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 습격 (1)
한센은 전보다 자주 아레이즈 영지를 들락날락했다. 그러면서 누비옷이나 향신료 같은 것을 팔았다.
평소 시세보다 싸게 팔았음은 물론이다.
그의 요즘 입장을 말자면, 자연스레 아레이즈에 호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레이즈의 영주에 대해 호의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접어놓고 아레이즈를 바라봐도, 전보다 훨씬 나아지려고 하고 있었다.
왠지 기꺼운 일이다.
일단 한번 크게 일을 벌여 길목과 벌판을 청소했었다.
그 이후로 용병들이 떠나지 않았던 까닭은, 세인이 주기적으로 청소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레이즈 근방은 전보다 평화로워졌다.
성벽 밖을 나서면 언제 몬스터와 마주칠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일이 줄어 들었다는 뜻이다.
전대 영주는 성안에서 살며,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 백성들의 세금을 쥐어짰다.
그러면서 성벽 밖의 일은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왜인지, 골드 힐이나 디펜더스 쪽에서도 아레이즈에게 호의적이었다.
통행세를 걷는 것이나, 병사들이 하는 이야기를 보면 감이 왔다.
그리고 목책이 늘어나자, 자연스레 성벽 안의 사람들도 밖으로 자주 출입을 하게 되었다.
“길만 봐도 달라졌어.”
전에는 성안의 좁은 길 위에 닭들이 돌아다니질 않나….
기르는 동물들의 변과 발자국으로 진창이질 않나… 그런데 이제는 그런 것도 없었다.
짐승을 기르는 사람들이 성벽 밖에 나서기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번우드 마을들에서의 평판도 점점 올라가는 중이었다.
번우드 마을들이 전혀 영향력 없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또 곤란하다.
여행자들에게는 그런 마을의 소문이 어느 영지로 갈지 결정하는 실마리가 된다. 그리고 번우드 마을이 세금을 내기로 결정하면, 당연히 평판이 좋은 영지에 들어가려 애를 쓸 것이다.
지리적인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말이다.
“하루아침에 되는 좋은 일이란 건 없지. 큰 그림을 그리려면 시간이 걸리는 법인데, 다만 여기 사람들이 이걸 알까 모르겠다.”
한센의 옆에 붙어있던 지크라는 남자는 그의 중얼거림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쨌든 싸게 파니 불티나게 팔리는 물건들을 다 비워내고, 그들은 펍을 찾았다.
안에는 낮 시간대인데도 맥주에 얼굴이 벌건 사람들이 많았다.
추운 지방이니까, 그들이 종종 독한 술을 마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혀 꼬부라진 목소리 가운데서 한센은 소시지와 밀빵을 주문했다.
“이제 추운 지방이 익숙해지기 시작하네요.”
지크는 코를 비비며 웃었다.
한센은 그런 지크를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외지에 나와서 고생하는 젊은이들은 대부분 효자다.
그들은 효자일 수밖에 없었다.
자기 한 몸 편하게 지내자면, 절대 외지를 떠돌리가 없을 테니까.
“우리 살림이 나아지니까. 이제 솜씨 있는 용병과도 계약했네. 차차 안전이 나아질 거야. 그걸 알고 힘을 내게.”
“재칼 용병단이요?”
“아는군.”
둘은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기다렸다. 그런데 둘의 이야기를 방해하는 소리가 있었다.
유독 쩌렁쩌렁하게 가게 내부를 울렸다.
“대체 이게 뭐냔 말이야. 자리에 오르시자마자, 잔혹한 손속을 보일 때부터 알아봤어. 그리고서 성안을 단속하기는커녕 외부로 떠도셨지. 그다음에도 성 밖에만 신경 쓰고 계시고 말이야. 우리는 썩어들어 가고 있다고!”
한센을 바라보는 지크가 어깨를 으쓱이는 가운데, 소리를 지르는 술꾼은 어딘가를 향해 삿대질까지 해댔다.
“인두세라니! 그것도 태어나자마자 한 살 먹은 어린아이에게 말이야. 세금을 걷는 게 영주님의 권한이라지만, 너무한 거 아냐?”
술판에서는 왕도 안줏거리로 올릴 수 있는 법이다.
그런 술꾼의 주위에 앉아 있던 남자들은 맞장구를 쳤다.
