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21화 (21/307)

# 21

& 피의 씨앗 (2)

레드가 젊었을 때 처음으로 세인을 보게 되었다.

그때의 첫인상은 뭐라 형용하기가 어렵다.

이상하게도 레드는 세인의 할아버지가 왜 자신에게 세인을 맡겼는지 바로 알 수가 있었다.

어린 세인은 정말 특별한 느낌을 풍겨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절대 잊을 수 없는 분위기였어.’

그 후로 레드가 세인의 손을 잡고 떠날 때, 아무도 말리는 이가 없었다.

“여기에서 뭐 하세요?”

“젬이구나.”

“산 중턱에서 무슨 고독이라도 씹는 거예요? 강한 검사만이 향유한다는 그런 거 말이에요.”

레드는 젬이 내민 물 부대를 받아들었다.

눈앞의 소녀는 순수한 구석이 있었다.

그녀의 언니도 마찬가지다. 따지고 보면 이런 산속에 사는 사람들치고는 지나치게 순수한 면이 없잖아 있었다.

누가 진짜 기형적인 인간일까?

젬이 옆에 앉고 말없이 한참동안 시간을 보낼 때 레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세인은 정말 기형적인 인간이었다.

외모가 아니라 내면이.

그 앞에 서면 레드는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자신의 포악함이나 유별남도 세인의 앞에선 묻혀버리는 느낌이었으니까.

거기에 안락함을 느꼈는지 또는 안도감을 느꼈는지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거부감이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점점 상대에게 동화되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멈추고 싶지 않았다.

아주아주 추웠던 어느 날.

레드가 세인을 버렸다.

하루 만에 세인이 있는 자리로 되돌아가 보니, 그가 했던 말이 아직도 귀에 선하다.

“왜 돌아왔어?”

사실 그는 그때 정말로 떠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 당시 세인의 눈망울이 아직도 잊히지 않은 걸 보면, 그때 떠나지 않기를 정말 잘한 것만 같다.

젬이 떠나간 후 레드는 검을 검집에서 뽑아내어 피를 닦았다. 그리고 손에서 몇 바퀴 돌리며 능숙하게 휘둘러 보았다.

시간이 지나 그는 개인적인 충성을 세인에게 바쳤다.

땅보다 우선되는 충성이다.

노을이 지는 그때 누군가가 레드의 뒤에서 나타났다.

그는 바로 행크였다.

행크가 어제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단단히 준비하고 온 듯, 커다란 도끼를 들고 있었다.

진짜로 하려는 건가 보다.

“이번에는 복면을 안 썼군요.”

“더는 눈 가리고 아웅 하기 싫습니다.”

행크는 나무로 만든 손잡이를 봉처럼 돌렸다. 그러자 끝의 도끼날이 붕붕 소리를 내며 원을 그렸다.

“나는 여기 있고 당신의 영주님은 멀리 있습니다. 더 뭐가 필요합니까? 이걸로 안 되겠습니까?”

“나는 무식해서 그렇게 말하면 모릅니다.”

정말 무식해서라기보단 행크는 일단 제대로 겨루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가 쿵쿵거리며 무거운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태산처럼 버티고 서서 도끼를 휘둘렀다.

도끼날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냈다.

그 빛을 피해 몸을 비스듬히 기울이는데, 기다렸다는 듯 나무 기둥 끝이 레드의 턱을 쳐올리려고 했다.

따악!

대신 손바닥을 때리고 지나갔다.

꽤 단련된 손이지만 손 전체가 얼얼해지는 힘이었다.

이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도끼를 놔두고, 어제는 못 볼 꼴을 보였으니 지금처럼 달려들 만도 하다. 하지만 레드는 지금도 그를 봐주고 있는 것이다.

그걸 빨리 알아야 할 텐데.

행크는 벌침처럼 파고들어 오는 검 끝을 피하지 않았다.

민첩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막아낼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과연, 그의 도끼는 레드의 공격을 다 막아내고 퉁겨낸 데다가 반격을 노리기까지 했다.

그는 허리를 꼿곳히 세우고, 긴 두 손을 움직여 붕붕 도끼를 휘둘렀다.

멀리에서 보면 우스꽝스럽게 보일 순 있었다. 하지만 장신의 몸집에서 긴 팔을 이용해 밀고 들어오니, 당하는 쪽은 위압감을 더 느낄 수밖에 없다.

어느덧 하늘에 달이 떠오르고 둘은 공수를 교환했다.

