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 습격 (2)
“그래서 사람이 많이 다쳤나.”
“지크라는 젊은이가 죽긴 했습니다만….”
행크도, 엉겁결에 대답한 한센도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세인을 바라보았다.
혹시나 했는데 비꼬는 표정은 아니었다.
진심으로 묻고 있었다.
“요번에 계약한 용병단의 실력이 좋아서, 다행히 인명 피해는 적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금화가….”
‘그러니까 솜씨 좋은 용병들이 있는데 왜 털렸느냐고!’
행크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세인이 말을 섞은 마당에 입 밖으로 그 심정을 토해 내지는 못하고 말이다.
세인은 고개를 들지 못하는 한센 앞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불쌍한 한센.
거대 상단이라면 이미 다 알고 있을 정보를 그는 모르는군.
그러니 이미 행단 루트를 다 정한 상단들이 북부의 몇 곳을 빼고 멀어질 때, 그는 여전히 이곳을 찾아 주었다.
오히려 마음을 담아 더 자주 드나드는 형편이었다.
그가 전부터 꾸준히 아레이즈 영지에 들려준 고마움을 생각하면, 거대 상단의 횡포에 실수했던 건 넘어가 줄 수 있었다.
‘자네가 자네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이 영지 상황을 알 수 있는 길은 내 입을 통해서겠지. 하지만 난 말해주지 않아.’
이는 영지의 이익을 위해서였다.
세인도 주관을 가지고 가치의 결정을 하지만, 그의 어깨에 올려진 책임 때문에라도 영지를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이 사람이 베푸는 호의의 상단행도, 이렇게 대접받을 뿐인 것이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얼마나 위험한 곳을 넘나들고 있는지.
가난한 상단이 다 그렇듯이 그들은 정보력이 미약하니까.
그런데 이 가엾은 남자는 왜 바닥에 엎드려 나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는가?
“당신은 사고를 당한 거야. 나는 농담으로라도 당신이 돈을 빼앗기려 안달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자네의 불행에, 왜 내가 벌을 주어야 하나? 아니 애초에 이게 상과 벌을 가릴 일인가?”
“영주님….”
한센은 감동과 죄책감이 범벅된 복잡한 표정을 지었고, 행크는 입을 오물오물하다가 신음과 함께 말을 토해냈다.
“여… 영주님. 자그마치 열아홉 닢입니다. 무… 물론. 저도 저 상인이 잘못한 건 아니란 것을 알지만, 그런 거금이… 걸린….”
세인은 딱 잘라 말했다.
“지금은 평화의 시대가 아니야. 여기는 더더욱 그렇고. 내일이라도 몬스터에게 습격을 당해, 열아홉 명이 죽을 수도 있는 일이지. 하지만 이건 사람보다는 금전적인 피해군. 세상이 우리의 긍정적인 상상에 보답해서 언제나 어리광을 받아줄 수는 없는 일이고. 어린 소년인 나도 그것을 알고 있네. 그렇다면 내 휘하의 나이 먹은 기사들은 그걸 충분히 알겠지. 나이 헛먹은 게 아니라면 말이야. 이건 사고였어. 그렇다면 저번처럼 용서하고 눈감아줄 필요도 없는 일이지.”
한 명의 죽음도 안타깝긴 하지만 여러 명의 죽음보다는 다행이었다.
누군가가 한 명의 목숨도 생목숨인데 여러 명의 목숨과 차이가 없다고 말한들,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구박만 받을 것이다.
바보냐고.
더하기 빼기도 못 하냐고.
여러 명보다 한 사람 죽는 게 낫다고 말이다.
“영주님!”
한센은 울면서 세인의 은혜에, 머리를 바닥에 찧었다.
가난한 영지에서는 돈은 ‘피’고, 곧 영지민의 ‘생명’을 연장하는 화폐였다.
그걸 모를 사람은 적어도 이곳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용서받았다.
또다시 말이다.
“고의로 도박하다가 돈을 날린 것도 아니고. 그냥 어느 날 마른하늘에 번개가 친 거야. 그뿐이야. 비가 내리지 않아, 옷이 젖지 않았으면 그걸로 됐어.”
일어서는 세인을 향해 행크가 입을 계속 벙긋거렸다.
그로선 미련이 남는 게 당연했다.
지금이라도 사람들을 풀어 찾는 게 어떨까요?
아무리 겨울이지만, 찾는 액수가 장난이 아니잖습니까?
제가 나설까요? 등등.
여러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습격한 놈들이 바보일 리는 없으니 멀리 갔을 것이다. 그것도 한참 전에.
