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16화 (16/307)

# 16

& 기치 (5)

밑에서 벌어지는 전투도 험악했지만, 사실 세인이 있는 이쪽이 진짜나 다름없었다. 알에서 태어난 와이번은 당장 날지 못한 데다가 불이라는 복병을 당했다. 하지만 지금 산을 오르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몬스터와 마주칠 확률 속에서 싸워야만 한다. 그리고 적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찾아내야만 했다.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행크와 맥은, 영주와 더이스를 떼놓고 가면서도 그들이 돌발 행동을 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여기에서 돌발행동이란 세인이 와이번 굴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극대화된 위험 속에서 영주가 앞장서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다.

하지만 흩어진 사람들 가운데, 와이번 굴로 의심되는 곳을 찾아낸 것은 더이스와 세인이었다.

산에 오른 수색대는 몰랐지만, 하늘에서 관찰하자면 세인은 직선에 가까운 거리로 금방 와이번이 머무는 곳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이게 운이라면 정말 지독한 운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불러 모으겠습니다.”

“아직은 큰 구멍일 뿐 확실하다는 보장도 없잖아. 그만둬.”

“예?”

더이스의 말에 대꾸하지 않은 세인이 따라온 병사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했다. 그러고 보니 영주를 호위하고 있는 병사들은 등에 잔뜩 무언가를 메고 있는 상태였다.

“영주님. 설마 저곳에 뛰어들려고 하시는 겁니까? 그건 무모한 행동입니다. 그리고 뛰어들어도 제가 뛰어들어야죠.”

더이스는 세인의 지시에서 뭔가를 알아차린 듯 그를 말렸다.

그런 더이스를 바라보는 세인의 입이 벌어졌다가 닫히기를 반복한다.

‘그러니까 강한 기사였다면 좋았잖아? 네가 강한 기사였다면 굳이 내가 이런 일을 할 필요가 없었잖아.’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기어올랐다가 다시 사라졌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그를 옭아매는 듯한 점을 젖혀놓고서라도, 더이스나 다른 기사들이 강했다면 이런 짓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굴로 내려보내면 죽을 걸 뻔히 아는데, 내려가라고 할 수는 없지.’

사람들의 발밑에 시커먼 아가리를 벌린 동굴은 얼핏 봐도 위험해 보였다.

저 안에 있을 와이번은 잠든 걸까? 아니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여기가 맞다 치면 언제 위로 날아오를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더 큰 재앙이야. 이렇게 실랑이할 시간이 없다.”

“영주님. 이 모든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네 상식은 내게 필요 없어.’

레드가 있었다면 밑으로 내려보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세인 옆에서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고생했다.

레드가 원한 것은 자유 기사라는, 자유도 아니었고,

그저 영지 근처에, 그것도 크게 보면 세인을 위한 길 위에 머무르기를 청한 것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렇게 마음에 드는 놈은 끝까지 마음에 드는데….

“더이스 경. 어느 날 길 위에서 눈트롤을 만났다 치자. 당신 혼자 해치울 수 있겠나?”

“해치울 수 있는 인간도 없겠지만, 만날 일이 애초에 없지 않습니까? 이번 일과는 상관없는 예이십니다.”

‘네가 약해서 내가 가는 거야’라는 말은 굉장한 모욕이 될 수 있었다.

말의 내용이 사실이라고 해도 말이다.

결국, 세인은 아무 말 없이 혼자 밧줄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시커먼 어둠이 세인의 허리 아래로 물드는 것을 보며, 더이스는 발을 동동 굴렀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여기서 같이 내려가는 것 또한 무책임한 행동이 될 수 있었다.

위도 지켜야 하니까.

“명령을 어기고, 사람들을 불러야 하나?”

병사들과 함께 남겨진 더이스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  *  *

‘여기가 맞군.’

지금까지는 육감이었다면 내려가자마자 더욱 강렬한 느낌이 왔다.

와이번이 있는 곳은 바로 여기 컴컴한 동굴 안이었다.

세인은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귀를 기울였다.

멀리에서 가파른 숨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그를 약간 흥분시켰다. 그리고 공포보다는 숙명적인 떨림 비슷한 것이 몰려와 그의 혈관을 가득히, 그리고 뜨겁게 달구었다.

이 기분.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세인은 그 자리에 앉아서 기다렸다. 그리고 생각해 보았다.

그 생각이란 것은 왜 와이번이 날아오르지 않았을까? 보다는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반응에 집중되어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세인의 곁으로 짐 뭉치들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다지 무겁지 않은 그것들은 세인의 옆에서 퉁퉁 굴러다녔다.

그때 위쪽에 있던 더이스는 일단 병사들을 남겨놓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다른 기사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서이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본인 스스로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병사들은 세인이 시킨 대로 짐을 던져놓고 있었는데, 그 짐은 바로 한센이 천막 안에서 세인에게 보여줬던 물건들이었다.

