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 극지 (1)
“좋은 생각을 내어 봐라.”
북부의 허리띠 지역 앞에 포진해 있는 괴물들, 그중 수장만을 모은 회의에서 군단장은 지금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군대가 전쟁 준비를 빨리 마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래도 수장이라고 모인 것들은 지능이 꽤 있는 존재들이었다.
그중에서도 고블린 쪽이 아무래도 꾀가 많았다.
여기에서 꾀란 인간들이 생각하는 꾀랑은 좀 다른 개념이다.
과격하고 사악했다. 아무래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거미줄처럼 촘촘히 위를 뒤덮고 있는 세계수의 뿌리 아래.
각기의 종족이 저마다의 욕망을 위해 모여 있었다.
그들을 거대하게 통제하는 것은 왕들의 의지였지만, 개체적으로 볼 때는 통제하기가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드워프 들은 더 고문하면 됩니다. 더 잔인하게요.”
“보는 앞에서 가족을 먹는 것도 좋겠지.”
옆에서 끼어든 다른 수장에게 고블린은 눈을 흘겼다. 그리곤 그 큰 귀를 펄럭이며 노란 눈깔을 뒤룩뒤룩 굴렸다.
그는 홉 고블린이었다.
사악한 꾀주머니가 아주 많았다.
“우리 군대는 이렇게 준비 시키는 게 어떨까요?”
홉 고블린은 자신이 준비한 계획을 군단장에게 세세하게 풀어 말했다.
그러자 이야기를 다 들어본 군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하면 준비가 좀 더 앞당겨질 수 있겠군.”
군단장의 말에 홉 고블린이 히죽 웃었다.
* * *
세 영지의 동맹은 점차 견고해졌다.
그들이 삐걱대지 않았던 이유는 서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배와 등 쪽이 모두 아쉬운 상황이었고 그것도 모자라 저마다 약점이 있었다.
아레이즈의 경우에는 병사들 상태가 괜찮고 많았으나 기사들이 부족했다.
게다가 그나마 있는 기사 세 명도 나이가 있는 편이었다.
노련하다는 쪽에 점수를 줄 수 있었지만, 혈기왕성해서 팔팔한 상태는 아니었다.
골드 힐의 경우에는 병사도 기사도 미흡했다.
용병들은 언제 배신할지 몰랐지만, 그 대신 자금이 풍족한 편이다.
디펜더스의 경우에는 충성스러운 가신들이 많았고, 성 상태도 좋았다.
기사들도 많은 편이었다.
대신 병사들이 좀 적었고, 어린 소녀가 영주 자리에 앉아 있어 불안 요소가 매우 컸다.
서로 돕지 않으면 안 된다.
세인이 손을 먼저 내밀었고, 그는 그 의지를 실천했다.
아니 지금도 실천하고 있는 중이다.
목책은 많을수록 좋았다.
왜 저렇게 무차별적으로 벌목하는지 모를 일이라고 주민들이 수군댔다. 그런데도 그는 주변 영지건 야만인들이 사는 곳이든 목책을 설치하고 다녔다.
그리고 몬스터들도 보이는 대로 족족 죽여 없앴다.
내치에 신경 쓰고 있지 않다는 불만은 차올랐지만, 대외적으로 세인은 아주 평판이 좋은 편이었다.
그나마 밖에서 보면 세인이 하는 행동의 의미를 읽기 쉬웠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레이즈에 방문한 사람들은 의외로 영주의 인지도가 낮은 것에 대해 굉장히 의아해했고, 의구심을 가지는 형편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코다로와 비비안은 세인에 대해 더욱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건 어려운 게 아니었다.
세인은 손해를 봐야 할 때면 기꺼이 손해를 감수했다.
더 큰 결실을 위해서 말이다.
그게 한두 번이라면 의심이 갈 수 있어도….
수십번 되풀이하다 보면 결국, 누군가는 알아주기 마련이다.
오늘도 그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책상 위에 쌓인 청원서를 읽고 있었다.
그걸 보는 맥은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화나지 않으십니까? 영주님?”
“뭐가?”
퉁명스럽게 입을 여는 세인 앞에서, 맥은 오히려 자신이 화가 난다는 듯이 말했다.
