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34화 (34/307)

# 34

& 극지 (5)

라이는 따뜻한 이불 속에 파묻혀 있었다.

레인저 생활을 하다 보면 추위에 익숙해지는 한편 지긋지긋해질 때가 많은데, 지금처럼 따뜻한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그래서 그는 눈을 감은 채로 안락함을 즐겼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손이 그의 멱살을 잡았다.

‘뭐지?’

그리고 옷깃을 꽉 움켜쥐며 흔드는데, 잠이 다 달아날 것만 같았다.

‘이 멍청아 그만둬. 야간 경비 삼 일째의 꿀잠이라고!’

그렇게 속으로 외쳤지만, 상대는 숫제 앞뒤로 흔들고 있는 마당이었다.

하도 거칠게 몰아붙이니 깨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는 결국 머리를 가득 채우던 잠이 달아나는 것을 느꼈고, 눈을 가늘게 뜨고야 말았다.

그러자 눈꺼풀 사이로 찌를듯한 햇빛이 느껴졌다.

그리고 귓가에 쌩쌩거리는 바람도.

“으으….”

“정신 차려! 정신 차리라고!”

라이가 보라색으로 변색된 입술을 벌렸다.

입술 사이로 그의 이가 드러났다.

그 안의 혀도 색이 바뀌어 있었다. 그래서 발음이 잘 안 되었다.

그는 눈을 힘겹게 뜨고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멱살을 잡고 있는 세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몸은 눈사태에 휩쓸린 상태였다.

세인은 급한 마음을 억누른 채 그에게 다그치지 않도록 노력했다.

“이름이 뭐지?”

“라… 이.”

“라이. 힘들겠지만, 어서 알려줘야 한다. 어느 쪽이야?”

“뭐… 뭘?”

그제야 라이는 주변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레인저의 경계초소가 눈사태 때문에 완전히 휩쓸렸음을…. 그러고 보니 기억이 끊겼던 마지막 즈음도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 같다.

병사들과 더이스는 창대로 눈을 푹푹 찌르며 부산하게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그중 운 좋게 그가 걸린 것이다.

세인은 결국 크게 소리쳤다.

참으려 해도 상황이 너무나 긴박했기 때문이다.

“네 조는 어느 쪽에 있어? 어디에서 잠자고 있었어? 말해! 어서!”

라이는 눈을 부릅떴다.

눈에 파묻힌 그의 동료들! 그리고 동시에 그의 동생도 기억이 났다.

그들의 위치가 기억이 났다.

‘텐트는 왼쪽이고, 내 동생은… 동생은 앞쪽의 초소에서 앉아 있었다.’

당연히 세인은 신이 아니니까, 자신에게 멱살이 잡힌 젊은이가 무엇 때문에 망설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꽤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지금 한쪽을 전력으로 판다면 살아날 가능성이 있었다.

문제는 레인저들이 모여 잠들어 있던 텐트와 초소의 거리가 상당하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로 발견되면 죽는다.

아마 죽을 것이다.

한명의 혈족과 여러명의 동료.

어떤 것이 더 무거운 무게인가?

“알려줘. 어느 쪽을 파야 해?”

라이가 순간 울먹였다.

그리고 쥐어 짜내듯이 대답했다.

간신히 말이다.

“왼쪽… 왼쪽입니다.”

*  *  *

저녁이 다가오는 늦은 시간, 레밍턴 부대로 이동하는 행렬이 있었다.

그들은 언덕 위를 걷고 있었고, 짐 마차와 수레에는 구조된 젊은이들도 보였다.

그 젊은이 중에서는 넋이 나간 얼굴의 라이도 있었다.

결국, 그의 동생은 사망한 것이다.

레밍턴 부대는 문을 활짝 열고 방문자들을 환영했다.

인간인 데다가 선물을 가지고 온 일행이었다.

환영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것이다.

레인저의 부대들은 산지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이렇게 물건을 전달하면, 부대의 부대장이 알아서 다른 부대로 물자들을 보급할 것이다.

병사와 더이스는 나름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술자리 말이다.

코가 얼얼해지는 강추위 속에서 독주를 맨 속으로 마시는 그 기분은….

정말 강력했다.

“이건 정말 낭떠러지군요.”

“기사분은 얼굴 길이 만큼이나, 정말 표현도 독특하십니다.”

단독 임무도 많았기 때문에, 외로움으로 지쳐있는 레인저들은 스스럼없이 어깨동무를 해왔다.

세인은 어깨동무하고 술을 마시는 사람들을 일별하고는 나무로 만든 계단을 올랐다.

돌고 돌아 가장 위쪽에 도착하자 튼튼한 통나무로 만든 집이 보였다.

집 앞에는 검은 비석에 새겨져 있었는데, 다른 곳에도 흔히 볼 수 있는 문구였다.

