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 여가
마플은 영주의 부름을 받고 홀로 달려갔다.
홀에 있는 거대하고 위가 뾰족한 의자에는 세인이 앉아 있었다.
전 영주가 앉던 의자에, 그가 앉아 있는 모습은 세월의 무상함을 깨닫게 했다.
또, 할아버지의 체취가 곳곳에 배어있는 의자는 그를 불편하게도 했다.
세인은 그녀를 보자마자 의외의 말을 했다.
“뭘 하면 재미있게 놀 수 있지?”
“예? 영주님. 말의 앞뒤를 다 잘라먹고, 그렇게 이야기하시면 곤란합니다.”
“농번기도 끝난 지 한 달이 흘렀고, 지금은 영지민이 쉬는 기간이다. 그러니까 뭘 하면 그들이 놀 수 있냐고.”
마플은 그런 시점에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내가 뭘 하고 재미있게 놀 수 있는가? 라는 질문도 아니고, 영지민이 놀 수 있는 시점 같은 거 말이다.
“기사분들에게 물어보세요. 여자 머리로는 한계가 있어요.”
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
“그보다 이 의자 좀 어떻게 해봐.”
“….”
아주 추운 겨울에도 단계가 있었다.
그냥 밖에 나가면 손이 아플 정도의 추위는, 말 그대로 그냥 겨울이었다.
그러다가, 누구 말대로 소변을 보다가 그게 바로 어는 것을 볼 정도면 혹한기가 시작되었다는 뜻이었다.
혹한기가 되면 그냥 안 돌아다니는 게 이득이다.
어차피 다들 쉬는 거지만 그래도 쉴 때나마 웃을 거리가 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은 세인의 앞에 하얀 보가 씌워지기 전에도 유효했다.
세인은 흔들의자에 눕다시피 앉아 있었는데, 그는 솔직히 아까보다 더 불편한 얼굴이 되었다.
“잠깐. 이거 흔들의자에서 하는 게 맞는 거야?”
“편안하시잖아요?”
“편안이야 하지. 하지만 흔들거리잖아?”
“불편한 것보다 흔들거리는 게 낫잖아요.”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세인은 자신에게 점점 다가오는 뾰족한 도구를 보며 눈을 감았다.
‘에라,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마플이 재잘거렸다.
여자는 저렇게나 나이를 먹어서도 재잘거릴 수 있나 보다.
남자는 그게 힘든데.
“할아버님의 의자가 불편하다고 생각하시지 말고 그냥 이제부터 내 의자다 생각하세요. 저 의자를 처분하려면 무거워서 옮기기도 힘들고, 고급 목재라 장작으로 팔기도 아까워요. 무엇보다 저걸 살 사람이 있겠어요?”
수다를 떠는 마플은 냄비에서 가져온 뜨거운 크림을 세인의 얼굴에 발랐다. 꼼꼼히 말이다.
그리고 면도를 시작했다. 사각사각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세인의 얼굴이 말끔해졌다.
그녀는 그러면서 뜨거운 수건을 세인의 얼굴에 덮었다.
그리고 턱 아래쪽을 면도한 후, 볼에도 날을 대었다.
“이런 건 기사들을 시키시지.”
“턱에 날붙이를 가져다 대도, 안심할 만큼 믿을 사람이 마플밖에 없어.”
“….”
마플은 자신을 그렇게 믿어준다는 것이 고마우면서도, 그런 속마음을 숨기기 위해 딴소리를 했다.
“믿으셔야죠. 전투 중에 등을 맡기는 그런 존재들 아니에요?”
햇빛이 잘 들어오는 테라스 쪽에서 세인은 흔들의자에 몸을 맡기고, 마플의 사각거리는 가위 소리를 들었다.
그의 머리카락이 잘리며 땅에 내려앉았다.
눈을 감고 머리를 만지는 마플의 손길을 느끼자니, 편안했고 마사지를 받는 듯 감미로웠다.
영주의 이발 같은 것은 아내가 하거나, 아내가 없으면 기사가 해주는 게 보통이다.
정략결혼이라든지, 아내가 바람 피우는 중이면 면도나 가위를 맡기지 않는 남편도 있었다.
이런 사실은 우스갯소리로 떠돌고 있고, 삽화 책으로도 나왔다.
세인은 레드가 있었다면 그에게 가위를 맡겼을 것이나, 지금은 마플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직, 다른 사람에게는 날카로운 것을 들려주고 눈을 감고 있을 믿음이 없었다.
