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 극지 (2)
‘이건 불공평하다.’
디펜더스의 영주인 비비안은 활을 쏘는 남자들을 볼 때마다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곤 했다.
남자들은 활을 잘 쏘았다.
그들은 탄탄한 근육을 가지고 있었고 과녁 중앙에 화살을 명중시켰다.
그녀는 앞으로 성장해도 활을 잘 쏠지, 아닐지 알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 통치에 재능이 있었다.
그녀는 꽉 막히지 않았고 기민했으며, 재치가 있어야 할 때 멍청하게 굴지 않았다.
판단 장애도 없었고 예법에도 통달했다.
지도 보는 법을 알았고 아첨꾼을 벌써 구별했다.
아랫사람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생각할 줄도 알았다.
하지만 이 모든 가능성이 그녀의 나이와 성별 때문에, 주변 때문에 무너진다.
이모는 그래도 그녀에게 정당한 권리를 넘겨주었다.
“네 아버지로부터 위임받았던 자리를 오늘에야 이르러, 정당한 후계자인 너에게 넘겨준다. 그리고 나는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가서 살겠다. 그러나 조카야. 사특한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나는 진정으로 네가 걱정되는구나. 자리가 제 주인을 찾아갔으나. 나의 시름은 깊어져만 간다.”
그리고 이모는 떠났다.
그리고… 비비안은 남겨졌다.
그녀는 자주 생각했다.
자기가 남 같았어도 어린 소녀가 영주 자리에 있다면 모반을 일으킬 것이다.
아니 최소한 건드려 보기라도 할 것 같았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정말 그럴 것 같았다.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그러지 않는 쪽이 바보 천치 같았다.
누가 아니겠는가?
그 후로 영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녀에 대한 부적합한 도발로만 느껴졌다.
비비안이 그 후로 얼마나 불안해하고 괴로워했는지 그의 측근만이 알았다.
쉴 새 없이 유혹이 코와 입으로 쏟아졌다.
누군가가 달콤한 향유를 들이붓는 것만 같이….
- 저들에게 너의 힘을 보여주고, 무시당하지 않도록 짓밟아 버려. 모욕당하기 전에 힘을 보여주란 말이야! 그러지 않으면 네가 당한다. -
그때 그녀의 기사인 윌이 다가와 말했다.
“나의 영주님. 저희 기사들은 당신을 수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그 눈에 동정을 담고 저들을 한 번만 제대로 보아 주십시오. 화살이 날아온다면 우리의 몸으로 그것을 막고, 창이 날아온다면 앞장서겠습니다. 당신이 죽는다면 저희의 죽음으로 충성을 돌려 드릴 테니, 제발. 그 마음에 동정심을 담아 주십시오.”
그때 비비안은 반지를 들고 있었다.
그것을 든 그녀가 명령을 내린다면, 그녀에게 고약하게 보였던 마을 하나는 절단이 날 판이었다.
진상은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과민 반응하는 그녀를 탓할 이는 여기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자리에서 쏟아지는 압력을 상상할 수 있었으니까.
망설이는 소녀 앞에서 윌이 다시 한번 말했다.
“한번 가혹하게 나가시기 시작하면, 스스로 그것을 멈출 수 없습니다. 한번 억압적인 자세를 결정하면, 그 강압적인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 계속 채찍을 매섭게 휘두르게 됩니다. 인간에게도 그런 관성이 본성으로 숨어 있습니다. 영민한 군주님. 당신의 현명한 시작을 저희에게 보여 주십시오. 간청합니다.”
“당신 말과 반대로, 제가 이 자리에서 마을을 불태우라 명령한다면 그렇게 할 건가요.”
“그렇습니다.”
“좋습니다. 나는 당신들에게 그것을 명령하지 않겠습니다. 적어도 내가 먼저 배반당하지 않는다면, 그런 확신이 없다면 나는 계속 당신들이라는 방패 뒤에 숨겠습니다.”
비비안이 영주 자리에 오르고, 첫 번째로 잘한 일은….
바로 기사들을 전폭적으로 믿어 보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사들은 그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그리고 그들의 그런 모습은 다시 비비안을 안심시켰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언제나 일말의 불안감은 그녀를 따라 다녔다.
그리고….
오늘날 두 번째로 그녀가 잘한 일은 아레이즈의 영주를 믿어보았다는 것이다.
책상 위의 서류를 뒤적이던 그녀는 그것을 재차 확인했다. 그리고 종이를 내려놓은 그녀가 뭔가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 표정이 끝나자 측근이 묻는다.
“무슨 고민거리라도 있으십니까?”
