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37화 (37/307)

# 37

& 화이트 라이더 (2)

야심한 시각.

아레이즈의 작은 교회에는 누군가가 앉아 기도하고 있었다.

그는 바로 아스칼리온이다.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그는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그의 뒤로 다가온 신부는 기도가 끝날 때를 기다려 입을 열었다.

“이런 시각에 돌아다니시면 건강에 해롭습니다.”

아스칼리온은 계속 등을 보이며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의 완강함에 신부는 한숨을 내쉬었고, 그걸 들은 아스칼리온은 그제야 입을 연다.

“세상에 기도를 적당히 하란 신부는 처음 보는군.”

“기도가 아니라 학대니까요.”

아스칼리온이 송충이 같은 눈썹을 들어 올리며 뒤를 보자.

청소를 하느라 빗자루를 잡고 있던 신부가 굳은 얼굴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최근에 아스칼리온님이 하신 행동은 자살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닙니다. 영지민 모두가 죽고 싶어 환장했다며 수군댑니다.”

“잊었나 본데 당신은 신부요. 말을 곱게 하시오.”

“솔직히 말해 당신이 살아난 것은 기적 그 자체입니다. 당신은 자살하는 것도 모자라. 영주님에게 살해를 종용하고 있습니다. 왜 그분이 우리를 위해 밖에서 하는 살해 말고도, 이 안에서 당신을 위해 손을 들어 피를 묻혀야 합니까?"

아스칼리온이 벌떡 일어났다.

“당신도 한통속이야? 내 앞에서 영주를 옹호하지 마! 당신은 신의 종이지 권력의 대변인이 아니야! 썩었군!”

하지만 이번에는 신부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대로 놔두면 분명 아스칼리온은 죽을 것만 같았다.

영주에게 대든 것은 정말 미친 행동이다.

거기에 기사들이 있었다면 그는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비밀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영주님.’

“어느 날 영주님이 제게 찾아왔습니다. 에메랄드 반지를 끼지 않은 상태로요.”

신부가 흠칫 놀라는 노인의 뒤를 가리켰다.

“바로 저 자리에 앉아 제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을 데리고 떠나라고.”

“무슨….”

“자신을 어떻게 말해도 좋으니 그들을 설득시켜 떠나라고 말이에요. 이곳은 피에 잠기게 될 것이다. 죄 없는 민간인과 아이, 여자, 노인을 데리고 떠나라. 그것을 위해 나를 모함해도 좋다. 가능한 많은 수를 데리고 떠나라. 눈감아 주겠다. 묵인해 주겠다. 성문을 열어 주겠다.”

노인은 이를 악물었다.

“거짓말하지 마.”

“저는 거절했습니다. 영주님이라고 모를까요?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이 추위에? 그리고 여기가 피에 잠기면 다른 곳도 안전할까요?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랬겠습니까? 저는 권력의 하수인이 아닙니다. 하지만 책임을 지려고 하는 자를 변호할 자격 정도는 가지고 있습니다. 정신 차리십시오! 아스칼리온! 그만 비탄에서 벗어나세요!”

신부는 다가가 노인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뿌리치려고 하자, 아예 두 손으로 어깨를 잡는다.

“벗어나세요. 당신의 증오에서요. 당신의 손자인 아델이 죽은 건 영주님의 탓이 아닙니다. 용서까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끔찍한 증오에서 벗어나야만 한단 말입니다.”

아스칼리온은 끝내 떨쳐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내 손자는 나의 전부였소….”

“아델은 누군가에게도 소중한 사람이었을 수 있습니다. 왜 영주님이 당신을 가만히 놔두겠습니까? 왜 그날 당신을 죽이지 않았을까요? 생각해 보세요. 당신은 지금 당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 살해를 종용….”

“은혜?”

아스칼리온이 소리를 질렀다.

그의 음성이 작은 교회 안에서 쩌렁쩌렁 울렸다.

“은혜라고 하지 마시오! 무슨 은혜? 내겐 남은 게 증오밖에 없어! 증오 외에는 도저히 나를 지탱할 수 없을 것 같단 말이야! 당신이 내 심정을 알아? 혈육을 잃은 내 심정을 아느냐고! 당신이 사랑하는 자는 불멸이잖아! 그러니 이런 감정을 알 리가 없겠지!”

