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13화 (13/307)

# 13

& 기치 (2)

어느덧 몬스터 토벌은 이주일 째를 넘어섰다.

세인이 벌인 일에 주변 영지들이 신경 쓰지 않고 있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골드 힐 쪽에서는 자신들의 앞마당을 청소하는 것에 예의 주시하고 있었고, 디펜더스도 촉각을 곤두세웠다.

*  *  *

디펜더스 영주의 집무실 안.

한 기사가 영주와 체스를 두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영주의 상태를 보면, 왜 디펜더스의 기사들이나 주민이 유독 신경을 곤두세우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항상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더욱 조심스러운 행보를 걷고 있는 디펜더스였다.

“어떻게 보십니까?”

“….”

영주는 기사의 질문에도 말없이 체스판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심사가 복잡한 것인지, 갈피를 못 잡는 모습이었다.

“듣자 하니, 용병들도 몰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이 왜요?”

북부용병들이야 억세고 강하기로 유명했다.

다만 웬만한 일에는 휘둘리지 않는다.

“큰 물건을 내걸었거든요. 용병들 입장에서는 평생 한 번 만져볼까, 말까 한 물건이죠. 사실 자유 기사들도 솔깃한 분위기입니다. 상품이 상품이다 보니….”

“네이블이 주도해야 할 일을 그가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럴 때일수록 남을 쉽게 믿을 수 없어요. 그건 확실합니다. 아레이즈의 영주도 앞날을 알고 있으니, 수작을 부리는 것일지도 몰라요.”

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조차 책임이 무거운 사람들에게는 의무였다.

손을 앞으로 뻗은 영주가 체스 말을 몇 칸 옮기며 다시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골드 힐의 망나니보다야 낫겠지만 말이죠.”

그는 어지간히도 골드 힐의 영주를 싫어하나 보다.

*  *  *

벨 상단은 영소한 상인들이 모인 곳이었다.

큰 상단과 경쟁이 힘드니 그들이 대어를 낚기 위한 미끼는 우리가 차지하자, 라는 것이 한때 신조였지만 지금은 퇴색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남이 보기에 어중이떠중이처럼 모인 그들의 조합은 힘이 없었다.

그냥 먹고 살기 위해 하루하루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가장들이 모인 집단이었다.

다루는 물건도 커피, 잣, 몬스터 부산물, 식기, 신발, 의류 등등으로 난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가끔 이들과 잡상인의 차이가 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면서도 상인이 받기 마련인 편견 어린 시선은 전부 받았다.

“상인들이야말로 근본이 없는 것들이야. 남의 불행에 기뻐하고 부추기지. 그리고 그걸로 이익을 보는 거야. 영지 전이라도 벌어지면 무기를 이쪽저쪽에 팔지. 그리고서 싸움을 부추긴 처벌도 받지 않아. 중앙 권력에 줄을 댔으니까. 기회가 되면 충분히 폭리를 취하고, 갈취하듯이 물건의 중간값을 올리지.”

그런데 벨 상단은 그런 뒷줄도 없다.

터번을 쓴 사람들이 나귀를 끌고 걸었다.

마차에 타고 옆에 선 사람들의 수효는 대략 50여 명 정도였다.

장기간의 여행 때문에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짐 끈을 고쳐 매었다.

“분위기가 어수선한데?”

“아레이즈의 영주가 몬스터를 정리한다고 들었어.”

“장기적으로 보면 우리에게 좋은 일이지만 지금은 난감하군.”

상단주인 한센은 굳은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레이즈의 병력이 주변을 들쑤시니, 몬스터들의 거주균형이 깨어져 버렸다.

그들도 불난 집에 계속 앉아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덕분에 지금 어떤 괴물과 마주쳐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지도에 적혀 있는 세력 분포도는 지금 쓸모가 없었다.

“세미! 어때? 찾아봤어?”

