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 기치 (1)
“내가 누구냐가 중요한 게 아니야. 네가 누군가가 중요한 거지.”
그렇게 젬이 어제 레드가 한 말을 흉내 냈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젠이 깔깔거리며 손뼉을 쳤다.
“내가 누구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야! 날 두들겨 패는 네가 누군지가 중요한 거다!”
깔깔거린 젠은 옆으로 구르며 그만하라고 소리쳤다.
웃겨서 배가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편 어제 얻어터진 레드는 묵묵히 자기 일만 하고 있었다.
사실 무안해하는 것보다, 그런 태평스러운 모습이 더 웃겼다.
“그렇게 말하고 신나게 얻어터졌죠. 와 진짜 사람이 먼지 나게 맞는, 그런 모습은 정말 오랜만에 봤어요.”
“아이고 배꼽이야.”
젠과 젬은 한통속이 되어서 레드를 놀렸다.
레드를 두들겨 팼던 남자, 무에타이는 ‘뭐야? 별거 아닌 놈이잖아!’라고 되려 성질을 내며 돌아가 버렸다.
허무함에 소지품 뒤질 생각도 안 하고 말이다. 그리고 레드는 아직도 젠과 젬의 창고에 머무는 중이다.
이제 마을 사람들은 그를 자매의 기둥서방 정도로 여기는 중이다.
실상은 전혀 아니었지만.
“그렇게 처맞을 거 같으면 처음부터 폼이나 잡지 말던가! 쓰라리겠지만 좀 기다려요! 약초 캐다가 다려 줄 테니까!”
“내가 누군지가 중요한 게 아니야! 넌 누구냐!”
자매는 미친 듯이 웃으며 창고를 떠났다. 그리고 홀로 남겨진 레드는 피식하고 웃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세인은 레드가 보내온 지도를 손에 쥘 수 있었다.
“목책을 만들 테두리가 정해졌군.”
그렇게 중얼거리는 가운데 곁에 있던 마플이 물었다.
“그는 거기에 계속 머문 데요?”
“그럴 모양이야. 그보다 추신으로, 물주머니에 술을 넣는 행동은 개념 없는 행동이라고 적혀 있어. 설마 술을 넣었어?”
인상을 찌푸린 마플은 뜨개질을 멈추고 세인에게 물었다.
“그런데 걱정 안 되세요? 그런 마을은 위험할 텐데. 언제 몬스터가 습격할지 모르잖아요. 지금이라도 불러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마플 입장에서는 성안에 기사가 한 명이라도 더 있어야 든든한 모양이었다.
세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편지를 탁자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괜찮아. 그는 강하니까.”
아닌 게 아니라, 레드는 진짜 강했다.
* * *
어느 날 아침 해가 떠오르기도 전에 뿔 나팔 소리가 울었다.
성 위에서 난 그 소리는 아침 안개를 뚫고 멀리 울려 퍼졌다.
성문이 열리고 말들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가장 선두에는 무장한 맥이 타고 있었다.
“이 집단을, 혹은 이 출발을 뭐라고 부르시겠습니까? 내걸 이름이 필요한데 말입니다.”
맥은 어제 세인에게 물어보았다.
그것에 대한 세인의 답은 망설임이 없었다.
“별동대. 임시 용병대. 뭐라고 이름 붙여도 좋아. 이름과 깃발이 중요한 건 아니니까.”
“귀한 신분이시니까, 더 잘 아시겠지만…. 명분과 이름이 있어야, 인간들은 더 잘 죽음을 받아들이는 법입니다.”
그러자 물잔을 집느라, 약간 상체를 숙인 세인이 대답했다.
“이번 출발을 보면, 활동 범위도 그렇고, 형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포용을 보인 셈이다. 사실 이번 행동은 이름을 붙이지 않는 것에 가장 큰 의의가 있다. 누군가는 물질만을 쫓을 것이나, 또 누군가는 내포된 뜻을 알아볼 수 있겠지.”
