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 검은 왕 (1)
“청이 있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묵직한 목소리를 들으며 세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교교로운 달빛이 쏟아지는 가운데 야영지는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보초들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세인은 팔짱을 낀 채 무릎을 꿇고 있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상반신을 납작 엎드리고 있는 남자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그가 입을 열었다.
“네 얼굴이 보고 싶다. 고개를 들어라.”
남자는 여기까지 오면서 봉변을 당했는지, 뭐 하나 걸친 것 없는 알몸이었다.
그의 창백한 나신은 달빛을 맞아 회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몸 구석구석에 달라붙어 있는 흙을 보면서, 세인은 상대가 얼굴을 들기까지 기다려 주었다.
마침내 들어 올려진 상대의 얼굴은 매우 초췌했다.
“제발 제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세인은 침묵을 지키다가 입술을 무겁게 떼었다.
“지금 네 모습을 보니 상황이 이해가 간다. 정말 절박하니까 여기까지 달려와 내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겠지. 그러나 지금 나와 내 병사가 여기 온 까닭은 적들을 물리치기 위해서다. 군사적인 목적을 위해 여기에 있는 거야. 그러니 자리를 비울 수가 없다. 이해해다오.”
그의 말을 들은 남자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보였다.
세인은 인내심을 가지고 상대의 상념이 끝나길 기다려 주었다.
“나리. 적들은 여기로 오지 않습니다.”
“뭐?”
“적들은 나리의 동료 중 한 명에게 몰려갔습니다.”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당연히 세인은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 앉더니 상대와 눈을 맞췄다.
참으로 담대한 모습이었다.
그런 담력 있는 행동에 상대는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그런 그의 앞에서 세인은 방금 전과 달리 위엄있게 말을 꺼냈다.
“좀 더 자세히 말해 봐라.”
* * *
마지는 남편을 사고로 잃고 아이 둘을 키우는 여자였다.
그녀는 높은 산 위에서 살았다.
사람이 살기 쉬운 곳은 아니었지만, 대신 몬스터들도 접근하기 힘든 곳이었다.
그곳은 전망이 좋아 남편은 망보는 일을 했었고, 영지의 지원을 받아 집이 지어져 있었다.
물론 이제는 버려졌지만, 그녀는 그곳에서 미래를 준비하며 살았다.
그녀는 앞으로 인간 세상이 망한다는 확신에 쌓여 있었다.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 지하에 쉽게 상하지 않는 식품들을 넣어 놓았다.
그 외에도 방한용품이나 여러 가지 물건들을 넣어놓고 미래를 대비했다.
가끔 산 위로 올라오는 사람들은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고 비웃었지만, 정말로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마지는 역시나 자기 생각이 맞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피난 가자는 사람들의 말을 거절하며 자신의 집에 남았다.
그녀 생각에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두 아들을 불러놓고 자신의 계획을 설명 중이었다.
“들어봐. 우린 지하에 숨어야 해. 그래야 살 수 있어. 집도 무너뜨린 마당이라, 놈들은 우릴 의심하지 않을 거야. 인간이 안 살거나, 다른 몬스터가 휩쓸고 간 줄 알겠지.”
그녀의 앞에서 소년 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엄마.”
“알겠어요. 엄마.”
그런데 마지는 두 아들 앞에서 섬뜩한 소릴 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단다, 아들들아.”
“그게 뭔데요?”
“우리는 오래 숨어 있어야 해. 그런데 입이 줄어야 오래 버틸 수 있는 거야. 나를 도와줄 조수는 한 명만 있으면 되거든. 나머지 한 명은 여기를 떠나야해.”
“….”
지금 여기에서 그런 말을 하는 그녀가 약간 미친 것 같았다.
아니면 완전히 미쳤거나.
그녀는 집을 허물기 위해 두 아들의 힘과 도움이 필요했다.
그리고 숨기 직전이 되어서야 자신의 계획을 말해 주었다.
결국, 아들 한 명이 산 밑의 피난 가는 사람들을 따라 안전하게 도망칠 수 있었던 기회를 날려버린 것이다.
“공평하게 가위바위보로 하자. 진 사람은 저 다리를 건너가 끊는 거야. 그리고 사라지면 돼.”
마지의 아들 중 한 명인 질리언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 잠겨 있는 두 번째 산봉우리와 거기까지 이어지는 구름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나무로 된 구름다리는 바람에 삐걱대며 흔들거리고 있었다.
저기를 건너는 것도 문제지만….