신부는 잔뜩 일그러진 노인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나는 이제 아까의 말을 바꾸겠습니다.”

“….”

“당신은, 당신 자신을 용서해야 합니다. 손자의 죽음에 무력을 느꼈던 것은 죄가 아닙니다. 당신에게 당신을 죽일 권리는 없습니다. 당신에게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을 권리만 있지 자신을 망칠 권리는 없습니다. 왜인지는 당신이 가진 아델의 기억에게 물어보십시오.”

어깨가 축 처진 노인은 발을 질질 끌며 교회를 떠나갔다.

남겨진 신부는 이마의 땀을 소매로 닦았다.

그도 큰 용기를 낸 것이었다.

불쌍한 사람.

언젠가는 깨닫겠지.

*  *  *

같은 시각 세인은 꿈을 꾸고 있었다.

그에게 엘릭서의 운명이 접촉해 온 것이다.

‘소원을 말해라.’

‘소원?’

그는 왠지 모르게 익숙한 공간에 앉아 있었다.

춥고 넓었다.

여긴… 이라는 생각이 들 때, 다시 목소리가 그의 머리를 휘저어 놓았다.

‘너는 하나의 소원을 말할 수 있다. 너의 정당한 권리다’

‘무슨….’

‘그 소원은 이루어진다. 그러니 소원을 말해라.’

“뭐든지?”

그가 입을 열어 육성으로 말하자,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그렇다.’

“그것참 꿈같은 이야기로군.”

세인이 그렇게 비웃으며 부정을 하자 그 공간이 깨졌다.

눈을 떠보니 침대 위였다.

그는 눈을 깜박이며 달빛이 들어오는 자신의 방안에 누워있었다.

머리를 뒤흔든 세인은 방을 나왔다.

하긴 꿈자리가 사납지 않은 게 더 이상하지.

요즘 그가 느끼는 압력은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그 압력의 다른 이름은 책임이다.

한 학자는 인간이 행복해지는 방법으로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을 꼽았다.

그러나 양심 있는 사회성이란, 서로에 대한 관여이고 곧 책임이었다.

세인은 계속 걸어 나가 도서관에 도착했다.

도서관 내부에는 불이 켜져 있었고, 세리스가 그림같이 앉아 있었다.

세리스는 고개를 들어 창백한 안색의 영주가 자신 앞에 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신경 쓰이는 남자는 그녀에게 물었다.

“어디로 갑니까?”

“….”

“어제 제게 들린 한센이라는 상인이 말해 주었습니다. 당신이 누군지. 당신 같은 사람이 왜 여기에 들렀지요? 책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데.”

“세계수 쪽으로 갈 생각입니다.”

“세계수.”

세인은 중얼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동료와 함께 세계수 쪽으로 갑니다. 세계수는 인간의 나무이기도 하니까요. 그런 존재에게 경의를 표하고, 한번 봐두는 것도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세리스는 아비게일이 알면 기절할 일을 하고 있었다.

세인은 그런 세리스를 바라보다가 입을 다시 뗐다.

“그만두는 게 좋습니다.”

“왜요?”

“전쟁이 일어날 테니까요. 당신같이 강한 사람이 생각도 없이 거기에 가려 할 리는 없지만, 거기는 이제 가장 위험한 지역이 됩니다.”

세리스는 책장을 덮고 뒤로 몸을 젖혔다. 그리고 더욱 객관적으로 눈앞의 남자를 관찰하려 애를 썼다.

전의 일도 그렇고, 세인은 그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런데 왜일까?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제 생각을 이야기해도 될까요?”

“말씀해 보십시오.”

세인은 세인대로 꿈자리도 뒤숭숭하고 잠을 설쳐서 멍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야심한 시각에 촛불 몇 개를 사이로, 마주 보고 하는 대화는 나쁘지 않았다.

“전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세리스는 심호흡을 했다.

상대가 매파라면 자신의 말을 기분 나쁘게 들을 수도 있었다.

“그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아니 그들 일부분은 저능해도, 지도자들은 바보가 아니에요. 이성도 있고 지능도 있어요. 어쩌면 인간보다 더 높을 수도 있어요.”

