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 기치 (3)
행크는 엎드린 한센과 세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이야기인즉슨.
블랙 라이어드의 사주를 받고, 마약을 아레이즈에 풀려고 했단 말인가?
대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만약 세인이 한센을 붙잡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영주님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계속 턱을 괸 상태로 앉아 있던 세인은 이 시점에서 마음을 돌린 이유라든가, 자초지종을 캐묻진 않았다.
그는 바보가 아니니까,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 수가 있었다.
“여기는 우리를 지켜보는 청중도, 뭣도 없어. 교훈을 얻어야 할 사람들 말이야. 그러니 정확한 잣대를 들이밀 필요는 없는 거겠지. 그만 가봐.”
“영주님!”
오히려 행크가 놀라서 낮게 소리치는데 세인이 귀찮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굳이 이런 사소한(?) 일들로 분노하기엔, 세인의 입장에서는 죽일 놈들이 널려 있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나가는 한센을 향해 세인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목적지까지 동행해. 우리 이야기는 아직 유효하니까.”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드는 한센의 등을 쿡쿡 찌르는 행크였다.
심기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한센이 나가자 행크는 씩씩거렸다.
“간악한 상단 놈들! 이런 음모라뇨! 물론 원래 상인들이라는 종자가 음모투성이이긴 하지만, 뒤에서 이런 공작을 하다뇨! 당장 네이블 가로 가서 놈들을 소환해 달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한센 저놈도 정말!”
얼굴이 붉어진 행크를 바라본 세인은 뚱한 표정이었다.
아니 그놈들도 범죄를 저지르다가 그렇게 된 거지만, 상단의 인물이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영지민이 바라보는 앞에서 말이다. 그리고 결국 전부가 끝까지 빠져나가지 못하고 고문 끝에 처참한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그런 마당에 당연히 저쪽에서도 이가 갈리겠지.
한센 같은 경우는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진 꼴이었다. 강한 자의 눈치를 봐야 하는 힘없는 중소 상단이니까 말이다. 게다가 자백까지 한 마당에 죄를 묻기가 어려웠다. 밖의 용병들이 보기에 힘없는 상단을 갈취하는 것처럼 여겨질 우려도 있었고.
“영주님 제가 네이블 가에 갔다 올까요?”
“난 이제 책을 봐야겠어.”
오히려 세인은 짜증 난다는 듯이 축객령을 내렸다.
네이블 가가 중매쟁이야? 찾아가서 뭐하게?
* * *
레드는 마을에 계속 머물렀다. 그리고 젬과 젠의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작은 오두막을 지었다.
처음에는 그를 경계하던 마을 사람들도 점차 마음의 빗장을 풀고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이런 곳까지 뭔가 이득을 노리고 올 사람이 없었던 탓이다.
그가 흉중에 어떤 마음을 품고 있든, 여기서 뭘 얻어갈 수 있을까?
더구나 그는 더럽게 약했다.
별로 위기의식도 생겨나지 않았다.
물론 레드의 생각은 달랐다.
만에 하나, 나중에라도 사람들이 배신감을 느끼게 될까 봐 솔직히 말하고 다녔다.
“나는 강해.”
레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빵을 먹었다. 그러자 젠이 진저리가 난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뭔가 멋져 보일 거라고 착각하나 본데. 듣는 쪽은 정말 얼굴이 간지럽거든요? 막 오글거려요. 세상과 동떨어져서 산 거 같아요. 가만히 보면, 말하는 게 진짜 아우.”
“이런 궁벽한 산에 사는 언니에게 동떨어져 살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면, 정말 심각한 거예요. 아저씨. 그건 마치 최악의 난봉꾼에게 바람둥이라는 욕을 먹는 거라고요. 그건 풋내기에게 어설프다는 말을 듣는 것이나 마찬가지고요. 쓰레기에게 너 더럽다는… 말을.”
“….”
“대체 어디에서 그렇게 폐쇄적으로 산 거예요?”
레드는 이제 묵묵히 단단한 빵을 뜯었다.
그는 한참 밭을 갈다가 점심을 먹는 중이었다.
여기 사람들은 거칠고 힘들게 살았다.
아레이즈의 영지민보다 더욱 말이다.
그건 그거대로 심각한 거였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성 근처 마을에 살 수 없는 사정이란 게 있다.
같은 인간이지만 야만족 취급을 받는 사정.
‘그들은 자신을 뭐라고 생각할까? 야만인? 몬스터? 산적, 강도, 화전민?’
레드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밭을 갈았다.
젠과 젬은 다시 산으로 간 지 오래다.
마을 사람들을 보니, 그들을 만나기 전에 가졌던 편견이 금세 사라졌다.
솔직히 영지민과 차이를 모르겠다. 굳이 차이라면 더 척박한 환경에서 살고 있을 뿐인 거다.
적어도 레드의 눈에는 보통 사람들과 이들의 차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세인이 이끈 병력은 멀리 산을 돌아갔다.