살기를 띤 공격을 나눌 때는 원수처럼 보였고, 가끔은 제자와 스승이 대련하는 것도 같았다.

한차례 세찬 공방 이후에 둘이 뒤쪽으로 떨어지자, 행크가 턱짓을 했다.

“허리춤의 단검은 안 뽑으시오?”

“언제까지 이렇게 장단을 맞춰줘야 하는지 몰라서.”

“….”

이마의 땀을 닦아낸 행크가 심중에 있던 물음을 던졌다.

“왜 세인님을 죽이지 않았죠?”

“….”

“솔직히 우리 모두는 당신이 세인님을 죽이고 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리고 내가 영주 자리에 앉고?”

“한때 그게 당연하다 생각했지만, 이제는 거꾸로 당신을 경계해야만 하지.”

“아니면 나를 회유해서 영주자리에 앉힐 수도 있겠지. 세인님이 당신들에게 쉽게 호의를 보이진 않겠지. 그건 감추려고 해도 드러나고야 마는 것이니까.”

행크는 바람을 몸으로 맞으며 레드 뒤쪽의 배경을 바라보았다.

산자락들이 검게 펼쳐져 있었다.

“다가올 미래를 알지 못했다면, 그런 상상도 어찌 가능했을 거요. 사람 마음이란 모르는 거니까. 그런 마음을 먹는다는 게.”

“지금은?”

“그냥 사태를 잘 수습해야죠.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두 번째 권력자는 필요 없다는 생각이죠. 그건 아주 위험해요. 당신이 세인님을 선택했을 때, 당신 자신의 운명을 결정해 버린 것입니다.”

“다른 기사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들은 자신밖에 몰라요. 자신들의 위치밖에.”

행크는 약간 씁쓸한 얼굴로 웃었다.

바람을 조금만 넣으면 맥과 더이스도 동조할지 모르지만, 왠지 그러기가 싫었다.

이게 바로 땅과, 개인에게 충성을 바치는 자의 차이다.

가문과 땅에 충성을 바친 행크는 차기 권력자인 레드의 목숨을 노리고 여기로 왔다.

반대로 지금 레드가 세인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땅에 충성을 바친 자는 여기에 왔고, 동시에 세인의 곁에 있었다.

세인 개인에게 충성을 바친 자도 여기에 왔지만, 그의 곁에 있을 수 없었다.

행크는 상대가 세인이었다면 반대로 물었을 질문을 레드에게 던져, 그를 흔들어 보았다.

“세인님에게 당신이 형이라는 것을 말해 주었습니까?”

레드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행크가 몸을 날렸다. 그리고 아까와 사뭇 다른 무서운 속도로 도끼를 휘둘렀다.

그 기세에 레드의 하얀 머리카락 몇 가락이 허공에 분분히 휘날렸다.

레드의 발길질이 행크의 가슴을 걷어차고 거리를 무리하게 벌리지 않았다면, 정말 누구 하나가 죽어 나갈 수도 있는 흉험함이었다.

“당신은 정말 바보 같군. 가문에. 세인의 할아버지에 충성을 바치는 것은 이해해.”

“당신의 할아버지이기도 합니다.”

“그렇다 해도, 내게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 거야.”

행크가 퉤! 하고 침을 뱉으며 도끼를 고쳐 쥐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레드가 그런 행크의 약한 구석을 무자비하게 후벼팠다.

“세인님의 기사라서 당신을 죽일 수 없는 내 약점을 노리고…. 실력 차이가 남에도 불구하고, 언제까지 이렇게 나를 괴롭힐 거지?”

멈칫하는 행크 앞에서 레드가 가슴을 폈다.

“동생을 죽이라고 했을 때부터 나는 가문의 일원이 아니다. 그러니 영주 자리도 나와 하등 상관이 없는 거야.”

“….”

세인의 할아버지는 아주 어린 세인을 바라보며 기이함을 느꼈다.

솔직히 말해서…. 그의 근원적인 공포는 이것이었다.

- 세인과 마물이 구별되지 않는다. -

그는 오랜 세월 동안 몬스터와 싸워왔다.

그래서 그들의 악취 나는 생리.

저열함과 역겨움.

공포와 지독함.

강함과 잔인함을 뼛속 깊이 알았다.

정말 깨닫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고야 마는 본능의 각인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각인이, 이번에는 세인의 할아버지에게 경고해 주었다.

이질감.

인간이 아니라는 절대적인 이질감!

그 앞에서 전대 영주는 세인에게 공포감과 무력함을 동시에 느꼈다.

한편으로는 며느리의 부덕을 의심해야 하는가가 너무 고통스러웠다.