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그러니 질 싸움을 할 리가 없습니다. 바보가 아니니까요.”

“좀 더 자세히 부탁합니다.”

“나는 여러 곳을 돌아다녀 보았습니다. 그리고 높은 신분의 사람들과 말을 섞어보고, 그들의 지론을 들었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경이를 보고 안목을 넓혔습니다. 당신이 내 말을 오해할까 봐 두렵지만. 당신이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것이 아니고, 세상은 아주 넓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은 아주 강합니다.”

세리스가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여 보이자, 세인은 괜찮다고 말했다.

그는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국왕들은 국가의 힘을 자랑하려고, 국내 최고의 검사에게 소드 마스터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그러면 정작 그 검사는 화를 벌컥 냅니다. 과분한 칭호니까요. 그는 국민들의 비웃음을 당하고 싶지 않은 겁니다. 하지만 그가 과분한 명예를 감당하지 못할 뿐이지. 강하다는 것은 변함없습니다.”

“예.”

“우리 조국인 가이더는 약합니다. 악이 일어서면 위태롭게 될 겁니다.”

그건 완화된 표현이고 필시 망한다.

지도상에서 송두리째 사라진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엄청난 수의 군대가 있습니다. 강대국이 있고요. 나무에 가려 악들의 수효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최대값으로 잡아도 칠대 삼입니다. 진짜 부풀리고, 부풀려서 상상에 날개를 더 해도요. 저들은 삼에 불과합니다. 온갖 상상의 마수를 다 가져다 붙여도요. 그게 끝이에요.”

“….”

“한곳에 몰려 있으니까 크게 보일 뿐입니다. 세상은 넓고 강자들도 많습니다. 그들도 그걸 알아요. 그들이 일어서면 약소국들은 무너지고 지옥이 됩니다.”

세리스는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결국 역풍을 맞게 될 겁니다. 삼이라고 말했지만, 더 숫자가 적은 그들은 결국 분쇄될 것입니다. 악하며 본능에 이끌리는 몬스터들은 몰라도 그들의 지도자들은 이걸 알고 있습니다. 그들 입장에서 가만히 웅크리고 있으면 본전입니다. 살아남을 수 있어요. 그리고 세계수 지역은 엄청나게 넓습니다. 저도 그걸 이용해 주변 이목을 피하며 이동할 생각이었죠. 그들이 그런 공간에 만족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

“그러니까 지금 도발은 그들의 본성의 발로입니다. 어쩔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하는 패악질이죠. 하지만 정말로 작정하고 일어선다면 결국 그들은 전멸입니다. 저들이 산수만 할 줄 알아도 절대 전쟁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협공을 당하는 미래가 있으니까요."

이게 정론이다.

남부로 가면 강대국들이 있었다.

그들의 군대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인간들이 만만했다면 벌써 몬스터의 천국이 되었을 것이다.

바보가 아니라면 대전쟁을 일으킬 리가 없었다.

강대국 중 성국만 해도 몬스터들의 나라와 비교 불가의 힘을 가지고 있다.

악이 일어서면 필패다.

그것도 작은 차이가 아니라, 압도적으로 망하게 되어 있다.

약소국 몇 개를 무너뜨리기 위해 그들이 죽음을 자초한다면 분명 저능아일 것이다.

세리스는 세인이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나, 기색을 살폈다.

그는 최전방에서 둥지를 틀고 있는 가이더의 방패였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실례일 수도 있다.

목숨 걸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에게 ‘앞으로 전쟁은 없을 거예요.’ …라니.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다.

하지만 세인은 그냥 깊게 생각하는 표정일 뿐이다.

“죄송합니다. 제 말이 기분을 상하게 하였다면….”

“아닙니다. 당신이 저를 영주니까 배려해 주고 있지만, 엄청난 실력을 갖춘 기사라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그런 자격을 떠나, 사람이 자기 생각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에서 한 표현은 허물이 아닙니다. 그보다….”

레인저로 생활해보면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수치로 증명하는 것이 아닌 확신이다.

문제는 이것을 정제해서 상대가 납득할수 있도록 말하는 게 어렵다는 것이다.