레드도 그렇고 마을 사람들은 멀리에서 화광이 충천하는 광경을 한밤중에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불안에 떨며 저마다 속삭였다.
“뭐야? 우리를 토벌하려는 건가?”
레드는 사정을 알고 있었지만, 자물쇠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을 뿐이다.
병사들이 아주 완벽히 멀어지자, 그제야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세인이 떠나기 전 레드는 마을을 몰래 빠져나와 그를 방문했다.
“어때? 그들은?”
“그냥 우리와 같은 인간들입니다. 몬스터처럼 생기지도 않았고 평범합니다. 오히려 더 순박한 면이 있습니다.”
“그래, 그렇군.”
“목책은, 이들을 분리하게 됩니까?”
그때 세인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레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좀 더 거기에 머물고 싶어?”
“….”
레드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내가 그들을 쳐낼 생각이었다면, 이렇게 번거로운 방법을 쓰지 않았을 거야. 목책은 그들을 분리하지 않아. 목책의 목적은 모두를 보호하는 것이다. 그 모두에는 당연히 야만족들도 들어 있다. 그들은 인간이니까.”
“시간이 지난다 해도, 영지민은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그들에게 저 사람들은 몬스터의 자식들이니까요. 마녀들 또는 악마라는 소문도 있고요. 야만인이고….”
“직접 네 눈으로 봤던 건? 생활해보니 어떠했지? 정말로 몬스터의 자식인가?”
“야만인과 영지민을 가르는 것은 그저 작은 문화의 차이였습니다. 이방인인 저를 의심할 줄도 모르는 순수함을 지녔고요.”
“아스터 1세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아도, 인간은 스스로 편을 가를 필요가 없어. 왜냐면 몬스터들 입장에서는 어차피 우린 다 죽일 놈들이거든. 그놈들끼리는 사이가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우린 서로 손을 잡을 수 있어. 그게 전부야. 우리 인간은 그거면 충분하거든.”
레드가 고개를 숙였다. 세인은 점점 영주라는 자리에 맞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 둘 중 하나라도 있고 싶은 곳에 있을 수 있게 되었구나. 자기가 있고 싶어 하는 곳. 그게 가장 중요한 거지.”
다시 그곳을 빠져나간 레드는, 세인이 부르면 언제라도 당장 달려온다는 말을 굳이 하진 않았다.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니까.
그리고 레드의 입장에서는, 시간이 지나 입이 무거운 인력들이 밀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멀리에서 목책을 쌓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 경계는 단지 나무 벽을 쌓는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 안의 인간들은 그것에 보호받는다는 인식을 하게 되면서, 보호의 아래 능동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주인 의식을 가지고, 수동성을 버리는 것에는 생각보다 많은 조건이 필요하지 않았다.
* * *
영주들이라고 해서 인근의 모든 마을을 다스리는 것은 아니다.
통치의 기준은 바로 세금이었다.
세금을 낼 능력이 없는 마을은 보호 아래 들어가지 못했다.
영주 쪽에서도 할 이야기가 있는 게, 영주는 왕에게 세금을 바치기 때문이다.
영주의 통치를 받지 못하는 마을들을 ‘번 우드’라 불렀다.
불길한 이름이지만, 불행만 없다면 살기 괜찮은 곳일 수도 있다.
세금은 없고 지리적인 이점을 취하니까 말이다.
롱 해밀턴은 그런 마을에 속했다.
그 마을은 키다리 헤밀턴이 세운 마을이었는데, 약삭빠르게도 디펜더스와 아레이즈의 중간 지점에 있었다.
이게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경계가 모호했다.
딱 어느 쪽 영토의 마을이라고 부르기 힘든 위치였으니까.
그러면서도 상인들이 지나가는 교차로에 있으니 좋았고, 볕도 잘 드는 편인 데다가 토지가 나쁘지 않았다. 그러니 식물들도 쑥쑥 잘 자랐다.
이대로라면 롱 헤밀턴은 언젠가 누군가의 우산 안에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걸 아니까 디펜더스와 아레이즈도 은근히 롱 해밀턴의 기색을 살피고 있었고 말이다.
세인은 이곳을 어떻게 정치적으로 써먹을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정보를 전해 들었다.
롱 해밀턴에 몬스터가 출현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래서 마지막 목적지로 정해진 것이다. 하지만 맹세하건대, 이렇게 심각한 상황일 줄 전혀 몰랐다.
잡티가 심하게 섞인 밤색 말이 땅 위를 달렸다. 그러다가 피 냄새가 강해지는 구역이 이르렀다.
대열은 천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하다가, 차츰 말발굽이 걷는 속도가 되었다.
결국, 완전히 멈춰 서기 전에 더이스가 발을 땅에 내디뎠다. 그리고 말을 뒤로하고 앞으로 나선다.
그의 손에는 단창이 쥐어진 지 오래였다.
상체를 굽히고 사방을 살피던 그는 앞으로 더 전진했다.
가득한 피 냄새 속에서 코를 벌렁거리면서 말이다.
하지만 다른 냄새는 맡아지지 않았다.
