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 습격 (3)
야음을 틈타 조용히 이동하는 것도 없었다.
말을 갈아타며 짧지 않은 거리를 주파한 사내들이 무기를 안장에서 끌어 내렸다.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그들이 만지는 병장기에 달빛이 반사되어 빛을 주위로 뿌렸다.
세인과 남자들은 고개를 들어 검게 웅크리고 있는 산을 올려다보았다.
그 안에 불빛은 없었지만, 그와 다른 남자들은 산 어딘가에 적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말들을 관리할 몇 명만 남겨두고, 그들은 산을 타기 시작했다.
인간들의 야간 산행에 놀란 밤새들이 이 나무에서 저 나무 사이로 날아다녔다.
산짐승뿐만이 아니라, 몬스터도 지금 산을 오르는 병력을 지켜보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덤벼들 엄두는 못 낼 것이었다.
남자들의 손에 들려진 메이스 같은 것이 무섭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올라가는 도중 그들은 폭이 좁은 개울물을 만났다.
참으로 소박한 골짜기 사이로 흐르는 감로수였다.
거친 숨을 토해내던 남자들은 그 차가운 물로 목덜미를 적시고 싶은 욕망에 시달렸지만, 영주의 눈치 때문에 침만 꿀꺽이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이, 다음인 것 같다. 쉬고 움직이자.”
산세를 살피던 세인이 멈춰 서며 그렇게 말하자, 남자들은 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창을 든 병사들은 바깥쪽으로 빙 둘러서 주변을 경계했고 말이다.
세인은 일어선 상태로 입술을 움직였다.
“여기에 왜 왔는지 알고 있나?”
“….”
“너희들은 내 자존심 때문에 온 거다. 내 자존심은 너희들의 목숨보다 중요하다.”
그때 누군가가 입술을 옴짝였다.
“그 자존심을 위해 저희의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참 이상한 사회의 이상한 대화였다.
하지만 달빛 아래에서 나눈 그들의 대화가 어리석을지언정 이게 바로 현실이다.
여기가 바로 그들의 현실 속이었다.
사람들이 충분히 쉬고 나자, 고개를 끄덕인 세인은 말했다.
“그럼 가자.”
그는 등에 멘 방패를 앞으로 받쳐 들었다. 그리고 위로 이동했다.
지금 형국을 말하자면, 산 위쪽을 점거한 사내들은 생각보다 견고한 지형에 들어앉아 있었다.
과거 토벌되었던 돌로미테의 산적들이 머물렀던 곳으로, 참호도 파여 있다.
인력 부족 탓인지, 들어간 사람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나마 망을 보는 오두막이 본관과 별도로 설치되어 있어, 적들은 세인 일행의 침입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화살 세례를 날리기 시작한다.
문제는 화살을 쏘는 사람들의 숫자였다.
그들이 잘 훈련된 인물들이라 한들 수가 많지 않았는데, 그나마도 절반 이상이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 있었다.
화살을 뿌리건 창을 던지건 공격하는 수가 많아야 할 텐데, 이래서야 약한 견제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미약한 달빛 아래에서 명사수를 기대하기란 욕심이 지나친 것이었다.
결국, 태반이 남자들 근처만 맞출 뿐이다.
게다가 바보가 아닌 이상 개활지를 통해 오를 리도 만무.
결국, 주변의 나무들이 방패막이 역할을 충실히 해주었다.
뭐 그래도 무서운 분위기였다.
살의에 눈빛을 번들거리는 남자들이 산을 오른다.
음산하고 무거운 밤바람이 굵은 나뭇가지를 뒤흔드는 가운데, 화살이 날아오는 파공성은 머리카락을 쭈뼛 세우는 자극이었다.
흙냄새.
풀 냄새.
그 사이로 움직이는 남자들의 발이 빨라졌다.
그리고….
그들의 몸집이 위에서 내려다보자니 점점 커졌다.
따당!
세인이 든 방패에 불똥이 튀었다.
지금의 그는 정말 전략적이지 못하게도 가장 선두였다.
그래도 리더가 이렇게 앞장서면 기세가 무서울 정도로 오른다.
게다가 정의도 굳이 따지자면 이쪽 편이었다.
엄밀히 말해 후안무치한 쪽은 저쪽이다.
그걸 세인이 이끄는 병사들 모두가 알고 있는 판이었다.
거친 쇳소리가 더 자주 방패 너머에서 들려왔다.
급조한 화살도 섞여 있는지, 부러진 화살대가 꺾여져 거칠게 튀었다.
이내 지푸라기처럼 아래로 떨어졌다.
그것이 바닥에 굴렀을 때, 화살을 받은 남자들의 몸은 서너 발자국 이상 전진해 있었다.
그리고 힘이 닿는 사정거리 안에 들어왔다 싶었을 때, 남자들의 망토가 펄럭이며 단검이 날았다.
팍팍 나뭇조각이 튀는 소리와 함께 화살을 쏘는 사람들의 사격이 느슨해졌다.
집중력이 떨어졌다는 소리다.
그 사이에 세인과 남자들은 건물 앞에 도착했다.
