.
눈을 깜박이는 시간조차 아까운 듯이 말이다.
그러다가… 결국 눈을 감지 못했다.
그렇게 굳어져 있는 그를 코다로는 한참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손가락으로 노인의 눈을 감겨준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커튼이 나부끼는 창문 밖에서 들려오는 고함이 꼬리를 물며 길게 이어졌다.
코다로는 그 소리를 들으며 허리에 찬 검의 손잡이를 매만지고 있었다.
그리고 돌아섰다.
문을 열고 나가니 복도는 난장판이다.
걸어가는 그의 발에 굴러다니는 집기들이 채였다.
근처에 있던 용병 대장이 코다로를 발견하고 다가오자 코다로가 말했다.
“여기를 불로 태워라.”
“이곳을요?”
“어차피 여긴 틀렸어. 시체를 이대로 두면 몬스터들의 희롱 감이 될 테니. 그건 곤란해.”
그게 바로 코다로가 집사를 위해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자신의 방으로 가서 대야에 담긴 물로 세수를 한 그는, 거울 속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농담처럼 중얼거렸다.
“역시 잘 생겼어.”
턱을 내밀고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죽기에는 아까운 얼굴이야.”
하지만 할 수 없었다.
그는 골드 힐의 영주였다.
집사에게는 미안하지만, 최후에 죽는 자가 될 수는 없었다.
코다로가 생각하기에 그건 나이든 늙은이들이 하는 일이다.
자신은 젊었고, 죽는다면 불꽃처럼 끝을 장식하고 싶었다.
그가 방에서 나와 뜰을 가로지르자, 용병들은 본채에 불을 질렀다.
그때 피어오른 연기의 꼬리가 하늘 높이 길게 이어졌다.
그걸 본 코다로는 어쩌면 이걸 보고 세인이 와줄 수도 있다는 기대를 하지 않았는지 자문해 보았다.
그러나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일이다.
그는 병사는 물론 용병들이 올려다보는 곳으로 걸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였다.
그리고 말했다.
“그대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은 단 하나다.”
“….”
“여기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언젠가 뒤따라올 가족들과 합류하는 길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물리적으로 회향은 불가능하다. 다만 나는 너희들의 죽음 뒤에 숨지 않겠다.”
그리고서 약간 뜸을 들인 후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이게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렇다는 말이다.”
그리고서 코다로는 쌍검을 소리 나게 뽑고, 앞으로 걸었다.
그가 그렇게 선두에 서자 무장한 사람들이 뒤를 따랐다.
장기간 이어진 전투는 주변을 황폐화한 지 오래였다.
나무들은 불타고, 깊이 파놓은 함정에는 이미 죽은 오크들이 손님으로 들어가 있었다.
골드 힐의 주변은 그야말로 오크 시체들로 가득했다.
하늘 위에는 까마귀들이 잔뜩 몰려와 군침을 다시고 있는 듯했다.
그들이 땅으로 내려오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
지상은 아직도 전투 중이기 때문이다.
오크들이 탄 짐승들은 동족의 시체를 밟고 달렸다.
그들의 흥분한 눈동자 속에서 성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고삐를 한 손으로 쥔 오크들은, 뭐가 그리도 기쁜지 소리를 지르며 다른 손에 든 무기를 붕붕 돌렸다.
그들의 선두 쪽이 쓰러져 있는 나무를 타고 넘었을 때였다.
아래쪽에서 두 개의 빛살이 현란하게 움직이며, 오크가 탄 짐승의 몸체를 갈랐다.
뜨거운 피와 비명.
그리고 흩날리는 거친 털들 사이에서 코다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짐승을 해치운 데 만족하지 않고,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오크를 향해 다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오크의 가슴받이에 코다로의 몸이 부딪혔다.
그러면서 서로의 팔이 잠시 얽히는가 싶더니, 핏줄기가 코다로의 얼굴의 반을 적셨다.
물론, 오크의 몸은 이미 조각난 후였다.
뒤에서 용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오는 오크들과 마주 설 때 코다로가 말했다.
“죽고자 하는 자는 필히 죽는다. 살고자 하는 자도 죽는다.”
어차피 죽는다는 소리다.
“하지만 우리만 죽어서야 곤란하지. 최대한 많이 데리고 가겠다. 내 죽음에 동참해라.”
코다로는 앞으로 홀로 뛰쳐나가며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그 기세도 기세지만, 신들린 듯한 빛의 궤적에 오크들이 목과 팔을 잡고 쓰러졌다.
뒤에서 안 되겠다 싶었는지, 전차에 타고 있던 오크가 뭐라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코다로의 앞쪽에서 오크들이 커다란 방패를 앞으로 들이밀었다.
일단 돌진을 저지하고, 경직된 코다로를 때려죽일 심산인 것 같았다.
그러나 코다로는 훌쩍 뛰어올라 방패를 밟고 다시 도약했다.
후욱, 후욱.
