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 기치 (4)
대장간 소년은 장검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더이스의 뒤를 따랐다.
그가 바라보는 더이스의 등은 축축이 젖어 있었다.
‘이상한데?’
처음에 마을 풍경은 그냥 메스킬을 당한 마을, 그 자체였다.
더 의심할 여지도 없어 보였다.
뿌리째 뽑힌 나무.
상반이 잘려 누워있는 다리.
보도블록을 적시는 피.
무너진 담벼락에 포개어진 시체.
“이봐.”
“예.”
“내 상식으로는 말이야.”
소년은 더이스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놓치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건 벌레들의 짓이야. 그러니까 마을의 뒤쪽에 가면 소용돌이 모양으로 땅이 파헤쳐져 있고…. 중앙에는 크고 검은 바위 같은 게 있을 거야.”
“그 앞에 가면 위험하잖아요?”
말을 뱉고 나니, 긴장감 때문에 너무 얼빠진 소리를 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얼굴이 시뻘게진 소년은 무안함으로 가득했다.
애초에 정찰이란 게 당연히 위험하지 멍청이야.
피식 웃은 더이스가 계속 설명했다.
그러면서 피로 끈적해진 바닥 위를 걸었다.
“포만감 때문에, 놈들은 땅속에서 잠자고 있을 거야. 우리가 보게 되는 건 수문장 같은 놈이고…. 그놈도 강한 외부 자극이 있지 않으면 좀처럼 움직이지 않아. 문제는 말이야….”
바로 앞쪽에 엎어진 금발 머리 시체를 보곤, 더이스의 눈가가 찡그려졌다.
박살 난 아이 시체 쪽으로 손을 뻗은 그 모습이, 기사의 가슴을 저몄다.
“다른 놈이 있을 때야. 그럴 때는 우리 모두 가능한 신속하고 은밀하게 도망치는 거야. 알겠어? 도중에 누구 한쪽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도망치는 거야. 내가 위험에 처해도 뒤돌아보지 말라고. 그리고 가서 알려. 검은 바위 같은 것이 아니라, 다른 게 있다고 말이야.”
아주 중요한 일이니까, 더이스는 몇 번이나 당부했고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반대로 내가 너를 버리고 가도 나를 원망하지 마라. 우리가 두 명인 것에는 이런 이유가 있는 거라고. 하나라도 살아서 밖에 알려야지.”
“알겠어요.”
둘은 점점 안쪽 깊숙이 다가갔다. 그리고 그럴수록 근처는 황폐한 풍경으로 바뀌었다.
일가족이 순식간에 몰살당한 듯 늪처럼 돼서 딱딱하게 굳어진 곳도 있었다.
그 처참함의 연속에서 어느덧 소년은 핏발 선 눈을 감지 않게 되었다.
이러니 인간은 몬스터에게 한없는 증오를 던질 수밖에 없다.
애초에 몬스터가 먼저 시작한 악연이다.
그렇게 시간이 걸려, 그들은 드디어 소용돌이치는 땅에 도착했다.
이상한 표현이겠지만, 소년은 조금이나마 안도했다.
더이스의 말과 다른 것은 없었다.
소용돌이치는 땅 위 중앙에, 검고 큰 바위 같은 게 박혀 있었다.
‘예상 범주 안이야.’
안도의 숨을 쉬며 더이스를 바라보는 소년이었다.
하지만 곧 소년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더이스의 표정은 엄청나게 안 좋았다.
게다가 얼굴과 목덜미에서 식은땀을 비 오듯이 흘리고 있었다.
* * *
사람들 사이에 있는 세인과 기사들은 낯빛이 창백하게 되어 돌아온 더이스와 대장간 소년을 보았다.
소년은 세인을 보며 누군지 몰라 하다가, 더이스의 말투에서 그제야 누군지 깨닫고는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내내 고개를 들지 못했다.
“무슨 일이야, 더이스?”
행크가 묻자, 더이스가 굳은 안색을 풀지 않으며 말했다.
“메스킬이 아닙니다.”
“메스킬이 아니라고?”
“소용돌이 중앙에 검은 바위 같은 게 있는데 너무 큽니다. 그리고 비늘로 뒤덮여 있어요.”
좌중이 침묵하는 가운데, 더이스는 검은 바위에 대해서 묘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끝맺음을 이렇게 한다.
“제 생각에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와이번의 알 같아요.”
“으음….”
사람들이 신음성을 토해내는 가운데 소년의 등도 움찔했다.
와이번이라고? 그게 여기에서 왜 나와?
맥은 자신도 모르게 세인을 바라보았다. 세인은 뭘 생각하는지, 침묵을 유지하며 요지부동이었다.
“정말이냐고 묻고 싶지만, 자네가 그런 걸 잘못 볼 리가 없겠지. 그럼 땅속에는 아무것도 없게 되는군. 영주님, 이걸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행크가 묻자 세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가 해야 할 건 정해져 있어. 다만 그걸 모두 하기 싫을 뿐이지. 그럼 저 마을은 알을 피로 적시기 위한 작은 둥지에 불과한 거로군. 문제는 알뿐만이 아냐. 알에서 태어난 놈은 날 수가 없어. 하지만 알을 낳은 놈이라면 다르겠지. 그놈은 알 주위를 떠나지 않을 테고 말이야.”
