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 디펜더스 (2)
디펜더스 영지는 와인 강을 끼고 있었다. 그래서 산간 지방에 터를 잡은 타 영지들처럼 수원이 부족할 일은 처음부터 근절되어 있었다.
땅도 기름진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못된 성질로 곡식들을 밀어내지도 않았다.
적어도 뭔가를 심고 정성을 들이면 답례는 해주었다.
회색 성도 과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안정적으로 세워져 있었으며, 마을의 치안 상태도 좋았다.
선대 영주들이 예술품을 사랑했기 때문에 건물 곳곳에서 괜찮은 조각상이 자주 보였다.
영지민의 생활고 정도도 높지 않았고, 타인이 보기에 잘 균형 잡힌 영지였다.
물론 그럴 수는 없지만 태어나는 것을 결정할 수 있고, 영지의 주인으로서 태어날 수만 있었다면 여기를 고르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요즘 디펜더스 영지는 상당히 방어적으로 변했고, 예민하게 굴었다.
세인이 처음으로 방문해 아쉬운 소리를 한 영지가 이곳이 아닌 까닭도 그 때문이었다.
그 속사정은 비밀도 아니다.
진눈깨비가 날리는 오전에 푸른색 마차 몇 대가 영지 성에 도착했다.
마차의 문 쪽에는 파란색 바탕에 노란 새가 양쪽 날개를 펼치고 있었는데, 아레이즈의 문장이었다.
하인들이 다가가자 문이 열리고, 에메랄드 반지를 손에 낀 젊은이가 시동의 도움 없이 스스로 바닥에 발을 내디뎠다.
바로 세인이었다.
그는 하인들의 안내를 받아가며 성 내부로 걸어갔다. 뒤에는 더이스와 행크가 뒤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평소 때처럼 거친 옷차림이 아니라, 최대한 격식에 맞는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세인도 마찬가지다.
“코트는 제게 주십쇼.”
세인의 코트를 두 번째 문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남자 하인이 받아주었다.
디펜더스의 응접실은 넓고 화려했다.
하얀색 바탕에 검은색 항아리들이 배치되었는데, 그 항아리에서는 녹색 식물들이 한가득 흘러나와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 덩굴은 천장까지 타고 뻗어 나가, 하얀 대리석 기둥에서 폭포수처럼 떨어진다.
문이 없는 그곳의 주변은 정원이었다.
비록 동장군의 입김에 움츠러들었지만, 여름에는 꽤 멋질 것만 같다.
세인은 장갑을 벗으며 정원을 구경했다.
앙상한 가지만 드러내놓고 있는 나무들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상 거리가 된다.
나무들의 고급스러움과 크기가 있었으니까.
“이대로 꼼짝없이, 저녁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겁니까?”
더이스가 하얀 소파에서 불평 어린 투정을 쏟아냈지만, 의외로 행크는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
“순조로운 여행길이라서 불만인 거야? 애먹지 않고 바르게 도착한 게 다행이지.”
이곳 영주는 지금쯤 멀리에서 세인을 지켜본 측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겠지.
지금 디펜더스의 상황을 고려하면, 확실히 저녁때까진 기다려야만 할 것 같았다.
그냥 세인은 느긋한 심정으로 정원을 돌아다녔다.
인공적으로 만든 작은 연못 앞에서 혹시나 하고 물고기가 있나 들여다보았지만, 미꾸라지 한 마리도 없었다.
저녁이 되자, 디펜더스의 영주는 비로소 그들을 성의 깊숙한 곳으로 초대했다.
하인들이 열어주는 커다란 문을 통해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좌우로 늘어서 있는 기사들보다도 크고 고급스러운 상석에 홀로 앉아 있는 영주가 보인다.
그, 아니 그녀의 목소리가 홀에 울렸다.
“이웃의 친구가 와서 이보다 좋을 수가 없습니다.”
“저도 기쁩니다.”
화답하는 세인은 무례하지 않은 정도로 디펜더스의 영주를 훑어보았다.
상대는 두꺼운 털 외투에 몸을 숨긴 작고 연약해 보이는 소녀였다.
아직 어린 티가 나는 볼록한 이마와 그 좌우로 흘러내리는 붉은 색 머리가 검은 양모 코트를 아름답게 장식했다.
비록 어린 소녀였지만 눈에 총기가 서려 있었고, 다스리는 사람으로서의 위엄도 제법 갖추고 있었다.
아마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의 이모가 아직도 섭정하고 있었을 테지.
그녀가 저 자리에 앉은 것은 채 2년이 되지 않았다고 전해 들었다.
지금의 디펜더스는 주민과 기사, 병사들 모두…. 어린 그녀의 위치 때문에 극도로 방어적인 상태였다.
이런 상태에서 와이번 가죽이 마법을 부린 것이나 다름없다.
