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 습격 (4)
“너희는 아레이즈 영지가 세금을 올려보내는 마차를 탈취했어. 그리고 병사들을 죽이고 내 무능력한 기사를 불법 감금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목격자들을 죽이는 모습까지 보였다. 그 목격자들은 무고한 양민들이었고 말이야.”
“….”
“갑옷도 그렇고 기사처럼 보이는데 말이야. 하는 짓은 파렴치하군. 생각해보면 이상한 게, 기사라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저질렀다는 거지. 중앙에 모인 세금은 왕실로 가는 거야. 그렇다면 너희가 한 짓은 반역이 아닌가? 이건 역으로 너희들이 기사가 아니라는 소리도 되지. 인간의 기사라면 이런 짓을 할 리가 없거든. 이건 오크 놈들이나 하는 짓이야.”
세인이 오크라는 단어를 말할 때, 그의 표정에서 숨길 수 없는 경멸이 묻어 나왔다.
물론 오크 같은, 이라는 말을 듣는 쪽도 꽤 경멸적일 것이다.
묶여 있는 남자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들이 잠시 침묵을 유지하는 가운데, 뒷수습 중이라 병사들이 움직이는 수레 소리와 나무가 타들어 가는 소리만이 주변을 메웠다.
그리고 어느덧 수레들이 멈췄을 때, 병사들은 세인과 포로들을 중심으로 빙 둘러섰다.
“뭘 원하는지는 알겠는데. 우리의 양심에 호소하기 이전에, 우리가 그걸 말해줄 것 같았다면 저렇게 했겠소?”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턱짓으로 불타고 있는 건물을 가리켰다.
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 당신들 양심에 호소하려는 게 아니야.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것 같은데 말이야. 착각하지마. 자네들은 정말 정상 참작을 해주고, 기사라는 전제하에 온갖 예우를 해줘도 잘 돼야 교수형이야. 사람들 앞에서 목이 나가는 거라고. 내가 온갖 관용을 베풀 때 말이지.”
세인은 솔직히 아직도 헷갈렸다. 이놈들이 기사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기사라면 이런 미친 짓을 저지를 리가 없다.
그는 일어서며 중얼거렸다.
“세상에서는 영주 앞에서 하면 안 되는 게 두 개 있어. 하나는 영지민을 건드는 거지. 뭐 이건 사람에 따라 취향을 탈 수 있다고 봐. 하지만 두 번째에 대해서는 다들 동의할걸.”
그는 들고 있던 나무 꼬챙이를 한 남자의 눈에 찔렀다.
비명이 울려 퍼질 때, 몸부림치는 남자의 몸을 붙잡은 소년이 차게 말했다.
참혹한 광경 안에서 말이다.
“영주와 영지민이 가진 세금의 권리이자 의무 행위를 방해하는 거야. 나는 그래서 지금 헷갈려. 너희들은 기사인가? 아닌가? 머릿속에 뭐가 든거지?”
게거품을 문 남자의 마저 남은 눈도 나뭇가지로 찔렀다. 그리고 개처럼 그의 등을 걷어차자, 울부짖는 남자가 포박당한 상태로 기어가기 시작한다.
세인은 허리에서 칼을 뽑아 뒤에서 그를 찔렀다. 그리고 다시 목등뼈와 등을 찔렀다.
포박당한 다른 남자들은 이런 상황을 예측했을진 몰라도, 직접 이렇게 보고 나니 말문이 막히는 모양이었다.
산 위에서 자리를 고수하며 누군가는 이런 결말을 상상했겠지. 그러면서 마음의 준비가 끝났다 다짐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주위를 메운 병사들은 세인의 이런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피에 젖은 칼을 들어 올린 세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피를 게워내는 남자의 뒤통수를 발로 짓밟았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레이즈의 사람들은 다른 영지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긍지를 가지고 그 땅에 살고 있다. 우리가 거기에 있음으로써 그곳은 인간의 영토이고, 인간의 자존심인 거야. 그리고 나는 그들의 애국을 대표한다. 몬스터의 악의에 맞서는 인간들의 목소리를 대표하며, 우리의 모든 권리와 영광을 대표한다.”