“코다로가 마음에 걸립니다. 아레이즈는 계속 신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코다로 같은 작자와 손을 잡은 건 아레이즈의 영주에게 실례되는 표현이겠지만, 경솔한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그쪽을 대놓고 무시하면 모양새가 좋지 못하죠. 골드 힐의 영주가 직속 병력이 미미해서 그렇지, 그의 용병술이면 병력을 쉽게 일으킬 수도 있음입니다. 광산을 몇 개나 가지고도 모반 한번 없었던 게 그 증거죠.”
흐음… 이라는 소리를 내던 소녀가 다시 입술을 떼었다.
“아레이즈에 한번 방문해서 그의 의사를 듣고 싶군요.”
“예, 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그의 호의를 연거푸 확인했으니, 괜찮은 생각이라 여겨집니다.”
* * *
비비안이 찾던 세인은 설원 위를 걷고 있었다.
오래 걷다 보면 반사된 햇빛에 눈이 아프고 머리가 어질했다. 그리고 살이 탄다.
일렬로 이동하는 짐 마차들은 평탄한 길 위를 문제없이 굴러갔다.
정작 문제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가운데, 희끄무레한 형체들이 주변에 늘어났다는 것이다.
“어떻게 할까요? 영주님? 가뜩이나 시계도 불량한데 늘어나고 있습니다.”
“내버려 둬.”
더이스는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가, 무뚝뚝한 대답만을 듣고 옆으로 떨어졌다.
세인은 말을 몰면서 전방만 주시했다.
“거인인가?”
병사들은 속닥거리면서도 길을 재촉했다.
그런 그들의 주위로 이제는 검고 긴 형체들이 같이 움직였다.
저게 뭘까?
몬스터라고 하기에는 옆에서 걷기만 한다.
일반인보다 두 배는 됨직한 것들이 떼를 지어 옆에서 이동하는 모습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포위된 것만 같다.
“무시하고 계속 이동하면 된다.”
호언장담하던 세인의 말과는 달리, 전방에서 버티고 서있는 형체가 잡혔다.
가까이 다가가니 그가 팔을 쳐들었다. 그리고 좌우로 벌렸다.
당연히 사람들은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저게 안아달라는 것은 아닐 테고 말이다. 게다가 눈으로 된 구조물은 붉은 두 눈 같은 것을 빛내고 있었다.
그것이 소리를 치자, 땅이 울리면서 바닥의 눈 조각들이 떠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더이스도 그렇고 병사들이 무기를 빼 들었을 때,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세인이 다가갔다. 그러자 괴물은 세인을 공격하려고 팔을 더 치켜 올렸다.
누가 봐도 이제 전투가 벌어질 상황이었다.
그때 세인이 붉은 불빛을 똑바로 보며 소리쳤다.
바람이 부는 가운데, 그의 소리만은 벽력처럼 앞으로 몰아친다.
“맹인아! 정신 차려라! 너는 죽었다. 너는 너의 의지로 서 있는 게 아니다!”
그러자 괴물의 움직임이 멈칫거렸다. 세인은 확신을 담아 다시 소리쳤다.
“너는 오래전에 죽었다. 그러니 섭리에 따라 다시 바닥에 몸을 뉘여라”
더이스는 약간 벌어진 거리를 유지한 채 천천히 허물어지는 설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설인이 완전히 허물어졌을 때, 세인에게 다가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뭡니까?”
“죽임을 당했던 사람들이야. 사념이 길 잃은 엘리멘탈과 결합한 거야. 하지만 이들은 그나마 주변을 자각하며 충성을 안고 죽었기 때문에 설득이 먹히는 망자들이다.”
가라앉는 눈더미 사이로 사람의 귀가 언뜻 보였다.
더이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커다란 설인들이 길게 기둥처럼 멈춰 서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령 말입니까?”
“그래.”
“세계수 근처답군요.”
다시 길을 재촉하자 설인들은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눈에 묻힌 골짜기.
옆으로 쓰러져 있는 거인 나무.
얼어붙어 있는 바위산 등이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지나쳐갔다.
세인이 경각심을 일깨운 시기는 바로 얼어붙은 호수를 지나갈 때였다.
“이틀을 단축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위험한 걸 알아도 지나갈 수밖에 없다. 동사를 피해야 하니까.”
하얗게 변해 있는 호수 위를 걷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하얀 바탕 속에 군인들이 행군한다.
그들의 입김은 얼음 알갱이가 되어 살에 달라붙었고, 옷자락들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주름이 접힐 때마다 깨지는 소리를 냈다.
호수 위로 국지적인 오로라가 몰아칠 때, 그것에 홀리지 않도록 더이스는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누군가를 부른 모양이다.
세인은 레인저로서 활동하며 지금보다 훨씬 위험한 곳을 많이 돌아다녀 보았다.
