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 화이트 라이더 (1)
늦은 시각 색다른 방문자들이 아레이즈에 발을 들여놨다.
두 명이었는데 한 명은 그럭저럭 생긴 남자였다.
다만 파리한 안색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는데, 어떤 특정한 일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원래 성질인 듯싶다.
다른 한 명은 하얀 말을 탄 아가씨였다.
그녀는 하얀 망토를 걸쳤으며 의복 전체가 하얀색이었다.
금줄이 들어간 소매나 바지 옆부분이 아니더라도 분위기에서 귀족 냄새가 풍겨 나왔다.
그녀는 작고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으며 눈썹이 가늘고 날카로웠다. 그리고 탐스러운 붉은 입술을 뽐냈다.
그 입술이 말 위에서 호흡하느라 살짝 벌어질 때면 가지런하고 하얀 치아가 드러난다.
눈은 크고 눈매가 약간 날카로웠다. 그리고 호수같이 맑은 눈동자를 지녔다.
눌러쓴 두건으로도 그녀의 태양 같은 금발 머리를 감출 수가 없었다.
치렁치렁한 금발은 그녀의 등에서 말의 갈기와 율동을 같이 했다.
가느다란 허리.
탄력 있는 몸. 게다가 큰 가슴은 껄떡쇠들이 입방아 찧기 좋아하는 적정 포인트였다.
아레이즈에도 파렴치한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의외로 그녀 주변의 남자들은 조용했다.
일단 그녀는 백마를 타고 있었다.
말은 당연히 비싸다, 한두 푼 하는 게 아니니까. 게다가 하얀 옷투성이다.
하얀 호랑이가 있다고 해보자.
산을 돌아다니면 눈에 금방 띌 것이다.
왜냐면 하얀색이니까.
그러니까 저 미인은 지금 말을 탄 데다가, 고급스러운 옷을 걸쳤으며 옷 색은 하얀색이다.
몬스터가 나돌아다니는 시대에 말이다.
저런 상태로 밖을 나돌아다닌다는 것은, 보통 사람은 엄두도 못 낸다.
그런 추측이 아니더라도, 그녀의 허리춤에서 흔들거리는 장검은 이미 충분한 힌트였다.
그녀는 매우 아름다운 엄청난 미인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남자들은 시선을 던지면서도, 애써 돌리려 노력했다.
어느 정도 아름답다면 말이라도 걸어볼 텐데, 너무 아름다웠다.
주눅 드는 것을 떠나 경계심이 강력하게 일어났다.
누가 봐도 이질적인 하얀 존재는 그래서 어떤 제지도 받지 않고, 아레이즈의 허름한 여관 앞에 설 수 있었다.
말에서 내린 그녀는 허약한 인상의 남자를 재촉한다.
“어서 내리세요.”
그녀의 음성은 시원하고 잔잔했는데, 호수 같은 눈동자와 잘 어울렸다.
그런 아름다운 목소리를 듣고도 남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죄… 죄송합니다. 멀미가 나서….”
그녀는 아비게일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나요? 승마 정도는…? 말 위에서 달린 시간이 얼마에요?”
“그런데 세리스님. 우리 여기에 들어와 있어도 되는 겁니까?”
남자는 불안한 듯 어깨를 움츠리며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누가 보면 범죄자인 줄로 오해할만한 행동을 하며….
“사전 답사에요. 그럼 멀미가 진정되면 방이나 두 개 잡아 놓으세요. 저는 깨끗한 거로 부탁드립니다.”
“아니 잠깐, 잠깐만요!”
세리스는 두 손을 상체 앞으로 모은 채 당황해하는 그를 남겨두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발걸음은 당당하고 시원시원했다.
과연 여자 기사답다.
이 미녀기사는 아무나 붙잡고 어떤 곳을 물어본다.
사실 사전답사는 핑계고 지금 물어보는 곳이 목적이었다.
원하는 곳의 방향을 알아낸 그녀는 뛰다시피 걸었다.
검이 그녀의 움직임에 맞추어 덜그럭거렸다. 그리고 그녀는 드디어 자신이 원하던 곳에 도달한 기쁨을 누렸다.
그것은 바로 영주 성 앞에 지어져 있는 도서관이었다.
무뚝뚝하게 서 있는 건물의 말 없는 그림자는, 환희에 찬 그녀에게 쏟아졌다.
하지만 그녀의 아름다운 금발 머리는 빛을 잃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책이 가득한 도서관에는 단 한 명뿐이었다.
