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 극지 (4)
마차와 그 마차를 호위하는 기마가 아레이즈 성으로 들어갔다.
마차는 아레이즈의 기준으로 매우 화려한 편이었다.
성 앞까지 달리다 멈춰선 마차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문 쪽에서 움직임을 보였다.
모습을 보인 것은 작은 숙녀였다.
비비안은 기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성 앞에 지어진 탑을 잠시 구경한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도서관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좋긴 한데 굳이 외부에 지어놓을 필요가 있었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귀족 외에는 별로 쓸 거 같지 않은데.”
“성 내에 이만한 크기의 공간을 추가해서 만들려면 힘들었겠죠. 짧게나마 산책도 할 겸 외부에 지은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비비안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저 멀리에서 맥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지금은 강추위였다.
비비안과 기사는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 이렇게 서 있는 것이지만, 오래 말하기 쾌적한 기온은 아니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일단 맥은 그렇게 말했다.
이렇게 추운 날 밖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세인이 부재중인 것을 말하는 것보다도 그들을 안으로 안내하는 게 더욱 중요했다.
“너무 추운 날이라 전령을 보내는 것도 그에겐 고역이고, 새에게도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 부득이하게 예고 없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이 실례는 영주님을 뵙고 사과하도록 하죠.”
“아, 네… 알겠습니다.”
맥은 그녀가 영주 신분으로 직접 말을 걸어오자 약간 당황했다.
기사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올 줄 알았기 때문이다.
어지간하면 영주가 타 영지의 기사와 말을 섞으려 하지 않을 텐데, 평소 아레이즈에 대한 호감이 그렇게 표현되었다.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맥은 골치 아픈 표정을 숨기려 애썼다.
세인은 지금 부재중이다. 게다가 손님도 한 명이 이미 와있는 상태였고 말이다.
비비안은 추워서 그런지,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성내에 들어섰다. 그리고 성안을 살펴보기도 전에 충격적인 만남이 다가왔다.
정확히 말해 그녀의 심정은 덮침을 당한 기분이었다.
“오래간만입니다. 영주님.”
비비안은 눈을 엄청나게 깜박거렸다.
주변의 기사들은 그녀가 지금 엄청나게 당혹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가려줄 상황은 아니다.
황급히 인사를 하는데, 앞에 버티고 섰던 코다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어째서 이 인간이 여기에?
대체 왜?
이 추운 날에 왜 여기에?
어째서…?
순간 엄청나게 복잡한 표정이 비비안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코다로도 바람맞은 신세지만, 이차적 피해자인 그녀의 얼굴을 약간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그녀의 응답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예… 오랜만…입니다….”
팔짱을 끼고 있던 코다로가 씩 하고 웃었다.
비비안은 그걸 보면서, 그냥 깡충 뛰어서 한 대 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상상은 자유니까 표현만 하지 않으면 무죄다.
정말 저 얼굴을 후려갈겨 버렸으면 시원하겠는데 말이다.
그녀가 코다로를 싫어하는 이유는 다양했다.
그중에서 천박하다는 이유는 한 99번째 순위 정도 된다.
“이걸 어쩌죠? 영주인 세인님은 외출 중이십니다.”
“그렇군요….”
“저는 기다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예….”
묻지 않았는데 주절대는 코다로를 보며 그녀는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실컷 비꼬거나 욕을 하고 싶은데, 간절히 참는 모습이었다.
귀족 체면에 돌려서 욕을 할 수도 없고….
그런데 그 간절함은 코다로의 얼굴을 간질간질하게 만들었다.
무심코 손을 들어 얼굴을 벅벅 긁는 코다로를 보며, 비비안은 그나마 아주 미량 정도 남아있던 인간에 대한 정마저도 떨어진다는 끔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지친다는 몸짓으로 하인의 안내를 받아 사라진다.
코다로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다가 맥에게 말했다.
“저분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정말 지치지 않아? 나만 그래? 괜히 성질나고 말이야.”
맥은 억지로 웃다가 급조된 미소로 마무리했다.
그의 생각에 코다로는 더이스 같이 촐랑대는 기사와 말을 섞으면 좀 어울릴 것도 같았다.
코다로와 비비안은 계속 성에 머물렀다.
혹한기에 성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방문하느니 ‘휴가 겸 시간을 보내는 것일지도 모른다’라고 맥은 그냥 편하게 생각했다.
“높은 분들 생각을 내가 알게 뭐람.”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행크와 돌아가면서 병사들의 경계를 관리했다.
마플은 안 하던 짓을 하느라 정신이 외출 중이었다.
커튼을 갈고, 안 쓰던 난로들을 가동하고, 식기들을 세척하는 일을 총감독하는 등… 매우 바빴다.
“손님이 오셔서 기쁘긴 한데, 너무 감당하기 힘든 분들이네요. 신분이 너무 높아서.”
이가 빠진 식기들을 보고 마플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한 말이었다.
맥은 병사들과 함께 짐승을 잡는다고 바쁘게 돌아다녔다.
그들은 신경 쓴다고 쓴 건데, 코다로와 비비안은 성내의 검소함에 매우 놀랐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삭막하게 살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이봐, 행크.”
“예 말씀하십시오.”
말을 거니 무시할 수도 없고, 말을 섞자니 신분이 너무 차이 나서 어려워 죽겠는데 자꾸 말을 시킨다. 그런데 코다로는 행크의 험상궂은 얼굴이 친근해(?) 보였는지 계속 말을 걸었다.
수행원들은 내버려 두고 말이다.
“대체 이 성이 지하 감옥이랑 다른 게 뭐야?”
“….”
