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42화 (42/307)

# 42

& 가이더 (5)

어느새 골드 힐에서는 영지민이 성벽 위로 올라, 자기편을 응원하는 소리로 공기가 찢어지기 시작했다.

코다로는 미친놈이었지만, 적어도 평소 영주의 책임에 무관심하진 않았다.

그리고 영지민이 보기엔 지금 그의 영주는 자신들을 위해서 홀로 나가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이겨라! 이겨라! 이겨라!”

“제발 이겨라!”

“이겨라!”

인간의 고함과 괴물들의 거친 숨소리.

그리고 증오에 찬 비명이 섞여 땅과 하늘을 울릴 때, 코다로는 아군의 지원을 받으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곡도를 미친 듯이 휘두르며 말이다.

그의 목적은 이제 오직 단 하나.

적의 대장이었다.

달려나가는 그의 뒤를, 재칼과 허겁지겁 달려온 용병들이 받쳤다.

그리고 의도를 알고 그 움직임에 힘을 주었다.

코다로의 전진을 따라 피의 강이 이어진다.

적의 대장은 일단 병력을 뒤로 물려 수습할 생각은 안 하고, 오히려 성을 내며 앞으로 뛰쳐나왔다.

과연 생각할 머리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보았을 때 코다로는 지쳐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 일단 머리만 잡으면 전세를 뒤집을 수 있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늘에서 보면 사기는 이미 인간 쪽이었다.

전쟁의 승패란, 사기를 먹고 자라나는 마물이다.

노력과 수와는 무관하게 사기가 우세한 쪽에 손을 들기도 한다.

“오냐, 오라! 이 겁쟁이 벌레 같은 놈아!”

코다로는 고함을 치며 하얀 이를 드러냈다.

그리고 오히려 곡도를 양쪽으로 휘두르는데, 날에 묻어 있던 핏방울이 터져 나가며 주변을 물들인다.

번개를 머금은 듯한 칼날이 휘둘러질 때 살기와 함께 전광이 폭사 되었다.

으르렁 거리는 소리가 주변을 헤집는다.

그는 다가오다가 난자되어 쓰러지는 고블린을 밟고 박차며 앞으로 나갔다.

허공에 붕 뜬 코다로를 향해 괴물이 양손으로 도끼를 휘두른다.

공기를 찢는 날들이 코다로의 천을 헤집을 때, 이미 그는 곡도를 괴물의 목에 박아 넣은 후였다.

피가!

붉은 피가 머리를 풀어헤친 듯, 위로 치솟으며 이를 드러낸 코다로의 볼을 때렸다.

“죽였다!”

전장을 뒤흔드는 외침.

그리고 코다로는 다시 소리를 질렀다.

“죽였다! 이제 너희들은 패잔병이다!”

괴물들은 머리를 돌려, 자신들의 우두머리 목이 잘려진 것을 보았다.

그 커다란 머리는 바닥을 구르며 쓰레기처럼 진창에 처박혔다.

그 광경을 보았을 때의 싸늘함이 적군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목이 달아난 몸체 위에서 코다로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식지 않을 광기로 가득 차 있다.

“승리다! 우리의 승리라고!”

용병들은 이제 의기양양하여 더욱 힘껏 무기를 휘두른다.

주춤주춤 물러나는 몬스터들은 결국 등을 보이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건 패자들에 대한 사냥뿐이다.

*  *  *

정말 일어날지, 일어나지 않을지 알 수는 없지만….

공성전을 염두에 둬야만 한다면 먼 곳의 주민들은 버린다.

왜냐면 공성전은 소모전이고 물자전이기 때문이다.

군대 유지란 게 소모되는 물자를 감당하는 싸움이라면, 공성전도 마찬가지였다.

빈번하진 않지만, 이런 경우가 있으니까 마을들이 영주의 눈에 들려고 발악을 하는 것이다.

눈 밖에 난 마을 같은 경우에는 태풍이 불어와도 성으로 발을 들이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데 세인은 세금을 내지 않는 여러 번우드 마을의 인간조차 모조리 불러들였다.

왜냐면 그들을 방치한다면 죽을 것을 뻔히 알기 때문이다.

디펜더스 영지처럼 아예 식수 걱정이 없도록 와인 강의 도움을 받거나.

물자가 풍족한 골드 힐과는 달리, 아레이즈는 그냥 수비에 치중된 성이었다.

그리고 수비에 최적화되어 있다는 게 마법을 부릴 수 있단 의미는 또 아니었다.

당연히 불어난 사람들은 보통 때와 다르게 식량과 식수를 소비했다.

그래서 원래 터를 잡고 있던 사람들의 불만도 있었는데, 그들 사이를 돌아다니는 기사들이 그들의 고충을 수렴하는 게 아니라 되레 화를 냈다.