이럴 때, 한밤중 산에서 홀로 버려진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했다.
두 아들.
그린과 질리언은 서로 가위바위보를 했다.
승리의 여신은 질리언에게 손을 들어 주었다.
승부에서 이긴 질리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린은 절망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린에게 동아줄이 내려왔다.
“세 번이다. 세 번 중에 두 번 이긴 사람이 나와 함께 남는 거야.”
마지는 갑자기 룰을 추가했다.
그녀로서는 착하고 순한 대신, 어리숙한 면이 있는 질리언과 함께 남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그린과 질리언은 다시 가위바위보를 했고, 이번에도 질리언이 이겨버렸다.
하늘은 그렇게 질리언의 편을 들어주는 듯했다.
마지는 탐탁지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때 질리언은 사색이 된 그린의 얼굴을 보았다.
눈을 돌렸어야 하는데, 그린의 눈동자와 딱 마주치고야 만다.
“형… 제발….”
그린의 입에서 처음으로 형이라는 말이 나오자, 질리언은 가슴이 울컥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항상 질리언에게 못되게 굴고, 형 취급을 하지 않았던 심술 궂은 그린이….
자신에게 매달릴 때 그 영악함을 간파할 수 있는 지혜가, 소년인 질리언에게 있을 리 없었다.
산속에서 자라난 질리언은 꾀가 부족했다.
이를 악문 질리언은 결국 이렇게 말하고야 만다.
“형이니까, 제가 대신 갈게요. 엄마. 그린과 함께 있어 주세요.”
마지는 반색을 했다.
“알겠다, 아들아.”
그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하로 통하는 계단으로 내려가 버렸다.
그다음은 마지였다.
이 살벌한 모자 관계 속에서는 이쯤 되면 한번쯤 나와 줘야 할 이별 인사조차 없었다.
마지가 사라지고 지하로 이어지는 문이 닫혔다.
그 쿵, 하는 소리를 귀로 듣자 질리언은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지금 대체 내가 뭘 한 거지?
그런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수습하며 주위에서 나뭇잎들을 모아 문 위에 덮어 주었다.
그리고 돌도 여러 개 올려놓았다.
그래서 지하로 통하는 입구는 감쪽같이 위장되었다.
질리언은 팔을 서로 감싸 안았다.
그리고 세상에서 혼자가 된 느낌을 되새겼다.
그는 어쩌면 이제 와 후회를 하고, 울면서 지하로 통하는 문을 두들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그는 마지를 너무나 잘 알았다.
결국, 소년은 쓸쓸하게 뒤돌아서고야 만다.
그리고 나무로 된 다리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불안정하게 흔들거리는 다리에 몸무게를 싣고 걸어가던 그는 흠칫 놀랐다.
다리의 중앙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형체가 서 있었던 것이다.
소년의 가슴에 왈칵 공포가 차올랐지만, 내친걸음이었다.
게다가 어차피 저렇게 나타나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면, 도망친다 해도 끝까지 따라올 것만 같았다.
어린 질리언은 상대가 당연히 저승사자라고 생각했다.
그 저승사자인 세인은 냉막하게 입을 열었다.
“다른 가족은? 다른 가족이 있나?”
그는 남자에게 가족을 구해달라는 말을 듣고 여기로 올라왔다.
그러면서 다리의 상태를 보고는 의아해했다.
건너편에서 보기에 다리를 지탱하는 줄이 반쯤 끊어져 있었다.
누구라도 올라갔다간 죽음을 면치 못할 듯싶었다.
마지가 미리 손을 써놓은 것이라는 걸 세인이 알 리 없었다.
그래서 다리의 줄을 보강했고, 그걸 하느라 건너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도착도 늦었다.
공교롭게도 마지의 지독한 노림수가….
아들 하나가 몬스터에게 잡혀 위치를 불까 봐서 해놓은 짓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세인을 정체시킨 셈이다.
야공을 달려온 바람이 질리언의 머리카락을 흩어 놓았다.
다리 한가운데에서 마주친 저승사자의 차가운 눈길 앞에 무방비로 노출된 그는, 심장이 얼어붙는 느낌을 받았다.
두 개의 산봉우리 사이에서 세인은 다시 물어왔다.
“너 혼자인가?”
질리언은 그 와중에도 마지와 그린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까스로 대답할 수 있었다.
“저 혼자예요.”
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서는데 질리언의 하얗게 탈색된 얼굴이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공포감과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졸도해 버린 것이다.
