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38화 (38/307)

# 38

& 가이더 (1)

정말로 전쟁이 일어나는구나!

눈앞이 아찔하면서도 세리스는 어서 아레이즈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전에 순서라는 것이 있었다.

그녀는 뛰쳐 올라가 그녀의 할머니에게 사실을 고했다.

크림힐트는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심정이었다.

세리스가 충격에 빠져 있다면 크림힐트의 얼굴에는 비애가 가득했다.

같은 집안이었음에도 사상이 달랐던 둘은 이렇게 다른 반응을 보였다.

‘대체 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지? 그들이 대체 왜?’

괴물들은 승산이 없었다.

가이더 따위야 흔적도 없이 사라질 테지만, 결국 패배는 그들의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 전체와 맞서 싸울 수 없고, 결국 고립되어 죽임을 당할 것이다.

대체 누가 그들과 동맹을 맺겠는가?

기정사실화된 패배인데….

‘마지막에 패배해도 상관없다는 것인가?’

그때 누군가 달려나가려는 세리스의 소매를 잡았다.

돌아보니 크림힐트였다.

“어딜 가려는 것이냐?”

“아레이즈에요!”

“얘야, 정신 차리렴! 정신 차려!”

크림힐트가 매섭게 꾸짖었다.

그리고 세리스에게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그녀가 저절로 집중하도록 말이다.

“우린 수도에 가야 해.”

“할머니. 아레이즈에 제 동료가 있고, 거기 영주에게도 경고를….”

“세리스. 전후좌우를 살피거라. 우린 천리안을 데리고 수도로 가야 해. 그리고 알현준비를 해야 한단 말이다. 경중을 가리거라. 지금 한 개인을 챙길 때가 아니야. 그곳 영주도 이럴 때를 대비해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보고를 해야 해!”

세리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크림힐트를 바라보았다.

크림힐트는 죽어도 남아서 여기를 지키겠다는 둥,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았다.

물론, 병력 일부는 여기를 지키겠지만 귀족들은 다 빠져나갈 것이다.

세상과 싸워 몬스터들이 이길 수 없었다.

이대로는 확실하다.

그런 확실함처럼 가이더도 절대 살아날 수가 없었다.

크림힐트는 다시 말했다.

“나는 너를 길게 설득할 시간이 없다. 가산을 정리해야 하니까. 나라를 위해서 네가 뭘 해야 맞는 것인지 생각해라. 왕에게 보고하는 게 먼저냐? 아니면….”

“할머니 제발….”

“아무리 검을 들고 싸우는 전사라고 해도 그 정도 머리는 있겠지.”

세리스는 고개를 숙였다.

이건 누가 생각해도 왕에게 달려가 보고를 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래야 나라 전체가 알 테니까.

*  *  *

시간이 걸려 결국 보고를 받은 왕은 시름에 잠겼다.

당연히 신빙성을 확인하는 그에게, 한 신하가 다가와 천리안에 대해 귓속말로 속삭였다.

그러자 왕은 비참한 기분과는 반대로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네이블이 승승장구하는 이유가 여기 있었군.”

하지만 그건 아주 잠시였다.

조속히 레인저들의 보고를 가져오라 시켰는데, 최근에야 보고가 점점 끊기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때까지의 내용은 언제나 그랬듯이 격한 교전 중.

“이를 어찌하면 좋으냐.”

평소처럼이 아니라, 너무 고개를 숙였기 때문에 왕의 왕관이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떨어질 듯 위태하게 걸쳐져 있는 왕관 밑 얼굴은 슬픔 그 자체였다.

“상대가 거대한 나라라면, 우리는 웃으며 싸운다. 질 수밖에 없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건 몬스터와의 싸움이다. 포로도 없고 일반적인 점령도 아니다.”

생태계에서 그 종의 존립을 걸고 일어나는 싸움.

일단 저쪽이 발톱을 드러냈으니 후퇴는 없을 것이다.

상대가 생태계에서 사라질 때까지 싸운다.

“게다가….”

왕은 차마 자신의 입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승산은 제로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괴물과 무슨 외교적인 타협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신하들도 비탄을 참지 못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고뇌하고 괴로워한다고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급한 대로 방어에 필요한 기본 조치를 내렸다.

그리고 회의를 재개했다.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고 해서,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왕이 크림힐트에게 물었다.

그는 크림힐트에게 ‘왜 북쪽을 지키지 않고 여기에 있소?’라고 말하지 않았다.

노회한 왕은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아무리 봐도 크림힐트 후작은 기특한 충신 유형은 아니다.

“얼마나 버틸 거 같소? 그들이 버텨줘야 우리가 방비할 시간을 더 많이 가지오.”

“새파란 애송이들입니다. 폐하. 제가 그래서 그렇게나 교체를 힘써봤지만,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들이 결사 항전의 뜻이나 제대로 알겠습니까?”

