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 가이더여 영원하라
코다로와 세인은 어딘가로 떠났다.
그들을 보낸 직후의 사람들은 성문 뒤에 남겨졌다.
그리고 뭔가 중요한 일을 하러 갔으리라 생각했다.
비비안 영주와 관계된 일이라고 생각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기사나 용병 대장은 영지에 대신 남아서 수비를 두텁게 했고 말이다.
그들은 기다리면 곧 돌아올 것이다.
떠난 영주들은 성을 오래 비울만큼 멍청하진 않으니까.
그래도 시간은 흐르고 흐른다.
그 시간은 무자비하게도 세 영지 근처에 끔찍한 대군을 불러왔다.
“두쿠님, 과연 이래도 괜찮겠습니까?”
“걱정하지 마라. 우리가 치워주면 오히려 좋아할 것이다.”
군단의 준비 계획을 만드는 등 사악한 계획 꾸미기를 즐기는 홉 고블린.
그의 이름은 두쿠였다.
그는 공로를 인정받아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번쩍이는 황금 수레에 타고, 호위병들에 둘러싸여 이동했다.
그의 주변에는 무서운 오크들이 창을 들고 움직였으며, 깃발과 북을 든 오크들은 그가 보내는 신호를 주변의 부대로 옮기는 역할을 했다.
현재 이 기고만장한 홉 고블린은 세 영지를 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눈엣가시 같은 영지들을 정리하고, 지름길을 개척할 생각인 것이다.
그의 주위에 있는 엄청난 숫자의 군대를 보면, 그 생각이 허황된 것만은 아니었다.
두쿠는 긴 귀를 펄럭이며 검은 손톱이 달린 손가락으로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이 정도 숫자라면 성벽이 의미가 없다. 그냥 우리들의 시체를 쌓고 그 위를 올라가면 그만인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재미가 없잖아? 뭐 좋은 방법이 없을까?”
싱거운 건 질색이다.
그렇게 생각한 두쿠는 인간의 터전을 짓밟고 있는 오크들을 응원했다.
오크들은 그 우람한 근육을 뽐내며 눈에 보이는 것은 모조리 죽였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는 마치 피의 폭풍이 몰아친 것만 같았다.
보는 족족 짐승이든 인간이든 죽였는데, 한 인간만은 죽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백기를 든 인간이 흥미로운 소리를 하며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는 공포에 질린 노인이었다.
그의 표정에서, 영악한 홉 고블린은 배신자의 냄새를 맡았다.
“오오? 아레이즈가 비었다고?”
“그… 그렇습니다! 아레이즈의 영주가 디펜더스를 도와준다고 자리를 비운 지 일주일 째 입니다!”
거대한 체구의 홉 고블린은 흥미가 당기는지 노인의 앞에 바싹 붙었다.
그의 큰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노인은 벌벌 떨었다.
고블린의 커다란 노란색 눈이 그의 앞에 있었다.
노인이 소변을 지리는 것을 보며 두쿠가 웃었다.
“그런데 왜 넌 내게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아레이즈의 영주는 불필요한 사람들까지 성에 끌어들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굶주렸고, 불화가 넘쳐납니다!”
“아니, 아니. 그런 상황설명 말고… 진짜 불만이나 속마음을 말해봐라.”
노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외쳤다.
“그 때문에 제 가족이 죽었습니다.”
그때 잽싸게 가느다란 손가락들을 노인의 몸에 가져다 댄 두쿠가 그 말이 사실임을 확신했다. 하도 많은 인간을 해부해본지라.
이렇게 손가락들을 가져다 대고 생체반응을 확인하면 진실과 거짓을 가려낼 수 있었다.
사실임을 확인한 그는 그제야 기꺼운 듯 손뼉을 짝짝 쳤다.
“킥킥킥! 좋아, 좋아! 아주 좋아!”
“제 목숨을 살려주십시오! 죽고 싶지 않습니다! 살려만 주신다면…!”
아레이즈는 가망이 없었다.
나이를 많이 먹든 적게 먹든 인간은 살고 싶어 한다.
두쿠는 웃으면서 노인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성으로 안내하게 했다.
노인의 안내에 따라 아레이즈 성에 가니, 영주가 외출 중이라는 것은 사실처럼 보였다.
그래도 조심성이 투철한 두쿠는, 사육한 짐승들을 시켜 몰래 주변 냄새를 맡게 했다.
“바람도 이쪽 방향이 아닌 데다가, 기름 냄새가 없습니다. 함정이 아닌 것 같습니다.”
보고를 들은 홉 고블린 두쿠는 노인에게 말했다.
“이제 증명해봐라. 네가 배신자임을. 보초병을 죽이고 성문을 열게 한다면, 우리가 무혈 입성하게 한다면 네 목숨을 보장해 주겠다. 받아라. 독이 든 단검이다.”
“감사합니다!”