결국, 모두가 뭉쳐야 한다는 것이다.
맥은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그가 생각해 보건대. 그런 기치를 마음에 품은 세인조차도, 몬스터에 대한 증오를 가장 큰 행동력으로 잡는 것 같았다.
정작 그날 세인의 눈빛 안에서 무서운 욕구를 읽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축복과 환호를 바라지 않는 것처럼 보인 무장집단은 성 앞을 가로질렀다.
그들은 마을을 관통해 출진하는 중이었다.
부지런한 상인이 아니면 사람을 보기 힘든 시간이었지만, 안개 속에서 많은 사람이 늘어섰다.
그들은 안개를 지나는 말, 기사, 큰 방패를 든 병사들, 그 위로 세워진 장창과 아레이즈 깃발의 흔들리는 형체를 보았다.
“돈을 원하는 자. 몬스터를 죽이고 싶은 자는 곁에 서라. 우리가 앞장서겠다.”
행크는 최근에 벽에 붙인 벽보의 내용을 읊으며 걸었다.
그의 등에는 두 개의 도끼가 교차해서 매달려 있었다.
그렇게 무장 병력이 지나가는 가운데…. 안개 속에서 새벽부터 열린 식당이 있었다.
그곳에 앉아 있던 소년이 탁, 하고 물잔을 내려놓았다. 짧은 머리인 그는 건장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소년이 일어서려 하자, 주인이 말렸다.
“이봐 정말로 가려는 거야? 너는 대장장이라고.”
“대장장이도 받는다고 쓰여 있었다면서요?”
“멍청아! 그만둬. 이건 진짜 전투라고.”
그리고 상인이 친구 아들이니까 말해준다는 식으로 속삭였다.
“그냥 영주 지위에 오른 젊은 분이! 뭔가 으스댈만한 과거를 만들고 싶어서 나가는 거라고. 적도 모호해.”
“그래 그만둬. 미쳤다고 청춘을 불장난으로 버리냐?”
새벽 일찍 열린 식당에서 술을 마시던 옆 주정뱅이가 신을 내며 지껄였다.
“이러다가 갑자기 옆 영지를 친다고 쑥하고 빠져 나가봐. 엇? 몬스터가 아니고 사람과 싸우라굽쇼? 히에엑! 쿵! 쾅! 넌 개죽음이야, 개죽음. 화살받이 알지? 그런 눈속임이면 어쩔래?”
하지만 대장장이 소년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검을 들고 밖으로 나갈 뿐이다.
그는 곧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식당 주인은 노골적으로 혀를 끌끌 찼다.
더이스는 말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옆에는 언제부터인가 가죽 갑옷을 입은 소년병이 걷고 있었다.
작은 방패와 단검을 양손에 든 채였다.
“너도 나왔군.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도 모르고 있었어. 이름이 뭐냐?”
“파웰입니다.”
“그래 파웰….”
더이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는 포상금을 보고 몰려들었다. 누군가는 괴물에 대한 증오를 품에 안고 곁에 섰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행진이었다.
남이 보기에 뚜렷한 명분이랄 것도 없고, 목적의식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합류하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목적이 담긴 불씨들을 안고 앞으로 나아갔다.
호랑이도 그렇고 코끼리, 심지어 어떤 말은 배고프면 인간을 먹는다. 하지만 거의 보금자리가 위협받거나, 배가 고플 때만이다.
그 녀석들은 최소한. 배가 고프지 않아도, 가죽을 노리는 인간처럼 굴진 않는다.
어느 날, 가족이 그런 동물들에게 해를 당한다면…. 너무나도 원통하고 분하지만, 어느 정도 납득을 할 수 있었다.
물론 비탄에 잠기는 건 같지만, 적어도 ‘자연’에 당했다고 자위할 수 있었다.