디펜더스의 초대장을 얻어냈으니까.
세인은 이곳에 오기 전에 어떻게 그녀를 대해야 할지 고심했다.
골드 힐의 영주에게는 귀족 같이 굴었지만, 여기에서도 그래야 할까?
그렇게 한다면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을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이런 말을 하면서도 다시 뜸을 들이고 있군요.”
“아닙니다.”
그 후는 식사를 하며 서로를 탐색해 보는 시간이었다.
그녀는 오후 내내 기사들과 세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을 것이지만, 지금은 직접 탐색을 해보는 시간이다.
세인 측 또한 소녀를 관찰했다.
툭툭 잽처럼 오가던 이야기는,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긴장이 풀어지도록 서로를 유도했다.
“비비안이란 이름은 어머님이 지어주신 것입니까?”
“예. 어머님이 딸이면 비비안. 아들이면 케이스로 정해놓았다고, 유모에게 들었어요.”
식사는 백포도주를 곁들인 생선 요리가 나왔다.
뼈에서 살점을 골라내는 시간이 길지 않았던 이유는 테이블 위에서 많은 이야기가 오갔기 때문이다.
세인은 소녀 영주를 모시고 있어서 예민해져 있을 사람들을 조심하고 배려했다.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선택했다.
식사를 마치고 냅킨을 던진 비비안과 세인은 그녀의 다른 방에서 다시 만났다.
아마도 비비안은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말이 안 통하는 위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녀가 거느린 기사들도 세인을 마음에 들어 한 눈치였다.
“윌과는 전에 일면식이 있으시죠?”
“다시 뵙게 돼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영주님.”
그렇게 윌과 더이스는 비록 같은 공간 안에 있었지만, 약간 딴청을 부리며 뒤로 물러나 있었다.
비비안은 고사리 같은 손에 끼인 큼지막한 토파즈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세인님.”
“예 말씀하십시오.”
“한 번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계속 영지 주변을 관리 하시더군요. 그런 노력이 저희 이웃 영지의 주요 길목에서까지 반영된 게, 주인으로서 기꺼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저희는 옆에 있으니 덕을 보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골드 힐처럼 저희도 그런 도움에 염치를 보이고 싶어서요.”
그녀의 반짝이는 눈을 보며, 세인은 마치 아름다운 카나리아가 자신에게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는 인형처럼 아름다웠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골드 힐만큼이나 대하기 어려운 존재가 바로 그녀였다.
골드 힐의 영주인 코다로는 풍족한 영지의 삶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균형 위에 서 있었다. 그래서 가뜩이나 잔인한 성정이었지만, 남에게 더 포악하게 굴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더구나 그는 광산을 몇 개나 가진 존재이다.
세인과 꼭 친분을 터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공생이란 게 말처럼 쉬울까?
비비안은 이렇게 보면 아름답게만 보이지만, 그녀의 역린은 너무나도 뻔하게 드러나 있었다.
사실 주변에서 아무도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리려 하지 않아도, 스스로 삐죽 솟아있는 그 비늘은 바람에도 파르르 떨리며 피를 부르기 쉬웠다.
그래서 이 성내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 한쪽에는 불안과 조심으로 가득 차 있다.
세인은 어떻게 그녀를 대해야 할까 고민하는 것을 멈추었다.
어쨌든 기회가 왔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와이번 가죽 이야기를 꺼낼 필요는 없다.
그건 오히려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 수 있고, 계산적으로 보일 수 있으니까.
그는 지금까지 유지하던 어조와 달리하며 입을 열었다.
“비비안님.”
“예 말씀하십시오.”
“저희 영지가 많이 힘듭니다.”
비비안은 잠시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뭔가를 생각하더니, 세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시다시피 아레이즈는 북쪽으로 아주 튀어나와 있습니다. 물론 북부에서 세 영지가 꼭짓점처럼 돌출되어 있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유별난 거죠.”
사실 아레이즈만 유별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세인도 안다.
다만 이렇게 운을 띄우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군량은 아직 부족하지 않지만, 최근에 인건비로 쓰기도 했고 말이죠. 어느 날 생각해 보니. 제가 영주가 된 후 영지민에게 있어, 달라지는 게 뭐가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자신이 없어지더군요. 어쩌면 더 나빠지지 않을까요?”
코다로 앞에서는 절대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비안은 세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여 보았다.
일단 수작을 보겠다는 것이다.
“비비안님 당신도 영주이니까 제가 아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정보는 있지만, 분석은 저마다 다를 수도 있겠죠. 누군가는 몇십 년 후에 벌어질 일이라고 여길 수도 있고 말이죠. 그렇다 해도 저로서는 전보다 더 좋아지지 않고, 더욱 나빠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
“그래서 이런저런 일을 해보겠지만, 만약에 언젠가 식량이 부족하다면 제가 어디에서 융통할 수 있을까요?”