세인이 서둘러 질리언을 안아 들자, 다리가 위태롭게 출렁거렸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만났던 남자는 세인에게 부탁하며, 몬스터들이 동료를 습격하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래서 그곳에 서둘러 가봐야 한다는 생각만이 세인의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세인은 질리언을 부축하며 자신이 걸어왔던 방향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밑으로 내려가 병사들을 이끌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난다.
한편 지하에 숨은 마지와 그린은 그럭저럭 잘 버텨나갔다.
어둡고 환기가 잘 안 되는 것을 빼면 괜찮은 생활이었다.
그 어떤 불편도 목숨과 뒤바꿀 수 없는 노릇이다.
그린이 다리를 건넜다면 세인과 마주친 후, 뒤에 가족이 있다고 말했을 것이다.
상대가 인간이 아니라는 착각을 똑같이 했어도 그린은 충분히 그럴만한 아이였다.
결국, 둘은 세인과 접촉하지 못하고 지하에서 시간을 보냈다.
긴 시간이 흐르고 낮과 밤의 순환 중 어두운 밤이 도래했을 때다.
지하로 통하는 문이 들썩이더니 살짝 열렸다.
사위는 어둠과 뒤섞인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뭔가 보여요?”
“잠깐.”
마지는 그렇게 대답하며 문을 더 열어 보였다.
바깥 상황이 궁금해서 살펴보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주위가 너무 어두웠다.
이왕 이렇게 된 것 확실하게 주위를 살펴보자고 생각한 그녀는 문을 활짝 열어버렸다.
땅속에만 있어서 미칠 지경이었던 것이다.
신선한 공기를 맡고 싶어서 한 행동이었고, 과연 머리를 지끈거리게 하는 공기 대신 신선한 공기가 폐부에 스며들어 왔다.
하지만 그 공기 속에는 이질적인 시선도 섞여 있었다.
“….”
마지는 덜컥 몸이 굳어 버렸다.
주위가 어둡던 이유는 몬스터들이 모여들어 가만히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열을 이루며 앉아있는 수많은 몬스터들이 땅속에서 몸을 일으킨 마지의 상반신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체구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들의 이글거리는 눈빛은 마지의 머리 위보다 훨씬 높게 떠 있었다.
그걸 문을 살짝 열었을 때는 보지 못했다.
달빛이 몬스터들의 정수리로 쏟아지는 가운데, 그들의 입이 열렸다.
그에 따라 드러나는 흉측한 이빨. 그리고 가슴까지 흘러내리는 타액이 눈에 들어온다.
그 앞에서 마지는 벌벌 떨었다.
그런 그녀에게 몬스터들의 손이 하나둘씩 다가왔다.
세인에게 도움을 받은 질리언이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상황을 간신히 파악했다.
…그리고 세인에게 어떻게 알고 오셨냐며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네 아버지가 내게 부탁했어. 너를 만난 그날 말이야.”
그 말을 들은 질리언은 한 대 맞은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서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예? 제 아버지는 돌아가신 지 오래되었는데요?”
세인은 골드 힐로 달려갈 준비를 하느라 말의 안장을 점검하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알아.”
“….”
처음 본 순간부터 알았지.
* * *
몬스터들의 행동은 정상적이지 않았다.
비비안이 성을 포기하면서 낸 회심의 수는 제대로 먹혔다.
그렇다면 아무리 거대한 집단이라도 일단 행동을 멈추고,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시간을 가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파상적인 공세로 돌아서든, 전처럼 몰아치든 할 것이다.
아무리 대군이라 해도 적에게 뭔가 한방이 있다고 여기는 이상.
그런 적을 파악하면서 희생을 최소화하려고 하는 행동은 기본 중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게 없었다.
멈칫하기는커녕 오히려 골드 힐로 밀고 내려왔다.
엄청난 숫자의 오크들이 골드 힐 주변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공략하기 시작했다.
이런 비정상적인 호흡에는 군단장의 존재가 그 이유였다.
최고의 힘을 손에 넣기 위한 그는, 부하들을 은근히 채찍질하며 아레이즈 주변을 무너뜨리려 했다.
일단 골드 힐만 무너지면, 아레이즈는 고립무원이 된다.
군단장은 자신의 계획이 어긋날 거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코다로는 사람들을 한데로 모으고 직접 진두지휘하며 나섰다.
그는 용맹하게 검을 휘둘렀고 적들의 피로 흠뻑 젖은 채로 귀환하길 반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