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39화 (39/307)

# 39

& 가이더 (2)

세인은 먼 곳에서 전달된 첩보를 받고, 주변 마을의 사람들을 성으로 들이게 했다.

각지에 흩어진 사람들이 가재도구를 가지고 성에 모인다.

미어터질 만한 인파가 우글거릴 때, 그는 레드에게도 사람을 시켜 경고하게 했다.

- 숨거나 도망쳐라. -

레드가 있는 곳은 울창한 숲속이었다.

근래에 생긴 목책이 방어에 도움도 되겠지만, 큰 기대는 금물이었다.

오히려 평소 야만인들이 이용하는 지하 동굴 같은 은신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은신처야말로, 그들이 낙후된 장비로 오래 생존할 수 있는 비결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결국 천운에 의존해야 하겠지만, 신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연설에 자신 있는 사람?”

더이스와 행크, 맥은 서로 눈치만 보았다.

한숨을 쉰 세인은 이렇게 말했다.

“제비뽑기라도 해서 누구 하나가 주민들을 안심시켜.”

그리고 평소 때에는 하나만 걸던 가이더의 국기를 성 곳곳에 내걸었다.

창고의 가장 깊은 곳에 잘 보관되어 있던 가이더의 국기가 바람에 휘날린다.

성문 위에서, 망루들 위에서 그 붉은 모습을 펄럭이며 모두의 앞에서 드러내었다.

마플은 하녀들과 함께 아레이즈의 깃발을 망토에 붙이는 작업을 했다.

아마 골드 힐이나 디펜더스에서도 지금 같은 작업을 하고 있겠지.

잘하고 있나 와본 세인은 이렇게 말했다.

“이쁘게 잘할 필요 없어. 그냥 박음질만 튼튼히 해서 떨어지지 않게 해줘.”

“예. 영주님.”

세인은 영주 재량으로 창고에서 무기들을 방출하고, 영지민의 손에 나눠 주게 했다.

이걸 본 기사들이 기겁하며 반대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차피 쇠스랑을 들 거다. 그들이 불안감에 반란을 일으키고 싶었으면 낫이라도 손에 들 거야. 차라리 제대로 된 무기를 쥐여 주는 게. 적어도 애 딸린 과부의 수면에 도움이 될 거야.”

“영주님은 가끔 너무 파격적이십니다.”

가장 선임인 맥이 투덜거렸다.

기사들과 영주만 있다 해도 이런 말을 할 수 있던 까닭은, 위기 앞에서 그들의 거리감이 순식간에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세인도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제비뽑기는 더이스가 걸렸다.

그는 더듬거리며 연단으로 나가 영주의 연설문을 읽었다.

별 내용 없었다.

뭉치자, 견디자, 이기자, 힘내자… 정도?

그러자 철없는 아이들과 멋모르는 농부들이 손뼉을 쳤다.

멀리에서 그 박수 소리를 듣는 세인은 우울한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그때 자신의 손바닥이 움직였다.

짝!

“우울한 생각은 여기까지다. 이제 끝났다.”

고민도 많이 했다.

골똘히 생각하며 돌파구가 있는지 자신을 후벼 파고, 또 파 보았다.

그래서 고작 여기였다.

세인은 이제 고뇌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저들에게 필요한 것은 고뇌하는 영주 따위가 아니었다.

병사들은 물통들과 기름통들을 굴리며 날랐다.

성벽 위의 사람들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따금 그들은 아주 멀리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깨달았다.

텅 빈 마을 중 몇 개가 불타고 있다는 사실을….

아닌 게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들은 무단으로 인간의 터에 침입했다. 그리고 건물을 부수고 불태웠다.

그들이 태우는 것은 집뿐만이 아니었다.

들판의 강한 식물이나 겨울에 잘 자라는 벼들도 다 불탔다.

미처 수거하지 못한 인간의 소중한 식량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왜?

그냥 불 지르는 게 좋으니까.

눈 섞인 비가 오면, 진창길에 발자국들이 무수히 찍혔다.

