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45화 (45/307)

# 45

& 스포일러

위기를 맞이하고 견디는 방법은 제각각이었다.

수많은 야만인이 모여있는 곳에 서서 레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머릿수는 많으나 변변찮은 칼도 창도 없지. 힘은 세지만 그것을 받쳐줄 것이 부족해.”

그의 앞에는 나이든 장로들도 나와 있었고, 야만인 중에서 나름 이름있는 전사도 모여 있었다.

그런 그들이 주의 깊게 레드의 말을 경청하는 까닭은, 이제 레드를 의심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진심은 변질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기필코 통하기 마련이다.

그들은 여러 가지 일로 레드의 진심을 알아보게 되었다.

물론 젠과 젬의 일도 유효했고 말이다.

그래서 야만인들은 레드가 말하는 ‘우리’라는 단어를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레드는 많은 숫자의 야만인을 바라보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야만인들의 대표에 불과했다.

뒤에는 엄청난 수의 야만인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보통 사람보다 많이 모자라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해일이 밀려오는데 숨을 생각은 하지 못하고, 그저 숫자만 믿고 웅크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덩치가 큰 거인이 웅크리기만 하면 무엇을 하겠는가?

그런 요지의 말을 하자, 전사들이 이의를 제기했다.

“우리는 웅크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야. 모여서 맞서 싸운다는 말이다.”

그러자 레드는 서늘한 눈으로 모두를 둘러보았다.

“꼭 싸운다고 해서 그것이 공격적인 전술은 아냐. 진정 공격적인 전술은 무모할 정도로 과감해지는 거야. 가장 궁극적인 공격성을 띄우는 전술은, 강을 뒤에 두고 싸우며 탈출로를 막아 버리는 정도의 광기. 그리고 운마저도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전략을 짤 때 나온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곳이 취하겠노라 말하는 발상은…. 결국 방어적인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라 말하고 싶은 거다.”

“시간이 없네. 결론만 말해 보게.”

한 장로가 더 자세히 설명하려는 레드를 막으며 재촉했다. 그러자 레드는 이곳을 떠나 고지대나 늪지대, 동굴로 숨어야 한다고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 그런 곳에는 많은 사람이 들어갈 공간은 없어! 결국, 습격을 받고 하나둘씩 죽어가게 될 거다.”

“너야말로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아라!”

결론을 채근했던 장로는 한 전사가 반대를 하자 화를 내며 호통을 쳤다.

그 서슬 푸른 호통에 전사들이 자라목이 되었다.

그걸 보니 장로 중에서도 꽤 힘이 있는 장로 같았다.

“우리 장로들은 지금 너희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여기 와있는 게 아냐. 시간이 촉박하다. 여기가 아무리 외진 곳이라지만, 놈들이 곧 들이닥칠지도 몰라! 지금 해결책을 듣고 있잖아! 자꾸 지연시키면 쫓아내 버리겠어! 레드 계속해보게.”

그렇게 계속된 레드의 이야기는 엽기적인 것이었다.

최대한 자연을 이용해 숨어서, 작은 점조직들이 서로를 돕는 방향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이 폭풍은 방향성을 가지고 있어. 그 방향은 밑이야. 우리가 뭉쳐 있으면 우린 커다란 식량 창고로 보여. 과일나무들이 잔뜩 모여 있는 과수원이라고. 하지만 절벽 위에 나무 한 그루가 있으면 어떤 생각이 들지? 갈 길이 바쁜데 올라갈 생각이 들까? 우리의 장점인 자연을 최대한 이용하는 거야. 당장 없는 무기를 만들어 낼 수는 없어. 갑옷도 마찬가지야. 우리에게 없는 것을 순식간에 만들어 낼 수는 없어.”

장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우리의 단점이라면, 우리의 장점은 뭐지? 엄청날 정도로 자연과 동화되고, 주변을 이용하는 능력이야. 깊고, 외지고, 접근하기 힘든 곳에서 흩어지는 거야. 그러면서 습격받는 쪽을 돕는다. 저쪽은 일정이 있어. 결국, 얼마나 버틸 수 있는가가 승부가 될 거다. 수백 명. 수천 명이 되면 기필코 공격받는다. 하지만 동굴 안의 수십 명, 땅굴에서 수십 명 그리고 늪지대에 수십 명이 서로 유기적으로 돕는다면…?”

그리고 그가 말하는 지역이 있었는데, 정말 가기 끔찍한 곳이었다.

여기에서 야만인들은 선택의 갈림길에 빠졌다.