“그 아스칼리온이라는 자 말입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마을 내에서 영주님을 음해하는 것 같던데요? 게다가 자기가 마을 내에서 부자면 부자지. 기껏 그 알량하고 쥐꼬리만 한 우호도를 주변 사람들에게 쌓았다고 해서 이렇게 날뛰다뇨.”
생각해 보니 점점 열 받는 듯 맥은 얼굴을 붉혔다.
세인은 종이를 꼼꼼히 읽다가 흘낏 맥의 꽉 쥐어진 주먹을 보았다.
“이 늙은이는 밤잠이 없는 탓을 영주님 탓으로 돌리는 모양입니다. 매일매일 이 정도의 글을 쓰다니. 혹시 대필이라도 하는 거 아닙니까?”
“설마 직접 쓰겠나? 기력이 어디서 나서? 적어도 받아 적게는 하겠지.”
세인은 종이의 뒷면에 쓰인 글을 보며 대꾸했다.
아스칼리온은 매일매일 세인에게 불평불만을 쏟아내고 있었는데, 어느 영주라도 성질이 날 만했다. 그런데 정작 세인은 평온하다.
“무덤덤한 영주님을 보면 신기합니다. 정말. 저 같으면 화가 나서 피가 마를 것 같은데 말이죠.”
“보통 마을 사람들은 내게 이야기하지 못해.”
종이를 내려놓으며 세인은 맥과 눈을 맞추었다.
그가 자신 몰래 아스칼리온에게 찾아갈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잔뜩 성질난 이 노 기사는 아니더라도, 행크 정도면 정말 노인을 두들겨 팰 수도 있다.
그는 성질이 불같았으니까….
“어떻게 내게 이야기하겠어? 내가 만약 온화한 영주더라도 마찬가지야. 나는 그들의 생명을 쥐고 있어. 내가 원하면 아녀자를 억지로 취하고 그게 도덕적이라고 포장할 수도 있지. 내가 원하면 내키는 대로 베고. 고문하고 화형 시킬 수도 있어. 내가 없는 데에서 욕을 할지언정. 나이 많고 적음을 떠나 모두 그걸 알아. 모를 리가 있겠나? 교육만 못 받았을 뿐 삶의 지혜가 없는 것도 아닌데.”
“….”
맥은 세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기사의 시야가 넓을 수는 없었다.
전투에 힘쓰다 보면 시야각이 좁아진다. 그렇다고 아스칼리온 같은 역할을 맥이나 다른 기사에게 기대하기에는 그들은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예를 들어 병사들 훈련 같은 일 말이다.
“청원을 받는다고 해봤지만 누가 이런 걸 적극적으로 활용하겠어? 내가 촌장이라도 말릴 거야. 영주에게 밉보여봐. 어느 날 나타나 무슨 짓을 할지 모르지. 그런데 이 아스칼리온 이라는 노인은 그래도 잃을 게 없다고 생각하는지, 내게 꾸준히 글을 보내고 있어. 그중에는 영지민의 이야기도 들어 있다. 물론 얼토당토않은 주장도 있지.”
“….”
“그렇다 해도 자신의 삶에 대해서 그들은 의사를 표현할 자유가 있다. 대우에 관해서 이야기할 권리 정도는 있어.”
“그래도 화나지 않으십니까? 틀렸다는 말도 한두 번이지. 옆에서 보는 제가 성질이 나는데요.”
“이들은 모르잖아. 우리가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부닥쳐 있는지 말이야. 그런 상황에서 보면 하는 짓이 마음에 안 들겠지.”
그러면서 세인은 종이들을 뒤적였고, 맥은 그런 세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맥은 세인과 시간을 보내면서 점점… 그가 안타깝다는 감성에 빠지곤 했다.
기사로서 피해야 하는 감성 말이다.
여기 말고 다른 곳에서, 안전한 곳에서 태어나셨다면 좋으셨을 텐데···. 라는 생각 따위.
‘안전한 곳에서 이런 마음 씀씀이를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면 좋으셨을 텐데.’
처음에는 세인을 보며 기분이 복잡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쉽게만 느껴진다.
그의 그런 감정은 호의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기사도 사람이다.
아무리 충성을 강요받지만, 그들도 주군에 대한 호감과 적대감이 존재했다.