“돌 감옥이랑 다른 게 뭐냐고. 전 영주님도 이렇게 검소하게 사셨나?”
“그렇죠….”
“굉장히 존경스러운 분들이군. 하지만 그건 그거고…. 절대 따라 하고 싶진 않아.”
“….”
“게다가 기사들도 그렇고, 하인들도 아첨을 모르는군. 정말 삭막한 성이야. 퍽퍽해.”
용병들이 잔뜩 있는 영지를 이렇게 오래 자리 비워놓고 있어도 되냐고 따지기에는 행크의 존재가 너무 미미했다.
그는 나름, 열심히 비위를 맞추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코다로는 그 어설픈 비위 맞추기를 즐겁게 바라보았다.
안되는 게 애쓴다는 표정이었다.
코다로는 이것저것 물으며 성을 둘러봤다. 그리고 솔직히 속으로는 감탄했다.
사람이 담백한 것도 정도가 있지 이건 거의 종교 수준이구나.
이렇게 검소하게 살다니.
이해가 안 되면서도 세인에 대한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원래 방탕하게 노는 사람도 성실한 사람을 좋아할 수는 있었다.
본인이 성실하고 소박하게 살기 싫어해서 그렇지….
비비안의 감상도 코다로와 많이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 딴에는 자신이 매우 검소하게 산다고 생각했는데, 한 방 먹은 얼굴이었다.
굉장히 신경 써서 음식이 나오는 것 같은데, 매 끼니가 정말 소박했다.
게다가 은 식기도 보이지 않는다.
벽에 걸린 그림이라고는 마플이 말려서 남긴 몇 점뿐이며, 사치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가끔 재수 없는 코다로와 마주칠 때면, 코다로가 중얼거리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어째 사냥터도 저 모양이란 말인가….”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속이 텅 빈 사냥터였다. 숨긴다고 숨겼겠지만, 나름 구색을 갖추고 사는 영주들에게는 옥에 티와 같았다.
뭐 그런 감상이다.
* * *
어느 날 저녁 비비안은 성벽 위에 올라가, 파랗게 내려앉는 저녁의 빛을 감상하고 있었다.
멀리 굴뚝에서 밥 짓는 연기가 나는 가운데 하나둘씩 켜지는 불빛들을 보였다.
오도카니 서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코다로가 올라오는 게 보였다.
“왠지 여기 하녀를 건들면 평생 책임져야 할 몹쓸 분위기가 느껴지니, 평소대로 할 수도 없단 말이야…. 난 이런 거룩하고 무거운 게 싫어.”
그는 아직 비비안을 발견 못 했는지, 이딴 소리나 지껄이면서 층계를 밟아 올라오고 있었다.
비비안은 정말 상대가 싫었지만, 그렇다고 바로 내려가는 것도 속 보이는 일이었다. 그래서 잠자코 성벽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코다로는 비비안을 지금 막 발견했지만, 흠칫거리지는 않았다.
그는 천연덕스럽게 다가와 거리를 유지하며 성곽에 기댄다.
“저야 성인이니까 괜찮지만, 수행원도 없이 돌아다니시면 안 되지 않을까요?”
“….”
비비안은 그냥 침묵을 유지하며 시선을 고정했다.
화자에게 얼굴조차 돌리지 않았다는 말이다.
코다로는 성질 같아서는 이 꼬맹이를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그건 상상뿐이었다.
뭐 상상은 무죄니까 가능하다.
한참 후에 비비안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코다로님.”
“예 말씀하십시오.”
“요즘 들어 느낀 것도 많고 해서, 제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앞으로 잘해 봅시다.”
코다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웃해 있지만 이렇게 교류하는 것 자체가 참 힘든 기회입니다. 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행동거지는 달라도 우리는 협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인간이니까요.”
둘은 어둠이 내려앉은 가운데 불을 밝힌 집들을 내려다보았다.
따지고 보면 몬스터들도 협력을 한다.
단지 방금 나눈 인간이라는 뜻에는 믿음이란 것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들의 가치관 안에서 몬스터는 서로를 믿지 않는 피조물이었다.
인간이니까 믿음을 전달할 수 있었다.
물론 리스크를 감당해야 하는 용기가 필요하지만….
코다로는 성정이 온순하진 않지만, 상황과 장소. 그리고 물불을 가리지 못하는 위인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상태를 잘 알았다. 그리고 비비안과 의견이 일치하는 구석이 있었다.
세인은 믿을 만한 사람이다.
일단 물꼬가 트이자 둘은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언제가 될까요?”
“빠르면 몇 년 후가 될 수도 있고, 늦으면 몇십 년이 될 수도 있겠죠. 누가 알겠습니까?”
“그날이 영영 안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건 우리와 같은 자리에서는 상상만으로도 유죄입니다. 최악을 염두에 둬야 하니까요. 그래야 극에 달한 경계의 긴장이 나오죠.”
두런두런 이야기가 이어지다가, 문득 코다로가 앞뒤 잘라먹고 갑자기 물었다.
“비비안님?”
“예.”
“제가 재수 없는 이유 하나만 말해 보시겠습니까?”
비비안은 움찔했다.
이런 대화는 귀족들이 나누기에는 너무 저렴했다.
영양가도 없었다.
이 인간은 잠시라도 긴장을 풀면 이따위구나.
코다로는 사실 비비안에게 먼저 말하도록 유도한 후, 자신도 한 방 펀치를 먹일 생각이었다.
아주 제대로 말이다.
그런데 비비안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말했다.
“하나만요?”
“네.”
“단 하나만요?”
“예.”
“고작….”
“…그만두죠.”
“….”
아니 잠깐.
뭔가 진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