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 협동의 씨앗
광장에서 상의를 탈의한 코다로의 알몸은 아름다웠다.
과연 남자의 몸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조각상이 그대로 현신한 것만 같은 몸은 안타깝게도 피로 물든 상태다.
허공을 매섭게 가르는 채찍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이제는 이런 광경에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광장을 메운 영지민은 공포와 흥분이 가득한 눈빛을 코다로에게 던지고 있었다.
그는 이십 분 전부터 채찍질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 채찍을 맞고 있는 자는 용병단의 일원으로, 지금 까무러친 상태로 매를 견디는 중이었다.
죽은 것이 아닌지 의심이 되기도 한다.
“영주님. 매를 멈춰 주십시오. 솔직히 우리도 많이 참았단 말입니다.”
이러다가 단원을 잃게 될 상황 인지라, 용병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다른 용병단의 대장들은 멀찍이서 구경 중이었고 말이다.
그는 기세 좋게 나서던 것과는 달리, 코다로의 광기에 찬 눈빛을 받자 몸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여기에서 타당한 이유를 대지 못하면 귀족 모욕죄로 자신까지 옭아맬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가 군인들도 아니고 쉴 틈을 줘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집창촌도 멀리 물리고 통행 시간까지 규제하다뇨. 밑의 부하들이 반발하는 건 당연지사입니다.”
“….”
코다로는 일그러진 얼굴로 방금 나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갸름한 턱선을 타고 튄 핏물이 흘러내리자, 섬뜩한 분위기가 연출 되었다.
“쯧.”
생각 같아서는 지금 뒤로 한 발짝 물러난 저놈도 잡아서 같이 족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골드 힐은 모든 게 좋아만 보여도, 사실 언제나 미묘한 균형 위에 쌓아 올려진 평화일 따름이었다.
여기서 저놈까지 족치면 균형이 흔들릴 수도 있음이다.
채찍을 쥔 손을 까닥거리고 있는 그때, 멀리에서 그의 병사가 달려왔다. 그리고 코다로에게 뭔가를 말했다.
그것을 다 들은 코다로는 그가 가져온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뭔데?”
“영지 근처의 통행을 허락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라고 합니다.”
‘아니 전혀 감사할 필요가 없는데. 말장난이로군.’
턱짓으로 물건을 펴보라고 지시하자, 놀라운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용병 대장들은 물론이고, 영지민도 한결같이 숨을 들이켰다.
“내가 집창촌을 가지 말라고 했냐? 좀 돌아서 가란 것뿐이잖아. 그렇다고 술집에서 싸우고 행패를 일으켜? 그리고 주점에 불을 질러? 이 멍청한 위인들아.”
병사가 전달한 물건은 놀라운 것이었다. 하지만 딱히 쓸모는 없기도 하다.
생각해 보라.
와이번 머리를 가지고 뭐에다가 쓸 것인가?
국 끓여 먹을 것도 아닌데 말이다.
와이번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가죽인데 말이다.
머리를 가지고 뭘 할 수 있을까?
‘박제를 만들지.’
코다로가 피식 웃었다.
그의 웃음에 다른 사람들은 그의 기분이 나쁜지, 좋은지 알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머리가 안 되면 눈치라도 있으란 말이다. 예의란 게 어렵지가 않아. 생각해 보면 칼싸움만큼이나 간단해.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는 거야. 반대도 마찬가지지.”
그는 와이번의 머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 머리를 선물한 자를 봐라. 그는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았으며 감수해야 할 것을 감수했고,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내 기분을 맞춰주는군. 이런 걸 받으면 내가 그에게 뭘 해줘야 하겠냐? 내가 근본도 없는 놈도 아니고, 약속까지 지킨 자에게 이런 걸 받으면 뭘 해야겠냐고?”
그는 채찍을 내던졌다.
와이번 머리를 보자 성질이 풀렸다.
어떻게 저것을 잡았느냐보다는, 저것을 박제해서 서재 같은 곳에 걸어 놓을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와이번에 대해 호사가들과 이야기 하자면 날개나 몸은 필요 없었다.
그 큰 것을 걸어 놓을 곳도 없다. 정답은 머리였다.
다른 것을 요구 하기에는 당연히 권리도 없었고 염치도 없었다.
“멍청한 놈들! 정작 내게 잘 보여야 할 놈들이.”
코다로는 머리를 저으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디펜더스의 기사인 윌은 얼떨떨한 심정으로 복귀했다.
그 기분은 성내를 걷고 영주 앞에 설 때까지 계속되었다.
“아레이즈의 영주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디펜더스의 영주가 묻는 그 질문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래서 윌은 한참이나 입을 열었다가 닫아야만 했다.
꺼낼 말을 고르기 위해서.
하지만 그가 받았던 강렬한 느낌과 함께, 객관적이어야만 한다는 의무감이 머리 안에서 뒤죽박죽되어 엉킨 실타래가 되었다.