세리스는 그 한 명이 당연히 서고 관리자라고 생각했다.
준 귀족 정도 되겠거니 생각한 탓은 옷차림이 너무나 검소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보기에 세인은 뭔가 우울해 보이는 검은 머리의 남자였다.
괜찮게 생기긴 했지만, 그녀는 그보다 미남인 사람을 숱하게 보았다.
“저기.”
때아닌 미성에 세인이 고개를 들자 세리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바보가 아니었으므로 단번에 그녀가 가진 이질감과 접근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알아보았다.
“책을 읽어도 되나요?”
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글을 안다면 안 될 건 없지.
세리스는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그런데 여기에 책이 좀 많은가?
결국, 그녀는 관계자에게 문의해보기로 한다.
“제가 책을 찾고 있는데요. 여기 분류 기준이 뭐죠? 어떻게 찾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책 이름은?”
“검제에 대한 것입니다.”
세인은 그녀의 말을 들으며 ‘기사가 맞는군’이라고 생각했다.
여제를 검제로 부른다면 기사가 분명하다.
“저쪽 열이야.”
세리스는 필요할 때 침착한 성격이었지만, 지금은 너무 들떠 있어서 반말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의 손가락을 의지해서 결국, 그녀는 원하던 것을 발견해냈다.
“맙소사.”
검의 이야기가 정말 있었다.
완전판이 몇 권이나 있었다.
그녀는 가늘고 긴 손가락을 뻗어 책들을 뽑아 보았다.
하나도 중복되지 않는다. 설마 여기 다 있는 거야?
그녀는 책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정신없이 넘겼다.
그런 세리스의 모습을 보며 세인은 책만큼은 팔지 않았던 이유를 되새겼다.
책은 소중한 것이다.
정신없이 빠져드는 세리스의 모습을 뒤로 한 채, 그는 소리 없이 빠져나왔다.
그리고 다음 날 저녁이 왔을 때.
그는 검의 이야기를 쌓아놓고 보는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설마 지금까지 본 건가?
세리스는 세인을 보며 고개를 들었다.
“대단하군요. 전권이 다 있어요. 이것들의 가치가 어떤지 아세요?”
그녀는 금전적인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검제를 좋아하는가 보군.”
“역사를 통틀어 오직 단 한 명 존재했던 소드 마스터니까요.”
세인은 세리스를 보며 매우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성에 대한 소유욕을 느꼈다.
찬탄 다음에는 본능적인 욕구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안 될 말이다.
“당신은 성기사?”
“예 그렇습니다.”
“홀리 레이크 출신인가. 여기 신부가 홀리 레이크 출신이야.”
하지만 그녀는 말의 내용에 호기심을 보이지 않았다.
되려 세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잠깐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그 후로 그들은 도서관에서 자주 마주쳤다.
세리스의 동행인은 자신의 방에서 처박혀 나오지 않았고, 그녀는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었다.
사실 그녀를 말릴 수 있는 자는 극히 드물었다.
그녀는 굉장한 검 솜씨를 가지고 있는 성기사였다.
출신은 가이더지만,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여검사다.
사람들은 그녀를 이야기할 때 차갑다거나.
의외로 상냥하던가.
맹하다.
신경질적이다.
섬세하다, 식으로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평소 그녀는 검제의 추종자임이 분명했다.
하긴, 도서관에 가면 그녀를 무조건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세인은 도서관에 대한 발걸음을 당분간 끊었다.
그리고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면서도 약간 궁금증을 가지긴 했다.
아무리 추종자라도 그것 때문에 직접 왔다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보였다.
뭔가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왜 온 것일까?
그렇다고 여관에 묵고 있다는 그녀의 동료를 불러 물어보기에는 그의 오지랖이 많이 부족했다.
결국, 그는 신경을 끊었다.
지금 미녀에 관심을 기울일 때는 아니라고 판단했으니까.
‘몬스터도 아닌데 뭐.’
세리스의 입장에서는 세인을 보면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 기분은 처음에는 알 수 없다가 점점 그녀의 가슴에 파문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두드림을 무시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그녀는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그건 너무 비이성적이고 뜬금없었다.
또 그녀가 싫어하는 말 중 하나가 ‘젊은 이성이 같은 공간에 있으면 서로 끌리게 되어 있다’라는 식의 말이었다.
지금 움직이는 그녀의 마음은 너무 개연성이 없었다.
그녀는 소설을 좋아하니까 개연성도 좋아한다.