‘기사들은 내 자리와 자신의 직분에, 땅에 충성을 바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까 믿을 만한 인연을 만들려면, 한 명의 인간으로서 이 성을 벗어나야 했다.
이 무겁고 추운 성을 말이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그는 책임지고 있는 것이 산더미 같으니까.
“세인님은 참 이상해요. 여자에 대한 관심도 없으세요? 참한 애들도 소개해줄 수 있는데.”
여자를 만나고… 아이를 낳게 된다면, 훗날 그들에게 뭐라고 말할까?
언젠가 이 영지는 습격당할 거야. 그리고 밀림이 될 거야? 라고…?
그것 또한 지독한 무책임이다.
세인에게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되었다.
아이를 낳을 시간조차 주어졌는지 불투명하지만, 낳아서 도피시킨다 한들….
나중에 대체 왜 태어나게 했냐고 자신을 고아로 만들었다며, 무책임한 아버지 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
“마플은 추운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아?”
“영주님. 아시겠지만 여기는 제집이 된 지 오래되었어요. 자꾸 그런 걸 물어보면, 이제는 걱정하는 게 아니라 혼내는 소리로 들려요.”
“그래. 그렇군.”
머리 위를 누비는 섬세한 손놀림에 잠이 쏟아졌다.
꾸벅꾸벅 뒤로 졸던 그는 결국, 얼굴에 쏟아지는 햇빛과 그 위를 교차하는 마플의 그림자를 느끼며 단잠에 빠져들었다.
완전히.
* * *
병사들에게 휴가가 주어졌다.
성은 최소 인력만 남겨놓고 비워졌다.
마을에 가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최소한의 불침번조차 완전히 나가게 하는 날도 있었다.
하긴, 작은 성이라 지하에 지켜야 할 감옥 같은 것도 없었다.
하녀들도 내보낼 수 있었던 이유는 불씨 걱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몇 명 정도는 성에 남겨둬야 한다고 말하던 기사들에게 그는 말했다.
“블랙 라이어드 상단은 외지인이라 눈에 띈다. 보이면 여기로 달려와. 그전에는 같은 인간에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싶지 않아. 몬스터들로도 충분해.”
사실 누가 와도 죽일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그것까진 설명하지 않고 그는 기사들도 집에 돌아가도록 배려했다.
가장 기뻐한 건 불침번 단골인 더이스였다.
그는 너무나 기뻐했기 때문에 그 말상인 얼굴을 보자니 그냥 기분이 그랬다.
보면 흐뭇한 것도 아니고,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가끔 그 긴 얼굴을 보고 있자면 그냥….
아무런…. 딱히, 어떤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바나나를 보면 저절로 입맛을 다시는 사람도 있고, 그냥 길구나… 라고 생각하다가 무심코 머리가 비워지는 사람도 있듯.
세인은 코다로가 준 검은 강아지와 함께 털옷을 입고, 자신의 서재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성 앞의 도서관에 가서 책을 가져오곤 했다.
도서관은 언제 가봐도 썰렁했다.
창고에 있던 묵은쌀을 풀었다. 그리고 얼어붙은 호수 위에서 빙어 낚시대회를 열고 상으로 쌀을 주었다.
참가만 해도 쌀은 받는다.
그 외에도 말린 과일이나 각종 물품을 여러 대회에 내놓았다.
활쏘기 대회.
공차기 대회.
팽이치기 대회 등등.
세인은 성벽 위에서 먼 곳의 사람들이 깔깔대며 노는 것을 보며, 나이답지 않게 뒷짐을 지고 구경했다.
그러다가 그러고 보니 내 어린 시절에는 팽이조차도 없었군, 이라는 생각을 했다.
마플도 성안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가졌다.
주로 뜨개질이었는데, 그걸 가끔 본 세인은 마플이 뭐든지 다 잘할 수 없다는 것을 깨우쳤다.
그리고 저럴 거면 차라리 마을에 있는 그녀의 집을 파는 게 좋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눈치 없게 그걸 입 밖으로 내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 와중에도 검은 강아지는 주인인 세인보다 오히려 마플 주변에서 더 잘 뛰어놀았다.
이상하게도 성에서 멀어질수록 세인의 평판은 좋았다.
안전한 성벽에서 보호받는 사람들은 그에 대해서 그리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가정으로 돌아간 병사들은 세인이 좋은 영주님, 까지는 모르겠어도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말했다.
“제 생각에는 영주님다운 영주님이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서 영주님이 창고를 풀어 한 명당 하나씩 품어준 술을 꺼내 놓았다. 그래서 집안의 어른들은 의외라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병사들이 더 불만일 줄 알았는데….