결국, 요점을 말하는 것은 포기한 그가 일단 가져온 물건부터 풀게 했다.
하인들이 몰려들어 방수천들을 걷어내자 검은 가죽이 드러났다.
이게 뭔가? 하고 바라보던 영주도 집사의 귓속말을 듣고서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걸 그가 주던가요?”
“보시다시피. 와이번 가죽 일부분을 줘서 가져왔습니다.”
침묵이 대전을 무겁게 짓눌렀다. 같이 싸웠으니까 당신네도 권리가 있다고 말하기에는, 가죽이 주는 가치가 대단했다.
“정확히 반으로 나누었습니다.”
윌의 대답에 침음성을 흘리던 영주는 기사들 같은 최측근 앞이라서 그런지 속마음을 쉽게 털어놓았다.
“차라리 아예 믿을 수 없는 자이거나. 거친 자였다면 좋았을 텐데. 왠지 불안해지네요.”
이런 큰 걸 받고도 입을 닦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쨌든, 그는 저희에게 전폭적인 호의를 보였습니다. 저희의 뒤에는 사자 같은 네이블이 버티고 있고, 곁에는 이리 같은 골드 힐이 마주하고 있습니다.”
윌은 자신을 바라보는 영주의 시선 앞에서 당당하게 말했다.
“적어도 그는 늑대는 아닙니다. 늑대의 접근 방식은 이런 게 아니니까요.”
디펜더스의 영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현재의 그들로서는 나중에 어떤 대가를 치르든 거부할 수 없는 선물임이 확실했다.
* * *
전쟁도 그렇지만 뭐든 사후 처리가 중요한 법이다.
상과 벌, 선물과 인정은 어쩌면 무엇보다도 무거운 것일는지도 몰랐다.
재칼이라 불리는 사내가 생각하기로, 아레이즈의 영주는 그것을 소홀히 할 것 같지 않았다.
다른 용병들은 혹시라도 영주가 시치미를 뗄까 걱정하고 있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자네는 정말 태평하군. 여기에서 자네가 가장 애 닳아야 하지 않나?”
“….”
상처투성이인 각진 얼굴.
짧은 머리에 멀리서도 타인과 구분되는 탄탄한 체격.
검은 피부를 가진 그는 말없이 자신의 천막 안에서 검을 닦고 있었다.
시간은 새벽이었고 밖에는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는 남들보다 더 큰 공을 세웠고, 그에게 돌아갈 다이아몬드는 대단한 물건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조바심이 나지 않았다.
‘지금껏 용병으로 굴러먹으면서 숱한 사람들을 만났지.’
검의 광택을 바라보는데, 오늘처럼 검빛이 눈에 들어오지 않기는 처음이었다.
사실 근래에 그의 머릿속은 세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레이즈의 영주에게서는 굉장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그런 분위기는 굉장히 드물고 위험한 것이다.
사실 따지자면 다이아몬드보다 몇백 배, 몇천 배는 더 위험해 보이는 가치였다.
문제는 과연 재칼이 그런 자에게 다가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
사실 불가능에 가까웠다.
용병 신분으로 영주에게 신임받을 수 있는 자리에 오를 수 있을까?
기사가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라면, 벌써 진작에 해치웠을 것이다. 하지만 포기하기도 어려운 게, 재칼은 불가능을 꿈꾸는 전형적인 남자 중 하나였다.
도저히 안 된다는 생각이 들면, 오히려 더 이루고 싶어 하는 남자 말이다.
그 야망을 이룰 수 있다면 무엇이든 올라타 편승할 텐데.
그때 흠칫하며 재칼이 검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검집을 들어, 입구의 천을 들춰본다.
어느새 잘고 더 빽빽하게 내리는 호우 사이로 희뿌연 물체가 보였다.
아침 녘의 회색빛 속에서 아른거리는 것이 재칼의 눈을 가늘게 했다. 그리고 종국에는 크게 떠지게 만든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
외투도 걸치지 않았고, 상반신은 붕대로 칭칭 감긴 채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사실 비가 어깨와 등을 두드리는 것도 신경 쓰지 못했다.
재칼이 다가가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검은 머리카락의 소년은 맨발로 쌓아놓은 검은 자갈 위를 걷고 있었다.
소년은 알몸이었고 검은 표범 외투만을 걸친 상태였기 때문에, 가냘픈 종아리가 다 드러나 보였다.
날씬하다면 날씬하다고 할 수 있고….
그걸 넘어서서 성인남성에 비교하면 왜소해 보여야 할 텐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행동 하나하나가 무겁고 무섭다.
적어도 재칼이 뒤에서 바라보기에는 그랬다.
소년은 고개를 들어, 얼굴로 비를 맞았다.
그의 콧잔등과 입술, 턱선을 타고 빗물이 흘러내린다.
아침을 가득 채운 비를 얼마나 음미했을까?