땅에 이마가 닿을 듯이 절을 하고 멀어지는 노인을 두쿠는 비웃으며 바라보았다.
약속은 무슨.
공포에 질린 인간의 생각은 저렇게나 짧군.
쯧쯧, 내가 널 왜 살려줘?
그나저나 영주가 자리를 비웠다는 것은 정말 같았다.
일단 아레이즈가 무너지면 수비 중앙이 무너지니, 곧 세 영지 전체가 함락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성 위에서 흔들리는 아레이즈의 깃발을 보았다.
그리고 밤이 될 때까지 멀리에서 기다렸다.
만약 대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면 성안에서 난리가 났겠지만, 그렇다 해도….
설마, 같은 인간이 뒤통수 칠 것으로 생각할까?
멀리에서 소식을 전달 받아도, 여기까지 영주가 달려오는 시간은 만만치 않게 소모될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노인이 건장한 병사들을 단검으로 찌를 수 있을까?
주시하는 앞이 아니라, 무려 뒤에서 날아오는 검이다.
배신의 검.
확률은 반반.
그리고….
도박은 승리했다!
성문이 열리는 것을 보며 두쿠는 사악하게 웃었다.
그리고 재빨리 명령했다.
“돌진, 돌진하라! 총공격!”
숨죽이고 있던 오크들이 일어나 달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 멍청한 놈들이 달려가면서, 평소 하던 대로 고함을 지르는 것이다.
두쿠는 당연히 애가 탔다.
“저! 저! 멍청한 놈들! 조용히 가라고! 조용히 가란 말이얏!”
오크들이 소리를 지르니 사람들도 기습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성문은 정복당했고 안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됐다! 됐다고! 멍청한 영주 녀석, 자리를 비우다니!”
두쿠는 친위대를 이끌고 성에 들어갔다.
사람들과 몬스터들이 한 덩이가 되어 싸우고 있었다.
더이스와 행크는 미친 듯이 무기를 휘둘렀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민간인은 집에 숨었는지 보이지도 않았고, 도와주러 나오지도 않았다.
하긴 나와봤자 거치적거리겠지.
병사의 수도 세인이 빼내어 갔는지 너무 적었다.
결국, 그들의 분투는 결실을 보지 못했다.
거친 숨을 내쉬던 행크와 더이스의 몸에 상처만 늘어간다.
“와라!”
행크가 고함을 치며 도끼를 붕붕 휘둘렀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더는 위력적이지 못했다.
“오오, 아레이즈가 오늘 무너진다! 좋아, 좋다고! 내가 해냈다! 저 녀석들의 목을 베어라!”
홉 고블린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손뼉을 쳤다.
성 밖에는 이제 엄청난 숫자의 군대가 득실거렸다.
이들이라면 그냥 밀고 와도 되었지만, 이렇게 꾀로 공략한다는 것에 의의가 있는 것이었다.
홉 고블린의 신호를 받은 전령들이 계속 그걸 전달했고, 밖에서는 군대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제는 누가 와도 전세를 뒤집을 수가 없었다.
이미 엄청난 수가 성안이며 밖에 가득 차 있다.
등을 맞댄 행크와 더이스는 자포자기한 듯 웃음을 교환했다.
“여기까지인가 보다, 더이스.”
“그래도 후련합니다. 최선을 다한 삶이었습니다.”
“그래 마지막까지 의미 있었다.”
둘이 주먹을 서로 부딪치는데, 멀리에서 아스칼리온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실성한 듯이 웃어젖히고 있었다.
홉 고블린은 배신자 노인이 미친 듯이 웃자, 뭔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늦었다.
늦은 것이다.
아스칼리온은 크게 웃으면서 외쳤다.
“지옥에나 떨어져라! 이 버러지들아!”
그때 우르릉.
우르릉하고 천둥 치는 소리가 들렸다.
괴물들은 반사적으로 하늘을 보았다.
그러나 하늘은 맑았다.
별들이 어둠에 잠긴 구름 사이에서 빛나고 있다.
그렇다면 이건 천둥소리가 아니다.
이건….
“안돼!”
홉 고블린이 머리를 감싸 쥐고 소리를 질렀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덜덜덜 하고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울림은 점점 가팔라지고, 종내에는 턱까지 덜덜 떨리게 했다.
아무리 생명체들이 날고 기어봤자 자연의 힘은 위대하고 압도적이다.
성의 위쪽에서, 엄청난 양의 물이 아래로 쏟아져 내려왔다.
길목을 타고 내려오던 것도 잠시.
아예 길 자체를 지워버리듯이 달려오는 홍수였다.
깃발을 달아 놓았지만, 이곳은 아레이즈 성이 아니다.
아레이즈 성은, 아레이즈 깃발을 내린 지 오래되었다.
이곳은 디펜더스 성이었다.
와인 강이 존재하는, 디펜더스 성 말이다.