그때 한센은 멀리에서 말을 타고 달려오는 청년에게 손을 흔들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 말에서 내린 청년은 헐떡거리면서도 대답한다.

“아레이즈의 주둔지가 여기에서 멀지 않습니다. 도보로 이동해도 반나절이면 충분할 거에요!”

“그거 잘됐군.”

한센과 사람들은 기뻐했다. 주변 상황이 불안하다면 돌파구는 간단했다. 토벌군에 붙어서 이동하면 된다.

한센과 사람들이 도착한 야영지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넓었다. 게다가 사람들도 많았다. 근방에서 몰려온 것인지 다양한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깡깡 소리를 내며 망치를 움직이는 대장장이도 보였고 상인들도 보일 지경이었다.

“뭐야 이들은?”

“원래 용병들을 따라다니던 잡상인들이에요. 용병들이 여기에 붙었으니까, 당연히 이들도 같이 온 거죠.”

예상했던 장면이 아닌데? 천막이 가득 펼쳐져 있었다.

천을 고정한 줄에서 나부끼는 빨래들을 보며 한센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 시간 세인은 자신의 천막 안에 앉아 있었다.

임시로 가져다 놓은 것이지만, 쿠션이 올려져 있는 의자는 푹신했다.

비록 낡은 책상은 투박했지만 말이다.

이곳을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은 기사들이 유일했다.

다른 사람은 평소 그의 얼굴을 보기도 힘들었고, 지금은 행크가 들어와 있는 상태다.

세인은 소매에서 뭔가를 꺼내는 중이었다.

검지와 엄지에 잡혀 나온 그것은 아름다운 다이아몬드였다.

아주 작은 그것은 여러 각도로 연마되어 아름답게 빛났다.

행크조차 그것이 가져다주는 황홀함에 목울대를 움직일 정도였고 말이다.

‘생각 같아서는 에메랄드 반지를 내놓고 싶지만….’

세인은 다이아몬드를 램프 옆에서 이리저리 비춰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에메랄드 반지를 내놓는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세인에게 있어서만은 작은 다이아몬드가 영주의 자격까지 대변하는 에메랄드보다 훨씬 값어치 있었다. 하지만 에메랄드를 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영주님.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행크는 다이아몬드를 이리저리 돌려보는 세인을 향해 우려 섞인 목소리를 내놓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저건….

“괜찮아. 어머니의 유품은 하나 더 있으니까. 그건 손수건이라서 미미한 향기도 나. 이건 향기도 없는 돌멩이니까. 유물로서는 빵점이지.”

그리고선 믿을 수 없게도 다이아몬드를 휙 하고 던졌다.

행크가 얼마나 허둥대며 그것을 받았는지, 다른 기사들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크게 웃었으리라.

“영주님!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이걸 던지다뇨? 어떻게 이걸!”

행크가 식은땀을 흘리며, 두 손으로 받아든 다이아몬드를 꼬옥 하고 안자 세인이 드물게도 피식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만 나가봐.”

행크는 등을 돌리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이렇게 물었다.

“영주님. 영주님의 고심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궁금해서 그런데요.”

“뭐?”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이 자리에 있으면, 보다 미래지향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그런 생각에 충실해야 하고. 그뿐이야. 아마 당신도 이 자리에 있었다면 나와 똑같이 행동했을 거야.”

하지만 행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자신이라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했다.

‘역시 영주의 피는 타고나는 거구나.’

자신이라면 유품이 가지는 의미도 그렇고, 가치도 그렇고 도저히 다이아몬드를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지금의 세인에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약속을 지키다니 설마설마했는데….’

이런 시기에 저런 영주를 만난 것이 결코 나쁘지 않았다.

행크가 가장 큰 천막 밖으로 나가자,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그중에서 가장 탐욕스러운 시선을 지닌 자들은 바로 용병들이었다.

정말 흉악하게 생긴 장한조차 순한 토끼처럼 눈을 빛내며 사랑을 갈구하듯이 행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행크가 다이아몬드 든 손을 번쩍 위로 올렸다.