한센이 습격을 당하고 여기까지 와서 몸을 잠깐 추스르고, 성에 오기까지 며칠이 흘렀을까?
생각해보면 다시 찾는다는 것은 힘들어 보였다.
병사들을 풀면 그나마 가능성이 희박하게라도 보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저런 표정을 하는 세인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마치 기르던 개가 집을 나갔다고 했을 때 짓는 표정이잖아?
결국, 정신적인 폭행을 당한 듯한 행크의 얼굴을 뒤로하며 세인은 그 자리를 떠났다.
그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였다.
남자의 배포란 건 이익을 향해 도박을 지를 때 보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손해 때 보이는 마음가짐이 그걸 대변한다.
송구스러움에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무릎을 꿇은 상태인 한센이 그날 그것을 다시 되새겼다.
그리고 그렇게 그날의 해프닝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는. 아니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비극이었지만 세인에게는 그저 해프닝이었다.
문제는 그렇게 사건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두 번째 습격이 터진 것이다.
* * *
“….”
더이스는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그러다가 기절에서 깨어났다.
목덜미가 얼얼한 가운데 그는 자신이 매달린 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으며, 앞으로 오래 매달려 있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왜냐면 자신의 일행을 습격한 놈들은 전문가들이었기 때문이다.
전문가니까, 사람을 거꾸로 오래 매달아 놓으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그러니까, 지금 이건 기죽이기 작전 정도가 되겠군.
결국, 심장이 뻐끈해지고 고통스러움에 몸부림을 칠 때에야 발목을 매단 밧줄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그와 병사들을 습격했던 건장한 남자 중 일부는, 땅에 내려온 더이스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더이스는 고문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깨달았다.
고문이 아니었다.
이들은 그저 화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왜? 정작 습격당하고 억울한 건 난데?’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 * *
코다로는 전갈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있었다.
전갈들은 하얀색과 검은색이었는데, 각기 중지 손가락만 했다.
그들은 새장 안에서 열심히 서로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찬 바람이 불자, 으슬으슬해진 코다로는 털 외투로 몸을 감쌌음에도 등을 떨었다.
그리고 말했다.
“오랜만에 담벼락 밖으로 나왔더니 춥군. 불을 더 지펴라.”
그의 명령에 건장한 남자들이 다가와, 화톳불을 하나 더 끌어다 놓고 기름을 부었다. 그리고 장작더미를 던져 넣는 소리가 났다.
곧이어 코다로의 옆에서 불이 활활 타올랐다.
코다로는 후계자 시절, 섭정인 삼촌에게 쫓기면서 곤충에 대한 각별한 추억을 쌓았다.
삼촌의 내연녀인 하녀가 그와 동행하면서 살을 섞고, 그 후에 독벌레로 그를 죽이려고 했던 게 이차 트라우마였다.
일차는 그의 어머니가 독충에게 죽은 거였고 말이다.
‘벌레는 왜 이렇게 징그러울까?’
그는 벌레를 지독히도 혐오했다.
그러면서도 얽매였다.
뭐 깊은 상처란 건 다 그런 것이다.
지독한 기억의 뿌리가 현재의 오늘까지 닿아 있는 것.
삼촌을 고문하면서 알아낸 것은 배후에 네이블 가문이 있었다는 것이다.
대체 그놈들은 그렇게 승승장구하고도 뭐가 모자란 지, 북부의 패자로서 부끄러운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바로 어른인 친척을 부추겨, 정당하고 어린 후계자를 죽이는 일.
그는 삼촌의 단말마를 듣기 전에 ‘네이블 가문은, 북쪽 끝의 세 가주가 너무 어린 후계자인 점을 염려하고 고심한다.’ 라는 의견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어린 것들이 방위를 못 해낼까 걱정이면, 직접 너희 아이들을 여기로 보내라고 말해주지 그랬소? 당신은 가문의 역적으로 날 수배했지만, 정작 배신하는 방아깨비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뛴 이는 누구지? 누가 외부의 장단에 춤을 추었냐고.”
한숨을 내쉰 코다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불붙은 장작개비 끝으로 친히 삼촌의 눈을 후볐다.
그다음은 비명을 지르는 삼촌의 입안이었다.
그는 그때 혀가 타는 냄새를 알게 되었다.
그 후는 뭐 파란만장한 그의 천국이었다.
살을 섞었던 하녀는 물론, 삼촌 쪽에 붙었던 놈들을 모조리 죽였다.
새 영주로서 너그러움 어쩌고….