인간들의 발을 받아들이던 진흙에는, 이제 수박잎 형태의 발자국들이 무수히 찍혔다.

그 발자국 위를 더 크고 기형적인 발자국들이 덮는다.

첫 조우는 목책에서 시작되었다.

성벽 밖에 높게 세워진 목책을, 경계 근무자가 창대로 툭툭 두드리며 걷고 있었다.

목책을 연결하는 이음에 이상이 없나 확인하는 것이다.

툭툭. 툭툭.

톡톡.

그때 근무자가 흠칫했다.

자신의 두들긴 소리보다 더 많은 두드림이 있는 것이다.

그는 세로로 세워진 갈색 나무들을 다시 창대로 두들겼다.

툭툭 하고 말이다.

그러자 건너편에서 응답하는 소리가 있었다.

톡톡.

얼굴을 굳힌 근무자는 걸음을 빨리했다. 그리고 세워놓은 기둥들중 벌어져 있는 틈에 다다랐다.

얼굴을 그 틈에 가까이 붙여 보았다.

‘건너편에 뭔가 있는 건가?’

그런데 예상했던 우거진 숲의 광경보다 이상한 게 그의 앞에 보였다.

붉은 태양.

아니 붉은 루비인가? 선명한 붉은색. 그리고 깜박인다.

깜박. 깜박.

그것이 눈동자라는 것을 알아차린 그가 황급히 고개를 뒤로 빼냈을 때, 날카로운 송곳 같은 것이 간발의 차로 그의 눈이 있던 자리에서 솟아 나왔다.

그것은 위에서 아래로 오르락내리락거리더니, 다시 도로 쑥 하고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건너편에서 성질이 났는지 미친 듯이 긁어대는 소리가 났다.

마치 날이 잘 선 단검으로 나무를 긁어내리는 듯한….

사색이 된 근무자는 뒤로 달려가며 망루 위의 병사를 불렀다.

저 너머에 뭐가 있지?

*  *  *

“리자드맨입니다.”

“숫자는? 알 수 있나?”

맥의 보고에 세인은 깍지 낀 손을 풀지 않은 채 덤덤히 질문을 던졌다.

“위쪽에서 확인해도, 하도 우거져 있어서…. 그래도 서른 마리가 훨씬 넘는 것 같습니다. 지금 목책 너머에서 약한 곳을 찾는지 건드려 보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색깔이 섞여 있을 것이다. 그렇지?”

“예.”

리자드맨만 있을까?

목책 너머로 우거진 숲이 버티고 서있었다.

그 울창한 잎들 사이사이를 채우는 건, 어두운 그늘이다.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나무들.

리자드맨들은 높은 곳에 쉽게 오를 수 있었다.

…민첩하니까.

“어떻게 할까요?”

“숫자가 많지 않을 테니, 이 김에 해치워야지. 바람을 빼내야 하니까. 많은 숫자가 건너편에 도착하면 그때는 안에 들어가지도 못한다. 지금은 그나마 왔다 갔다 하면서 죽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놈들의 수색을 말려야 해.”

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일을 대비한 무장을 준비시키러 밖으로 나갔다.

다음날 새벽은 안개가 가득 찬 아침이었다.

땅에 희고 짙게 흐르며 고여 있던 안개들을 헤치고 말들이 끌려 나왔다.

마구간 지기는 말들이 고개를 휘젓느라 날리던 그들의 머리털을 쓰다듬어 주며 진정시켰다.

그 앞에 모인 병사들은 자신들의 장비 상태를 점검했다.

성내에서는 세인이 지도를 펼쳐놓고 설명을 하고 있었다.

“골드 힐의 용병들이 떠나지 않았다면, 그들은 날카로운 검이 될 거다. 그리고 디펜더스의 기사들은 강한 창이 될 수 있어. 결국, 그 둘이 날개다. 문제는 골드 힐의 병력은 충성심이 약하고. 디펜더스는 병사의 수가 많지 않아.”