그리고 손가락을 몇 개 펼쳤다.

화톳불 불길에 그것이 반사된다.

반짝반짝.

“우와아아! 우와아!”

“와 아아!”

나무 식탁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던 전사도. 활을 등에 멘 채로 옷을 수선하고 있던 사냥꾼들도 다이아몬드를 확인하고는 함성을 질렀다. 그리고 쿵쿵거리며 탁자와 바닥을 두들긴다.

열렬한 환호 아래 행크가 소리를 질렀다.

“약속은 지킨다! 많은 보상 중에 최고의 보상은 이것이다! 큰 공을 세운 자에겐 최고의 물건인 다이아몬드가 손에 쥐어진다!”

신이 난 남자들이 술잔을 휘둘러 술을 뿌렸다.

평소대로라면 그 술을 맞고 칼부림을 벌였을 험한 놈들도 낄낄거리며 만세를 외쳤다.

그야말로 흥분의 도가니였다.

“가죽을 조작한 놈은 죽여버리겠어! 기필코 죽여버리겠어!”

병사들이야 먼 산 구경하듯이 바라보고 있지만, 보상을 노리고 합류한 사람들은 장난이 아니었다.

얼굴에 칼자국이 가득한 한 노인도 만세를 부르는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소리를 질렀다.

여기서 가죽이란 개인마다 몬스터를 죽이고 표시를 한 증거였다.

“좋아 끝까지 가보자고! 난 목숨을 걸었다!”

“영주가 주는 다이아몬드란 말이지! 나와 같이 오지 않은 동료는 땅을 치고 후회하겠군! 분명히 내게 그럴 리가 없다고 말했단 말이야! 그런데 보라고! 저 황홀한 보석을 봐!”

껄껄대는 남자들 사이를 걷는 한센에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앳된 청년이었는데 한센의 소매를 잡아당긴다.

“벨 상단의 대표님 맞으시죠?”

“예? 예 예. 그런데요?”

어린 청년이라도 무장한 상태라 대하기 껄끄러웠다. 하지만 청년은 뒤로 물러나는 한센에게 더욱 다가가며 그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댄다.

주변이 너무 시끄러웠기 때문이다.

“영주님께서 찾으십니다!”

‘나를? 왜? 나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임시로 꾸려진 위병소 천막에서 방문 기록을 적었으니까, 자신의 방문 사실을 알겠다만….

왜?

대체 왜? 자신같이 보잘것없는 상인을 찾는단 말인가?

한센의 얼굴이 걱정과 근심으로 잔뜩 얼룩졌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전의 누군가도 톡톡히 겪은 것 같은데?

*  *  *

한센이 들어오자 세인은 그를 앉은 채로 맞이했다.

쭈뼛거리는 그에게 좋은 차가 있냐고 물었다.

물론 한센은 최고의 차를 바치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본론을 기다린다. 고작 차 이야기를 하려고 부른 것은 아닐 테니까 말이다.

고개도 들지 못하는 그의 앞에서 세인은 앞으로의 목적지를 물었다.

“아시겠지만 아레이즈를 거쳐 골드 힐 그리고 디펜더스 쪽으로 갈 예정입니다. 요번 하반기도 전과 다름없이 말입니다.”

“이렇게 주기적으로 오지를 도는 상단은 자네들이 거의 유일하지? 일 년에 몇 번이나 도는 상단은 특히 말이야.”

“오지라뇨. 당치 않은 말씀이십니다.”

“일정이 바쁜가?”

어리둥절한 한센 앞에서 세인이 속 시원히 이 집단의 목적지를 밝혔다.

“그때 자네들도 같이 있으면 콩고물이 떨어질지 누가 아나?”

“저…. 저기 저희가 그런 정보를 알아도 되는 겁니까?”

“알아서 나쁠 게 뭐가 있는데?”