그중에서는 까마득한 높이의 산도 있었다.
그런 마당에 여기에서 생소한 경험을 할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안다 해서 그것이 버겁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육체적으로는 몰라도 정신으로 말이다.
평소 그는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영리하게도 자신의 인간성을 스스로 의심할 때쯤이면,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은연중 긴장을 풀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알면서도 말이다.
이 호수가 거울처럼 사람을 홀린다는 것을….
눈과 오로라뿐인 호수는 더 이상 낯선 방문자들에게 보여줄 것이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마지막 즈음에서 그의 선물이 드러났다.
두건을 뒤집어쓴 남자는 얼어붙은 호수 위에 앉아 있었다.
눈이 쌓여서가 아니라, 원래 하얀색인 망토를 제외하면 남자는 알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등을 보이고 있었는데, 바람에 망토가 옆으로 휘날릴 때마다 하얀 등줄기와 엉덩이가 드러나 보였다.
더이스는 하얀 맨살이 호수의 얼어붙은 바닥과 밀착되어 있는 것을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춥고 아플 것만 같다.
더이스는 일행을 정지시킨 다음에 세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레인저 경험이 있는 자와 설원을 걷는다면, 그의 충고와 조언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이제 깨달았다.
“나서지 마라.”
그런 말만을 남겨둔 채 세인은 회색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앞으로 걸어갔다.
그의 검은 코트 밑자락이 얼어붙은 바닥과 닿을 듯이 아슬아슬하게 흔들거렸다.
장화에 닿을 때마다 얼음은 둔탁한 소리가 났고, 그 소리는 앉아있는 남자의 옆까지 이어졌다.
멈춰선 아레이즈의 영주는 남자의 옆에서 물었다.
“뭘 하고 있지?”
그의 물음에 입을 벌린 남자의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새어 나오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앉아 있던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어.”
“누구를?”
“….”
둘은 잠시 침묵을 공유했다. 그리고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그렇게 같이하고 있었다.
그렇게 영원처럼 이어질 것만 같았던 착각은 언젠가 끝난다.
예고도 없이 세인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두꺼운 검은 코트 안에서 보호받던 검집에는 성에가 없었다. 덕분에 약간의 마찰 말고 그의 손짓을 방해하는 저항은 없었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남자가 고개를 비스듬히 위로 돌렸다.
그의 머리카락은 하얗고 두 눈은 빨간색이었다.
세인은 그의 손톱이 길어지며 바닥과 수평이 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옆으로 벌린 팔의 열 가닥 침 끝이 얼음을 두드릴 때, 그는 조금 뒤로 물러났다.
남자가 일어났다.
그 바람에 망토가 벗겨졌다.
그의 몸은 꿰맨 자국으로 흉측했다.
“눈사람들이 나를 다시 이어 붙였어.”
“눈사람들은 시체를 이어 붙이지 않아. 그건 너의 상상이야.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세인은 그렇게 말하며 다가오는 더이스에게 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방해하지 마라.
그리고 입을 열어 앞의 남자에게 부탁했다.
“침묵하라. 너는 이미 죽었다. 땅에 영혼을 뉘어라. 부탁이다.”
남자는 세인의 앞에서 붉은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얀 눈이 그의 얼굴에 쌓였으나 녹지 않았다.
“입을 벌리지 마.”
세인은 가끔 생각했다.
그는 괴물들이 너무나 저주스러웠다. 그리고 죽이고 싶었다.
증오하고 증오해도 끝이 없었다.
모든 수단을 다해 죽이고, 잔인하게 학대하고 싶었다.
왜냐면 그들의 악의가 인간 내면의 뭔가를 짓밟고 희롱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 그들을 산산이 부수고 싶다.
나는 인간이니까.
남자의 입이 옆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목덜미를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세인은 그것들이 지퍼처럼 열리는 것을 보며 장검을 위로 올렸다.
“아델, 너는 죽었어. 오래전에…. 영혼과 몸을 뉘어라. 미련을 가지면 안 돼.”
“어렸을 때 친했던 친구가 있었어. 꽤 괴로운 생활을 하던 친구였어. 그는 너무나 가혹한 환경 속에서 싸우고 있었어. 나는 그에게 빚을 졌고 그를 위험에 빠트렸지. 그를 찾아가 사과하고 싶다. 너를 먹는다면 힘이 나서, 그게 가능할지도 모르지.”
세인이 뭐라 더 말하기 전에 아델의 몸이 입을 따라 찢어졌다. 그리고 불어났다.
좌로.
우로.
그리고 높이 솟아올랐다.
호수 일부분이 흔들릴 정도의 지진 후에, 커다란 입을 가진 괴물이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