“맞아 전의 영주님은 세금을 걷긴 해도 병사 관리에 다 썼다고. 그런데 지금은 봐. 대체 먼 곳 사방팔방에 왜 목책을 세우냐고. 그 판에 나무꾼들만 살판났지 뭔가? 장작값만 올리고 말이야. 한 철 장사니까 아주 바닥까지 해 먹겠다는 거지.”
“게다가 말이야.”
모습은 속삭이는 듯 손으로 입 옆을 가렸지만, 식당 사람들이 다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다른 남자가 하는 말은….
“영지 내에서는 어린아이들에게 인두세를 물리면서, 번우드 마을 같은 곳은 어떤지 알아? 거기에 목책을 세워주고 있다는군. 정말 그렇다면 이거 형평성에 어긋난 거 아닌가? 가슴을 칠 일이야! 그리고 내가 듣고도 설마설마했는데 저기 북쪽의 그 마녀 야만인들의 마을조차… 어이쿠!”
그때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허둥거렸다. 그리고 일부러 몸을 부딪쳤던 한센은 잽싸게 떨어지는 술잔을 잡아 올려주었다.
그러자 남자는, 팔걸이를 쳐서 놀라게 한 것에 대해 욕을 해야 하는지….
아니면 술잔을 잡아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는지…, 일순간 헷갈리는 표정이 되었다.
한센은 마치 모든 게 실수였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입을 열었다.
“아이들에게 왜 세금을 거두는지 알고 있소?”
“뭐요?”
“그리고 아이들에게 세금을 올린다고 뭐라 하기 전에, 아이 열명 모아봐야 구리 한 푼도 되지 않는데 한쪽 면만 말하지 맙시다. 그쪽 집안에 구리 한 푼이 없어서 아쉬운 것도 아니면.”
“뭐야? 시비야?”
“초면에 인사도 없이 왜 우리 말에 끼어들어?”
“옷차림 보니 외지인 같은데? 당신이 우리들 생활에 대해 뭘 알아?”
식당을 시끄럽게 하고 있던 남자들은 이제는 한센을 보고 삿대질을 해왔다.
여기에서 식사를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결국, 지크와 한센은 먹을 것을 들고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성안의 영지민이 모두 영주에게 우호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런 것은 동화책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걸 알만도 한데 한센은 실수를 저질러 버렸다.
문을 지나치면서 한센은 한숨을 내쉬었다.
장사하는 입장에서 잠재 고객과 마찰을 빚으면 좋지 않은데 말이다. 하지만 순간 울컥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한숨을 자신들에 대한 한심함에서 비롯된 것이라 오해했는지, 뒤에 남겨진 남자들이 저주를 퍼부었다.
“에잇! 가다가 오크 발치에 자빠져라!”
그런 저주는 정말 좋지 않은데 말이다.
결국, 말이 씨가 된다고 한센은 정말로 낭패를 보게 되었다.
* * *
“훅훅.”
간밤에 잠을 설쳐서인지, 세인은 새벽부터 자리를 박차고 나와 아침까지 뛰고 있었다.
얼마나 오래 뛰었는지 그의 옷이 땀으로 착 달라붙었다.
홑옷이 그 지경이니, 근육질의 날씬한 몸매가 어둠이 물러가는 음영 속에서 두드러져 보였다.
검고 긴 나무들이 그의 옆에서 바람 소리를 내며 스쳐 지나갔다.
그는 산길을 홀로 달리는 중이었다.
경호원 같은 남자는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시원하게 내리막길을 달려 내려가던 그는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그리고 멈춰섰다.
아침 햇빛을 받은 창백한 길 위.
얼어붙은 낙엽들이 쌓인 길 중앙에, 몸이 꽁꽁 얼어 날개를 오므리고 죽어있는 새가 있었다.
세인은 잠시 그 새를 내려다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위를 쳐다보았다.
검은 가지들만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데, 둥지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가슴 부분이 볼록할 뿐 파먹힌 흔적도 없는 것을 보니 얼어 죽은 새인가?
“아침부터 죽은 새를 보면, 재수 없다던데.”
그렇게 중얼거리던 세인은 잠시 그 새를 묻어줄까 말까 고민했다.
그리고 새삼 안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런 귀찮은 일을 대신해줄 병사들을 데리고 다닐까 잠시 고민하는 시간도 가져 보았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뭇잎들에 잔뜩 껴서, 가시를 반짝이는 성에를 보자니….
