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32화 (32/307)

# 32

& 극지 (3)

대륙 제일의 현자는 어디에 있는가?

현자 하면 다들 거북이를 생각한다.

그런데 거북이는 숫자가 너무 많고, 평생 한 사람만 정해 한 번만 지혜를 빌려주니까 논외로 치자.

‘대륙 제일의 인간 현자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내용을 바꿔서 묻는다면, 그는 어둠의 연회장에 있었다.

정중앙.

눈 부분을 가로지르는 상처가 아물고 난 후에 그는 앞을 볼 수가 없었다.

학자들이 앞다투어 지식 빌리길 염원하는 존재는, 과거에는 인간이었으되 지금은 인간이라고 보기 좀 어려웠다.

그는 머리가 깎였고, 여러 개의 촉수가 달렸다.

몸은 점액질의 달팽이처럼 끈적거렸으며, 바닥에 발이 붙어 있었다.

옛날 왕 중 하나와 수수께끼 내기를 해서 져버린 결과였다.

그는 무거운 쇠사슬에 몸을 결박당한 것뿐만 아니라, 점점 영혼이 오염되어 결국 괴물들에게 지혜를 빌려주는 역할까지 자청하게 된 것이다.

“엘릭서!”

그는 연회장의 존재들이 다 들을 수 있도록 소리를 질렀다.

불은 꺼져 있었고, 여러 개의 눈이 달린 샹들리에의 조명은 일자로 쏟아지며 그의 비참한 육신만을 조명하고 있었다.

이 비참한 웅변가는 다시 소리 질렀다.

“엘릭서!”

그 단어를 들은 존재들은 짜증 난다는 눈빛을 보내기도 했고, 탐욕스러운 기대의 눈빛을 던지기도 했다.

즉 반응이 갈렸다.

“엘릭서란 무엇인가? 그것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보물입니다. 거대하고 강력한 존재!”

*  *  *

세인의 뒤쪽으로 달려가던 사람들은 그의 고함에 다시 뒤로 물러섰다.

더이스는 황급히 병사들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자신만 앞으로 뛰어나갔다.

하얗고 붉은 소용돌이가 몰아치면서 거대한 손이 뻗어져 나왔다. 그리고 더이스를 그대로 후려갈긴다.

더이스는 뒤로 몇 바퀴나 데굴데굴 굴러가 눈더미에 처박혔다.

영주를 구하기 위해 나선 행동치고는 너무 허무한 결과다.

세인은 옆으로 달렸다.

방금 전까지 그가 있던 자리에 손이 처박혔다.

강철 침들이 옆으로 뉘며 쩔렁이는 소리를 냈다.

“헉! 허억!”

이제 괴물은 거친 숨소리를 내며 얼굴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목은 비정상적으로 길어져 있었고, 가시처럼 곤두선 침들이 가득했다.

오염된 정령들이 엉겨 붙어, 그의 의지에 형체와 힘을 주었다. 그리고 급조된 핏줄에 검은 피를 공급했다.

휘둘러지는 검을 여러 개로 늘어난 팔 중 두 개가 마주 잡았다.

손안에서 으드득거리는 소리가 날 때, 괴물의 머리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왔다.

그의 벌어진 이마에서 눈들이 깜박이며 세인의 이마와 맞닿았다.

“나는 그를 만나야해.”

“….”

*  *  *

현자는 떨어지는 소금을 맞는 것처럼 몸을 뒤틀었다.

그게 고통의 경련인지 희열의 극치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는 입에서 침을 튀기며 말하고, 또 말했다.

“마왕 유고가 더러운 나무와 결탁하고, 우리의 군주를 죽였습니다. 이에 신은 그를 칭찬하면서도 엄청난 형벌을 주었습니다. 그 당시 남겨진 것은 애증의 세계수뿐이었습니다. 인간들은 유고가 무슨 벌을 받았는지도 모르고, 잘못된 역사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실에 접근하지 못합니다.”

현자는 계속 말했다.

“우리들은 정당한 피조물이 아니니, 신의 선언에도 영향받지 않습니다. 게다가 세계수의 자식들이기도 하죠. 그래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완벽한 과거 속의 역사를요. 정확히! 신은 부서질 뻔한 세계를 보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에게 미안하니까, 시대마다 수호자를 두겠다. 그 수호자는 모든 것을 초월하여 권능을 행사할 것이다!”

*  *  *

엄청난 충격에도 불구하고 세인의 검은 부서지지 않았다.

그게 의아할 따름이었다.

그의 검은 무서운 힘으로 괴물 앞에서 소용돌이쳤다.

삽시간에 근육과 강철로 된 뼈대가 잘려져 나가며 조직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것들은 거머리처럼 펄떡대다가 다시 세인에게 덤벼들었다.