긴 얼굴의 그는 눈매를 좁히며 초입 구를 살펴보았다.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반 토막 난 시신들, 바닥에 굴러다니는 손과 발목들….
그때 그의 뒤로 맥과 행크가 다가왔다.
“이거 메스킬이지?”
“보시는 대로 다 반 토막 나 있어요. 그 외에 뭐겠어요?”
행크의 은근한 질문에 더이스가 대답했다. 그러면서 흔들림 없는 나뭇가지와 굴러다니는 옷조각 사이에서 뭔가 색다른 단서라도 없을까, 살피는 기색이었다.
“빌어먹을. 메스킬 같은 것을 보면, 몬스터들이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새삼 느껴져서 기분이 더러워져. 아주 뼈저리게 알게 된다고.”
행크가 침을 탁하고 뱉었다.
그리고 등을 돌린다.
“어디 가세요?”
더이스의 질문에 행크가 대답했다.
“영주님도 이걸 봐야지. 그분의 판단도 필요해.”
그때 더이스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입을 다시 열었다.
“무슨 말이에요? 물론 어렸을 때부터 호된 훈련을 받았고, 레인저로서 생활한 것도 알지만…. 아직 어린 소년이라고요. 대체 이런 것들을 보고 뭘 판단하실 수 있겠어요? 우리는 그분의 기사예요. 우린,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해야죠.”
그때 행크와 맥이 약속이라도 한 듯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렇군. 이 친구는 아직 젊지.’
둘은 세인의 곁에서 그를 지켜보며 깨달은 것이 있었다.
입 밖으로 섣불리 내지는 않았지만, 어떤 인상을 받은 것이다.
세인의 분위기와 행동에서 어떤 재목인지 알아봤달까?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든 말이다.
그들의 결론이 자칫 반역이라고 받아들여질지 모르니까 말이다.
‘그분은 마치 왕 같아. 그런 느낌이 있어.’
막상 단어를 나열해 말하자면, 딱 꼬집어 묘사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뭔가 확신을 들게 하는 정체성이 세인에게는 있었다.
곁에서 보면 표현하기는 어려워도 점점 느끼게 된다.
어쩌면 그의 할아버지는 이런 부분을 먼저 알아보고 세인을 몰아세웠던 걸까?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뭔가가 있다고. 자연스레 풍기는 기도가 그래. 과거, 네이블의 후작님을 보았지만…. 후작님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무게감이 있었어.’
“여하튼 기다려. 영주님도 보셔야 할 거야.”
그렇게 말하고 떠나가는 행크를 향해 더이스는 혀를 찼다.
지금은 기사가 알아서 행동해야 할 때였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더이스는 진영 쪽으로 돌아가 정찰 지원자를 받았다.
지원자로 나선 것은 의외로 대장간 소년이었다.
용병들은 방금 다른 곳에서 사냥을 끝마친 후라, 지쳐있었기 때문이다.
장검을 든 소년을 향해 더이스가 말했다.
“비위가 좋은 편이니?”
“….”
위험은 없을 것이다. 배부른 벌레들은 땅에 들어가, 자고 있을 테니까.
다만 비위가 강해야 했다. 긴장한 대장간 소년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마을의 안쪽으로 사라졌다.
맥은 구태여 그를 말리지 않았다. 지금 더이스가 하는 행동은 그릇된 게 아니다.
사람들은 마차에서 내리는 세인의 얼굴을 보려고 목을 길게 뺐지만, 그는 후드로 얼굴 전체를 가리다시피 하고 있었다.
거친 용병들조차 세인이 그들의 앞을 지날 때마다 숨소리도 못 냈다.
세인이 마음만 먹는다면 용병 한둘쯤은 없는 죄를 물어 쓱싹 해버릴 수도 있음을 아는 것이다.
그들이 볼 때 귀족들이란 법과 지위를 이용해 칼부림하는 종자들이었다.
세인은 롱 헤밀턴 앞에 다다르러 후드를 뒤로 넘겼다. 그러자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이마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길게 숨을 내쉰 그가 반 토막 나 있는 시체들을 바라보았다.
“더이스는?”
“안쪽으로 들어갔습니다. 영주님이 보시기에도 메스킬 같죠?”
대형 곤충 몬스터들은 짝짓기 기간이 되면 인간을 습격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습격이란 잠복해 있다가 길에서 공격하는 것이 아닌, 떼를 이루어 마을로 밀고 들어가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극도로 흥분한 곤충들이 인간에게 닥치는 대로 욕정을 풀려고 하지만, 애초에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결국, 사방이 살육의 축제로 물드는 것이다.
“여자 시체만 있는 게 아니잖아.”
“남자들은 곁에서 두고만 볼 수 없어, 공격하다가 죽었겠죠.”
세인은 초록색으로 물들어 있는 모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마을 쪽을 다시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예감이 좋지 않았다.
“롱 헤밀턴은 그래도 꽤 안전지대라고 생각했어. 만만치 않은 몬스터 정도는 당연히 예상했건만, 이 정도일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