오히려 가까이에서 세인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조금씩이라도 훔쳐본 그들은, 영주 욕을 들으면 불쾌한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아무리 높은 집안 어른이 그래도 말이다.
어차피 술을 안 즐기니 창고에 있는 술을 수레 단위로 풀었다. 그리고 분위기를 만들어 주니, 여러 마을은 축제 분위기였다.
촌장이 자리를 만들어주는 거랑.
영주가 노는 분위기를 만들며 물건들을 대주는 것에는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밤이 되면 세인은 성벽 위에 올라갔다. 그리곤 아래쪽에서 사람들이 불을 밝히며 노는 모습을 등지고, 그들의 활기를 음미하는 순간을 가졌다.
하지만 피날레는 따로 있었다.
* * *
“우리만 온 게 아니로군요.”
“따뜻한 성에 머물지는 못할 거네.”
한센이 그렇게 말하며 여러 명의 사람을 내려 주었다.
그 사람들이 두리번거리면서 주위를 살펴보니, 자신들과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이들이 여러 명 보인다.
그들은 주로 거리에서 놀고 있다.
“성에서 묘기를 부리다가 쫓겨난 건가?”
귀족들의 유흥 중에는 서커스도 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서커스는 네이블 가문에서나 초대 가능했다.
아니면 수도권에서 말이다.
동물은 그렇다 치고 수십 명을 먹고 재워야 하는데, 한두 푼이 나갈 리가 없었다.
게다가 귀족들 앞에서 놀게 하려면, 귀족 체면에 구두쇠처럼 잔푼 조금 던져주고 입 닦을 수도 없고 말이다.
왕은 그나마 넓은 곳이라 나은 편이지만, 대부분 귀족은 성에 갇혀 지낸다. 그러다 보면 대개 하인에게 막 대하게 되고, 멋대로 행동하게 된다.
그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도 자유를 표출할 곳이 필요한데, 그게 본의 아니게 공개되다 보면 어느새 구설에 오르는 것도 체념하게 된다.
그런 그들의 낙 중 하나가, 성으로 서커스나 광대를 초대하는 것이다.
물론, 귀족에 따라 대접은 천차만별이다.
아무리 예술인이라고 말해봤자 귀족이 개 취급을 하면 개였다.
아레이즈에 수레를 타고 온 광대들은 평민을 상대로 공연을 했다.
뭐 과거에도 이런 적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니까 불만은 없었다.
그들은 열심히 웃겼고, 저글링 같은 것을 했다. 그러면 아이들이 골목에서 몰려나와 손뼉을 치며 그것을 구경했다.
무뚝뚝한 남자들은 투덜거렸지만, 그들의 신기한 재주는 아낙네들에게도 인기가 좋았다.
치마에 재가 묻은 두 손을 닦은 여자들이 딸과 아들의 손을 잡고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링 위를 걸어 다니는 사람을 구경한다.
그들의 눈은 평일과 다른 자극에 반짝이고 있었다.
입은 헤 벌어져 있었다.
그래 인간에게는 가끔 이런 것도 필요하다.
실속과 이익만 좇는 게 인간의 모든 것은 아니었다.
인간에게는 호기심과 낭만이 있었다.
거리마다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생소한 노래 그리고 때를 가리지 않고 불쑥불쑥 솟아 나오는 아카펠라.
허밍. 피리 소리. 박수 소리. 웃음들.
유랑극단을 부르는데 많은 돈이 들진 않았다.
어디에서나 지역을 가리지 않고, 예술성을 가지며 태어난 사람들이 존재했다.
그들은 스스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예술인의 길을 걸었다.
구멍 난 양말을 신발로 가리며 노래를 부르고 연극을 했다.
세 명. 네 명. 어깨동무한 남자들이 뭔가를 이야기하고, 웃고 정열적으로 호소했다.
그들이 본을 뜬 역사를 어린아이들이나 보통사람들이 자세히 알 리가 만무하다.
그들은 책조차 읽을 줄 모르니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의 섬세함에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청자들은 열심히 연극을 듣고 눈으로 보았다.
이해할 수는 없었어도 누군가가 자신들 앞에서 낯선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게 좋았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광대들은 나쁘지 않은 시민들의 호응에 기꺼워하면서도, 서로 눈치를 보았다.
누구일까?
누가 과연 성에 불려가는 영광…? 을 누리게 될까 하고 말이다.
그러니까 그래서 브레멘은 황당해했던 것이다.
“제가요?”
“그래 자네가 성에 가게 되었네.”
