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22화 (22/307)

# 22

& 디펜더스 (1)

이른 아침이 되면 마플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마을의 집이 아니라 성안에서였다.

그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방에서 나와 싸늘한 복도를 걸었다.

층계를 오르고 올라, 영주님의 침실로 가는 데 15분이 걸렸다.

그녀가 방 앞에 다다라 두세 번 노크를 한 후, 대답이 없자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그리고 잠긴 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간다.

이제 세인은 과거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쓰던 침실을 홀로 쓰고 있었다.

낡은 가구들 사이에 놓인 침대는 소년에게는 꽤 넓어 보였다.

세인은 마플이 들어온 줄도 모르고 곤히 자고 있었다.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영주님.”

마플의 차가운 손이 세인의 발목을 잡고 약하게 흔들자, 세인은 흠칫하며 눈을 떴다.

“뭐야. 아침인가.”

탁하고 갈라진 목소리를 들으며 마플은 고개를 끄덕였다.

창가로 다가가 회색 커튼을 젖힌 그녀가 넌지시 세인에게 찔러 보았다.

“요즘 눈에 들어오는 하녀라도 없으세요? 혼자서 자는 것보다는 따뜻할 텐데 말이에요.”

“누구 신세를 망치려고?”

지나가듯이 물어온 것에 다시 지나가듯이 대답한 소년이 마지막 미련으로 베개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가,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서 침대를 무릎걸음으로 내려오는데, 기다리고 있던 마플이 털 슬리퍼를 소년의 발에 신겨 주었다.

“그러는 마플은? 언제까지 이 추운 성에 있을 생각이야? 마을에 내려가고 싶지 않아?”

“늘 하던 일인데요. 뭐, 오히려 여기가 편해요. 시시콜콜 물어오는 아줌마들에게 시달리는 것보다.”

당신도 아줌마라고 말하는 대신 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제 받아놓은 세숫대야의 물로 세수를 했다.

아침은 샐러드와 딱딱한 빵으로 대충 때우고 난 뒤, 업무를 보았다.

청원서는 오늘도 책상을 수북이 채우고 있었다.

대부분은 아스칼리온 이라는 사람에게 온 청원서였다.

구리로 된 안경을 낀 세인이 그 종이 뭉치들을 머리 위로 올려보면서 투덜거렸다.

“이 사람도 어지간하군. 이게 취미인 모양이야.”

그러면서도 꼼꼼히 읽어보았다.

요약해 보면 주변 산들을 다 민둥산으로 만들 작정이냐고 따지는 것 같았다.

그래 오늘의 주제는 민둥산인가.

연서도 아니고, 뭐 이렇게 구구절절하게 써놨담?

“그러고 보니 앞으로 나무를 벨 곳이 마땅치 않군.”

턱을 쓰다듬으며 나름대로 고심을 해보지만, 대안이 없는 것만 같았다.

홍수 같은 재해를 대비하려면, 어차피 일정 이상의 벌채는 벌일 수 없었다.

겨울이라 장작 수요가 많아진 것이 문제였던가.

그는 그 후에도 낡은 책상에 앉아 이런저런 문제를 점검했다.

가끔 기사들이 와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거기에는 디펜더스의 초대장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 있었다.

“초대에 응하실 겁니까?”

“그래.”

“그러면 언제 가실 겁니까? 레인저 부대 방문 후로 생각하십니까?”

맥의 질문에 세인은 잠시 고민하더니 결정을 내렸다.

“그 후에는 지쳐서 아무것도 하기 싫을 것 같아. 나도, 다른 사람들도 진이 빠져 있겠지. 기다리게 하는 것도 실례니 먼저 응하는 게 좋겠지. 사흘이나 일주일 정도 후에 전서구를 날려서 기별해놔. 그 후에 북쪽으로 가자고.”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맥이 나간 후에, 만년필이 종이 위에서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

세인은 잉크병에 펜촉을 담그면서도, 이 모든 걸 굳이 자신이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재판 관련해서 꼼꼼히 읽고, 판결문을 쓰며 직인을 찍어주는 것도 그렇다.