생각 같아서는 목책 뒤에 한데 모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살아날 수 있을까?

“우리는 각개격파 당하지 않는다.”

레드의 말이 끝났을 때였다.

하얀 머리의 장로가 천천히 레드에게 걸어왔다.

그가 나서자 뭔가를 물어보려던 사람들은 입을 닫았다.

레드가 이렇게 주목받게 된 것은 지금 걸어 나오는 장로의 입김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세상에 몇 안 되는 존재 중 하나였다.

바로 미래를 볼 줄 아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장로님, 해결책을 주시려는 건가요?”

누가 그렇게 묻자, 하얀 머리의 장로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 내 예언은 필요할 때 얼마든지 꺼내 쓰는 물주머니가 아니야. 지켜야 하는 주기가 있어.”

“….”

그리고 하얀 머리의 장로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예언은 최근에 부족을 위해서 썼다. 레드가 우리의 왕이 될 거라고 말이야.”

그리고 장로는 고목 가지처럼 굽은 검지로 레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넌 우리 모두의 왕이 될 거다. 네가 하기에 따라 우리는 비극에 빠질 수도 있고, 최대의 번영을 맛볼 수도 있어. 레드, 나의 소원이 뭔지 아나?”

“….”

노파가 히죽 웃었다.

“아프지 않게 죽는 거야. 우리 예언자들은 항상 그걸 걱정하지. 미래를 볼 수 있다고 해서 죽음을 피하는 건 아니야. 그래서 고작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빌 뿐이지.”

그러면서 노파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레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 상태에서 입을 열고 레드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내 예언을 인정하지 않는 거냐? 그런 거야?”

그러자 사람들이 손을 들고 저어댔다.

“아닙니다. 그 예언 때문에 우리가 목숨을 건진 게 몇 번인데요?”

“그런데 왜 여기에서 금 같은 시간을 버리고 앉아 있냐! 멍청이들아. 위기 시에 회의를 하는 건 우리 전통이지만, 그것도 때를 가려야 하는 거야. 죽고 싶어서 안달이 난 거냐? 움직여! 움직이라고!”

노파가 화를 내자 야만인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짐을 챙기러 저마다의 집으로 걸어갔다.

그런 그들을 보다가 레드에게로 고개를 돌린 노파는 이렇게 말했다.

“참 이상한 놈들이지? 어떨 때는 굉장히 난폭하고, 야성적인 힘을 보여주다가도 저렇게 순진해. 너는 저 잠재력을 가진 놈들을 잘 이끌어야 할 거다. 누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닭 잡기도 힘든 단검이 될 수도 있고…. 몬스터를 베어 버리는 장검이 될 수도 있어.”

레드는 솔직히 눈앞의 노파가 어려웠다.

전혀 파악되지 않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노파는 그런 레드의 내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가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레드의 몸이 약간 움찔했다.

멀리에서 레드에게 달려오던 젠과 젬은 그 자리에서 멈추며 둘을 바라보았다.

대화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들어라, 레드. 네가 아는 그 사람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한 존재다.”

“그 사람?”

“여자도 아닌데, 네가 매일 걱정하는 사람 말이다.”

레드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노파의 손을 치우려고 했다.

그러나 노파의 무거운 어조가 그의 그런 행동을 막았다.

“네가 그를 죽이지 않았던 이유는. 네가 인간다운 인간이어서 이기도 하지만, 이 세상이 구원받아야 하기 때문이야. 그게 어떤 의미인지 너는 상상도 하지 못할 거다. 검은 왕이 탄생해야 하는 이유에 얼마나 구구절절한 사연이… 아픔과 분노가 서려 있는지, 너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은 절대 알지 못할 거야.”

내려앉은 눈꺼풀 밑에서 노파의 눈은 뜨겁게 빛났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소.”

“레드, 이대로 네가 우리와 함께하면 너는 그를 영원히 잃게 된다.”

고작 이런 소리였던가?

너무 당연한 말에 레드는 어이가 없었다.

이건 예언이랄 것도 없었다.

그거야 당연한 말이지 않은가?

동시에 가장 아픈 곳을 후벼 파는 말이었다.

“다른 길을 가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그를 잃게 된다. 그래도 좋으냐? 어느 날 술잔 앞에서 그를 상실하게 된다 해도, 감수할 수 있을 정도로 이 집단에 확신을 가지고 있냐?”

어찌 보면 노파는 그가 야만족의 왕이 되기 전에 시험을 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하지만 그 모든 걸 떠나, 레드는 노파의 모든 말이 기분 나쁘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입을 꾹 다물고 있는데….