와이번의 알을 부화시키기 가장 좋은 촉매는 바로, 인간의 피였다. 그래서 마을은 몰살당한 것이다.
어미 와이번에 의해.
그제야 사람들은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멀리 사방을 둘러싼 산이 보이는 이곳은 분지였다.
크게는 지금 그들이 밟은 땅 자체가 어미 와이번의 두 번째 둥지이자 사냥터였다.
“어디선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들어오는 건 반갑게 맞이하겠지만, 떠나려 한다면 글쎄….”
그다음에 세인이 한 행동은 디펜더스로 편지를 쓴 것이었다.
발이 빠른 자 몇을 골라, 은밀히 여기를 빠져나가도록 지시했다.
다수라면 모를까, 한두 명이 은밀하게 움직이는 것까지 와이번이 잡아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세 영지 주변을 세인과 사람들이 청소하지 않았다면 디펜더스 측에서 어떻게 나왔을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곧이어 디펜더스의 기사들이 도착했다.
“윌입니다.”
갈색 머리의 잘생긴 기사가 말에서 내려 머리를 숙이자. 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윌에게 이것저것 캐묻지 않았다. 이렇게 병력을 파견해 준 것만 해도 디펜더스의 의사를 알 수 있었다.
세인은 윌이라는 기사와 말을 섞기보다는, 수레를 쌓아놓은 곳에 발을 디디고 섰다.
그는 출진 후 처음으로 높은 곳에 선 것이다. 그리고 세인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을 향해 진실을 이야기했다.
사실 용병들은 영주가 디펜더스 성의 병력을 불러, 자신들의 뒤통수를 치는 것이 아닌가 조금 의심 중이었다. 하지만 곧 그런 의심은 비에 씻긴 듯이 사라졌다.
“마을 안에 와이번의 알이 있다. 곧 알을 깨고 밖으로 나올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서 세인은 사람들이 충분히 충격에서 헤어나올 수 있게 도와주었다. 웅성거리는 것을 막지 않고 가라앉을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는 말이다.
“그놈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저 산들 어디선가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어미 와이번이다.”
그제야 사람들은 이 추운 날에 왜 불씨를 사용 못 하게 했는지 이해했다.
세인의 주위만 밝힌 상황에서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우리가 그냥 떠나 버리면, 놈들은 어디로 떠오를지 아무도 모른다. 아레이즈가 될 수도 있고, 다른 영지들이 될 수도 있겠지”
그 대목에서 윌과 다른 기사들이 검집을 움켜쥐며 소리를 냈다.
“더 멀리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거야. 내 입장에서는 이것을 수수방관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녀석들은 마법 생물이다. 그냥 몬스터가 아니라는 소리지. 그러니 너희들을 강제하진 않겠다. 가죽에 너희들의 수고가 고스란히 기록되었으니, 떠날 이들은 떠나라. 와이번의 감시가 있을 테니. 마을의 소란을 틈타서 말이다.”
어두운 밤.
달빛을 받는 사람들의 머리들이 웅성웅성했다.
그것을 바라보던 세인은 손을 내민 행크를 의지하지 않고 그냥 내려왔다. 그리고 자신의 천막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때 기사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공격은 내일 아침 무렵이라고 공지했다.
물론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던 대장간 소년도 충격을 받았다. 그때였다, 어떤 소년이 다가와 그의 팔을 툭 친 것은.
“뭘 그리 멍하니 서 있어?”
“어. 파웰이구나.”
대장간 소년은 너덜너덜해진 방패를 등에 메고 있는 소년에게 대답했다.
비슷한 나이 또래인 둘은 행동을 함께하면서 곧 친해졌다.
“길게 생각할 거 없어. 어차피 우리들 입장에서는 싸워야만 해. 와이번들이 영지 주변에 둥지를 튼다고 생각해봐. 매일 매일 가지에 핀 감 빼먹듯이 사람들을 채 갈걸. 우리는 싸워야 해.”
대장간 소년은 하늘에서 날아오는 와이번을 상상하며 몸을 흠칫 떨었다.
이야기로는 황소도 채갈 만큼 힘이 대단하다는데….
그건 확인할 수 없지만, 재앙이 확실했다.
그런 것들이 주변에 있으면 누가 외출할 수 있겠는가? 영지가 망하는 것도 시간문제다.
“그래도 그렇지…. 빌어먹을 와이번이라니.”
대체 왜 그게 여기서 나오는 건데?
앓듯이 중얼거리는 대장간 소년을 향해, 파웰이 등을 탁하고 쳐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 * *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아레이즈의 깃발이 내려갔다.
쓸 일이 없을 거로 생각했던 가이더의 깃발을 단 창대가 높이 세워져 흔들렸다.
“영지나 용병, 민간인이라는 차원이 아닌. 우린 우리의 나라 안에서, 인간이라는 복수(複數) 집단으로 싸운다. 가이더의 왕들이여, 우리를 축복해 주소서.”