거대한 강이 근처에 흐르니, 치수를 위해 당연히 수문이 존재했다.
그것도 상류에….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으니 미끼가 필요했고 더이스와 행크, 아스칼리온 등이 스스로 나섰다.
세인 앞에서 기사도 아닌 아스칼리온은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살 만큼 산 저입니다. 마음의 짐도 벗어 던졌으니, 영주님께 그 답례를 하고 싶습니다. 연륜으로 그들을 속여 보이겠습니다.”
고요한 눈으로 아스칼리온을 내려다보던 세인은 무겁게 말했다.
“허락한다.”
병사들과 나머지 기사들은 디펜더스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외쳤다.
달려오는 파도의 굉음을 들으면서.
“비비안 영주님 만세! 디펜더스여! 영원하여라!”
홉 고블린과 몬스터들은 공포에 질려 출입구를 찾았다.
화계가 아니었으니 기름 냄새가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
홍수 앞에서는 단단한 갑옷도, 활도, 칼도 무용지물이었다.
단단한 바위를 뿌리째 뽑고, 벽을 무너뜨리는 홍수다.
내내 모아두었던 물을 한꺼번에 푸니, 그 위력이 어마어마했다.
크게 웃는 행크와 더이스가 물에 휩쓸렸다.
그들은 삽시간에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디펜더스의 사람들 그리고 아스칼리온도 마찬가지였다.
위안이 되는 것은 엄청난 숫자의 몬스터도 함께였다는 것이다.
지옥도가 따로 없는 광경이 연출되었다.
물은 디펜더스 성을 잡고 뒤흔들며, 끝에 가서는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잠잠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물이 뒤흔드는 포효는 더욱 힘을 얻었는데, 양옆으로 늘어선 절벽이 흔들거리며 돌무더기를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이 계획의 가장 큰 노림수는, 바로 성을 포기하는 선택이었다.
인간들에게 있어, 영주에게 있어 성은 어마어마한 의미를 가진다.
성은 인간이 가진 최고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게다가 조상의 유산이고, 방패이고, 고향이며… 추억이다.
자존심이기도 하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
설마 그걸 포기할 줄이야.
그걸 대가로 내놓을 줄이야.
너무나도 상식 밖이라 물에 휩쓸려 성벽에 부딪히고, 위에서 쏟아지는 돌무더기에 맞아 죽는 홉 고블린 조차 예상치 못했다.
물이 부글거리며 수많은 몬스터를 죽여 버렸다.
워낙 대군이라 살아남은 녀석도 있었고, 가장자리에서 필사적으로 헤엄쳐 어떻게든 살아남는 녀석들에겐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제일 먼저 달려 나온 윌과 기사들은 악귀처럼 날뛰며 몬스터들을 죽였다.
빛을 죽이느라 재를 묻힌 그들의 창과 검이 적들을 용서치 않았다.
자비는 한 줌도 없었다.
그리고 세인과 코다로가 이끄는 병력이 뒤를 이었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몬스터들을 죽여 없앴다.
헤엄을 치느라 기진맥진했던 놈들은 허무하게도 죽임을 당했다.
이미 갑옷의 무게 때문에 수장된 녀석들도 태반이었다.
물과 돌무더기.
그리고 인간들의 악다구니에 몬스터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어느새 물을 시뻘겋게 물들인다.
그날 죽인 몬스터의 수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훗날 발 디딜 틈 없이 까마귀로 가득 차게 되는 이곳은, 적 본대의 예봉을 완전히 꺾어 버린 곳이 되었다.
그야말로 대승.
무너져 내린 디펜더스의 성은 그 역할을 기대 이상으로 해냈다.
“비비안 만세!”
아레이즈의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입성하는 비비안을 환영했다.
그녀의 과감한 결단과 흉내 낼 수 없는 희생으로 엄청난 수의 몬스터가 죽었다.
마치 분노한 신이 벌을 내린 정도의 죽음이었다.
보금자리를 잃은 비비안은 아레이즈에 머물게 되었는데, 영웅이나 마찬가지인 비비안은 열렬한 환영에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영지민은 희생된 사람들에 대해 애도하면서도, 그렇게 많이 마음 아파하진 않았다.
왜냐면 자신들도 곧 뒤따라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렇게 통쾌한 한 방을 날려 버렸다는 것이 너무나도 기쁜 것이었다.
적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군대가 순식간에 몰살당했으니 뼈가 저릴 것이다.
안내를 받으며 아레이즈 성의 깊은 곳에 도달한 비비안은 마플이 가져다주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심호흡을 했다.
마음이 복잡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이 승리는 수많은 희생 아래 이루어졌다.
흘러나오는 눈물을 소매로 훔치던 비비안은 그렇게 심호흡을 계속했다.
마플은 비비안의 얼굴에 눈물이 가득하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다가 비비안은 문득 의아한 얼굴로 마플에게 물었다.
“그런데 세인 영주님은 어디에 계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