보통 때라면 엄청난 문제가 될 발언이다.

영주자리를 놓고 수작질을 벌였다는 말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집에서 불이 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얼마나 버틴다는 소리요? 일주일? 이주일?”

“본격적인 남하가 시작되면, 전투가 시작되고 이틀 정도일 것입니다.”

대전에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렇게나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는 이럴 때 대중이 기대하기 마련인, 나라를 구할 영웅의 기개를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아주 잘생긴 왕자가 쭈뼛쭈뼛 왕에게 다가온다.

왕은 그가 다가와 귓속말을 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왕자는 이렇게 속삭였다.

“조세핀이 임신을 한 거 같습니다.”

“….”

그러니까 일국의 왕자라는 사람이.

지금 이런 마당에….

왕자비가 임신한 것 같다고 말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왕은 더욱 깊은 비참함에 몸을 떨었다.

당연히 그는 여기까지 기어들어 와서, 고작 한다는 소리가 임신 이야기인 왕자의 의도를 알아먹었다.

“가면 볼모는커녕 광대가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으냐?”

“저도 사내니 가장으로서 아이를 지켜야죠.”

신하들은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왕은 왕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든가 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하는 행동이 상대에겐 평생 기억에 남는다고 믿었다.

어쩌면 두고두고 수치감에 몸을 떨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기 아들도 사람인데, 훗날 양심의 가책을 느끼겠지.

그때 너무 큰 고통에 휩싸이지는 말아라.

그래서 오히려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그래. 과연 그래야 남자답지. 해외로 떠나라. 명령서를 작성해 주겠다.”

그리고 왕자가 대전을 빠져나가기를 기다려 크림힐트에게도 말했다.

“후작. 당신의 손녀는 성기사요. 그것도 엄청난 검사. 그 귀중한 인간의 별을 고작 여기에서 지게 하지 마시오. 성국은 당연히 소중한 인재를 보듬어 안을 테니 잠시 거기에 몸을 의탁하시오.”

그는 농담이라도 크림힐트에게 국가에 남을 거냐고 묻지도 않았다.

왕은 아까도 말했지만 사람 보는 눈 정도는 있었다.

크림힐트는 황급히 허리를 꺾어 보였다.

지금 자신의 꼴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모양새 때문에 죽음의 강을 건널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런 여 후작을 다른 신하들은 역겹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많은 인재를 도피시켜서 필히 고국을 기억하도록 만들겠습니다.”

“그래 주시오. 우리 국가를 기억할 젊은이가 어딘가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 있소.”

남으라고 해봐야 충성을 바치지 못할 자다.

저런 저질이, 왜 후작 자리에 앉아 있냐고 호통을 치는 것보다….

이렇게 끝내어, 왕자의 보필을 기대하는 게 차라리 나았다.

그래도 아예 바닥인 위인은 아니니 눈치껏 알아서 하겠지.

평화 때에는 그래도 중간은 하는 위인이었으나, 전시가 되니 진가가 드러났다.

왕은 피곤하다는 듯, 얼굴을 손바닥으로 한차례 쓸어내리더니 피난을 명령했다.

“이웃 나라들에 경고를 하고, 최대한 많은 국민을 밖으로 빼내라. 나는 수도에서 너희들의 복심이 되어 주겠다.”

그때 한 장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일단 몸을 빼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머리가 살아야 몸도 살아 훗날을 대비할 수 있으니. 잠시 굴욕을 참고, 후일을 도모하심이….”

그러자 왕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지금까지 그는 필사적으로 울분을 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눈치도 없는 놈이 끝에 와서 속을 뒤집어 놓으니까 화가 폭발했다.

그가 팔걸이를 내리치며 외쳤다.

“미쳤소? 나는 이 나라의 제일가는 군주요! 내가 여기서 죽지 않으면 대체 누가 여기서 죽는단 말이요! 그게 허약한 문신도 아니고. 군부에 몸을 담은 자가 주인에게 할 소린가?”

그러자 얼굴이 홍시처럼 달아오른 장군이 황급히 얼굴을 푹 숙였다.

*  *  *

역사는 그들을 알아주지 않을 것이다.

기억하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면 역사가들의 입장에서는 기억할 가치가 있는, 큰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국가적 위기에서 해외로 도피하는 크림힐트 같은 사람.

하늘에서는 하얀색이 아니라 회색빛 눈이 내렸다.

그것은 내려오며 점점 굳어져, 얼음 알갱이로 화해 쏟아졌다.

그중 몇 개가 서 있던 머독의 턱수염을 때렸다.

그는 홀로 서서 거친 숨을 내뱉고 있는 상태였다.

얼굴에는 대각선으로 가로지는 상처가 생겨났고, 거기에서 흘러나온 피가 가슴 섶을 적셨다.

그가 두 손을 들어 머리 위의 뭔가를 잡았다.