세인은 쌀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비비안은 당연히 그것을 알아들었다. 그리고 그가 이런 식으로 자신을 배려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먹었다.
귀족이니까 자존심을 세우는 것도. 낮추는 것도 정말 필요할 때가 있었다.
겨우 아는 사이끼리는 위기 때 만족할만한 쌀이 돌고 돌지 않는다.
이 사람은 동맹 때문에 모든 것을 계획했구나. 그리고 적어도 그는 진심을 내보이기 위해, 먼저 양보 정도는 할 줄 아는 위인이었다.
아니 희생인가? 와이번 가죽 정도라면?
그녀는 바보가 아니라서 곧이곧대로 듣고, ‘우리에게 줄 와이번 가죽으로 왜 쌀을 사려는 생각은 안 하셨어요?’라고 묻지 않았다.
“세인님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해서 죄송하지만, 골드 힐의 불한당에게도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가 제 속내를 안다면, 스스로 알아차렸기 때문일 겁니다.”
“그거 마음에 드는군요. 그리고 노파심으로 말하건대. 그자는 정말 조심해야 할 속물입니다.”
세인은 무표정인 상태로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들었다.
그녀의 이야기에 동의한다기보다는 무안해하지 않게 해주려고 말이다.
그리고 입가를 축인 후 이야기를 계속한다.
“당신은 이런 제가 굉장히 조야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저는 제 책임을 다하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몹시 힘듭니다. 그래서 발버둥이라도 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상태로 여러 가지를 고려하다 보니, 네이블 쪽에 시선을 두지는 못하겠더군요. 평판이 좋고, 믿을 만한 세력은 멀리 있지도 않았고요.”
비비안은 뭔가를 생각하는 듯, 턱에 손을 괴고 바람이 불어오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세인은 적어도 ‘우린 같은 처지이고. 난 당신에게 빚을 짊어지웠으니,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내 의견에 동조해라. 그게 결국 당신 집단의 이익에도 부합되는 미래가 아닌가?’ 식으로 다가서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낮추며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비비안이라는 본인을 배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귀족은 자존심을 챙겨야 할 때는 정말 무섭게 굴면서, 피를 봐야만 하고 자존심을 버려야 할 때는 걸인처럼 굴어야 한다.
비비안은 지금 무섭게 자존심을 챙겨야 할 때였다.
그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무시당하면 핏값을 치러서라도 무안을 상쇄해야 하니까.
그녀의 권력을 위해.
“저는 오늘, 실은 네이블 가에 대해서 이야기도 나눌 겸 자리를 마련한 것입니다만. 우린 그보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것일는지도 모르겠군요. 세인님.”
“저는 능력이 없으며 성벽 너머 멀리도 아니고, 가까운 곳에는 인간을 죽이려고 혈안이 된 것들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언젠가 결과는 도외시하더라도, 분명 저는 그것들을 죽이려고 발악을 하겠죠. 그리고 그것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어깨를 나란히 하자, 까지는 욕심이라 해도…. 제가 노력하고 좀 더 제 진심을 증명한다면, 등 정도는 돌리지 않을 수 있겠죠.”
“그렇군요. 알아들었습니다.”
비비안은 고개를 끄덕였고 자리는 그렇게 끝났다.
그날 밤 윌이 그녀에게 세인에 대해 물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적어도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행동으로 본심을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제게 와서, 모두의 처지를 자신의 처지로 돌려 말하며 자신을 낮추기도 했죠. 호의 어린 선물도 받았습니다. 네이블 가와 골드 힐은 짐승 같습니다. 그런 상황에 제가 그의 뜻을 거부할 이유가 있습니까? 받아들여도 제 기반이 단단해지는 마당에?
“그는, 그의 할아버지와 다른 인물 같더군요. 영주님.”
“음흉한 인물 같아 보이지도 않지만, 훗날 그가 배신한다 해도 우리가 잃는 게 무엇입니까?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뿐입니다. 내가 먼저 무언가를 받았으니 이제 약간이나마 신용을 준다는 게 이상한 건가요? 윌님?”
“아닙니다.”
“직접 말을 나눠보니 골드 힐의 영주와는 다른 인간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적인 호의에는 같은 호의로 답하겠습니다. 그게 지금의 저로서는 최선입니다.”
세인도 앞에 없었고 비록 구두지만, 미래의 동맹 선언을 염두에 둔 말이나 다름없었다.
윌은 고개를 끄덕였고, 디펜더스의 대접은 그날을 기점으로 아주 융숭해졌다.
비비안은 잘 정돈된 사냥터를 거닐며 세인과 같이 사냥을 하기도 했다.
소녀인 그녀가 이 추운 날에 사냥을 즐길 리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시늉까지 한 걸 보면, 그녀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확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