그건 태어나 한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강자와 약자로 이루어진 사슬 속에서는 분한 눈물을 삼킬지언정 이해해야만 했다.
하지만 몬스터는 다르다.
몬스터는 자주 재미를 위해 인간을 죽이기도 했다.
누가 봐도, 그들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증오를 가지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들은 고대 전쟁 때, 여왕이 미처 처리하지 못한 악의 자식들이라고 하지. 지금 세상의 괴물들은 말이야. 그때 여왕과 제국이 죽이지 못한 것들의 씨가 남아, 이렇게 모든 생명을 증오하고 저주하는 거야. 그런 그들의 원천적인 적개심은 자연의 법칙을 거슬러도 한참 거슬러. 균형도 뭣도 없어. 정신 나간 메뚜기 떼들 같아.”
인간을 해치고 먹었다. 그리고 죽였다.
철저히 가지고 놀기도 했다.
인간의 고통을 탐구하고, 절규처럼 내뱉는 애원을 쫓았다. 그리고 그 근원을 탐닉하는 저열한 본능, 그게 바로 몬스터들의 본능이었다.
이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런 무자비한 적개심에 한두 번쯤은 할큄을 당한 인간들이기 쉽다.
멀게는 친척부터 가까이는 매일 매일 식탁에 마주 앉던 가족까지.
그 괴물이 괴롭히고, 찢어 놓았다.
점점 왜? 라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사라졌다.
이제 와서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원인을 안다고 쉽사리 사라질 복수심은 아니니까.
행렬은 세 갈래로 쪼개졌다.
두 가닥은 각각 디펜더스와 골드 힐 쪽으로 향했다.
그들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목을 청소하면서 전진했다. 그러다가 습격해 오는 몬스터들을 역추적하여 올라갔다.
보통은 습격받거나, 한 번의 전투로 충돌이 끝나기 마련이다.
누구도 뿌리 뽑을 엄두 내기는 어려웠다. 토박이라도 마찬가지였다.
세인이 이끄는 병력은 교차로에서 꺾어져, 아레이즈의 뒤쪽으로 돌았다.
그러면서 어두운 숲에서 마주친 모든 몬스터들을 죽였다. 그리고 돌을 던지는 곤충설인을 쫓아가 마을을 발견했다.
“밀어라. 앞으로 밀어! 넘어져도 앞으로 넘어져라! 뒤로 넘어지면 죽는다!”
맥이 쩌렁쩌렁하게 소리 지를 때, 병사들의 방패가 이중 턱을 가진 곤충의 가슴에 부딪혔다.
각질이 긁히는 소리를 내며 곤충들의 목이 쭉 하고 늘어난다. 그러더니 위쪽에서 양 갈래 이빨들이 내리꽂혔다.
진홍색의 타액을 머금은 흰 이들이 딱딱한 방패를 훑고 지나갔다.
병사들은 이미 앞과 위로 방패를 치켜든 상태.
곤충설인들이 이룬 마을은 짚과 침을 엉겨 만든 둥지가 가득한 곳이었다.
강철같은 강도를 자랑하는 나무가 삐죽삐죽 솟아오른 지대로 인간들이 쏟아져 들어갔다.
나무 위쪽은 해골들로 지붕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늘과 곤충의 그림자가 사람들의 정수리 위를 덮었다.
날개가 세차게 비벼지는 소리가 나더니, 벌레 우는 소리가 사방에 요란했다.
그 소리를 분쇄하려는 듯이 행크의 양 도끼가 강렬한 회전을 일으킨다.
땅거죽을 뚫고 몸을 일으켜 세웠던 곤충의 두꺼운 허리가 두 동강 난 것도 바로 그때이다.
쓰러진 상체에 대고 씩씩대며 도끼를 내리찍는 행크.
그의 뒤로 방패를 든 인간들이 우르르 움직였다.
몇몇 사람들이 초록색 피가 고인 곳에 미끄러져 넘어졌다.
