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20화 (20/307)

# 20

& 피의 씨앗 (1)

습격은 어느 날 밤에 갑자기 이루어졌다.

수련을 위해 몰래 자리를 빠져나온 레드가 예기치 못한 급습을 맞아 몸의 근육을 긴장시켰다.

상대는 무거운 쇠붙이를 이용하는 남자였다.

대담하게도 홀로 레드를 찾아와서 바람 소리 나게 무기를 휘둘렀다.

그는 누구인가?

야만족 남자일까?

상대는 검은 옷을 입었고 얼굴 전체를 가리는 복면을 했다.

건장한 그의 몸이 레드를 향해 다가서며 압박감을 선사했다.

뒤로 물러난 레드가 검으로 무기를 흘려내며 약간 비틀거렸다.

그 모습에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거한이 두세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양손을 휘두른다.

단번에 레드의 목숨을 빼앗을 듯이 흩날리던 예기가 허공에 선을 그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레드의 몸이 아슬아슬하게 앞쪽으로 파고들더니, 번개처럼 움직이는 팔꿈치를 잡았다.

동체 시력과 순발력이 요구되는 움직임이 아닐 수 없었다.

팔꿈치를 따라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자신의 등을 상대의 가슴에 가져다 댄 것은 대담하기 이를 데 없는 행동이었다.

습격자의 몸이 멈칫하는 것도 잠시, 그는 무릎을 굽히며 움직이는 레드의 등을 막으려고 했다.

몸의 중심점을 아래로 내리면 균형이 안정감을 더 되찾는다. 그런데 그전에 레드의 등이 그를 번쩍 들어 올렸다.

우지끈.

썩은 나무 둥치가 부서지며 내려앉았다.

그 위에 쓰러졌던 남자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레드의 검은 거기에 박히지 않았다.

남자를 집어 던졌던 레드는 달빛을 바라보며 복면인에게 말할 뿐이다.

“돌아가시오.”

“….”

그러나 남자는 숨을 고르며 침묵을 지켰다.

한번 낭패를 봤다고 ‘예, 알겠습니다.’ 하고 돌아갈 정도면, 왜 굳이 야밤에 무기 들고 찾아왔겠는가?

그런데 이번에 벌어진 일은 습격자와 레드의 수준 차이를 너무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무기를 휘두르는 공간 안으로 파고들어 아예 메쳐버린다는 건, 제자를 상대하는 스승도 쉽게 하지 못 하는 일이다.

아무리 실력 차가 나도 흉내 내기 힘든 행동이었다.

결국, 남자는 들어 올리던 손을 아래로 내리고야 말았다. 그리고 잘 옮겨지지 않을듯한 무거운 발걸음을 떼어 놓았다.

남자가 비틀거리며 사라져 갈 때, 레드는 그가 머지않아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  *  *

순회라면 순회라고 말할 수 있는 일정을 끝났다.

성에 들어온 세인은 지도를 복사해 다른 영지에 전달하는 한편, 밖으로 튼튼한 목책을 세우는 것에 정성을 기울였다.

지도를 돌린 것은 다른 영지에 대한 우호 표시였다.

아무리 자기 영지라고 해도, 몬스터에 의해 달라지는 근처 지형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그리고 목책에 대해서라면, 일단 주변의 길들과 벌판이 청소 된 상태다.

나중에 누가 다시 거기를 채우더라도 지금이 일을 추진하기 좋은 시기였다.

처음에 영지민이나 다른 지방 사람들은 나무로 만든 벽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사실 이것을 느끼려면 먼 곳에 있는 이들이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왜냐면 성에서 가까울수록 성벽과 병사로 만들어진 벽에 보호받는 실정이니까.

마을의 몇 안 되는 유지들은 이 목책 뒤에 숨겨진 의미를 이해했을까?

‘세금을 내지 않는 인간들도 영주의 보호를 받는다.’

마플은 한센이 바친 차와 커피를 집무실에 틀어박힌 세인에게 날랐다.

한센은 아레이즈의 몫으로 떨어진 와이번 가죽을 전담하게 되었다.

이런 걸 보고 사막에서 보석을 주웠다고 하는 것인가?

그는 면목이 없어 고개를 못 들 지경이었지만, 가슴 속에 번져 오르는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런 그를 향해 세인은 자신의 덕을 뽐내기보다는 이렇게 말해 버렸다.

“이런 척박한 곳에서 이처럼 챙겨주는 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테지. 그러니 마음껏 활용해도 좋아.”

이건 대놓고 네가 중간에서 둘러 처먹으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지은 죄가 있어서 과연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일단 이렇게 말해주었다는 것 자체가 한센에게는 다시 감동이었다.

세인은 와이번 가죽을 판 돈으로 골드 힐의 빚도 갚고, 여러 방면에 활용했다.