그리고 끙, 소리를 내며 아래로 힘껏 당겼다.

거대한 괴물의 몸집이 그의 움직임을 따라 뒤집히더니 굽힌 그의 무릎에 머리를 부딪쳤다.

으드득!

기이한 각도로 꺾어지는 괴물의 머리.

머독은 확인 사살로 건틀렛을 낀 주먹을 내리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밟고 있는 땅은 선 분홍빛이었다.

여자아이들이 곱다고 좋아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런 감성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괴물들이 즐비했다.

그의 부대는 박살 났다.

그리고 거기를 지키던 인간들은 지금 높은 장대에 매달려, 거친 바람에 연처럼 나부끼고 있었다.

머독을 중심으로 빙 둘러선 괴물들의 몸 너머.

그들의 그림자가 덜렁거리는 것이 머독의 눈에도 보였다.

하지만 비참함과 분노에 몸을 떨지는 않았다.

아직까진….

“대단하구나.”

그때 키득거리며 그를 구경하는 괴물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앞으로 나왔다.

고군분투하던 인간을 구경하던 괴물들은, 군단장이 나서자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이런 유희에 나설 존재가 아닌데, 요즘 들어 기분 좋은 일이 있나 보다.

사기 진작을 위해서인가?

검은 갑옷을 빛내는 군단장은 몸을 때리는 얼음 알갱이 속에서 머독의 주변에 시선을 던졌다. 거기에는 머독에게 덤벼들었다가 머리가 박살 난 시체가 즐비했다.

머독은 이미 몸에 화살도 몇 대 맞고, 자상이 가득한 상태였다.

출혈 때문에 오한이 뼈까지 잠식했을 텐데 대단한 의지다.

“네가 선발대를 움직인 놈이냐?”

“그렇다.”

“더럽구나. 전쟁도 알지 못하는 놈.”

머독의 비난에 군단장이 작게 웃었다.

“전쟁이란 건 상대가 될 때 성립되는 거야. 압도적으로 일방적이면 그건 전쟁이 아니야. 그냥 괴롭힘이지. 우리가 왜 가이더와 전쟁을 해야 하나?”

“이 더러운 악마 새끼야 와라.”

머독이 두 주먹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하지만 군단장은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쪽뿐만이 아니라 각기 다른 방향으로 수백 명의 군단장이 출발했다. 그들이 거느린 군대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가이더뿐만이 아냐. 이제 대륙 전체가 전화에 몸부림칠 것이다. 그걸 알고 비관하며 가라. 아무것도 없는 결말로.”

군단장의 말을 들으면서도 머독은 표정에 흔들림이 없었다.

솔직히 지금 그의 가슴은 증오보다도 슬픔으로 가득했다.

가이더는 좋은 나라였다.

그는 자신의 나라를 사랑했고 아꼈다.

또한 작지만 이곳에서 태어나길 잘했다고 느꼈다.

당장 자기 죽음보다도, 자신을 태어나게 했던 이 테두리의 소멸이 슬펐다.

타국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좋은 나라였는데….

정말 좋은 나라였는데….

군단장의 이죽거림을 들으면서, 움직이는 힘마저 아끼려는 머독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어서 오라고, 수준 이하의 악마 새끼야.”

군단장은 미끄러지듯이 앞으로 움직였다.

그러면서 깜짝스런 움직임을 했다.

다른 이들은 모르지만, 라이트닝 블러드를 발견한 그는 기분이 최고조인가 보다.

진짜 평소 안 하던 짓을 하던 걸 보면 말이다.

그는 머독에게만 보일 수 있도록 자신의 투구 앞부분을 올렸다가 내렸다.

그러니까 머독은 아주 찰나이지만, 군단장의 투구 안을 볼 수 있었다.

군단장의 계획은 머독이 놀람으로 눈을 부릅뜰 때, 그의 머리를 베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우스꽝스러운 표정의 머리를 장대에 달고 다녀야지….

하지만 그의 그런 의도는 무산되었다.

머독은 결연한 표정으로 주먹을 날렸다.

무거운 쇳소리가 군단장의 갑옷에 적중했고, 무거운 불똥이 미친 듯이 터져 나갔다.

소용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한 움직임이었다.

갑옷이 충격에 덜덜 떨리자, 기분이 나빠진 군단장은 그만 손을 거칠게 휘두르고 말았다.

살이 찢기는 소리가 나고 머독의 머리가 공중에 떠오른다.

털썩.

머리를 잃는 몸이 뒤로 넘어갈 때.

군단장은 머독의 머리를 들어 올렸다.

기대하는 심정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는 짜증 난다는 듯이 곧 그 머리를 집어 던져 버렸다.

“흥이 샜잖아.”

데구르르 구르다가 멈춘 머독의 얼굴은, 오히려 매우 슬픈 표정이었다.

나의 조국 가이더여 영원하라.

비록 사자들의 가슴 속에서만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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