그것은 당연히 세인의 수중으로 들어갔었고, 여기까지 가져오게 한 것이다.

‘상대는 마법생물이 틀림없는데, 지금 이 감정은 두려움뿐만이 아니군.’

마법 생물과 보통 몬스터의 차이라면 대표적으로 보상을 말할 수 있다.

그냥 몬스터들은 죽여봐야 하등 쓸모가 없었다.

죽이고 난 후 얻을 수 있는 고기를 못 먹는 것은 아니었지만, 존재 자체가 너무 역겨웠다.

피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인간 스스로 이룬 문명이 있는데, 몬스터의 사체를 빌려야 할 정도로 자존심이 없진 않았다.

그에 비해 마법 생물들은 일단 죽이고 나면 보상이 매우 유혹적이다.

가죽도 그렇고 눈이나 뼈도 그 자체로서 좋은 물건이 된다.

때로는 부르는 게 값인 마법 생물도 있었다.

문제는 보통 몬스터보다 마법 생물들은 발견도 어렵고, 무지하게 강하기 때문에 잡기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세인은 벽에 손을 짚었다.

돌벽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바닥에는 열기에 녹아내린 듯 이끼들이 죽처럼 끈적거린다. 그리고 뭉개졌다.

앞으로, 다시 앞으로.

그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점점 귓가에 거친 숨소리가 강하게 잡혔다.

그 불규칙은 가슴 속에 뛰는 맥동조차 흔드는 듯, 고무줄처럼 잡고 위아래로 뛰놀았다.

세인 본인은 몰랐겠지만, 어둠 속에서 그의 눈동자가 일순간 어떤 색으로 물들었다.

그의 운명과 관련이 있는 물건을 만나니, 일시적으로 달아오른 것이다. 하지만 그 붉은 빛은 이내 김이 식은 듯 팍하고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어둠 속에서 빛났던 두 눈동자는 다시 어둠에 먹혔다.

그는 이런 현상을 모른 채 앞으로 다가가며 와이번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다.

긴 목과 악마같이 일그러진 얼굴.

뿔이 돋아난 산양 같은 머리.

우람한 가슴과 양쪽으로 뻗어난 앞발.

그리고 날개.

스륵, 스르륵….

그때 동굴의 위와 옆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끈적끈적한 표면이지만 단단한 뭔가가 말이다.

세인은 그것을 와이번의 날개라고 짐작했다.

스르릉.

허리를 꼿꼿이 세운 그가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을 때였다.

그것을 효시로 받아들인 저편에서 맹렬한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어둡고 조용하던 공간에서 강력한 힘이 이동하자, 세인은 반사적인 움직임으로 그걸 쳐냈다.

불똥이 튀는 순간, 악마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 괴물의 모습이 보였다.

찰나의 순간, 전광이 가로지르며 여러 개의 눈알.

그 밑으로 주름 잡힌 살들과 웃고 있는 입가까지…!

그 모든 것이 세인의 눈에 담겼다.

순간 소름이 끼치며 무서웠고, 그런 상대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욕망이 피어올랐다.

인간이 아닌 이형의 짐승이 어둠 속에서 자신을 노리며 웃고 있었다.

그것 자체로 옴짝달싹할 수 없는 공포였을 텐데도, 세인의 가슴 한편에서 주인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분노가 피어올랐다.

그 분노는 하찮은 것 따위가? 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파팟! 파팟!

번쩍이며 발톱을 튕겨낼 때마다 세인의 몸이 회초리에 맞은 듯 좌우로 흔들렸다.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지만, 그는 결과적으로 앞으로 전진 중이었다. 검을 바싹 곤두세운 채 말이다.

그러다가 그의 모습이 동굴을 밝히는 불빛 속에서도 희미해졌다.

뒤편으로 다가온 피막들이 세인을 감싼 것이다.

으스러뜨려 죽이려는 듯이 날개들이 다가오는 순간.

그는 숨을 멈추고, 충격을 가슴과 배로 받아냈다.

놀랍게도 내장이 터지거나 입으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정말 여기에서의 괴물은 와이번인가? 아니면 스스로 굴로 뛰어든 미친 영주인가? 가 의심스러운 대목이었다.

꽉 쥐고 있는 날개들 속에서 그의 검이 불길을 당기며 위로 솟구쳐 올랐다.

그 마찰은 찰나였지만 어둠을 꿰뚫었고, 날개들을 찢어발겼다.

그때 처음으로 가쁜 숨소리만 내던 괴물에게서 반응이 있었다.

“끄아아아아아아!”

그리고 유황 냄새가 났을 때, 세인은 옆으로 몸을 날리며 기지 있게 입김을 피했다.

약이 바싹 오른 와이번의 입김은 동굴 속에서 일직선의 불길이 되었다.

그 불길이 한센이 가져왔던 마른 꽃잎들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제2막이 시작된다.