“어찌 사람들이 이리 야박하단 말이오! 우리가 쫓으면 저들은 죽어요! 보세요, 뿔이 달렸습니까? 아니면 눈이 여러 개에요? 같은 인간이라고요.”

어느덧 기사들도 세인에게 물들었나 보다.

아니면 이제 곧 세인이 벌일 일을 알고 있어서였던가.

세인도 바보는 아니니 빨리 소모되는 식량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방법이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몬스터들은 논과 밭을 불태우길 즐겼고….

그들을 약탈하려 해도, 그들이 먹는 것은 인육이 주를 이루었다.

그리고 앞으로 상황은 더 심각해질 것이다.

그는 별로 심사숙고하지 않았다.

솔직히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민은 시간 낭비였다.

앞으로 골드 힐이 도와주긴 하겠지만 글쎄….

대신, 그는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  *  *

영지민들은 충격을 받았다.

어느 날 가장 넓은 공터에 식탁이 차려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식탁에 앉은 사람은 바로 세인이었다.

영주님의 얼굴을 보기도 힘들 때, 세인이 광대처럼 식탁에 앉아 식사하는 모습은 꽤 충격적이었다.

영지민은 기사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왜 저러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기 마련이다.

세인의 의도를 알아도, 날고 싶다고 해서 날 수 없듯이…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심리적인 영역에서 불가능한 것을 그들의 영주가 원하고 있었다.

그것도 충격적인 방법으로.

세인은 맛있게 식사를 했다.

냅킨을 두르고, 큰 물잔을 빙빙 돌렸다.

와인도 아니고, 물잔을 빙빙 돌리는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멀리에서 자신을 조심스럽게 바라보고 있을 사람들의 시선 앞에서, 태연하려고 애를 썼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왔다.

근처에 서 있던 병사들이 창으로 제지하려 했지만, 세인은 손을 들어 다가오는 자를 용납했다.

천천히 맞은 편에 선 자는 바로 괴팍하게 생긴 노인, 아스칼리온이었다.

지금의 그는 매우 지치고, 평소보다 더 주름살이 많아 보였다.

성에 엄청나게 사람을 들인 것 때문에 꾸짖으러 왔을까?

아니면 귀족의 이런 작태를 비웃으러?

둘 다 아니었다.

아스칼리온은 복잡한 얼굴로 세인을 바라보다니 입을 열었다.

“무엇을 원하는지 충분히 알겠습니다. 왜 자존심을 내려놓았는지도, 하지만 무리입니다. 영주님.”

세인은 먹던 고기를 내려놓았다.

광장 한복판에 식탁보를 펼치고 이렇게 앉아 있는 게, 고기 먹는 자랑이나 하려고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 고기는 바로 몬스터의 고기였다.

몬스터 고기는 독성이 있는 것도 많았지만, 사실 맛이 좋고 영양가가 듬뿍 들어 있는 것도 많았다.

결국, 잘 가려 먹으면 될 일이다.

어디서도 식량을 수급할 수 없다면,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된다.

정말 그런가? 하고 말이다.

세인은 편견을 다 빼놓고, 합리적으로 생각했다.

결국, 영지민을 배부르게 할 수 있는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아스칼리온은 평소 그답지 않게 평온한 어조로 이야기를 했다.

“영주님. 물론 굶주림이 극에 이르면 사람들은 뭐라도 먹을 것입니다. 그전에 이런 것을 권하고 싶겠지만, 이런 것을 먹으면 밀려오는 자괴감은 어떻게 감당해야 합니까? 역겨움도 역겨움이지만, 그 수치와 처참함은요?”

“살기 위해서는 자존심도 내려놓아야 한다.”

“삶 자체가 자존심입니다. 몬스터가 밖에 가득한 이때. 자존심을 내려놓는 방법은 쉽습니다. 자살이죠.”

몬스터는 따지고 보면 잡식성이니까 고기 맛이 아주 좋았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들은 괴물이었다.

혐오스러운 생명체였다.

그리고 좀 더 생각해 보자.

증오의 대상이기도 하고, 그 증오의 대상은 인간을 먹는다.

결국, 몬스터 고기를 먹게 되면 그 식자는 인간과 몬스터를 같이 먹게 되는 셈이다.

그게 과연 할 짓인가?

“결국, 가망 없는 짓입니다.”

“알고 있다.”

“그러면 왜?”

세인은 아스칼리온과 눈을 맞췄다.

그의 그런 눈빛에서 노인은 답을 읽었다.

세인은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

과거 비비안이 세인에게 훌륭하다고 말했던 것은 이런 의미였다.

세인도 안다, 이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하지만 시도라도 하는 것이다.

최선을 다해 자존심을 내려놓고, 안 될 걸 알면서도 시도하는 일.