와이번 가죽으로 만든 것이라면 기사들이 무엇이든 좋아할 것이지만, 활용도 면에서는 파는 게 나았다.

결국, 조끼 정도의 가죽만을 남겨 두었을 뿐이었다.

“청소로 인하여 우리도 이익을 충분히 봤으니, 돈을 갚을 것까지는 없는데.”

때론 고약한 상인처럼 굴기도 하는 골드 힐에서 이런 요지의 답변이 왔다.

이것은 현재 골드 힐이 아레이즈를 어떻게 대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말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이전과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더불어 디펜더스와도 관계에 큰 진전이 있어 보였다.

가끔 편지가 오가는데, 마플은 그것을 꼼꼼히 챙기며 관리하는 편이었다.

문서를 통해 재판을 진행하고 청원도 받았다. 하지만 글을 모르는 대다수 영지민이 청원다운 청원을 넣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러니 글을 아는 대리자를 통하거나, 대부분 유지들의 청원이 접수되는 편이다.

기사들이 여러 마을의 이야기를 해주고, 간접적으로 주변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가운데 시간은 점점 흘러간다.

자금이 늘어났지만, 성은 을씨년스러운 상태 그대로였다.

하녀들과 마플에게는 두꺼운 옷이 필수였으며, 세인조차 자신의 방 난로에 언제나 불을 지피진 않았다.

점점 날이 추워지는 가운데, 성안에서도 입김이 서로 보일 정도가 되었다.

“언제 눈이 오려나요?”

소파에 앉은 마플이 뜨개질을 하며 그렇게 묻자 세인은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한 달 정도 후면 내리지 않을까?”

그는 소파에 깊숙이 몸을 파묻은 채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의 제목은 ‘과일로 시작하는 나의 자서전’ 이었다.

왼손으로는 책을 받치고, 다른 손으로는 단검을 허공으로 던져 올렸다가 받기를 반복하는데…. 본인은 몰라도 마플이 보기에는 참으로 아슬아슬해 보였다.

거꾸로 손바닥에 박히면 어쩌지?

그래서 참으려 하다가도, 참지 못해 기어코 한마디를 하고야 만다.

“영주님. 한 손으로 하는 저글링은 아주 옳지 못해요. 그것도 단검으로는 특히 나요. 왜냐면 영주님은….”

광대를 운운하기 전에, 세인이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두꺼운 융단을 밟으며, 그 자리를 떠나간다.

홀로 남겨진 마플은 이야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를 중얼거리며 뜨개질을 계속했다.

하얀 외투와 장갑을 챙긴 세인이 성의 외곽 쪽을 돌아다녔다. 연병장에는 잡초들이 무성했는데, 그의 관심에 들진 못한 것 같다.

겨울이 되면 알아서 죽겠지.

살아도 상관없어.

어차피 돌들이 굴러다니는 밖이나, 풀밭이나 현실적이어서 좋은 거지.

크고 넓은 성벽의 그늘이 세인의 몸을 집어삼켰다.

그 밑을 걷다가 잔뜩 쌓여있는 장작더미의 수를 어림잡아 세보던 그는, 갑자기 레드가 떠올랐다.

그는 잘 지내고 있을까?

*  *  *

레드가 사는 마을도 그렇지만 주변의 마을들이 목책에 둘러싸였다.

이것은 전과 달리 그만큼 안전해졌다는 의미였다.

통나무로 간신히 쌓아놓은 벽이 아니라, 제대로 나무의 결을 매만지고 조립한 튼튼한 목책이었다.

위쪽에는 날카로운 가시 같은 것들이 솟아나 있었고, 기름도 적당히 먹인 나무 벽.

그것은 주렁주렁 매달린 모래주머니와 쇠사슬로 말미암아 더욱 튼튼해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침입을 안 받는 것은 아니었다.

“피해!”

거대한 털북숭이가 덮쳐들자 사람들이 분분히 흩어졌지만, 대신 오두막이 우지끈하고 내려앉았다.

나뭇더미 사이에서 몸을 일으킨 늑대인간은 성질이 난 듯 고개를 높이 들고 울부짖었다.

그 소리에 자극을 받았는지, 울창한 숲속에서 늑대인간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냥꾼이나 전사라고 할 수 있는 남자들은 다 외지에 나간 상태이다.

이들은 흔한 파수꾼조차 촘촘하게 세워두질 않았다.

멀리 서 있는 목책이 그들의 방심을 끌어냈기 때문이다.

한 늑대인간의 상반신이 고무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충혈된 눈의 괴물이 붉은 입을 벌리며 울부짖는데, 모골이 송연한 것을 떠나 제 자리에서 한 걸음도 떼기가 힘들었다.