동굴 안이 무럭무럭 피어나는 연기로 가득 찬다. 그리고 와이번의 움직임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사실 지금 세인의 상태를 보자면 이런 도움이 필요 없었겠지만, 그걸 들어오기 전의 세인은 미처 알지 못했다.

매캐한 연기 속에서 입을 천으로 가린 세인이 달려나갔다. 그리고 땅이 뒤집히며 와이번의 발이 솟아올랐다.

그것은 세인의 가슴을 움켜쥐고 천정으로 솟구치더니, 쿵! 하는 소리를 내었다.

세인의 몸을 움켜쥔 와이번의 발은 바닥으로 추락했다.

땅에 닿았을 때 그 발은 피를 뿌리며 잘렸다.

세인의 검은 이 한차례의 일격을 먹이며 엉망이 되었다.

와이번의 돌덩어리 같은 가죽에 날이 다 상한 것이다.

세인이 점프를 하자, 발밑에서 뭔가가 휙 하고 지나갔다.

어둠 속에서 인식의 장애가 일어나며 괴물과 인간을 잡고 뒤흔들었다. 그러나 그런 것 치고는 둘은 치고받으며 잘도 싸웠다.

일단 와이번 입장에서는 황당했을 것이다. 충분히 즉사할 만한 힘으로 때렸다고 생각했는데도 상대는 끄떡도 하질 않았다.

오히려 검을 휘두르는 그 힘에 결국, 와이번의 몸이 찢어졌다.

날이 다 나간 검 짓에 말이다.

나중에 가서야 괴물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동굴의 벽을 등졌다. 그리고 좌우로 옮겨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분명히 늦은 감이 있었다.

마지막일까?

번개 같은 폭력이 와이번의 가슴을 훑고 지나갔을 때, 이 괴물은 탄성처럼 신음을 지르며 상반신을 앞으로 기울였다.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와이번의 머리가 천천히 앞으로 움직여 세인의 이마에 닿았다.

어쩌려는 건가?

세인은 와이번이 뭘 하는지 기다려 보았다.

그때 와이번의 두 눈이 처음으로 번쩍 떠졌다.

아름다운 보석처럼 와이번의 눈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놈은 마지막으로 세인의 모습을 자신의 뇌에 각인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으니.

세인의 얼굴은 와이번의 머리와 가까이 맞닿아 있었다. 그래서 양쪽으로 벌어진 두 눈 사이에 세인의 얼굴이 있다.

결국, 와이번은 자신의 사각 안에 들어있는 세인의 모습을 담지 못했다.

게다가 동굴 안은 연기로 흔들리고 있었고, 애초부터 너무 어두운 곳이었다.

세인은 와이번의 마지막 몸짓을 착각했다.

그를 조롱하려는 의도로 해석한 것이다.

“마지막까지 오만을 부리는구나. 날아오르지 않았던 미련한 동물아.”

그 말이 끝이었다.

이윽고 무서운 힘이 와이번의 목을 찢어냈다.

*  *  *

“눈 하나의 소식이 끊겼습니다.”

“어디서?”

“여기에서 가깝습니다. 눈의 허리띠 너머입니다.”

그러자 보고를 듣고 있던 존재가 콧방귀를 뀌었다.

이렇게 가까우니….

설마 자신들이 찾던 존재가 ‘눈’을 해치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다.

원래 램프 밑이 심리적인 사각이다.

그들은 그들이 찾는 것이 아주아주 멀리 있을 거로 생각했다.

“또 관리 허술이군. 지근거리에서 이렇게 문제를 일으키니.”

“살해당한 것이 확실합니다.”

“그 전에 계속 날 수 있게 만든 건 확실하고? 장담할 수 있나? 저번 불량품들처럼 만들지 않았다고 말이야?”

“….”

“제발 제대로 좀 만들어. 너희들 눈에는 이게 장난 같나? 세상을 놓고 벌이는 행동이 장난 같아 보여?”

“죄송합니다.”

“그래, 마지막에 뭘 봤는데? 와이번이 뭘 봤어?”

“그냥 아무것도….”

“그런데도 살해당했다고 내게 와서 말해? 그럼 이대로 주인님께 내가 보고라도 했어봐. 결국 나만 죽어나는 거 아냐? 너희들의 무능 때문에.”

“….”

몬스터들은 눈의 허리띠 지역에 모여 있었다. 그리고 벼르는 중이었다.

눈앞의 대륙을 지옥으로 만들겠다고 말이다.

다만 모든 일에는 순서란 게 있는 법이니까, 다음 단계를 밟아나가기 위해 노력 중이다.

매일 매일 무기를 만들었고 병력을 더 모았으며, 라이트닝 블러드를 찾았다.

‘눈’을 만들어 대륙 각지에 뿌린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 찾는 대상이 너무나도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정작 세인 본인도 자신이 라이트닝 블러드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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