그래서 자신의 그런 마음을 그저 일종의 호기심으로 해석했다.
평소 그녀를 아는 사람이 보기에도, 너무 이상한 끌림이었다.
말도 안 된다.
그녀는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파문을 무시했고, 세인도 세리스를 잊었다.
서로 끌리니까 오히려 조심하게 되었다.
초면에 끌린다는 건 너무 비정상적이니까.
부자연스러운 일에 경계심이 드는 건 당연한 일이다.
* * *
그러던 어느 날 세인은 와이번 조끼를 받아보게 되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 의미가 뭔지 생각을 좀 해보았다.
이 조끼는 전에 누군가에게 선물한 것이다.
그런데 왜 돌아왔을까?
* * *
세리스와 동행한 아비게일은 마법사였다.
그는 편집증이 있었고, 결벽증까지 겹쳤다.
누군가가 그걸 지적하면, 인정하는 게 아니라 둘은 하나라고 말하며 성내기 일쑤였다.
여하튼 지독히도 연구실만 찾는 위인이었는데, 실력이 좋았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그가 연구 바보라고 해도 역사적인 임무에 자원하지 않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게 바로 세리스와 동행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현재 그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세리스에게 애걸복걸하고 있었다.
“세리스님. 아무래도 이건 순서가 안 맞아요. 왜 여기부터 들리셨죠? 우리의 계획은 어떻게 된 겁니까?”
수프를 떠먹은 세리스는 눈을 반개하고, 마음을 비우려 노력했다.
하지만 아비게일은 그녀의 주변을 돌아다니며 끊임없이 앵앵거렸다.
파리도 아닌데 말이다.
영웅전기 전집 때문에 그랬다고 하면, 아비게일은 평소 그의 성격상 자해라도 할 것 같았다. 힘으로는 세리스를 어찌할 수가 없으니까.
혼자 발광하겠지.
“사전 답사에요, 아비게일.”
“여기에 이렇게 시간을 할애할 가치가 있을까요? 여기를… 왜요?”
“큰일을 하시면서 그런 무책임한 발언을 하시다니. 유감입니다.”
세리스는 고통스러워하는 아비게일을 무시하며 수프를 싹싹 비웠다.
그녀는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으므로 철모를 때가 당연히 있었다.
성기사단에 들어간 것은 그런 의미에서 참 다행이었다.
그녀는 이제 능숙한 전사가 되어 있었다.
아무리 옆에서 마법사가 자기 머리를 쥐어뜯어도, 비운 접시만 옮길 뿐이다.
훌륭한 전사란 그렇게나 좋은 것이다.
사람이 귀찮을 땐 냉담하다는 표시도 하고 그래야만 한다.
아비게일은 받아주다 보면 한없이 피곤한 타입이었다.
“아니 제가 이번 일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왜? 대체 왜? 여기를 들렀냐고요? 순서가! 순서가!!”
그의 절규를 들으며 세리스는 여관을 나왔다. 그리고 산책 겸 걸었다.
가끔 아비게일은 꽉 막히고 세상 물정 모르는 마법사답게, 그녀가 왕자의 구혼을 거절한 걸 떠들기도 했다.
그러니까 저 불쌍한 학자는 그게 왜 암살당할 수도 있는 일인지 전혀 모르는 인간이었다.
너무 길게 말했는데, 요약하자면 방금 전처럼 세리스에게 소리를 지를 정도로 예의를 모른다는 소리다.
“마법사들은 자신들을 위해서라도 세상에 나오지 않는 게 좋아.”
그렇게 중얼거리며 세리스는 걸었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지나치게 모여 있는 구역에 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교수대?”
그녀는 목을 길게 빼고 앞쪽을 구경했다.
웅성대는 사람들 앞에 낡은 옷을 입은 여자가 묶여 있었다.
풀어헤쳐 진 머리카락 아래로 보이는 갈색 피부.
그리고 발목 쪽에 있는 문신.
야만인.
그녀는 바로 야만인이었다.
그녀의 앞에 한 노인이 목이 터지라고 연설을 하고 있었다.
요약하면 이 여자가 죽을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 연설을 법 집행관이 따분하다는 듯이 들었다.
속으로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만해 이 노인네야. 이미 영주님이 문서로 승인한 사형이라고.’
사람들은 기대 만발한 눈빛으로 사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불안한 시대일수록 불안을 잠재울 자극을 갈구하게 된다.
머리를 푹 숙이고 있던 여자는 그것을 알까?