남이 대신해준다 해도 성 밖의 사람들이 어찌 알겠는가? 위임이 불법이라 해도 불법을 저지르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다른 성에서는 자신처럼 일일이 영주가 업무를 처리하는지 궁금하긴 했다.

어쨌든 머리 아픈 오늘의 오전이 그렇게 지났다.

점심은 아침과 다르게 고기를 곁들인 빵을 먹었다.

어제 먹다 남은 꿩고기에, 푸석한 빵과 채소들을 반죽한 매운 소스를 발라 먹었다. 거기에 버무린 붉은 죽 같은 것도 발라먹었는데 꽤 자극적이었다.

쌉싸름한 게 입맛을 돋우는 역할도 해줬다.

식후 차를 마시고 있는데, 행크가 다가와 디펜더스 영지 방문 일정에 대해 논의했다.

“수행인은 누구로 할까요?”

“제비뽑기 해.”

“….”

골드 힐은 몰라도 디펜더스라면 서로 가려고 할 공산이 컸다.

거기는 이 근방에서 그나마 제대로 된 영지니까.

그렇게 오전에 미처 처리하지 못한 업무 몇 개를 정리한 후, 찻잔을 다시 들어 올렸는데 싸늘히 식어 있었다.

바닥의 남은 액체를 후루룩 마셨다.

그 후에는 외곽의 성벽 위를 거닐었다.

칼바람에 옷깃을 여미는데 성벽 너머로 움직이는 영지민의 모습이 보였다.

귀족은 영지민과 가까이하지 말아야 한다.

가까이하다 보면 같은 인간임을 체감하느라 자연스레 위엄이 떨어지고, 귀족이 하는 일 처리에 무거움을 잃는다.

귀족이라면 몰라도, 같은 사람이 명령한다면 누가 그의 명령으로 죽음과 희생을 받아들이겠는가?

결국, 강제력을 동원하기 위해 더욱 많은 병사와 칼이 필요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게 바로 가이더의 일반적인 귀족론이었다.

세인의 활동 반경은 내성 깊숙이 아니면 외곽 쪽에 치중되어 있었다.

그 동선은 하녀들과 병사에게 동떨어진 동선이다.

그래도 시린 하늘 아래의 땅을 바라보면서, 세인은 문득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다.

그 라고 다른 인간의 체온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믿을 만한 남자는 마음에 안심을 주고, 살결이 보드라운 여자는 육체의 긴장을 이완시켜 줄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둘 다 가망이 없군.

성벽 위에 앉은 그는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멍하니 먼 곳에 시선을 던져두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유난히 짙은 초록색 띠가 있는 지역에 눈길이 멎었다.

“그러고 보니 사냥터가 있었지.”

중얼거린 그는 밑으로 내려가 더이스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영주님.”

“사냥터지기가 아직 살아있나? 내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오늘내일하던 노인이었는데.”

“딱 한 번 보셨을 텐데 그걸 기억하십니까? 지금은 그 후계자가 맡고 있습니다.”

“그래. 거기를 벌채해야겠어.”

“사냥터를요?”

“안 그러면 영지에 나무가 남아나지 않을 판이야."

더이스는 잠시 복잡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전 같았으면, 아니 지금 상식으로도 상상 못 할 일이지만 뭐 어떤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 그리고 그것에서 끝나는 일이 아니다.

그렇게 새로 담긴 새 술은 새로운 사람이 마신다.

“조치하겠습니다.”

“밖에서 보기에는 멀쩡하게 놔두라고, 중앙의 나무들만 베는 거야. 최소한의 체신은 지키도록

힘써 보지. 그 안을 오가는 나무꾼들 가족이야 금방 알겠지만.”

“예.”

그나마 있는 것이 손님이 왔을 때 접대용으로도 쓰이는 사냥터였는데, 이제는 그것마저 절단나게 생겼다.