그 와중에 몇 명의 용감한 청년이 화살을 날려보지만, 갑옷처럼 부풀어 오른 승모근은 근육 안쪽으로 촉을 보내주지 않는다.

오히려 화살에 자극을 받은 늑대인간이 양손을 휘두르며 다가왔다.

손톱에 인간 한 명이 갈기갈기 찢겨나가기 직전, 쇳소리가 나며 늑대인간이 비틀거린다.

사람들은 장내에 나타난 의외의 인물에 이런 상황에서도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머리카락을 뒤로 질끈 동여맨 레드는 늑대인간에게 안기듯이 자신의 몸을 밀착시켰다. 그리고 검을 역수로 잡고 뒤로 질러 넣는다.

답답한 신음이 터지며 함께 뜨거운 김을 내뿜는 타액이 그의 어깨에 방울방울 후두둑 떨어졌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왜냐면….

그 보상으로 상대의 목숨을 받았으니까.

늑대인간의 등 중앙으로 솟아오른 검 끝이 찌이익 소리를 내며 아래로 내리그어졌다.

그와 함께 피와 절개된 근육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레드는 뒤로 늑대인간의 시체를 밀었다.

쿵 하고 그것이 쓰러질 때 그의 발은 땅을 박찬 후였다.

하얀 검광이 가로로 불을 뿜었을 때, 소녀의 머리를 잡고 위로 들어 올리던 털북숭이 팔은 바닥에 나뒹굴었다.

안간힘을 쓰며 소녀가 옆으로 굴러 빠져나가자, 잘린 팔이 살아있는 장어처럼 펄떡거린다.

레드는 그 팔이 아니라 주인에게 용무가 있었다.

그의 검이 앞에서 미친 듯이 춤을 추자, 남은 것은 무력하게 밑으로 떨어진 고깃덩어리뿐이었다.

거대한 발톱이 무차별적으로 할퀴고 지나간 듯.

늑대인간은 전사가 상대하기 까다로운 축에 속하는 몬스터는 아니다.

일단 냉정하다고 보기 힘든, 일시적 광폭화 상태가 상대하기 적절한 때이다.

그렇다고 늑대인간의 주저하는 본능이 거세된 상태도 아니었다.

그저, 어정쩡함만이 가득했다.

무기를 능수능란하게 쓸 정도의 차가움도, 몸이 찢기는 것을 감수하며 달려들 정도의 뜨거움도 없었다.

미지근한 욕망 속에는 인간에 대한 식욕만이 있을 뿐이었다.

레드가 있던 자리가 파여나갔다.

부서진 돌 조각이 솟아오른 가운데, 레드의 신형이 오른쪽으로 이동하며 칼을 채찍처럼 후려갈겼다. 그러자 믿을 수 없게도 커다란 늑대인간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게다가 보다시피, 피지컬 적인 면에서도 기사가 상대하기 어려울 정도의 압도적인 면도 없었다.

다만 늑대인간들도 물론 스스로 자신들의 문제점을 인지하고는 있었다. 그래서 지금처럼, 골치 아프게 떼로 덤비는 편이다.

레드가 미친 듯이 날뛰었지만, 일단 습격해온 늑대인간의 수효가 너무 많았다.

마을 하나 전체를 갈아엎고, 동료들을 늘리려고 온 모양이다.

그래도 레드의 분전이 있었기 때문에 중앙이 멈칫거렸고, 그것은 멀리에서나마 전사들이 뛰어올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주었다.

중앙이 겨우 한 명 때문에 막혀서 전진이 안 되니, 주저하는 사이에 응원군이 들이닥친 것이다.

붕붕 소리를 내는 망치가 뒤에서부터 늑대인간들의 어깨와 골을 부숴나갔다.

후면에서 전사들이 밀려 들어오자, 늑대인간들도 어쩔 수 없음을 느꼈는지 오래 버티지 못하고 퇴각하고야 만다. 그리고 올 때 비해 떠나는 늑대인간의 숫자가 절반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기가 질린 얼굴로 레드의 주변을 바라보았다.

잘린 살점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너 전에 나에게 당했던 놈이 맞냐?”

한 남자, 무에타이가 몹시 놀란 표정으로 그렇게 물어오는 것을 무시하고, 레드는 칼을 검집에 밀어 넣었다.

사실 밤에 불청객 때문에 시달리랴, 수면이 부족한데 낮에 이렇게 날뛰다 보니 몹시 피곤했다. 그리고 아마 오늘 밤에도 불청객은 찾아올 것이다.

몸을 돌려 일단 그곳을 떠나는 레드를 아무도 붙잡지 못했다.

이제 와서 뭔가 말을 붙이기에는, 그가 주위에 남겨놓은 풍경이 너무 압도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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