무릎을 흠뻑 적시는 점액질에 진저리를 치며 일어나려 하는데, 파헤쳐진 흙 사이로 인간들의 시체가 보였다.
시체들이 입은 낡은 옷들은 찢기고 삭아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그들의 몸은 퉁퉁 부어 있을 뿐 싱싱해 보였다.
아마 여기에 곤충 학자가 있었다면 그들의 목 부위를 살펴보았을 것이다.
곤충설인들이 가슴에 달린 대롱으로 시체에 방부액을 주입한다는 학설이 있었으니까.
세인은 먼 곳의 곤충설인 둥지에서 흘러나온 괴성과 울음소리를 듣고 있었다.
맥은 옆에서 대기 중이었고 말이다.
곧이어 병사들이 우르르 옆으로 빠져나오자, 한 무더기의 곤충들이 따라 나오는 것이 시야에 잡혔다.
네 개의 더듬이를 성이 난 듯 바짝 세운 괴물들은 가슴을 연 상태였다.
거기에서는 거미의 다리처럼 대롱 다발들이 쏟아져 나온 상태였다.
“밤이 되면 땅을 파고 침입해. 그리고 슬금슬금 민가로 기어들어 가지. 달빛도 없으면 아무도 몰라. 그러다가 집 안에 들어서면 인간처럼 몸을 일으켜. 소변을 보러 나온 아이와 마주치면 그 아이를 죽이지. 그리고 방 안으로 들어가서, 천연덕스럽게 자고 있는 부부 중 한 명을 끌어안고 마비시켜. 그리고 계속 끌어안고 있는 거야. 아침이 밝아 올 때까지.”
다음 날 아침 깨어난 배우자는 엄청난 크기의 말벌이 옆에 누워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는 놀라서 비명을 지르고 고통스러워 할 것이다.
아내나 남편의 머리에 침을 박고 엎드려 있는 괴물을 보고 말이다.
저 벌레들은 그런 유희 등을 즐겼다.
맥에게서 활을 받아든 세인이 활시위를 뒤로 당겼다. 그리고서 잠시 위로 올렸는데 활대가 팽팽하게 곤두섰다.
마치 성이 잔뜩 난 것처럼 보였다.
다시 팔과 함께 내려온 활대가 수평을 이뤘을 때는, 이미 무서운 소리를 내며 화살이 쏘아진 직후였다.
화살의 끝이 곤충의 눈을 뚫고 들어갔다.
명중한 화살은 파르르 떨리며 깃대만이 남을 정도로 깊숙이 박혀 버렸다.
유독 그 괴물의 비명이 허공을 찢어발겼다.
그사이에 병사는 방패를 끌어안은 그 곤충에게서 빠져나왔다.
대가리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이 덜렁거리면서도, 그 곤충은 빠져나가는 병사를 발로 낚아채려고 한다.
그때 달려온 행크가 도끼를 수평으로 붕 하고 휘두른다.
드디어 목이 끊기고. 날아간 곤충의 머리가 벽에 부딪혀 박살이 났다.
“불태워라.”
그걸 지켜본 세인의 명령에, 횃불을 든 사람들이 성큼성큼 다가갔다.
미안하지만 시체를 수거해갈 수는 없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었고, 죽일 놈들이 널렸으니까.
짐을 최소화해야만 한다.
둥지가 통째로 불타자, 붉은 혀를 머금은 검은 연기가 위로 치솟았다.
안에 있는 애벌레들이 울부짖는 소리로 땅이 울렸다.
그 소리를 듣는 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돌아가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불이 붙은 채 엉금엉금 둥지 밖을 빠져나오는 곤충의 머리에 횃불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아래로 짓누른다.
동시에 폭발하며 코를 시큰거리게 만드는 역겨운 냄새.
이글거리는 불길 속에서 발버둥 치는 곤충들을, 둘러선 인간들은 끝까지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