코다로는 자신의 거친 숨결을 느끼며 공중에서 잠시 세상이 멈춰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힐끔 하고 발밑을 보니, 오크들의 크게 뜨여진 눈이 자신을 쫓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이 자신의 그림자로 반쯤 가려진 것을 보고 있는 그 순간.
쿵!
“으윽!”
그의 몸이 거칠게 땅바닥을 굴렀다.
보다 못한 전차 위의 우두머리가 자신의 원형 방패를 던져 코다로를 맞춘 것이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코다로의 왼팔은 부러져서 맥없이 덜렁거렸다.
그러나 지금은 왼팔을 신경 쓸 시간도 부족했다.
오크들이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전차 위의 우두머리는 코다로를 잡아 죽이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최우선으로 리더를 잡으면 인간들이 와해할 거라고 믿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인간들은 이미 지휘자가 있건 없건 죽음을 각오한 상태였다.
사방에서 개싸움이 벌어졌다.
인간과 몬스터가 서로에게 이를 드러내며 죽이기 위해 달려드는 흉험한 싸움이었다.
해를 가리는 거대한 검은 덩치들 사이로 부서지는 햇빛이 코다로의 눈을 아찔하게 했다.
그 덩치 중 하나가 코다로의 왼팔을 집요하게 노렸다.
“으으윽!”
오크의 손이 왼팔을 움켜쥐자, 코다로는 신음을 악물며 검을 휘둘렀다.
그 칼부림에 적들이 분분히 물러서자, 코다로는 앞으로 달려가 오크의 가슴을 걷어찼다.
발에 챈 오크가 꽤액 소리를 내며 뒤로 쓰러지고, 걷어찬 반동으로 코다로는 뒤로 몇 바퀴나 굴렀다.
다시 일어났을 때는 온통 진흙투성이였다.
몸을 일으키자마자 코다로는 날아오는 장창을 보았다.
그는 반사적으로 왼손을 움직이려 하다가 멈칫했다.
잠깐의 머뭇거림을 뚫고 날아온 장창은 코다로의 몸에 박혔다.
“아악!”
이때가 기회다 싶었는지 오크들이 마구 달려든다.
그리고 발버둥 치는 코다로의 몸에 무기를 찍으려 했다.
그때였다.
외곽 쪽에서 일이 벌어진 것은….
인간의 함성이 일어나자, 악전고투하며 용병들을 포위한 오크들이 나자빠졌다.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병사들이 창을 찔러대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아레이즈의 구원군이었다.
발광하는 오크들의 뒤를, 병사들의 도끼들이 찍어내렷다.
아래로 쓰러진 오크는 창에 고슴도치가 되어 꿈틀거린다.
서로의 악다구니가 부딪히며 다시 전장이 달아오를 때, 세인이 검을 휘두르며 길을 열었다.
그의 검날이 닿을 때마다 오크들의 갑옷과 근육이 찢겨 나갔고, 나중에는 흡사 검압에 오크가 박살 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다시 전차 위의 우두머리가 소리를 지르자, 건장한 오크들이 달려 나왔다.
이들은 일반 병사와는 차원이 다른 자들로서 우두머리가 뒤로 아껴놓고 있던 놈들이었다.
원래 가이더의 수도 공략 정도 때 쓰려고 했던 진짜배기인 것이다.
정예병들이 투입되자, 밑바닥에서 타오르던 인간의 기세는 잠시 소강상태를 맞이했다.
마치 타오르는 불길에 물을 끼얹은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몸을 낮췄던 불은 세인의 기세와 명령에 다시 위로 솟구쳤다.
“아군을 구해라. 우리가 죽을지라도!”
그렇게 말한 그는 다시 앞으로 돌진했다.
지휘관이 뒤를 보이며 펄럭이는 망토를 보여주자, 병사들은 정말로 목숨을 걸었다.
그렇다.
어차피 모두가 죽는 전쟁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적들이 강하다고 아낄 목숨은 아니었던 것이다.
함성이 해일처럼 일어나며 인간을 추수하고 있는 정예 오크들과 부딪혔다.
거대한 오크의 파도 앞에서 인간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오크의 발길질 한 방에 인간의 몸이 부서지고 피가 튀었다.
그들이 도끼를 휘두르면 인간은 장난감처럼 잘려져 날아갔다.
무서운 힘이었다.
그런 힘을 휘두르는 오크들의 눈은 붉게 빛났다.
그리고 그 빛을 가리는 자는 바로 세인이었다.
세인은 위로 뛰어올라 검을 내리쳤다.
상대 오크가 도낏자루로 그것을 막았는데, 검날이 자루를 가르고 오크의 어깨를 박살 냈다.
상대 오크가 고통에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세인은 검을 빼내고 머리에 검날을 쑤셔 넣었다. 부들거리며 상대 오크의 양팔이 세인을 가두려고 했을 때, 그 품 안에서 검광이 요동친다.