“그녀의 독초를 먹고 사람들이 죽을 뻔했다가 살아났어요. 간신히요! 동물들은 다 죽었습니다! 이 여자는 마녀입니다! 죽여야 합니다!”
노인이 소리를 지르자, 사람들이 ‘옳소, 옳소’하고 소리를 질렀다.
세리스가 얼굴을 찌푸리는 가운데 누군가가 그녀의 뒤에 섰다.
보통 거리를 유지하는 사람들보다 약간 가깝게.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며 경계한 세리스는 낯선 남자를 발견했다.
그는 안색이 아주 좋지 않았다.
우울한 얼굴로 세상의 고민을 다 떠안은 표정이었다.
“좀 지나가겠소.”
세리스는 옆으로 비켜주었다.
그러자 남자는 사람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
뭘 하려는 거지?
그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 법 집행관 앞에 선다.
마녀 앞에서 소리를 지르던 노인.
아스칼리온은 송충이 눈썹 한쪽을 추어올렸다.
“당신은 뭐요?”
“이 여인의 변호자.”
“야만인의 변호자라고? 그렇다면 당신도….”
한패라고 말하려던 신경질적인 노인.
아스칼리온은 말을 채 잇지 못했다.
누군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세리스도 엉겁결에 뒤로 밀려난다.
그녀는 천천히 걸어 나오는 세인을 보았다.
“서고 관리인?”
“영주님!”
법 집행관이 어찌할 줄 몰라 하는 가운데, 누군가가 잽싸게 의자를 대령했다.
사람들은 이제 어찌해야 할지 공황상태에 빠져 버렸다.
무릎을 꿇어야만 하나?
해산해야 하나?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피곤한 얼굴로 걸어온 세인은 놀라며 물러나는 아스칼리온을 보았다.
꼬장꼬장하게 생긴 노인이다.
그리고 시선을 옮겨 묶여 있는 야만인 여자.
그리고….
앞으로 걸어 나온 남자를 마지막으로 본다.
의자에 앉은 세인이 뭔가를…. 남자, 레드의 발치에 던져 놓는다.
레드는 바닥에 떨어지는 그것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아주 괴로운 표정으로 말이다.
그때를 같이 해, 세인의 음성이 그의 고막을 후벼 판다.
“이게 무슨 뜻이냐?”
레드는 이를 악물었다.
결정은 이미 내렸다, 다만 괴로울 뿐이다.
세인은 다리를 꼬고 앉아서 그의 고통스러운 음성을 들었다.
“이 여자의 이름은 젬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오해를 받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오해입니다.”
다 함께 합죽이가 된 가운데 레드의 말이 이어졌다.
세리스는 분위기에 밀려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세인과 레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레드의 말을 듣던 세인이 갑자기 그의 말을 끊었다.
“그만. 내가 물은 건 이 재판에 대한 변론이 아니라 이것의 의미다.”
그가 손가락으로 와이번 조끼를 가리키자 레드는 대답한다.
느릿하게 말이다.
“저는 이제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세인은 가라앉은 눈길로 그런 레드를 보았다.
그런 그의 분위기가 어찌나 무거운지 아스칼리온조차 입을 열지 못했다.
야만인 여자가 무죄라 치자. 그래도 일이 간단하지 않다.
수많은 사건을 처리하던 세인은 문서로 보고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
그도 인간이니까 실수할 수 있었다.
이 시대에는 그런 실수 가지고 뭐라 할 수도 없다.
레드는 그가 아끼는 인간이다. 하지만 그는 영주가 이미 내린 판결을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셈이 되었다.
그가 이렇게 하기까지 얼마나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했을까?
하지만 이렇게 영주가 틀렸다고 말하는 경우는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세인은 영지를 대표한다.
영지민의 자존심을 대표한다.
틀리고 맞고를 떠나 물러서면 안 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걸 아는 레드는 몹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마치 자신이 단검으로 영주를 찌르고 있는 기분이다.
하지만 그의 흔들리는 눈 끝에는 머리를 숙이고 있는 젬이 있었다.
그녀는 이미 기절한 상태다.
“그녀는 산을 옮겨가며 약초를 채집하다가, 딴에는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결과가 돌아올 줄 몰랐을 겁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영주님.”
세인은 팔짱을 끼었다.
그가 몰래 자신을 찾아왔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기에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 죄는 제가 달게 받겠습니다.”
“무슨 죄.”
“영주님을 모욕한 죄 말입니다.”