썩어들어간 나무로 만들어진 바리케이드를 건넌 다음에는, 검집에서 칼을 빼내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어둠을 가로로 찢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메이스와 창들이 앞다투어 앞으로 쏟아져 나갔다.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얽히는 소리 다음에는 벽에 피가 뿌려졌다.
세인은 달려나가며, 마주 달려오는 남자의 가슴을 발로 찼다.
아마도 상대 남자는 소년의 발차기가 얼마나 위력적이랴,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등이 새우처럼 꺾이며 벽에 처박혀 버렸다.
그가 입에서 피를 토해낼 때, 세인의 장검이 그의 몸을 찔렀다.
정확히 목숨을 노린 것은 아니었지만, 출혈이 시작되었으니 방치하면 죽을 것이다.
세인을 따르는 남자들은 방패로 도끼를 막았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앞으로 던졌다.
그 힘에 그대로 뒤로 처박힌 남자들에게는, 준비하고 있던 병사의 창이 기다리고 있었다.
거친 반항에 쓰러진 병사가 메이스를 휘두르자, 묵직한 일격에 산 정상을 지키던 남자의 발목이 박살 난다.
신음을 내지르며 옆으로 쓰러질 때, 방패 날이 위에서 아래로 그의 얼굴을 찍었다.
세인의 얼굴 옆으로 묵직한 창대가 휙 하고 지나갔다.
그는 그걸 완전히 놓아주지 않고, 반사적으로 어깨와 얼굴 옆을 이용해 창대를 잡았다.
아주 잠깐 힘겨루기가 벌어졌고, 세인이 몸을 돌리자 창을 잡고 있던 남자는 그만 무릎을 꿇고 말았다.
정말 바보 같았던 것은 그대로 창을 잡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세인이 창을 한 손으로 잡고 옆으로 돌리자 남자의 몸이 젖혀졌고, 장검이 그의 한쪽 팔을 훑었다.
너덜거리는 옷자락 사이로 핏줄기가 튀어 오른다.
세인은 목조 건물을 누비며 달려 나오는 남자들을 너무나도 쉽게 쓰러트렸다.
마치 희극을 보는 듯 기세 좋게 바닥을 박차고 나오던 남자들이었다. 하지만 주먹질 몇 방에 무릎을 꿇었고, 튀어나오던 기세 그대로 뒤로 처박혔다.
그때였다.
나무 문이 박살 나면서, 하얀빛이 세인의 몸을 가로로 절단했다.
아니 절단 낼 뻔했던 것이다.
세인이 뒤로 몸을 젖히자, 튀어 오르는 나뭇조각들 사이로 하얀 봉대가 보였다.
그것을 잡고 있는 것은 풀 플레이트 메일을 입은 기사였다.
이런 산속에서 저런 걸 입고 있다는 것 자체가 참 이상하지만, 그의 몸집은 그보다 더 비약적이었다.
천장에 등이 닿는 체구가 산처럼 움직였다.
“후욱! 후욱!”
투구의 턱받이 밑으로 멧돼지가 흥분했을 때 내는 숨소리가 거칠게 넘나들었다.
남자는 창 말고도 철 줄을 꼬아 만든 스커지(Scourge)를 들고 있었다.
한 움큼이 위로 번쩍 들려졌다가 아래로 후려쳐졌다.
콰가각!
찰싹하는 소리가 아니고, 엄청난 소리가 세인이 있던 자리에 났다.
뒤로 물러난 그는 자신의 검과 중무장한 기사의 갑옷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개인적으로 이 검을 가지고 뚫을 수는 있었다.
그럴 자신은 있다. 하지만 그건 누가 봐도 비정상적이잖아.
뒷걸음질 치는 동안 기사가 기세 좋게 스커지를 휘두르며 다가왔다.
그 모습을 본 한 병사가 세인이 밀리고 있다고 착각했는지, 중간에 끼어든다.
“이놈!”
고함과 함께 병사의 몸이 쓰러졌다.
스커지에 정통으로 맞은 그의 얼굴은 피범벅이었다.
이를 악문 세인이 검을 집어던졌다.
그 검을 쳐내느라 기사의 균형이 무너진 틈을 타 봉을 붙잡는다.
기사는 당연히 봉을 잡아당겨서 끝을 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건 그의 오산이었다.
쩌적!
쩌쩌 적!
놀랍게도 봉대의 중앙이 찢기는 소리가 나면서 분리되었다.
세인은 그것을 잡아당겨 위로 던졌다가 받았다.
창두가 앞쪽으로 향하게 해서 말이다.
그걸로 달려가며 투구의 밑을 찍는다.
그때 기사의 건틀릿이 민첩하게 움직여서 창끝을 잡아냈다.
움직이는 다섯 개의 쇳조각이 우드득 소리를 내며 창날을 비틀 때, 세인은 역순으로 창날을 돌렸다.
우두둑!
“으으으.”
손가락들 사이에서 흘러내리는 검은 액체.
기사의 피였다.
기사는 지금 자신이 소년과 싸우고 있는지, 곰과 싸우고 있는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무서운 힘이다.
그리고 극통.