배포니, 뭐니 그런 것은 일절 없었다.
그가 유일하게 믿는 사람은 피신 때 비밀 문을 알려줬던 집사뿐이었다. 하지만 그도 가끔 피곤하긴 했다.
용병들의 줄다리기를 심판 보며 이익을 조정하는 일 따위가 말이다.
“때론 남자라면 적극적으로 미래를 모색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지.”
이 세상은 참 이상하다.
몬스터들은 인간이라면 아기든 뭐든 가리지 않는데, 같은 인간끼리는 어리다면 삐뚤게 보고 짓밟으려고 혈안이란 말이지.
코다로는 새장을 열었다. 그리고 승리에 도취한 전갈을 꺼냈다.
상대 전갈을 토막 낸 놈이 몸부림쳤지만, 그는 지금 사슴 가죽 장갑을 끼고 있었다.
코다로는 어릴 때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 잔인해졌다. 그리고 괴팍해졌다.
그의 아름다움에 혹해 다가온 사람들은 이내, 그의 성정을 알고 뒤로 도망간다.
그는 상종하기 어려운 인간이었다.
그대로 전갈을 단검으로 토막토막 내어서 술잔에 넣었다.
분홍색의 술 안에 전갈이 들어가자 선홍빛을 띠기 시작한다.
술잔 속의 전갈을 빙빙 돌리던 그는 입가에 술잔을 가져다 댄다.
술맛이 기대 되었음인지 무심코 내심이 새어 나왔다.
“빨리 좀 와라.”
주변에는 그의 부하들이 가득했고, 모두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세워놓은 창끝이 가시처럼 원들을 만들고, 성채를 이루었다.
그는 야외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세인을 말이다.
세인은 분명 여기로 올 것이다.
그의 속삭임을 들었는지 발치에 엎드려 있던 작은 개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 * *
“이건 좌시할 수 없겠군.”
세인이 그렇게 중얼거린 지 반나절이 지났다.
그는 정말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은 피를 예고하고 있었다.
밑의 기사들도 덩달아 긴장했다. 그리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더이스, 이 바보 같은 자식.’
막내라고 그렇게 아꼈는데 납치나 당하고 말이야.
그리고 납치를 당해도 하필···.
생각해보면, 그동안 세인은 기사들 앞에서 진심으로 정색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뭘 해도 적당한 선을 유지했다.
그라고 소년 영주를 모시는 기사들의 내심을 모를 리 없었다.
뭐, 고충이 있을 것이다.
벽도 서로 있을 거고.
하지만 이렇게 공동체가 되었으니 밉든 짜증 나든, 믿지 못하든….
시간이 가다 보면 해결되는 것도 있겠지, 하고 보내왔다.
그런데 지금 세인 앞에 서면 그가 살기 띤 표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바보라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당연한 거지. 영주님으로서 이건 정말 민감한 문제니까.’
오히려 지금 화가 나지 않는다면, 영주로서 자격 미달이었다.
기사들은 언변을 조심하며 세인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했다.
세인은 홀에 나와, 영주만이 앉을 수 있는 커다란 의자에 앉았다.
그동안 할아버지의 체취가 배겨 있는 것 같아 거들떠보지도 않던 의자에 앉은 것이다.
그 위에서 그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그때 한 마리의 새가 도착하였는데, 바로 코다로가 보낸 것이었다.
그 새가 가지고 온 메시지를 받은 세인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서도 그는 행크와 맥을 성에 남겨두기로 마음먹었다.
더이스에게 주의를 돌려, 민감한 사건으로 화가 난 자신이 앞뒤 안 가리고 모든 지휘관과 나갔을 때를 노린 양동작전이면 곤란하니까.
보통 때라면 따라나서겠다고 말했을 행크도 입을 다문 까닭은 세인의 상태를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마구간의 문은 열린 지 오래였다.
공터를 몇 바퀴 돌면서 몸을 천천히 덥히던 말들이 성문 뒤로 끌려 나오고, 그중 한 마리에 세인이 올라탔다.
그는 넓은 방패를 등에 멘 상태였다.
“가자.”
이제 해는 검은 산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굴뚝에서 밥을 짓는 연기가 줄을 잇고, 일반적인 가정집이 휴식을 준비할 때쯤.
오히려, 세인이 이끈 수많은 남자가 말과 함께 성문 밖으로 달려나갔다.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안장에 매달아 놓은 검과 창이 움직이고, 그 역광에 서슬 푸른 남자들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들 모두는 곧 다가올 살인을 체감한 모습이었다.
이제 이 밤은 피로 물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