노파는 그런 레드의 안면을 살펴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는 강하고 위대한 존재지. 그리고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난 그가 아름다운 존재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난 희생이야말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

“오, 레드. 불쌍한 레드. 너는 장차 여기에서 존경받는 훌륭한 왕이 되겠지만, 너는 결국 그 대가로 그런 존재를 영영 잃고 말았구나. 오, 불쌍한 레드. 우리의 왕.”

그리고 손을 내린 노파는 발을 질질 끌며 자신의 집으로 갔다.

그녀의 등 뒤로 레드에게 다가서는 젠과 젬이 보였다.

노파는 자신의 방에 들어가 벽에 등을 대고 앉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는데.

사람들이 조금 후에 그녀를 찾으러 왔을 때는 이미 죽어 있었다.

*  *  *

비비안의 과감한 결단과 희생으로 이루어진 한방은, 위에서 내려오는 군단을 순간적이나마 주춤거리게 했다.

그리고 그들의 사기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애초에 이건 어른과 갓난아기의 싸움이었다.

전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비비안이 자신의 성에 있다는 것을 확인한 세인은, 병사들을 이끌고 고지대를 찾아 이동했다. 큰 전력 누수로 인해 적들의 움직임에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잘만 노린다면 다시 크게 한 방 먹여줄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적이 주춤거리며 자세가 무너질 때 급소를 찌르는 공격은, 최소한의 힘으로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음이었다.

코다로는 골드 힐의 사람들을 위해 따로 이동해야만 했다.

그와 코다로는 헤어지기 전에 서로의 주먹을 맞부딪혔다.

“그분을 잘 다독여 주십시오.”

코다로는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평소 비비안을 좋게 생각하지는 않았던 그였지만, 그녀의 희생을 보니 그도 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고난은 사람을 변하게 하고 성숙하게 한다.

그 고난에 존망까지 달려 있다면, 변화의 폭은 수용범위를 아슬아슬하게 채울 것이다.

코다로도 그런 상태였다.

“천막을 쳐라. 언제 놈들이 나타날지 모르니 식사 시간은 따로 갖지 않는다. 불은 금지고, 육포로 끼니를 때우도록.”

그들이 있는 곳은 커다란 산의 사이였다.

두 개의 산 밑은 우거진 나무들로 가득했고, 한줄기 흰 길이 구불구불하게 나 있었다.

그곳에 하얀 자갈이 깔린 것을 보면 과거 물이 흐르던 길임을 알 수가 있었다.

하늘이 어두운 것을 알아차린 일행은 산 중턱 정도에 자리를 잡고 천막을 쳤다.

큰 두 개의 산 옆으로는, 작지 않은 산들이 앉아 있었다.

그 능선을 넘어가려면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분명 산 사이로 적들이 오게 될 것이다.

활과 화살을 준비한 병사들은 보초를 서러 옆 능선을 타고 걸었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다른 사람과 교대했다.

물론, 피곤하면 천막 안에 들어가 눈을 붙이기도 했다.

세인은 나무들이 서 있는 곳 중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간 천막 안에 있었다.

시간은 밤이었고 밖에서는 벌레 우는 소리가 들렸다.

긴장감에 깊이 잠들지 못한 그는, 꿈결에 울음소리를 들으며 벌레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했다.

차라리 벌레가 되면 이렇게 불안해하며 살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이었다.

‘참 바보 같군.’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무엇으로 살든 인간으로 사는 게 가장 좋은 것이다.

설령 오래 살 수 없다 해도….

불안에 떨며 살다가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고 해도, 인간이 참된 가치였다.

인간이 바로 그가 원하는 진실이었다.

점점 옅어지는 꿈 안에서 그렇게 결론 내렸다.

뒤척인 그는 다시 잠에 빠져들려고 했다.

그런데 발소리가 들린다.

발소리에도 낯설다는 표현이 어울릴 수 있을까?

낯선 느낌에 세인은 잠에서 확 깨어났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의 근처까지 도달한 발소리는 천막 앞에서 멈췄다.

숨을 고르는 것일까?

잠시 정적이 흘렀다.

병사는 아닐 것이다.

일반 병사라면 이렇게 와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게 가능할 리 없었다.

정적을 깬 것은 밖의 사람이 아니라 세인이었다.

어느새 풀벌레 소리가 멈춰 있었기에, 그의 말소리는 밖으로 들리기 충분했다.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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