생각보다 용병들이 많이 떠나가지는 않았다.
그들도 생각해보면 북부에 거점을 둔 인간들이었다.
“여기에서 떠나 버리면, 결과야 어떻든 우리들은 두고두고 와이번에 당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억하겠지. 그 자리에서 비겁하게 도망쳤기에…. 지금의 아이들, 청년, 처녀들이 낚아챔을 당하고 있는 거라고. 의리를 떠나 그런 지랄 같은 기분을 나중에 당하기 싫어서 나는 지금 싸우는 거야.”
한 용병 대장의 말에 많은 용병이 공감했다.
어차피 검에 건 인생이었다.
아침에 그동안 비축했던 식량 대부분이 풀렸다.
가마솥 안에 온갖 고기들과 채소를 넣고 푹 끓인다. 그리고 술을 돌렸다.
“가자!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 인간답게 죽으련다!”
그렇게 외치며 머리 위에 술잔을 거꾸로 하는 남자도 있었다.
수육을 질겅질겅 씹는 가운데 드디어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몇 줄은 마을 쪽으로, 그리고 대부분 병력이 뒷산으로 향했다.
마을 쪽으로 향한 사람들은 주저하지 않고 집에 불을 질렀다.
횃불을 던지고 천을 펄럭거리며 바람을 제공하니, 안 그래도 나무 곳곳에 등잔 기름을 뿌렸는데 더 활활 타오른다.
붉은 혓바닥들이 거꾸로 곤두선 가운데, 그대로 불에 타죽고 싶지 않다는 본능이 발휘되었음인가.
알이 쩌적 소리를 내며 급속 부화했다. 그리고 몸을 둥글게 말고 있던 파충류가 비명을 내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곧이어, 사지로 바닥을 지탱하고 선 녀석이 고개를 치켜들고 이리저리 돌린다.
녀석의 눈은 붉은색이었는데, 그 안에서 잔혹해 보이는 세로줄이 좌우로 움직였다.
말을 탄 기수들이 마을 주위를 빙빙 돌았다. 그러다가 폭염이 일며, 돌조각들이 흩날린다.
우지끈하며 불타던 나무가 옆으로 쓰러지고, 연기를 머금은 괴물이 그리폰처럼 뛰쳐나왔다.
물론 아직은 날 수가 없지만, 몸집이 어마어마했다.
불타는 괴물이 그대로 말과 충돌하자, 말의 허리가 기형적으로 꺾였다.
당연히 그 위에 타고 있던 기수도 성치 못했다.
땅에 머리를 처박은 후 몇 번이나 뒤로 굴렀기 때문이다.
그때 다른 기수들이 목청 터지라 소리쳤다.
“여기다! 여기야!”
“여기에 나타났다!”
그리고 불타는 괴물을 향해 돌진했다.
부리를 가진 괴물은 그것을 앞으로 찌르고, 말을 타고 달려든 기사들을 두 발로 낚아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앞에서 보란 듯이 가지고 놀았다.
우드득! 우드득!
“아악! 아아악!”
피 섞인 살점이 비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병사들은 얼굴에 잔뜩 묻은 그것을 닦아낼 생각도 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이글거리는 화염에 약해졌다지만, 와이번 비늘에서 불똥이 튀며 무기를 튕겨낸다. 그다음은 악전고투였다.
“잡아라!”
멀리에서 달려온 윌이 옆에서 뭔가를 던졌다.
그것을 능숙한 솜씨로 다른 기사가 잡아챘다.
말들 사이로 가로 선을 이은 그것은 바로 쇠사슬이었다.
다른 기사들도 윌의 행동을 따라 했다. 그리고 모락모락 연기를 내뿜는 괴물의 좌우로 말이 달렸다.
철컹! 쾅!
철컹!
몇 번 좌우로 흔들리던 괴물은 말들의 힘에 이기지 못하고 결국, 뒤로 나자빠졌다.
구부린 뒷다리에 채인 땅이 높게 흙을 뱉어냈다.
물론, 디펜더스의 기사단도 성치만은 않았다.
와이번이 버티던 힘에 그대로 낙마해 땅을 구르는 기사도 보였다.
말에서 내린 그는 쇠사슬의 한쪽을 붙잡고 옆으로 달렸다. 그때 와이번이 포효하며 상반신을 폭발하듯이 일으켰다.
그 반동 때문에 윌의 몸이 한 바퀴 굴렀다.
그의 망토가 반원을 그릴 때, 믿을 수 없는 몸짓으로 땅에 안전히 착지했다. 그리고 힘껏 쇠사슬을 당기며 검을 뽑았다.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들의 분발에 힘입어, 사람들이 다가와 와이번에게 화살을 날렸다.
누군가는 힘껏 창을 던지기도 했다.
비스듬히 날아간 창은 와이번의 약이 오른 머리를 때렸다.
“너를 절대로 놓아주지 않겠다. 내 공명심이 아니라 앞으로 이 땅에 태어날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그렇게 말한 윌은 검을 휘두르며 앞으로 돌진했다.
그가 잡고 있던 쇠사슬은 다른 힘 좋은 용병에게 넘겨준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