오히려 알아봤자 뭘 할 거냔 눈빛을 뒤통수로 받아내며, 한센이 중얼거렸다.

“그… 그렇군요.”

“선대 때부터 자네들이 영지에 주기적으로 들려줬기 때문에, 영지민이 그나마 안정적으로 살 수 있었다. 그 의리를 잊으면 안 되겠지.”

“영주님, 의리라니요. 당치 않은 말씀이십니다. 저희야 그냥 먹고살기 위해서….”

“그렇다면 굳이 아레이즈를 들리지 않아도 됐었겠지. 며칠이라도 더 위험을 감수하는 목적이 뭐겠나? 결국, 너희는 내가 책임진 인간들을 생각해 준 거고, 나는 그것을 잊지 않는다.”

한센은 영주 앞에서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그러나 세인은 그의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입을 열었다.

“너희 쪽에서 더 위험을 감수하고 우리 영지에 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고립되었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있었어. 고마움은 어차피 내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그걸 표현하는 게 늦어졌을 뿐이지.”

“….”

“말만 길어졌군. 아직 구체적인 결과도 없는데 말이야. 이만 나가봐.”

한센은 머리를 조아리며 천막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종일 좌불안석이었다.

너무도 불편한 얼굴인 한센에게 아들이 물어왔다.

“아버님? 안전지대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왜 그렇게 불안해하십니까?”

한센은 일그러진 얼굴로 자기 아들을 바라보았다.

꽤 상재가 있는 녀석이었다.

녀석의 또랑또랑한 눈망울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가슴이 착잡해져 왔다.

뭔가 가르칠 것이 있나 싶어서 합류시킨 것인데, 나는 이 녀석 앞에서 어떤 행동을 해야만 하는가?

“아레이즈의 영주님이 우리에게 호의를 베푸셨다. 아니 베풀려고 하신다. 나는 그저 네 할아버지의 말을 따라 행동했을 뿐인데, 그 덕을 내가 받게 되었구나.”

“그렇다면 기뻐하셔야 하지 않나요? 왜 그렇게 불안한 얼굴이세요?”

“아레이즈의 은혜를 원수로 갚게 생겼구나. 이제서야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제대로 깨달았다. 아무리 우리 사정이 빈곤해도 그런 짓은 하면 안 되는 것이었어. 결국, 신의를 배반한 인간은 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신의를 받고 있으면서도 우둔하여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었던 것이구나.”

“….”

밤새 고민한 한센은 행크에게 찾아갔다. 그리고 영주님을 만나고 싶다고 청했다.

물론 행크는 콧방귀를 끼었고 말이다.

“영주님이 원하신다면 모를까. 자네가 원한다고 아무나 만나주시는 신분인가?”

하지만 정말 중요한 일이라고 말하며 간청하니, 행크는 결국 세인에게 말을 전했다. 그리고 다시 짧은 자리가 만들어졌다.

한센은 저번과는 달리 천막 안에 들어서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세인의 옆에 서 있던 행크는 좀 놀란 얼굴이었다. 저 사람이 왜 저러지?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 영주님.”

세인은 턱에 손을 괴고 앉은 채 한센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길이 한센의 등에서 뒤쪽 짐에 가 멎는다.

“저것 때문인가?”

“블랙 라이어드 상단이 저희에게 물건을 넘겼습니다. 상인들끼리의 계약이죠. 그래서 저 물건들은 원래대로라면 아레이즈에 풀릴 예정이었습니다.”

수상함을 느낀 행크는 보따리 앞으로 다가가 천을 풀어 보았다. 그러자 말린 꽃잎들이 가득 나왔다.

그것을 혀에 넣어본 행크는 짜증을 부렸다.

“에 퉤퉤! 이게 뭐야?”

“식용 식물입니다. 후추처럼 간을 맞추는 데 사용되죠. 그러나 일정량 이상을 먹으면….”

주저하던 한센은 눈을 질끈 감으며 다 털어놓았다.

“마약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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