왼손을 움직여 그중 하나를 박살 낸 세인 앞에, 아델의 상반신이 떨어졌다.

피를 머금은 날카로운 이빨들이 세인을 물었고, 그것을 아델의 몸도 느꼈는지 환희를 물리적으로 표현했다.

성게의 가시처럼 길게 뻗친 끝이 얼음과 부딪혀 딱딱한 소리를 냈다.

세인을 물은 상반신은, 하반신과 분리되듯이 떨어지며 끌리는 소리를 낸다.

거울 호수가 힘을 행사하는 법칙은 간단하다.

대상의 힘을 이용해 얽힌 인연을 투사하는 방식이다.

세인의 힘이 강할수록 끌려 나온 영혼의 힘도 강해진다.

물론, 그 영혼은 설원에서 죽었어야만 하며 세인에게 끌어오는 힘은 그의 총량에서 일부분이었다.

“안돼!”

더이스가 울부짖을 때 세인의 손이 움직였다.

그리고 덥석 하고 가시가 돋아난 아델의 입 부분을 잡았다.

*  *  *

“왕들이여. 우리는 그 엘릭서를 찾아야만 합니다. 하나의 시대에 눈을 뜨는 엘릭서는 단 한 개. 그것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잃은 힘은 단 하나의 지성만을 받아들입니다. 그 대상이 바로 라이트닝 블러드입니다.”

현자는 흐느꼈다.

그는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가 가슴으로 모으며 떨었다.

격정이 그의 몸체에 몰아친다.

그는 격정의 태풍을 혼자 맞듯, 고난을 혼자 짊어지고 바위를 산 위로 굴리듯 떨었다. 그리고 웅크린 거인이 상반신을 크게 젖히듯 일어나며 소리쳤다.

“힘! 엄청난 힘! 우리가 엘릭서를 굴복시킬 수 없다면…. 그가 함께하는 단 하나의 지성! 바로, 라이트닝 블러드를 우리가 고문하고 분쇄하여 다시 조립해 길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더 크게 소리쳤다.

“바로, 저처럼요! 그를 학대하고, 꾸깃꾸깃 주먹 안에 몰아넣어서 후려치고…. 벽을 후려치고 유리처럼 깨트려서! 그러면 엄청난 힘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절대의 힘이 우리에게 다가와요! 그것만 있다면 우리의 승리는 확실해집니다.”

그리고 옆으로 쓰러졌는데, 흥을 못 이겨 펄떡대던 그를 노예들이 싣고갔다.

쓰레기를 치우는 듯 그가 사라지자, 왕들끼리 의견 차이가 있었다.

“나는 반대요. 찾을 만큼 찾았소. 그런데 없잖아. 이미 사라졌을지도 모르지.”

“설명 못 들었나? 시대를 거쳐 연속성을 가진다잖아. 인간들은 그것의 존재조차 몰라. 그냥 무방비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고. 절대의 힘이. 그런데 왜 우리가 수색에 더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을 못 하지?”

“얼마나 그 허구를 위해 우리의 시간을 낭비해야 하는데? 게다가 매달릴 게 오직 그것뿐인가?”

왕들은 다투었다.

그들의 의견은 각기 차이를 보였다.

어둠의 연회장은 시끌벅적해지다가 다시 잠잠해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한 왕이 말했다.

“우린 이미 계획이 있소. 그 계획은 인간들이 알아차릴 수도 있어요. 시간을 계속 끈다면 말입니다. 보시오, 간단한 거요. 엘릭서는 찾는다는 보장이 없어요. 계속 미루다간 원래의 계획을 망가뜨릴 수도 있어요. 아직도 남부의 인간들은 방심한 상태로 으스대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게 언제까지 계속될까요? 다른 엘릭서라는 것이 무척이나 매혹적이지만, 대체 누가 그걸 계속 찾을 수 있습니까? 그 열쇠인 라이트닝 블러드는요?”

다른 왕이 그를 거들고 나섰다.

“완전한 공략만 찾다간 끝이 없어. 누가 진짜로 세상을 뒤엎을 거지? 최소한 허구를 쫓는 자는 아니야.”

“라이트닝 블러드를 어디에서 찾는단 말이요? 내가 추측하기로 분명 인간은 아닐 거요. 오래 못 사니까. 그렇다면 수명 긴 놈들을 찾아야 하는데, 대부분 꼭꼭 숨어있단 말이요. 아무리 눈들을 보낸다 한들, 지하를 파고들 수 있소?”

결국, 왕들은 의견을 통일하게 되었다.

군단장에게 섭정을 보냈던 왕이 적극적으로 나서자, 엘릭서에 대한 수색은 완전히 중단되었다.

그의 호언장담대로 진행된 것이다.

이제는 군단장이 적극적으로 행동할 차례였다.