솔직히 그건 말도 되지 않는다.

며느리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의 품성을 그대로 닮았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

그래, 바보처럼 뒤늦게 서서 ‘왜?’냐고 묻지 말고 일단 수습부터 하자.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기사 중 한 명을 쓰자니, 그건 기사 한 명의 본성을 먹칠하는 꼴이다.

암살을 지시한다면 정말 최측근이라는 소리인데, 그렇게 쓸만한 자가 훗날 그런 과거를 지니고 쓰임을 받을 수 있을까?

다시….

그렇다면 이 무거운 짐은 누가 짊어져야 할까?

영주의 자리에 앉아있던 노인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옆으로… 옆으로….

그리고 어둠 속에 서 있는 누군가에 닿고 나서야 비로소 멈췄다.

- 그건 레드. 바로 너다.

일방적으로 생각해 보면 공평한 게임과도 비슷해 보였다.

차기 후계자 둘이 서로 다투는 거니까.

자리 하나를 노리고, 동등한 자격이 있는 자가 서로 다툼을 벌인다.

그런데 그건 말만 놓고 볼 때 그렇다.

레드는 다 큰 청년이었고, 세인은 아주… 아주 어렸다.

훗날 큰다면 지금을 기억이나 할지 의문이었다.

둘은 손을 잡고, 검술 수행을 한다며 떠났다.

그리고 한 명이 돌아와야 하는데 둘이 돌아왔다.

“당신이 지금 하려는 행동은, 인간을 보지 않고 땅에 충성을 맹세한 자의 기우에 지나지 않아. 더구나 이룰 수 있는 확률도 희박하다는 뜻이지. 나는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 땅이라는 물질과 역사가 아니라. 그, 라는 개인에게 말이야. 그래서 여기에 남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 고통을 감수했어. 그런데 당신은 뭘 감수하고 있지? 고작 해봐야 나의 관용과 용서?”

“….”

“비웃음 당하지 말고 돌아가. 나는 아직까진 당신을 조롱하지 않았어.”

“당신은 화근이요. 세인님이 에메랄드 반지를 낀 순간부터 그건 확실해졌소. 인간의 마음은 언제나 바뀌죠. 당신이 충성을 맹세한 세인이라는 개인도 인간이오. 오히려 그렇기에 당신의 충성은 변질되기 쉽지. 당신 스스로 변질될 수도 있고. 아니면 세인님이 먼저 바뀔 수도 있고. 하지만 나나 다른 기사들처럼 불변하는 것에 충성을 맹세하면, 그것은 누구보다 오래 간다오.”

“이봐 확실하게 말해주지. 여기에 영주 자리를 노린 후계자는 없어. 이제 그것은 가상의 존재야. 우린 서로 각자의 충성을 쫓는 방식대로 살아가면 되는 거야. 그것만이 확실한 진실이야.”

레드는 대담하게도 검을 바닥에 거꾸로 꽂았다. 그리고 등을 보였다.

행크는 땅에 충성하는 인간이다.

레드를 죽일 수 있다 해도, 무방비인 그를 죽였다고 훗날 세인에게 고해바칠 것인가?

그가 그럴 수 있을까?

기사가 등을 돌린 기사의 등에 무기를 휘두르는 오욕?

역시나 행크는 등을 돌려 내려가는 레드의 등에 도끼를 박아넣지 못했다.

“산에서 뭐 하고 오신 거예요? 혹시 연애하세요?”

“야. 오늘의 활약상으로 레드님은 처녀들 사이에서 관심이 올라가고 계셔. 너같이 얼굴 느낌이 바닥인 애가 지금 이렇게 레드님을 갈굴 때가 아니야. 다른 처녀들의 원한 맺힌 린치를 당하지 않으려면….”

아무래도 마을 사람들은 지금의 레드에게 서먹서먹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무서운 활약상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젬과 젠은 아무렇지도 않게 레드를 대했다. 그리고 농담 따먹기를 하며 마당에 불을 피우고 술을 마셨다.

이 약초꾼 자매는 정말 오늘만 살 것처럼 편하게 하루하루를 사는 편이다.

레드가 걱정했던 추궁도 없었고 말이다.

레드는 자리에 앉아 말린 고기를 씹었다. 그러면서 약간 우울한 얼굴로 술병에 손을 가져갔다.

누구나 희생을 한다. 그리고 가끔 그 희생은, 그 대상을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달린 것 같다.

그가 여기에 있는 것은 희생일까.

셋은 그날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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