“게다가 나는 독재로서 그들의 기본적인 알 권리를 짓밟고 있다. 아스칼리온이 만약에 나쁜 자라면 나는 엄청나게 사악한 자 정도쯤 되겠지. 그나마 그는 모르니까 이 정도 지적밖에 못 하는 거야.”
“영주님. 국가의 국민으로서 그들도 책임져야 할 부분입니다. 그들은 아레이즈의 구성원이고요. 위기라고 해서 마음대로 살던 땅을 떠날 수는 없는 겁니다. 너그러우신 것은 좋으나 너무 과한 동정심을 가지지는 마십시오.”
세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그는 마치 노예 다루듯이 밑의 사람들을 몰고 있는 셈이다.
이제 8살도 안 된 어린아이들은 자신들이 뭘 강요받고 있는지 알기나 할까?
현재 어머니 배 속에 있을 생명은?
“법적으로 나는 무죄지. 하지만 인간적으로는? 나는 죄인이 아닌가?”
그러나 이른 아침부터 나누기엔 너무 무거운 주제였다.
이 모든 것을 털어 버리려는 듯이 세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맥에게 어조를 달리해서 말했다.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잘 부탁해.”
“제가 동행해야 하는 건데 죄송합니다.”
맥의 그런 말을 들으며 세인은 외투를 걸쳐 입었다.
그의 옷은 온통 검은색이었다.
두 개의 벨트가 허리에 교차 되어 있었고, 두 개의 검이 그 옆으로 수납되었다.
성 밖으로 나온 그는 회색 말의 안장에 활과 가방을 걸었다.
더이스와 여러 명의 병사들은 이미 모두 집합한 상태였다.
그들 중 몇 명은 말의 상태를 체크하고 수레들을 점검했다.
짐마차는 5대. 수레는 3개였는데 털북숭이 소들도 보였다.
이미 더이스가 간략하게 설명했겠지만, 말 위에 올라탄 세인은 병사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우리는 레인저 부대 쪽으로 나간다. 너희 중에서는 이런 일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왜 우리가 이런 모험을 목숨 걸고 해야 하냐고 말이다.”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들은 알아야만 했다.
병사는 일반 영지민과 다르다.
비밀 엄수를 약속받는 대신 세인은 왜 우리가 무슨 이유로 어디에 가야만 하는지, 충분히 이야기해 주었다.
“만약 너희가 죽어도 우린 그 시체를 수습하지 못할 것이다. 여유가 없을 테니까. 대신 죽는 이유를 알고 사라져 가라.”
“영주님. 병사들을 향해 그렇게 시시콜콜 다 이야기해줄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더 불안해하거나 그릇된 판단을 내릴 수도 있고요.”
더이스는 그런 세인을 말리기도 했지만, 세인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어차피 배신할 놈은 하고. 딴 마음 먹거나 개죽음당할 놈은 어떻게 대해도 그렇게 하고야 만다. 하지만 난 고작 그런 놈들에게 입 아프게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냐.”
그렇게 일축하곤 했다.
“레인저들은 하루하루 힘들게 살고, 보고서를 써서 왕실로 보내주고 있다. 그런 그들에게는 도움이 필요하다. 왜냐면 적어도…. 그들은 죽음에 대한 의무를 우리보다 한 발짝 앞서 실천하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렇게 직접 만나서 호의를 베풀면, 보다 생생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점도 강력하게 적용하고 있었다.
규정상 레인저들의 정보는 일차적으로 봉인되어 수도로 올라갔다가 밑으로 내려온다.
그 시간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불평을 해도 고쳐질 수 없는 규정이다.
물론, 네이블 정도가 되면 봉인에 수작질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아레이즈나 다른 영지들의 여건으로는 정찰병을 멀리 운용 못 한다.
네이블에서 도와주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몸을 움직일 수밖에.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외성의 문이 열리고 눈이 쌓인 숲이 그들을 받아들였다.
모든 게 꽝꽝 어는 겨울이었다.
제대로 맞는다면 눈 다람쥐도 한 방에 뻗어버릴 무시무시한 고드름도 있었다.
그것들은 높게 서 있는 나무마다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혹한기에는 사람들이나 몬스터도 어지간하면 활동을 멈춘다.
살인 곰들은 동굴 깊숙이 들어가고 겨울잠을 잔다.
그런 극한의 시간대이기 때문에 오히려 안전해지는 감도 있었다.
세인은 그것을 노려 예정된 출발을 감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