「맹세하라

저 산 앞에서 맹세하라

나는 인간이고

인간으로서 인간을 지키겠다고.

우리에겐 오직 그것 하나뿐이다.

그러니 말하라.

이 공포 안에서도 같은 인간으로서 또 다른 인간을 망설임 없이 안아줄 수 있다고.」

세인은 추억에 젖은 얼굴로 잠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힘들었을 때, 아델이 곁에서 딱 한 번 말려주었다.

그의 자살을 말이다.

레드의 도움도 있었지만, 아델 때문에 부정적인 생각을 없앨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했을 때, 여기의 부대장은 이 비석에 새겨진 글을 차렷 자세로 무려 이천 번을 말하게 했다.

목이 쉬었지만, 효과는 있었다.

그날 이후로 그는 더는 자신을 의심하지 않았다.

“적어도 나는 인간이다. 그리고 나라는 인간에게 맹세할 것은 하나면 차고도 넘친다.”

그게 그의 정체성에 대한 확답이며 하나의 깨달음이었다.

진실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런 건 오늘을 힘겹게 살아가는 자에게 한 푼 값어치도 없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대머리 중년인이 일어섰다가 손을 잠시 들어 올린다. 그리고 다시 앉았다.

머독이란 이름을 가진 남자는 세인에게 존댓말을 했다.

“오래간만입니다.”

“머독님에게 존댓말을 들으니 어색하군요.”

“자리가 사람을 만듭니다. 아직도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면, 빨리 다 만들길 바랍니다.”

세인은 피식 웃으며 경례를 했다. 그리고 머독은 고개를 돌려 그것을 받지 않았다.

영주에게 경례를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쨌든 정중히 경례를 마친 세인은 머독의 앞자리로 가서 앉았다.

머독은 지도와 보고서를 잔뜩 펼쳐놓고 있었다.

이것들은 엄밀히 말해 기밀이다. 그리고 그런 점이 레인저들이 가장 싫어하는 점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보가 인간 모두에게 공평하고 빠르게 흘러 들어가길 원했다.

세인은 지도에 표시된 붉은 점들과 보고서를 살펴보았다.

머독은 스스럼없이 날짜별로 그린 지도를 보여주었다.

빨간 점들이 어떻게 이동하고 있는지 아주 잘 느껴지게….

보급 물자를 들고 먼 길을 온 사람이라면, 친분이 두터운 머독이 아니라도 보여줬을 것이다. 머독은 이 표시가 무엇을 뜻하는 것 같냐고 물으려다가, 세인의 침울한 표정을 보고는 되려 웃었다.

그들은 물론 계획을 짠 홉 고블린의 존재조차 모르지만, 홉 고블린은 진짜 개자식이었다.

붉은 점들은 게릴라전을 할 이유도 없고 전혀 그럴 필요도 없는데, 흩어져 침투하는 중이었다. 그것도 띠를 이루어서 말이다.

특별한 구조물도 없이 그냥 조를 이루며 이동 중이다.

뒤의 본진이 저렇게 튼튼한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나?

그리고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이러면 허리띠 너머로 흘러 들어가는 수를 통제하기 힘듭니다.”

머독의 말을 들으며 세인은 입을 열었다.

“수도에 보고는 하셨겠지요?”

“매파는 적극적인 대응이나 대비를 주장하고, 비둘기파는 전쟁이 일어날 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비둘기파가 지지를 얻는 이유는 평화를 원하는 인간의 심리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전쟁이 일어날 이유가 없다는 것이죠.”

이성적으로는 저들이 전쟁을 일으킬 리가 없었다. 세인이나 머독이 여기 와 있지 않다면, 그들도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정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확신하고 있다.

북부인이라면 어떤 예감을 강하게 느낀다.

문제는 그걸 이성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때로는 이런 상황 속에서조차, 아군을 설득해야 한다는 사실이 참 피곤하게 느껴진다.

“단순한 도발이 아니라고 첨언하려다가 깨달았습니다. 저의 위치는 누군가를 설득하는 게 아니라, 여기에서 감시와 보고에 충실한 것이죠. …대응에도.”

머독은 지도를 둘둘 말아 세인에게 주었다.

그것을 말없이 받아든 세인은 머독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힘겹게 말했다.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 몰랐는데, 죄송합니다. 영지로 돌아가야만 해서.”

“조금 늦게 죽는다고 뻐기지 마십시오.”

머독은 언짢은 표정으로 대꾸하다가, 쩝 하고 입맛을 다신 후 첨언했다.