비비안은 자신의 자존심 때문에라도 하지 못하고, 실패할 걸 아니까 두려워했던 일이 있다. 그래서 세인의 말을 듣고는 생각했다.

‘이 사람은 영주의 그릇이 맞구나.’

아스칼리온은 멀리 서 있는 영지민을 보았다.

그들 사이사이에는 그의 기준으로 볼 때 외지인이 가득 섞여 있었다.

“그러게 왜 바깥의 사람들을 들이셨습니까? 법적으로 그들은 영주님이 책임질 인간이 아닙니다. 세금을 내지 않습니다. 국가에 충성하지도 않고, 의무를 행하지도 않습니다. 그들 때문에 왜 우리가 삶을 위협받아야만 합니까? 이 모든 것은 영주님의 고집 때문입니다. 이기려면 저들을 쫓아내야 합니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저들을 내보내야 합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노인의 음성에 세인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입안이… 비렸다.

“한 소녀가 있다. 그녀는 아무것도 몰라. 그냥 추운 날, 추운 땅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따라 산에 산다. 물론 부모가 한 명만 있을 수도 있겠지. 아예 부모가 없을 수도 있어. 흔한 거야. 고아라는 건.”

“….”

“그녀는 돼지를 친다. 평생 돼지들만 데리고 살았다. 동화책을 읽을 기회조차 없었어. 그녀가 아는 건 동물을 기르는 일. 추위에 떨면서도 그나마 뒤척거리며 추위를 덜어내는 일뿐이다. 그녀는 하루하루 힘들게 산다. 그녀의 손과 발은 거칠고 글을 더듬더듬 읽지도 못한다. 국가와 법 운운 이전에, 국가와 법이 뭔지나 알까?”

세인은 계속해서 말을 쏟아냈다.

“머리는 빗지 못해 산발인 소녀가. 이가 빠져서 크게 웃을 때마다 빈틈이 많이 보이는 그녀가. 앞으로 돼지들과 함께 살며 산속에서 외로울 소녀가. 불한당이 그녀를 괴롭히면 아무것에도 보호받을 수 없어 두려워할 그녀에게, 내가 받을 돈이 있는가? 그리고 국가가 그녀에게 뭘 요구해야 하지?”

아스칼리온은 그때 처음으로 진심을 다해 분노하는 눈동자를 보았다.

자신이 그렇게 문서로 고약한 짓을 해도 반응이 없던 사람.

대중 앞에서 체면을 구기게 해도 끄떡도 안 하던 사람이 처음으로 노여운 눈동자를 보였다. 노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인간이 더러운 몬스터 놈들과 다른 점은, 시간을 나누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린 약하다. 대신 서로에게 자신의 시간을 나누어 준다. 그 행동에 거리낌이 없다. 왜냐면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그게 옳다는 걸 아니까. 그러니까 인간은 고귀하다.”

“….”

“나도 당신의 손자에게 내 생명을 연장받았다. 그는 내가 자살하려 했을 때 최선을 다해 말리고, 내 삶을 연장해 주었다. 나는 그가 나누어준 시간으로 살고 있다. 나는 그에게 배웠다. 인간의 수많은 고귀함 중 하나는 타인에게 자신의 시간을 나눠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 영지민이 남에게 자신들의 시간을 나눠 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먼 곳의 그들을 들였다.”

“내 손자는….”

“남에게 시간을 나누어 준다 해서… 자기 죽음이 빨라진다고 해서. 저들을 내쫓아야 한다면, 나는 내가 아끼는 이들에게 서슴없이 말하겠다. 그건 인간이 아니다.”

세인은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의자를 탁자에 가져다 붙였다.

손에 쥔 냅킨을 내려놓은 그는 마지막으로 못 박았다.

“몬스터들 앞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라면 싸우겠다. 너희들을 위해 내 목숨을 바치마. 악귀처럼 싸우며,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 결국, 짓밟혀 처참하게 죽을 것을 약속한다. 내 시체는 기꺼이 그들의 조롱과 침에 젖을 것이다. 하지만 나도 너희들에게 원하는 게 있다. 인간으로 남아라. 얼마나 오래 살든. 죽는 날까지 인간으로서 살아라.”

그리고 영주는 돌아섰다.

그는 실패한 영주였다.

이것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것을 알고도 일을 벌였고.

역시나 보기 좋게 실패했다.

그는 그러니까, 말하자면 패배자였다.

세인은 훌륭한 영주도 아니고, 능력 있는 영주도 아니다.

하지만 아스칼리온은 그것을 탓할 수가 없었다.

남겨진 그는 자신의 가슴을 치며 울었다.

그렇게 실컷 울고 나서야, 그는 진정으로 손자인 아델을 떠나 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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