비비안의 경우에는 통제할 수 있을까 두려워 자제하던 병사를 뒤늦게 늘린 감이 있었다.

세인은 가운데에 있는 자신의 영지를 검지로 짚었다.

“우리는 병사가 충분하다. 그리고 이 성은 수비에 최적화되어 있다. 결국, 우리가 중심이 되고 방패가 된다. 약점이 노출된 영지가 있으면 우린 주변이 확보되는 즉시 거기로 달려간다.”

“우리에게 위기가 닥치면요?”

“비비안 영주의 기사들이 와줄 것이다. 기사단, 그들의 강함이라면 위기를 빠르게 타개할 수 있어. 집중된 그들로도 안 된다면 그건 진짜 어쩔 수 없는 위기인 거지.”

영지 둘이 위험해 지면?

셋이 위험해 지면?

그런 질문은 아무도 던지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이렇게 대략 얼개를 만들어 놔도….

결국, 위기가 중첩되고 예상치 못한 난관이 닥치면 지휘관의 임기응변이 필요한 것이었다.

지금 기본 포지션은 이렇다는 소리다.

세인은 하얀 외투를 걸쳤다. 그리고 아레이즈의 문장이 달린 망토를 뒤집어썼다.

그의 벨트 아래에는 검집에 잠긴 검이 달각거렸다.

무겁고 넓은 방패를 들기 전에 그는, 그의 기사들에게 말했다.

“다들 잘 알겠지만, 이제 판단 외에 불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아라. 감성적인 생각은 필요 없다. 감성에 빠질 수 있는 시간은 끝났다.”

“맞습니다, 영주님. 저는 어떻게 하면 저들의 유희를 박살 내 버릴 수 있을까 하는 건설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더이스가 농담을 하며 장갑을 낀 손 위에서 봉을 휙휙 돌렸다.

그리고 익숙한 몸짓으로 가죽 혁대에 꽂아 넣는다.

이번에는 행크가 성에 남는 역할이었다.

앞서 나가는 맥의 어깨를 두드리며 행크가 말했다.

“건투를.”

고개를 끄덕인 맥은 미늘 두건을 뒤집어썼다.

그리고 옷깃을 올리고 코 밑을 가린다.

기사들이 나오는 것을 본 병사들이 움직이고 세인은 말 위에 올라탔다.

그는 성안에서 죽을 생각이 없었다.

이때만큼은 말도 안 되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이 괴물이길 바라는 마음.

괴물이 되어서라도 놈들을 더 죽이고 싶은 마음.

병사들의 몸이 한껏 긴장된 것을 내려다보며 세인은 손에 하얀 장갑을 끼었다.

푸른 테가 둘려 있는 두꺼운 기마용 장갑이었다.

“걱정하지 마라. 우리는 돌아온다. 상대는 기껏, 기형 도마뱀이야.”

그렇게 다독이며 말을 출발시켰다.

따각따각, 이는 말발굽 소리는 안개 너머에서 부드러운 초지를 만나 사라졌다.

이윽고 성문 옆의 작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안개가 그림자들을 날름날름 집어삼켰다.

성문을 나와 목책까지의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다.

곧, 말들은 성을 빠져나와 목책 앞에 섰다.

그리고 목책이 쩌적 하고 열리는데, 우연인지 건너편에서 이상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가파르고 여린 목소리.

그 울음은 괴조의 울음처럼 길게 이어지다가 다른 곳의 응답을 받았다.

마치 신호를 주고받는 것처럼, 안개로 가득 찬 공기 이곳에서 저곳으로 돌아다닌다.

병사들은 투구 안에서 눈빛을 반짝이며 침을 삼켰다.

풀들은 안개가 적신 이슬에 흠뻑 젖어 있었다.

움직이던 일행 중 한 병사가 엉겁결에 돌아보았다.

목책의 반대편은 날카로운 발톱으로 긁어댄 자국들이 무성했다.

그 자국들은 폭력적인 야생을 잘 대변해 주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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