우리를 벗어나려던 야생동물처럼… 검빛이 몸부림치니, 이번에는 오크의 몸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저쪽도 괴물이라면 이쪽도 엄청난 괴물이었다.
세인은 계속 달려나가며 오크들을 베는 게 아니라, 아예 박살을 내놓았다.
그의 행동은 과도한 힘이 실려 있어 투박하게도 보였지만, 모든 동작에 적을 꼭 죽이겠다는 의지가 배어 나왔다.
그것은 적에게 있어 소름 끼치는 살기였고.
등줄기를 관통하는 전율이었다.
가까이 붙어서는 곤란하겠다고 생각했는지, 멀리에서 쇠사슬이 날아왔다.
그리고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세인의 몸에 휘감겼다.
양쪽에서 쇠사슬로 잡아당길 때, 세인은 잠시 무릎을 꿇었다가 땅을 발로 밀어내며 버텼다.
그대로 계속 힘겨루기가 벌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좌우에서 쇠사슬로 잡아당기는 오크 중 한 마리의 등에 검을 박아넣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코다로였다.
몸부림치는 오크와 한 덩이가 되어 코다로가 바닥을 구르자.
세인은 쇠사슬을 끊어내고 다른 한쪽에서 잡아당기는 힘을 이용했다. 그러면서 오크에게 빠르게 접근했다.
그리고 검으로 수차례 오크의 몸을 찔렀다.
오크가 건틀렛을 낀 손으로 검날을 막아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철렁이는 쇠사슬 사이로 오크의 살점이 떨어져 내렸다.
마지막으로 오크의 목을 관통하고 빠져나온 검이 오크의 두꺼운 손목을 잘라버렸다.
아래로 떨어지는 손과 함께 쇠사슬이 떨어지자, 세인은 몸을 돌려 코다로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코다로는 이미 오크의 숨통을 끊어 놓은 직후였다.
등을 맞댄 둘은 주변에서 달려드는 오크를 상대했다.
얼마나 그렇게 날뛰었을까?
바닥에 쓰러진 사체들 때문에 방해를 받은 오크들 앞에서, 세인과 코다로는 잠깐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여기로 오시다니, 악수를 두셨군요.”
“시간을 벌 테니 피하십시오.”
세인의 말에 코다로는 고개를 돌리려 했다.
그러나 윽, 하는 신음과 함께 곧 그만두고 만다.
아까 오크와 바닥에서 엉키면서 목을 다친 것 같았다.
그런 코다로의 뒤에서 세인은 거친 호흡과 함께 말을 내뱉었다.
“골드 힐의 사람들을 데리고 아레이즈로 가십시오. 뒤에 더 많은 병력을 숨겨 놓았습니다. 지금 이건 우두머리를 잡기 위한 행동입니다.”
“적들도 뒤가 있어요. 새까맣게 산을 뒤덮었죠. 다른 우두머리들이 여기를 관전하고 있을 테고요. 제가 왜 아레이즈에 가야 합니까? 여기서 죽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코다로가 그렇게 말하자 세인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당신도 죽을 겁니다. 우린 그걸 알아요. 하지만 가능하면 의미 있게 죽고 싶은 게, 우리 같은 자리가 주는 욕심입니다. 저는 오늘의 당신을 살렸습니다. 당신이 아레이즈에 가서 한 소녀의 곁에 있어 주고…. 그녀의 곁에서 죽는다면 설령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다 해도, 그 죽음은 가치가 있죠. 안 그렇습니까?”
“….”
“당신은 거기로 가서 제가 오늘 얻은 의미를 찾으세요. 그 안에서보다 가치 있게 죽길 바랍니다.”
그러나 동료 곁에서 죽는 것도 가치 있는 죽음이었다.
되로 돌아 그걸 말하려 할 때 코다로는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세인을 보았다.
그가 보는 곳을 따라 시선을 던지니, 아주 멀리 엄청난 숫자의 오크들이 보였다.
햇빛에 번쩍이는 무기들과 머리 위로 솟아 있는 깃발들, 그리고 잘 정돈된 진영은 그들의 여유를 보여주는 듯했다.
그걸 바라보고 세인의 옆얼굴을 보았다.
세인의 입술이 움직인다.
“위기에 빠지면 달려오겠다는 말, 테이블에서 한 말은 진심이었습니다. 저는 약속을 지키러 왔습니다. 당신이 아레이즈로 가준다면 정말로 고맙겠습니다. 찰나의 유예라도 우리에게는 가치가 있습니다.”
코다로는 피에 젖은 얼굴로 웃었다.
그리고 세인의 말에 대답했다.
“저는 그때만 해도, 과연 당신이 와줄 수 있을까에 대해 회의적이었습니다. 내심은 그랬습니다. 저란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거든요. 믿음을 나눈다 말하면서도 그런 면이 있어요.”
코다로는 세인 앞에서 웃어 보였다.
그는 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왜냐면 이제 그 이상의 언어는 불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세인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세인에게서 멀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