세인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공
교롭게도 때가 좋지 않았다.
자신은 틀렸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
또 사람들이 수긍하고 넘어가든 그렇지 않든….
법적으로 여러 문제가 일어날 수 있었다.
사람들이 모른다고 해서 넘어갈 수 있는 일일까.
세인은 고개를 숙인 레드의 목을 바라보았다.
‘넌 이제 자리를 잡았구나. 숲속 깊이 틀어박혀라, 아주 깊이. 그들과 함께…. 그러면 운이 좋다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천운이 따라준다면.’
그의 입에서는, 그의 속마음처럼 의외의 말이 튀어나온다.
“재주도 좋은 야만인이구나. 이산 저산 옮겨 다니면서 약초도 채집하고. 아니 내 덕이 대단한 건가? 그렇게 안전하게 산들을 만들었으니.”
어조가 너무 가라앉아서 이게 농담인지도 모를 지경이다.
레드의 고개가 들렸다.
그리고 세인의 불타는 눈과 마주한다.
“레드. 저 조끼를 입어라. 나는 그것을 너에게 주었다.”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아스칼리온이 그만 끼어들고 말았다.
“영주님! 설마….”
그때 법 집행관이 아스칼리온을 위협하듯이 으르렁거리며 밧줄을 들어 보인다.
여기에 기사들이 있었다면 아스칼리온은 걷어차였을지도 모른다.
세인은 아스칼리온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리고 계속 말했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 못 한 것이 아니다.
다만 수습하는 게 힘들 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녀를 데리고 가라.”
“영주님!”
아스칼리온이 소리를 질렀는데 그런 그의 복부를 칠 수 없었던 까닭은, 법집행관이 여자를 묶은 밧줄을 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눈을 크게 뜨며 아스칼리온을 바라보았다.
오늘 저 노인은 죽기로 작정한 사람 같았다.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이는 레드와는 달리, 저 노인은 지금 영주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영주님. 저자의 일방적인 말입니다. 야만인에 대해서 우호적인 것은 이해합니다. 그래서 목책도 세워 주셨겠죠. 하지만 이건 다른 문제입니다.”
“나는 네게 입을 열라고 말한 적이 없는데?”
“영주님….”
세인은 아스칼리온의 눈을 보며 죽기를 각오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와 말을 계속 섞지 않고 일어났다.
“적이 오고 있다. 적들은 우리를 낱개로 나누지 않는다. 우리를 나누는 것은 우리뿐이다. 사는 곳이 다르다고. 생활이 다르다고. 나누고 다시 나누고.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피부가 다르다고, 발가락이 다르다고. 손가락이 다르다고 나누는 건 우리뿐이다. 그렇게 조각조각 나뉘고 혼자가 돼서 얻는 게 뭐지?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그는 그답지 않게 말을 흐리다가, 침음성을 흘린다.
결국, 세인은 레드에게 물었다.
“나의 보호자. 나의 소중한 벗이었던 사람. 당신은 내가 사과하길 바라는가?”
레드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에게는 젬이 너무나 소중했다.
밝고 멋 모르는 소녀다.
절대 죽게 할 수는 없었다.
그것도 한낱 오해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지금 그가 한 짓은 그의 소중한 사람의 체면을 뭉갠 꼴이 되어 버렸다.
철저히 부정해버린 꼴이다.
그게 얼마나 중요하냐면 살인도 불사할 수 있는 무게였다.
그런데 그는 지금 자신이 원한다면, 사과도 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한다.
지금 세인을 칼로 찌른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나 마찬가지였다.
레드는 도리질을 쳤다.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가슴을 들썩이는 그의 앞에서 세인이 말했다.
“소녀를 데리고 가라. 당신의 충성은 이제 자유다. 가서 자유롭게 당신의 벗과 함께 살아라. 그리고 다시 한번만 저 조끼를 내게 돌려보낸다면, 난 널 죽여버리겠어.”
그리고서 세인은 돌아섰다.
그의 살벌한 분위기에 모두가 물러났다.
세인은 반대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고….
울먹이는 레드는 몸을 숙여 젬을 끌어안고 다시 일어났다.
눈물이 그의 얼굴에 흘러내리다 못해 범벅이 되었다.
전혀 울 것 같지 않은 남자가 소리도 못 내고 우는 그 모습에 아무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유난히 작아 보이는 세인의 등이 멀어져갈 때, 그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리고 돌아섰다.
그제야 뒤늦은 흐느낌이 그의 입을 통해 쏟아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