사냥터는 영주의 자존심인데… 말이다.

세인은 경장으로 갈아입고 근처의 야산에 올랐다.

아주 가파른 산이었는데, 발목에 납 주머니를 매달은 그는 빠른 속도로 산길을 뛰었다.

처음에는 숨도 차오르지 않았는데, 곧 땀이 비 오듯이 떨어졌다.

일정한 속도로 달리는 게 아니라, 지그재그로 빠르고 느리게 변환하며 달렸다.

산 위에는 부서진 나무가 잔뜩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는 그런 나무 중 한그루에 박혀 있던 검을 빼내어 휘둘렀다.

그가 검을 다루는 모습을 보면 의외인 게 하나 있었다.

민첩하고 빠른 검술을 구사할 것 같았는데, 세인은 의외로 무겁고 힘 있는 검술을 썼다.

다만 중검이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면 다시 쾌를 찾는 그 수준에 도달해서, 생각보다 둔한 느낌은 아니다.

땀에 젖은 세인이 휘두른 검광은 소리 곁을 넘나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가끔씩 손을 아예 떠나는 아찔한 느낌마저 가져다 주었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범상치 않은 수준을 보였는데….

레드가 가르칠 때, 레드 스스로 더 가르칠 게 없다고 인정하는 순간이 빠르게 찾아오게 되었다.

그때 레드는 마지막으로 세인이 필요한 게 뭘까? 하고 고심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에게 무거운 짐을 주면서 몸에서 한시도 떼어놓지 말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정작 레드 본인은 가벼운 차림으로 거대한 산을 탔다.

세인은 그 산에서 구르고 또 굴렀다.

레드는 세인을 혹독하게 몰아붙였고, 침식도 잊은 행군이 그 안에선 예사였다.

그러면서도 레드는 세인의 체력에 혀를 내둘렀다.

그의 예상보다 세인은 오래 버텼다. 하지만 어떤 것이든 끝이 있었다.

세인에게 한계가 찾아왔을 때, 레드는 다시 그를 채찍질하며 넘어서게 도와주었다.

높은 봉우리를 정복한 쾌감에 헐떡이고 있을 때, 레드가 쓰러져 있는 세인 옆에서 말했다.

“지금의 경험을 잊지 마십시오. 순간적으로 뽑아낼 수 있는 무력만이 우리의 전부는 아닙니다.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다양한 싸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추격전이 될 수도 있고, 유인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운이 나쁘다면 도망가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모르죠. 때론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압도적인 힘보다 오히려 지구력입니다. 역경을 받아치듯 끊임없이 회복하는 힘 말이죠.”

지구력과 한계를 넘어서는 경험. 그리고 그 희열과 다시 회복하는 힘.

그는 세인에게 한계를 경험하고, 그것을 넘어설 때 느끼는 맛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세인은 레드의 바람대로 그날의 그 느낌을 깊이 각인시켰다.

그 후로 그는 혼자서 그런 한계들을 넘나들기 시작했다.

그 작업은 너무나도 지루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고, 고문처럼 다가올 때도 있었다. 하지만 하나하나의 한계를 넘어설 때 느껴지는 희열감은 정말 무엇과도 비할 게 아니다.

신이 각자의 인간에게 낯선 자신을 준 까닭은, 아마도 이런 희열을 느끼라는 자비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세인은 오늘도 자신의 한계를 맛보고 그것을 넘어섰다.

매일매일 계속되는 일과였다.

그 순간만큼은 ‘매일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나?’라고 자문해볼 필요가 없었다.

살려면 자연스레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너무나 단순하게도 한계를 넘고 나면 살아남았다는 희열과 정복감이 보상처럼 주어졌다.

이보다 더 확실한 보상이 어디에 있을까?

검을 거칠게 휘두르던 그는 가볍게 그것을 뒤로 던졌다.

두꺼운 나무를 거짓말처럼 관통하며 박힌 검을 일별하지 않고, 그대로 몸에서 김을 안개처럼 뿜어내며 산에서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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