그가 턱짓하자, 두 병사가 달려들어 포로 한 명을 앞으로 끌어냈다.
그 포로는 백치가 아니었으므로 당연히 반항했다.
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떨면서 발버둥 치는 것을 끌어왔다.
세인은 남자의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어찌나 도리질을 치는지 머리카락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쫙! 쫙!
하얗게 얼굴이 탈색된 포로들의 얼굴 위로 핏방울이 점점이 튀었다.
“우리의 영광중에서도 으뜸은 바로 여기를 지키고, 우리나라에 세금을 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희생과 봉사. 자존심을 다 아우르는 대단한 권리이지. 우리들은 영지를 지탱하고 있어. 깃발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나라를 지탱하는 축이기도 하다. 주기적으로 그걸 증명하고 있지. 중앙 권력에 세금을 바치면서 말이야. 너희들은 바로 그런 숭고한 권리를 침범한 거야.”
세인이 서슬푸른 얼굴로 이야기하는 가운데 모두가 숨을 멈추고 듣는 분위기였다.
“최소한 목숨에 대한 값만 알아도 이런 짓은 하지 못할 텐데 말이야. 이런 짓은 몬스터들이 인간에게 하는 행위잖아. 야만적인 것들이 저지르는 짓.”
무언가의 기대를 요구라고 표현한다면, 세상에 벌거숭이로 내놓아진 인간의 향후 모든 행동은 의무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요구라고 사람 좋게 말해가며, 사실상 의무를 디밀고….
그 속에서 살아가며 누군가는 만족하기도 하며, 합리화를 하고 성질을 내겠지.
그런데 가끔 그런 의무 중에서도 권리와 치환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북부 영지들 사이에서는 그런 게 심한 편이다.
그들은 인간의 교두보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인간의 본성을 짓밟는 몬스터 앞에서, 인간이 스스로 인간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간을 지키며 살아가며…. 자신들의 삶이 그 증명에 영입해 있다고 믿기도 한다.
물론, 그중에서도 수많은 회의론자가 있을 수 있으나 이것은 사실이다.
세인은 아레이즈의 소중한 의무이자 권리를 짓밟은 자들을 그냥 곱게 죽여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가능한 한 잔인하게 그들의 숨통을 하나씩 끊어 놓았다.
그가 멋진 옷을 입고 거드름을 피워야 할 때, 그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많은 사람의 자존심을 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대리함에서는 개인적으로 달갑지 않은 것도 있었다.
그건 바로 복수다.
그가 하나씩 잔인하게 죽여갈 때, 콧수염의 사나이와 다른 남자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목숨을 구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세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말했다.
“솔직히 내가 궁금한 건 하나야. 내게 이럴 수 있는 자들로 블랙 라이어드가 떠오른다. 파렴치하고 뭐가 소중한지도 모르는 천한 놈들이 충분히 침범할만한 일이니까. 하지만 그건 그렇다 치고, 정작 문제는 뒤에 큰 가문이 있냐는 말이야. 자네들의 무장 상태를 봐도 심증은 굳어지거든?”
“….”
하지만 누가 미쳤다고 여기에서 네이블 가를 거론하겠는가? 세인이 노려보았지만, 그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제발! 그만두시오! 사람을 그렇게 개돼지처럼 죽이다니!”
“이제라도 내가 어떤 가문을 거론하면 목숨만은 살려주실 수 없겠습니까?”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옆으로 흔드는 고갯짓이었다.
“너희들은 여기에서 비참하게 죽는 거야. 그건 변하지 않아. 다만 덜 고통스럽게 죽기 위해 신의를 파느냐? 라는 문제일 뿐이지.”
고통의 비명이 꼬리에 꼬리를 이었다.
세인은 직접 놈들을 죽이면서도 궁금해했던 답을 알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은 그대로의 결과만을 낳았다.
죽어가면서 포로들이 저주를 쏟아부었지만, 세인은 콧방귀만 뀌었다.
반역자들의 저주 따위 두렵지 않다는 식이다.
시체를 묻어줄 생각도 하지 않던 사람들은 산채를 태우는 불이 완전히 꺼지길 기다렸다가 움직였다.