소년은 다시 걸었다.
울퉁불퉁한 자갈 위를 걸으면서도 비틀거리지 않았다.
재칼은 조용히 다가가 소년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가 멈추는 곳, 근처에서 자신도 멈춰섰다.
재칼의 아버지는 자유 기사였다.
그의 아버지는 자주 왕을 말한 적이 있었다.
훗날 아버지의 술주정에 도망간 어머니는 그때마다 콧방귀를 뀌었지만, 재칼은 그때만큼 빛나던 아버지의 두 눈을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왕을 말할 때는 표정과 목소리가 달랐다.
평소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어린 마음에 그게 너무나 의아했고, ‘무엇이 저 야수 같은 아버지를 저렇게 만드는 걸까?’ 라며 그 당시의 재칼은 의아해하곤 했다.
그리고 훗날. 재칼이 야수로 완성되고 나서도 가끔 그런 의문이 남으며, 그의 가슴 아래로 내려가지 않곤 했다.
체증처럼.
“누구의 무덤입니까?”
재칼은 무심코 튀어나온 자신의 음성에, 오히려 스스로 놀라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의 앞에 서 있는 소년, 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어투로 대답해 주었다.
그는 자갈들로 덮어놓은 무덤 중 유독 구석진 돌무더기 앞에 서 있었다.
“파웰”
“파웰.”
되뇌는 자칼의 앞에서 세인이 말했다.
“그의 부모는 상인들에게 더럽혀지고, 살해당했어. 나는 그런 그의 상처를 복수로 식혀주려고 한 게 아니라, 영지의 미래를 위해서 덮어두려고 했다.”
“….”
재칼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들었다.
“그런데 어찌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그의 복수를 해버린 셈이 되었어. 그래서 이 소년은, 나와 영지를 위해서 방패와 검을 들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거지.”
세인과 재칼은 파웰의 묘 앞에서 비를 맞으며 침묵을 공유했다.
그러다가 뭐라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 재칼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칼밥을 먹으며 굴러먹은 용병의 위로라는 게, 그렇게 마음에 와닿을 내용일 리가 만무하다.
“허무하군요.”
고작 이거였다.
세인은 눈을 들어 자갈들이 쌓인 지대 너머를 바라보았다.
검은 잎을 가진 측백나무들이 가득히 보였다.
그들은 버섯의 군집처럼 흉하고 더럽게 얽혀서, 좌우로 파헤쳐진 뿌리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런데 이 빗속이라면 그런 모습조차 그리 혐오스럽게는 안 보인다.
“허무? 그런 건 인간의 일생이 하나의 이야기일 때나 그렇게 표현하는 거야. 이럴 때엔 어떤 말도 여기에 어울리지 못해.”
이익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소수를 배제하는 걸까? 그렇다면 그 이익은 누가 가져가는 걸까?
다수라면 왜 그 다수에 희생당한 소수는 포함되지 않는 걸까?
정의란 건 무엇일까?
법의 얼굴인가?
하지만 많은 이들이 법의 자애로운 미소보다는, 소름 끼치는 법의 손길을 원한다.
그것은 바로 복수였다.
앞으로도 원하건 원치 않건 세인은 법을 휘둘러야만 했다.
그것이 전처럼 공개적으로 열리지 않는다 해도, 상당 부분 남에게 위임해서 진행한다 해도, 최종적인 책임은 그에게 있었다.
그는 책임지는 자리에 앉아 법과 폭력을 쥐고 휘두른다. 그러면서 누구에게나 말하곤 한다.
이게 정당한 나의 권리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는 사실 아무것도 책임질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남들이 그걸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년의 무덤 앞에서 이렇게 서있으면 무력감과 자괴감이 뼈저리게 느껴진다.
자신이 얼마나 작은 남자인지 알 수 있지만, 결코 그걸 내색해서는 안 되었다.
죽은 소년조차 그걸 원하지 않을 것이다.
세인은 외투 주머니에서 다이아몬드를 빼내 재칼에게 던졌다.
“수고했다, 용병.”
재칼은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래도 전의 행크보다는 자연스러운 손놀림이었다.
“저는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걸 주실 줄 알았습니다.”
이런 건 가급적이면 뽐내면서 주어야 하는 것이었다.
남들 앞에서 널리 알려야 할 사실이니까 말이다.
아랫사람들 앞에서도 약속을 잘 지킨다는 것을 부각하려면, 대중 앞에서 하사해야 하는 것이다.
재칼은 정말 의외여서가 아니라, 어떻게든 세인과 말을 더 섞고 싶어서 이런 말을 꺼냈다.
하지만 세인의 음성은 쌀쌀맞았다.
그의 시선은 계속 파웰의 무덤 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야.”
“….”
소년아
너는 비극 속에 죽었지만
결국, 아무도 너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한낱 기억만으로, 인간 전체의 가치가 재단되거나 정의되지 않는다.
그것이 조금이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