반사적으로 손을 놓았고, 드디어 해방된 창끝이 기사의 투구 밑을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우두둑!
미늘 상의를 우습게 뚫는 창이었다.
이럴 거면 기사들이 무거운 갑옷을 입는 의미가 어디에 있을지 의문이다.
거대한 몸체가 일순간 움찔하더니 앞으로 넘어진다.
그걸 피하는데 쿵, 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걸 피하는 세인은 옆으로 넘어가는 시체에서 진한 기름 냄새를 맡았다.
“설마?”
그는 기사를 타고 넘어 앞으로 달려갔다.
낡은 복도가 발밑에서 삐걱대며 비명을 질렀지만, 개의치 않았다.
수세에 몰리면 다 불태울 속셈이군.
무서운 속도로 확대되어 오는 사람들에게 검을 휘두르니, 괴수의 일격에 당한 듯 그들의 목이 터져 나간다.
흡사 강철 몽둥이를 거한이 양손으로 잡고, 힘껏 휘두른 것만 같았다. 그러나 실제로 보면 가볍게 한 손으로 휘두르는 검이다.
남자들이 복도 여기저기에서 쏟아져 나왔지만, 누구도 세인을 막지 못했다.
그는 무인지경으로 사람들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그리고 이제는 뒷수습을 생각하지 않고 살수를 펼쳤다.
그때 브레스트 메일을 걸친 한 남자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그에게서도 기름 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검은 옷을 입은 그 남자는 중년인이었는데, 능숙한 솜씨로 쌍검을 다루는 검사였다.
그의 공격을 방패로 받아넘기며, 세인이 옆으로 이동했다.
젖히고 통과하려는 그의 의지를 눈치챘는지, 남자의 검이 세인의 귀 옆으로 움직인다.
쇠가 충돌하는 소리가 나고,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남자는 놀란 얼굴로 자신의 내려앉은 흉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에서 주르륵 피를 흘리는데, 주먹을 떨쳐낸 세인이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검으로 그의 목을 찔렀다.
세인은 가라앉은 눈으로 자신의 검날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와 부들거리는 중년인을 보았다. 남자가 고통을 호소하려는 듯 헐떡이며 어깨를 움직였지만, 그는 사정을 봐줄 기분이 아니었다.
머리카락을 쥐고 차디찬 검날을 비틀었다.
느껴진다.
손안에 쥔 생명체가 고통스러워하며 움찔거리는 게.
울컥대는 남자에게 칼을 가져다 댄 채로 팔을 움직이고 있을 때, 화광이 충천했다.
결국, 그와 병사들은 증거를 인멸하려는 놈들의 움직임을 막지 못했다.
* * *
“….”
수십 명 중 스무 명이 명을 달리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조리 잡혔다.
도망가는 놈도 없었다.
그거야 당연했다.
밑으로 내려가 봤자 희망이 없었으니까.
마지막에는 세인이 생각하기에 작은 해프닝도 있었다.
더이스를 인질로 잡은 수뇌부들이 뭔가 협상을 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지 않고, 그대로 전진해 밀어 버렸다.
적들은 ‘협상’이란 단어를 꺼낼 틈도 없었다.
세인이 선두에 있는 남자의 팔을 베자, 병사들이 몰려들어 방패로 그들을 가격했다.
결국, 꽁꽁 묶어 버렸다.
세인은 불타는 건물을 등지고 서 있었다.
그런 그의 앞에는 끌려 나온 이들이 무릎을 꿇었고 말이다.
과거에 한차례 무너졌던 산채는 이제 완전히 연소할 조짐을 보였다.
그것을 등진 세인은 중얼거렸다.
“뭐. 따뜻해서 좋군.”
병사 한 명이 굴러다니던 테이블을 가져왔다.
세인은 그것을 들고 하나 남아 대롱거리던 다리를 발로 차 부러뜨렸다. 그리고 그 위에 앉았다.
세인이 앞에 줄줄이 꿇어앉은 남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대들을 영지로 데려가기에는 내 사정이 여의치 않다. 그래서 여기에서 조사하려고 하는데, 취조에 앞서 내게 할 말 있는 사람?”
인상을 쓰는 남자들도 있었고, 기가 죽은 듯 바닥만 바라보는 남자들도 있었다.
어떤 놈은 세인을 죽일 듯이 노려보기도 했다.
세인은 고개를 돌려, 병사들의 부축을 받는 더이스를 바라보았다.
더이스에게 뭔가 물어볼까 싶었지만, 그러기엔 그의 상태도 좋지 않아 보였다.
“가뜩이나 얼굴이 말상인 사람을 저렇게 패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농담을 중얼거리는 영주를 보고, 남자들의 눈빛은 이제 복잡하게 변했다. 그래도 처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면, 절대 배후를 누설하지 않을 거란 사실이다.
하지만 이쪽은 충분히 짐작 가는데.
세인은 병사를 시켜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 오도록 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든 후 끝을 땅에 찍으며 입을 연다.
“사건 경위부터 천천히 이야기해 보자고.”
그걸 모르는 사람은 이중 아무도 없었지만, 차근차근 따지고 들어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