잿더미가 된 곳을 파헤치니, 혹시 몰라 깊이 묻어둔 듯 땅속 깊이 감춰진 상자들이 나온다.
금붙이들은 지상 위의 열기에 녹지도 않은 상태였다.
“금화 아홉 닢을 찾았습니다.”
그제야 세인은 안도의 한숨을 쉰다.
금화 아홉 닢.
이 가치를 지키기 위해 이 피비린내 나는 일을 벌인 것이다.
그 후에 병사들이 열아홉 닢의 금화를 찾았는데, 한센을 습격했던 놈들도 바로 이놈들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 열아홉 닢이 처음의 아홉 닢보다 반갑지는 않았다.
그만큼이나 아홉 닢의 금화가 소중했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금화를 품에 안고 산에서 내려오는데, 배후를 지키고 있던 코다로의 진영과 마주치게 되었다.
“간밤에 마신 술이 깰 정도로 오래 기다렸습니다. 여기 천막을 쳐놨으니 일단 병사들을 쉬게 하죠. 새벽이슬 정도는 피해갈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녀석들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세인은 약간 피곤한 얼굴이었지만 정중하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코다로는 밑의 사람들을 시켜 의자를 가져오게 했다.
둘은 화톳불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코다로는 세인이 손을 내밀어 불을 쬐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지나친 억측을 가져다 대고 추리해 보자면, 네이블 가문의 도움이 있었다는 전제하에 일을 벌인 놈들이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었다.
바로, 적당한 지점에서 마차를 습격하는 것이다.
네이블 가문의 영향권에서 일을 벌인다는 것은 안 될 일이다. 왜냐면 마차는 네이블로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스스로 욕을 먹는 짓이나 똑같다.
그렇다면 적당한 지점을 찾아야 하는데, 결국 코다로의 영지와 가까운 지점이었다.
한번 한센 일행을 찔러보고 자신이 생긴 그들은, 이차 타격을 주는 일에 자신만만하게 착수했다.
이차 타격은 일차 타격과는 비교도 안 되는 강력한 수준이었다.
영주가 위로 세금을 전달하지 못했다는 것은 기본 능력을 완전히 의심받는 일이니까 말이다.
훈련받은 인간들이 아레이즈에 타격을 주겠다 작심하고 달려들자, 일은 착착 진행되어 갔다. 하지만 그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코다로의 변심이었다.
평소 때의 그라면 자기 영지 일도 아니고, 애매한 영향권에서 벌어지는 일에 신경 쓸 리가 없었다.
변덕도 어느 정도지, 설마 이렇게 병력을 이끌고 수상한 조짐에 전력으로 달려들 줄이야. 진짜 누가 그걸 예상했겠는가?
그는 퇴로를 막고 산을 포위하다시피 했다.
그러니 능선을 따라 이동하던 습격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산채를 점령하고, 농성 아닌 농성에 돌입한 것이다.
평소 알던 미친놈이 전혀 다르게 미친 짓을 하니, 골탕을 제대로 먹을 수밖에.
그뿐만이 아니라 코다로는 전서구를 보내 세인에게 연락까지 했다.
아주 능동적으로 움직인 셈이다.
“다시 한번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천만에요. 같은 영주로서 느낄 수 있는 수치스러운 일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고 해두죠.”
코다로는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등받이에 등을 깊숙이 기댄 채 잠시 뜸을 들이더니 지나가듯이 묻는다.
“디펜더스에 들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초대장이 와서 잠시 그곳의 영주님을 만나 뵈었죠.”
“굉장히 애먹이는 위인이죠?”
코다로의 은근한 물음에 세인은 억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보면서 코다로는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물론, 이 정도로 병력을 끌고 나와서 도움을 간접적으로 줬으면 이미 다 파악은 했을 것이다. 그래도 쐐기가 필요했다.
‘저쪽은 빚이라는 구실을 만들러 온 사람답게 예의를 지켰어. 그리고 상황에 맞는 수모도 감내했지.’