‘내가 틀렸다면 좋을 것이다.’

세인이 틀렸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는 확신했다.

그들의 적의.

모이는 뜻.

외침과 불빛….

그때 세리스는 눈앞의 남자가 진실을 말하기 위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았다.

어떤 사람은 얼굴로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세인은 그런 사람이었다.

뭔가를 증명하려는….

상대가 믿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증명하고 싶어 하는 그의 얼굴이···.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말보다 먼저 그녀의 가슴을 흔들었다.

“당신은 세계수 쪽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성인이고 강한 기사입니다. 당신의 검이 좇는 곳도 자유고요. 하지만 나는 우리나라의 소드 마스터가 지옥으로 가서 연소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은 가서는 안 됩니다.”

세리스는 세인의 얼굴에서 뭔가 충격을 받았다.

이성적인 논리가 아니었다.

그런 건 아무것도 없었다.

설득도 뭣도 아니다.

하지만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그녀의 가슴을 쳤다.

“전쟁은 일어납니다. 고결한 기사인 당신은 절대 거기로 가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사기를 진창에 처박고 싶지 않다면.”

다시 한번 불길한 육감이 세리스의 가슴을 쳤을 때,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세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진정으로, 그들과의 전쟁이 일어난다고 믿나요?”

그리고 그의 입술에 집중했다.

세인이 대답했다.

“예.”

역사학자들이 역사를 기록할 때 난감해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건 바로 영웅들의 돌출 행동이다.

한 나라의 시조가 수도를 정하고 기틀을 닦는데, 즉흥적으로 보이는 움직임에서 뭔가 근거를 써 내려가야 하는 분석 자체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그냥 ‘기분에 이끌려 그 중요한 일을 해냈다’고 쓰기도 모호한 일이다.

세상 모든 일이 이성적으로만,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영감, 예감, 육감, 예지.

그게 아주 중요한 일을 좌우하기도 한다.

세리스는 여관으로 달려가, 자고 있던 불쌍한 아비게일의 뺨을 탁탁 쳤다.

밤중에 봉변을 당한 아비게일은 소스라치며 일어난다.

그의 앞에는 심각한 얼굴의 세리스가 버티고 서있었다.

“잘 들으세요. 아비게일. 저는 잠시 자리를 비울 거에요. 빨리 확인하고 싶은 일이 생겼어요.”

“예? 뭐라고요?”

“두 번 말하게 하지 말아요. 아마 곧…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 분명 저의 착각일 테니까.”

순수한 마법사 청년 아비게일은 세리스의 심각한 얼굴을 올려다보며 얼빠진 소리를 했다.

“저를 여기에 버리고 간다고요?”

세리스는 순간 아비게일을 발로 걷어차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다 심호흡을 한 그녀는 눈을 감고 조용히 말했다.

“그러니까 왜 승마에 익숙해지지 않냐 이 말입니다. 그럼 제가 오밤중에 멀미하는 사람을 끌고 가야 할까요? 그리고 다 성장한 성인 남성이, 자신을 버리고 가냐고 묻기에는 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예… 예, 예.”

그 서슬에 자라목이 된 아비게일을 남겨두고, 세리스는 마구간으로 이동했다.

그녀의 백마 이그문트는 어둠 속에서 조용히 눈을 빛내고 있었다.

이그문트를 밖으로 끌어낸 세리스는 백마의 머리를 양손으로 붙잡고 속삭였다.

“죄송합니다, 나의 친구. 하지만 너무 급해요. 내게 힘을 빌려주세요. 질풍처럼 달리는 나의 발이 되어 주세요.”

이그문트는 알았다는 듯 조용히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이그문트에 올라탄 세리스는 그야말로 질풍처럼 달렸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마치 하얀 새가 수평비행을 하는 것처럼 그 먼 거리를 순식간에 돌파해 버렸다.

곧 웅장한 성이 그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고, 그녀의 방문 소식을 들은 총관이 허겁지겁 뛰쳐나온다.

“아니 아가씨? 갑자기 어찌한 일로?”

“할머니는?”

“에… 마사지 받고 계십니다.”

“안내해 주세요.”