“제가 젊었을 때는 솔직히 하루하루가 공포였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깨달았습니다. 어차피 결국 나는 비참하게 살해당할 것이다. 그건 절대 피할 수 없겠지. 그런데 그래서? 그 순간이 며칠이나 될까요? 그리고 그게 가장 뒤에 있다고 해서 제가 더 길고 깊은 시간을 절망에 빠져 괴로워해야 할까요? 뒤에 놓여 있다고 해서 그게 결말이니 하는 모든 것은 아닙니다.”

그는 현실적인 충고도 해주었다.

“깊은 사색은 하지 마시고 현실을 즐기십시오. 생각해보면 여기에서 레인저들이 이러고 있는 이유가. 그것일는지도 모릅니다.”

세인이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머독이 갑자기 농담을 던졌다.

“하녀도 마구 건드려 보고요. 총각으로 죽는다면 억울한 일 아닙니까?”

세인은 농담인 걸 알고 있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말이 나가고 말았다.

언짢게 말이다.

“그녀들은 물건이 아닙니다.”

그러자 머독이 웃었다.

“그 말이, 당신이 여기 들어와 한 말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말입니다.”

둘은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리고 세인은 다음날 레밍턴 부대를 빠져나왔다.

돌아가는 길은 비교적 평안했고 말이다.

“아주 짧고 괴로웠지만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더이스는 세인의 옆에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항상 누군가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물론 그들의 존재는 알았지만, 이렇게 두 눈으로 확인하고 보니 레인저들의 희생 위에 자신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더욱 혹독한 환경 속에서 인간들에게 봉사하고 있었다.

더이스는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보호도 받고 있었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바탕이 된 보호.

그리고 고백했다.

“가끔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영지를 몰래 빠져나가는 공상을 하곤 했습니다. 영주님.”

세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고백을 받아들였다.

“아무도 당신을 비난하지 않아 더이스. 슬픈 건 그런 공상조차 할 수 없는 사람들이지. 다 내 탓이다. 나는 거짓말쟁이니까.”

더이스는 묘한 표정으로 세인을 바라보았다.

입을 열었지만, 음성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기사였다.

영주가 언질을 주며 원한다면 모를까.

원하지 않을 때 충고랍시고 뭔가 말을 해주는 건, 아직 그에게는 멀었다.

영주와 봉토에 인생 전체를 봉사한 노기사라면 모를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힘내십시오. 영주님.’

더이스는 그렇게 속으로 말하며 고삐를 다잡았다.

혼자였다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오늘 아침 출발하기 전, 상의를 탈의를 하고 산악 구보를 하던 레인저들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인간 혼자서 역경 속에 놓이면 도저히 못 견딜 것만 같았다.

그러나 같은 처지의 동료가 있다면 벌거벗고 산도 뛰어오른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공동체라는 의식은 그 자체로서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남을 수 있다.

어차피 도망갈 곳도 없겠지만….

*  *  *

성으로 돌아가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행크는 대응할 수 없는 언어폭력 때문에 전보다 황폐해진 얼굴로 반색을 했다.

마플도 엄청 힘들어 보였다.

달려 나온 그녀의 표정은.

‘영주님 제가 이 귀한 분들에게 형편없는 음식을 먹였어요! 그랬어요! 진짜 그랬다고요! 이게 제발 현실이 아니라고 말해 줘요!’

뭐 이 정도가 될까.

그는 장갑을 벗고 피곤을 숨기며 코다로와 비비안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사흘간 중요한 시간이었다.

떨어져서도 동맹을 견고히 할 수 있지만,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그걸 굉장히 단축할 수 있음이다.

무엇이 그들을 아레이즈 성으로 거리낌 없이 움직이게 했는가?

세인은 와이번에 대한 정당한 자기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고,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오히려 전리품을 나누어 주었다.

비비안의 기사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코다로에게는 그의 리더쉽과 허영심을 만족시키는 것을.

용병들을 휘어잡는 그의 무대 소품으로 말이다.

이웃 영지에서 오는 행인이 있으면 세금을 물리지 않았고, 주변을 안전하게 만들었다.

그가 만든 목책은 야만인 지역뿐만 아니라 이웃에도 설치되었다.

징검다리를 놓아야 할 때가 있으면 거기가 우리 영지냐, 아니냐를 가리지 않았다.

그의 치안 의식은 점점 전파되었다.

‘우리는 같은 편이다’라는 것이 반복되고 선의가 거듭되자 결국, 마음의 경계가 풀어졌다.

그런 담보들이 켜켜이 쌓여서 이루어진 방문이고 신뢰였다.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며칠 내내 그들은 많은 이야기를 했다.

문서로는 나눌 수 없는 말들.

그중에서는 코다로와 비비안에게도 의외인 말도 있었다.

그들은 솔직히 감탄했다.

훌륭한 생각이라서가 아니라 그 용기에 대해.

그리고 헤어지기 전날 그들은… 한 테이블을 둘러싸고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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