솔직히 코다로의 성질을 아는 사람들이 아무리 그걸 감안하고 노력해도, 감당 안 되는 선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코다로와 친분을 쌓아 놓으면 이익인 것을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다.
못하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세인은 그것을 감내했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세 영지 주변에 순찰을 돌고 있다. 토벌도 하고 있고.’
“세인님. 제가 개를 참 좋아합니다.”
이제 본론인가보다. 예상은 가지만.
“그렇군요.”
세인은 코다로 옆의 검은 강아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스러운 개 없이는 못살 정도입니다.”
코다로는 이따금 몸이 허하다 싶으면 개를 날름날름 잘도 잡아먹었다.
“여기 이놈은 제가 아끼는 개인데 한번 키워보시겠습니까?”
길게 끌기 싫었던 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도움도 받은 마당이다.
둘은 일어서서 악수를 하였다.
코다로는 피곤해 보이는 세인의 얼굴을 보며 네이블 가문에 대한 이야기는 뒤로 미루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반가운 사람을 만나 저도 모르게 오래 잡아두었군요. 그만 쉬십시오. 이따금 개가 잘 있나 놀러 가겠습니다.”
“다시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공증인도 없었고 문서도 없었다.
그냥 구두로 오간 이야기고 그것도 직접적이지 않다. 그러니 네이블가문이 알아도 뭐라 할 구석도 없었다.
꼭 거기를 의식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로써 세 가문의 연대가 이루어졌다.
그 자리에서 물러난 세인은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더이스의 품에 금화 주머니를 안고 있게 했다. 그리고 그를 말에 태우는데, 더이스는 끝내 참지 못하고 신음을 냈다.
린치를 당한 자리가 쑤셔왔기 때문이다.
“면목이 없습니다. 영주님.”
“이제 수습은 되었으니까. 따질 생각은 없어. 그것보다 고삐를 잡을 수 있겠나? 저 쪽에게 마차를 내달라기엔… 아무래도 번거로워서.”
더이스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서 돌아가는 길 내내 끙끙거렸다.
세인은 세인대로 골골대는 더이스에게서 신경 끈 채, 생각에 빠져 있었다.
세 가문은 따로 놓고 보았을 때 완벽한 가문은 아니었다.
저마다 약점이 있었다.
디펜더스의 경우에는 어린 여자가 영주 자리에 있다는 것이 꽤 불안 요소였다.
나이 먹은 가신들일수록 입방정을 찧기 딱 좋다.
게다가 주변 사람들이 얕잡아 보며 쿡쿡 찔러대기 시작하면, 몬스터들 앞에서 단합력을 보여야 할 때 낭패다.
골드 힐의 경우에는 영주가 너무 괴팍하고 직속 병력이 미미했다.
아레이즈의 경우에는….
‘내가 바로 단점인가? 나는 영주라고 하기에는 이상하고 많이 모자라지.’
세인은 한숨을 쉬었다.
자신은 영주 자리에 어울리는 위인인가?
“하지만 단점들이 있는 만큼 장점도 있어.”
적들을 죽이려면, 손을 잡고 서로 장점을 맞대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에 약점이 없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약점으로 노심초사하며, 마음속에 가득 채우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반대인 장점만 극대화하면 된다.
아레이즈로 돌아간 그는 깨끗하게 씻고 성안의 잠자리에 일찍 들었다.
그런데 너무 피곤해서 그런지 오히려 잠이 잘 안 오는 것이다.
뒤척이길 몇 차례, 세인은 바지를 꿰차 입고 어딘가로 나갔다.
도중에 불침번들과 마주쳤지만, 생각에 잠긴 그는 그들의 경례도 받지 못했다.
추운 밤 밖으로 나간 그는 어느새,
전에 봤던 얼어 죽은 새 앞에 다다라 있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는지, 얼어 죽어 있던 새는 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누가 보면 하얗게 박제한 것만 같다.
잠시 사체를 내려다보던 그는 결국 새를 두 손으로 집어 들어 땅속 깊이 파묻어 주었다.
그리고 손을 탁탁 털며 조금이나마 홀가분해진 기분으로 그 자리를 떴다.
침대로 돌아간 그는 뒤늦게 푹 잠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