크림힐트는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고 들어오는 자신의 손녀를 바라보았다.

세리스는 그녀의 자랑 중 하나이긴 한데, 가끔 너무 전사처럼 행동했다.

여기가 어딘데… 저 칼차고 들어온 것좀 봐라.

며느리를 잘못 들였어.

그래서 애가 저렇게 경우가 없는 거야.

“내가 망아지를 키운 것인지, 손녀를 둔 것인지 모르겠구나.”

네이블 성의 후작이 혀를 끌끌 차는 가운데, 세리스가 인사고 뭐고 다 잘라먹으며 본론을 꺼냈다.

“할머님. 저는 천리안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 생겼습니다.”

“그래 너도 알겠지만, 한 달에 딱 한 번 가문을 위해 질문을 할 수 있다. 그것도 한 가지에 대해서만. 그러니 순번을 기다려라. 안 그래도 물어볼게 쌓여 있거든.”

손짓으로 안마사를 물러가게 하며 크림힐트가 말하자, 세리스가 간청했다.

“정말 급해요.”

“정말 왜 다들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거야? 그렇게 부를 때는 서신도 없더니. 갑자기 찾아와서 이게 뭐냐? 아무리 우리가 가까운 사이라 해도 정도가 있는 법이야! 가문의 재산이잖니? 아예 안 된다는 게 아니고 숙녀처럼 인내심을 가지고 순서를 기다리라고!”

크림힐트는 벌컥 성을 냈지만, 세상에 손녀 이기는 할머니는 없었다.

결국, 그녀는 짜증을 더 내면서도 허락하고야 말았다.

“사흘 남았다, 기다려라.”

이 말을 남긴 채 말이다.

그러나 세리스는 하인도 대동 안 하고, 허겁지겁 지하로 내려갔다.

그리고 천리안이 있는 문을 열어젖혔다.

그런 그녀를 본 천리안은 전혀 당황한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모를 말만 했다.

“검은 왕을 만나고 왔군. 그는 강하고 위대한 존재지.”

천리안이 헛소리를 하는 게 어제오늘 일도 아니었다.

그는 한 달에 한 번 제대로 말해주는 것을 빼곤 거의 헛소리였는데, 크림힐트는 그 헛소리마저 받아 적는다.

왕 운운은 그냥 평소처럼 영양가 없는 소리려니 하고, 성큼성큼 걸어간 세리스는 천리안에게 말했다.

“간절히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부디 대답해 주세요.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당신의 할머니도 거의 그런 식으로 말해. 그럼 나는 언제나 그럴듯하게 거짓말을 하지. 진실을 듣고 싶다면 사흘을 기다려라.”

하지만 세리스는 바싹 그의 앞에 다가섰다.

그리고 주저앉았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당신의 곁에서 뛰어놀았어요. 단지 가문의 어려운 대상뿐만이 아니라 친근한 대상으로 대했어요. 게다가 최근에는 음모까지 꾸몄어요. 바로 당신에게 세계수를 구경시켜 주는 것입니다. 할머니 몰래 당신을 가출시켜서 그러려고 했어요. 당신은 그걸 원했잖아요. 제 눈을 보세요. 이런 제 말에 거짓말이 있나요?”

천리안은 신음을 흘렸다.

그는 네이블 가에 보호받는 형편이기도 하고, 구속된 형편이기도 했다.

뭐 크게 보면 그의 안전을 위한 공생이지만, 갇혀있지 않다고 보기도 모호했다.

가문의 수호자라고 불리며 대접은 잘 받았지만, 분명 답답한 구석도 있다.

“규칙은 지켜야 하는 거야. 그러니 사흘 후에 물어봐다오.”

“당신을 위해 세계수를 구경시켜주려고 했어요. 친구니까요. 제가 그랬다고요.”

천리안은 두 팔을 아래로 늘어뜨리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걸 항복 선언으로 받아들인 세리스는 질문을 던졌다.

이걸 위해서 그렇게 미친 듯이 말을 달린 것이다.

“천리안님. 제발 대답해 주세요. 앞으로 대전쟁이 일어납니까?”

그러자 천리안이 세리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말했다.

“내 친구 세리스여. 네가 우려하는 전쟁은 이미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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