거기에 손길을 묻힐 생각은 저만치로 사라져 버렸다.
“동사 또한 자연의 섭리야. 태양이 완전히 떠오르면 배고픈 짐승이 널 뜯어 먹겠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새를 지나치는 세인은 문득, 저 새가 죽는 순간 스스로 그것을 자각했을까 궁금해졌다.
자각했다면 저 새는 죽어가는 자신을 알고도, 스스로를 동정했을까? 아니었을까?
그날 아침 세인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후, 평소대로 간단한 아침 식사를 했다.
마플은 깨우지 않았는데도 일찍 일어난 세인을 보며 깜짝 놀랐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아니 그냥 간밤에 잠이 안 와서.”
그리고서 그는 맥과 제대하는 병사의 급여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그가 돌아간 후에는 행크의 선물을 받았다.
“푹신한 소파입니다, 영주님. 성이 너무 황량한데, 이거라도 있으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서요.”
“누가 만든 거지?”
“제 장인어른의 셋째 딸입니다. 여자만 아니었어도 알아주는 목수가 되었을 거예요.”
세인은 체크무늬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 안락함에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할 수가 없군. 동감이야.”
그렇게 흡족해하고 있는데 한센이 들이닥친 것이다.
성의 관리들이 그를 잡지 않았던 까닭은, 한센의 낭패한 몰골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영주님의 이익과 관련된 소식을 가져왔기에 빠른 대면이 가능했다.
물론, 그 소식이 마이너스 소식이란 건 매우 유감이다.
“죽여 주십시오. 영주님!”
행크는 아주 엉망진창인 모습으로 한센이 걸어오자,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그가 보기에 한센은 어디에서 습격이라도 받은 사람의 몰골 같았다.
그의 얼굴 또한 울 듯한…, 아니 이미 펑펑 운듯한 얼굴이었다.
누가 이 다 큰 남자를 울린 걸까?
세인은 소파의 감촉을 느끼면서도, 행크와 한센 사이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입을 열려는 한센에게 한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봐.”
안절부절 못하는 한센의 얼굴은, 양심의 가책에 못 이겨 차라리 빨리 어른에게 뭇매를 맞고 싶어 하는 아이의 표정이 되었다.
그는 현재 공황상태였다.
그 표정을 음미하고, 들어 올렸던 손을 팔걸이에 내려놓은 세인이 입을 다시 열었다.
마음의 준비가 끝났기 때문이다.
“좋아. 이제 이야기해.”
그 후로 이어진 한센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어느 날 한센이 불한당들의 습격을 받았고, 그와 몇 명은 용병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구사일생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게 왜 중요한 이야기냐? 하면….
“와이번 가죽에 대한 골드가… 골드가, 그만…. 그들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몇 골드나 되는데?”
침을 삼키며 듣고 있던 행크가 조바심을 참지 못해 그만 끼어들어 버렸다. 그러자 한센은 작게, 그러나 신음처럼 액수를 내뱉었다.
“….”
“뭐? 열아홉 닢? 지금 열아홉 닢이라고 했어? 내가 잘못 들은 거야? 금화로 열···, 아홉 닢?”
행크는 금방이라도 기절할듯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다가 되려 세인보다도 안절부절 못하며, 그의 영주와 이 한심하고 못난 상인 위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뭘 생각하는지 세인이 침묵을 지키고 있자, 몸이 단 행크가 대신 한센에게 질문을 속사처럼 던졌다.
얼굴은 보았나?
옷차림은?
언제, 어디서 털렸어?
그리고 왜?
뭐 짐작 가는 건 없나?
그리고 대체 그 엄청난 액수를 어디에다가 숨겨 두었길래 털린 거야?
행크의 윽박 같은 추궁에 한센은 미주알고주알 고해바치며, 다시금 이마를 바닥에 처박았다.
그가 이익금 중 바쳐야만 했던 금화 열아홉 닢은 결코 가벼운 액수가 아니었다.
이곳 영지의 미래 일부분이다.
그래서 또 외쳤다.
“제 불찰입니다. 죽여 주십시오!”
행크가 성질을 이기지 못해 부드득 부드득 이를 가는 가운데, 세인이 오히려 침착한 표정으로 운을 뗀다.
그렇게 침착한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