그는 물론이고 동료들도 의아한 표정이었다.
브레멘 혼자 간다고?
브레멘은 남창이 아닌데?
어쨌든 브레멘이란 청년은 정말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는 표정으로 질질 성안으로 끌려갔다.
그를 끌어…. 아니 안내해준 병사는 임무를 마치자마자 마을로 달려가 버렸다.
휴가를 계속 보내기 위해서.
잠시 홀로 남겨졌던 브레멘은 마플의 안내를 다시 받았다. 그리고 바이올린 하나만을 든 채 세인의 앞에 서게 되었던 거다.
보통 아름다운 여자가 초대받아 연주 후 영주에게 열쇠를 받는 게 일상화된 사회에서 브레멘은 낯선 경험을 했다.
세인은 접시 위의 고기를 썰면서 브레멘에게 연주를 하라는 몸짓을 했다.
그걸 알아들은 브레멘은 얼떨떨한 기분 속에서도 연주를 시작한다.
이야기로 전해 들었던 것처럼, 연주를 들으며 고기를 썰려 했던 세인은 그의 연주를 듣다가 행동을 멈췄다.
나이프는 고기를 썰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포크와 나이프를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브레멘의 연주가 끝나기를 기다린 후 소감을 말했다.
“나는 음식을 먹으며 연주를 들으려 했는데 내 착각이었군.”
브레멘은 자신의 연주가 형편없었다는 소린가? 하고 마음을 졸였다.
“원래 연주를 들으면 음식을 먹을 수가 없는 거였어. 내가 레인저 시절 전해 들은 이야기는 다 허구였군. 귀족이 음악을 들으며 음식을 먹는다는 이야기. 귀에 달콤한 노래가 신경 쓰여서 입에 집중할 수 없잖아. 음악을 들으면서 음식을 먹는 건 이도 저도 아닌 것 같아.”
그리고서 등받이에 완전히 등을 기댄 세인은 브레멘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바이올린을 다시 켜. 이제 나는 더욱 집중해서 들을 준비가 되었어.”
브레멘은 열심히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예술가와 예술가를 표방한 노동자의 차이는 간단했다.
발치에 던져주는 동전을 반기고, 거기에 온통 신경이 쏠려 있으면 노동자였다.
하지만 동전보다도 소중한 뭔가가 있다면, 그것에 모든 걸 바칠 수 있다면….
그는 아직 예술가다.
어떤 시인은 아침에 일어나 저녁에 잠들 때까지 시 생각만 하거나…. 그 비슷한 생각에 전념한다면 누구나 시인이고 예술가라 말했다.
그러나 지독한 고리대금업자도 아침에 일어나 잠들 때까지 돈 생각만 한다.
호색한은 매일 그 생각만 한다.
브레멘은 활을 켜면서 세인의 눈빛을 읽었다. 그리고 그가 진심으로 자신의 연주를 음미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되새겼다.
그래서 그는 상대를 먼 곳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높은 곳으로 초대하고 싶었다.
그것이 바로 예술을 세공하는 자들의 특권이기도 했다.
브레멘은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말하며 바이올린을 켰다.
서로 앙숙인 가문에서 태어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다가 좌절하고…. 마녀에게 육신을 팔아 사슴으로 다시 태어나, 그들의 사랑을 이룬 이야기.
머리 없는 괴물인 미궁의 안주인에게 잡혀, 한평생을 소비한 사내. 그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녀를 속이고 탈출했을 때, 그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마을의 이정표. 그리고 결국 뭔가를 깨닫고 그 미궁으로 다시 돌아가는 사내의 이야기 등등….
얼음 성의 왕비. 숫처녀를 탐하는 도끼 난장이의 이야기.
고기는 식어버린 지 오래였지만, 세인은 깍지를 낀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그의 노래를 탐미했다.
선율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웠고 그 호소와 표현들은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
모든 연주가 끝났을 때 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서재에 가서 한 권의 책을 가지고 와 그에게 선물로 주었다.
“악보가 될 수도 있지만 팔면 꽤 돈이 될 거야. 선택은 너의 자유지.”
그리고서 뭔가 가슴이 벅찬 얼굴이 된 브레멘을 돌려보냈다.
브레멘의 얼굴은 그날 밤 내내 상기되어 있었다.
자신의 음악을 진심으로 즐긴 청자에 대한 감흥이 그를 흥분시킨 것이다.
세인은 세인대로 그날 즐겁게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눈을 감고서도 감미로운 연주가 그의 귓가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그도 예기치 못한 선물을 충분히 받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