하나의 시대에서 하나의 엘릭서가 동반자를 찾아올 때….

세계를 움켜쥐는 절대적인 힘이 탄생한다.

그 시대가 허락한 것이 마검이라면, 시간을 멈추고 내키는 대로 죽인다.

그 시대가 허락한 것이 성검이라면, 죽은 자를 살리고 원하는 것을 심판한다.

그 힘앞에 굴종하지 않을지라도 상관없다.

저항하는 자는 죽을 테니까.

*  *  *

더이스가 단검을 던졌다.

그것은 충혈된 붉은 눈에 정확히 맞아 퍽 소리를 냈다.

붉은 액체가 주룩주룩 아래로 흘러내릴 때, 더이스는 상반신의 힘을 지탱하지 못해 주저앉은 괴물의 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그리고 바람 소리를 내며 메이스가 횡으로 움직였다.

처음에는 당연히 세인을 섬겨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미심쩍은 부분도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은 부분도 있었고 말이다.

가끔 마지못해 복종해야만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더이스는 세인의 기사가 되어갔다.

세인이 더이스에게 어떤 거리를 둘지 몰라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마차를 지키던 병사들이 명령을 거스르고 달려들어야 하나 마나 우왕좌왕할 때, 하나의 노란 눈이 상반신을 탈출했다.

촉수 끝의 노란 눈은 허공에서 휘어지며 더이스의 목을 감았다.

그때가 메이스에 다른 하나의 눈이 맞은 때였다.

노란 액체가 퍽하고 터지며 더이스의 얼굴을 물들였다.

더이스는 낯선 괴생명체의 공략 방법으로, 눈을 없애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눈이 너무 많다.

촉수가 몸부림치는 더이스의 몸을 감아서 위로 올렸다.

그는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때 세인의 손이 그의 몸에 박힌 주둥아리를 잡고 찢었다.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쩍쩍 갈라지더니, 괴물의 근육들이 터져나간다.

검은 피에 온몸이 젖었지만, 세인은 멀쩡했다.

기괴할 정도로 말이다.

그의 머리는 분노로 뜨거워진 것이 아니라 이상할 정도로 싸늘하게 식었다.

그리고 그 싸늘함은 점점 아래로 내려와 가슴마저 식혔다.

그 서늘함은 목소리가 되어, 세인이 알아듣지 못함에도 자신의 언어로 속삭였다.

마음만 먹는다면 죽일 수 있다.

넌 ‘라이트닝 블러드’니까.

계시를 받은 듯 그가 묵묵히 검을 휘두르자, 비명과 함께 피바람이 불었다.

저항하려 가져다 댄 팔은 검에 닿자마자 기형적으로 꺾이며 부서져 나간다.

엄청난 힘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아래에서 위로 움직였다.

그와 함께 괴물이 부서져 나가며 뒤로 물러난다.

세인은 그런 상대를 뒤따라가며 검을 박아 넣었다.

검날을 통해 단단한 이물감들이 느껴졌다.

뚫릴 것 같지 않은 단단한 껍질이 검 끝을 막아섰다. 그러나 힘 앞에서는 미약한 방패일 뿐이었다.

결국, 딱딱한 것이 견디지 못해 갈라지는 소리가 나고, 괴물의 뒤로 피보라가 일었다.

더이스는 죽다 살아났다.

땅에 거꾸로 처박힌 것 치고는 무사했지만, 머리에 혹이 몇 개나 생겼는지 모르겠다.

달려온 병사들이 그를 받쳐 들고 수습할 때.

그는 바쁘게 움직이는 팔들 사이로 세인의 뒷모습을 보았다.

붉은 연기 사이에 서 있는 모습이었다.

붉은 형체들이 검게 변하며 내려앉는다. 그리고 아래로 사라진다.

뼈 같은 것들이 굴러다니다가 재처럼 스러졌다.

얼음 바닥은 용케 깨지지 않고 모든 것을 받아냈다.

누군가의 끝도 마찬가지였다.

끔찍한 전투가 벌어졌던 것과 대비적으로, 세인의 등은 약간 쓸쓸해 보였다.

그때 녹아내리는 잔해 속에서 하얀 손 하나가 불쑥 뻗어 나왔다.

아까 마주쳤던 망자가 마지막으로 보여주었던 귀처럼, 인간의 손이었다.

버둥대는 그 손은 어떤 정확한 의도가 아니라, 생존을 갈구하는 본능적인 움직임을 담고 있다.

세인의 손이 반사적으로 그것을 마주 잡았다.

아델의 손은 아주 차가웠다. 그리고 오래 견디지 못했다.

세인의 손에서 그의 손이 부서진다.

그렇게 그가 내려다보는 가운데….

아델은 전에 미처 나누지 못했던 작별의 인사를 그에게 건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