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 금화의 가치 (3)
한편 작은 금화 주머니를 들고, 영지로 돌아가던 맥은 자괴감에 휩싸였다.
최소한 같이 먹기라도 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자괴감이었다.
그런데 정말 몸서리쳐지게 징그러웠다.
그게 현실이다.
그리고 이번에 세인을 다시 보게 되었다.
세인의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자리를 박차고 나올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왜? 무엇을 위해?
이틀 동안 말도 못 하다가, 맥이 가까스로 꺼낸 말은 이것이었다.
“보시기에 어떠셨습니까?”
고개를 들 수 없는 맥과는 달리 세인은 스스럼없이 맥을 대했다.
“자네가 보기에는 어때?”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냥 소문대로라는 것밖에는….”
“그 사람 입장에서는 짜증 나는 게 당연한 일이지. 갑자기 들이닥쳐서 무리한 걸 요구하니까. 나 같으면 더 신경질적으로 대했을 거야. 그래서 의외였어. 자리를 가릴 줄 아는 사람 같아. 그러니까 날뛰더라도, 최소한 의자를 걷어차며 일어날 자리는 고른다는 의미지. 분위기 속에서 그런 색깔이 느껴졌어.”
“….”
“그리고 눈빛이…. 그 안에 도사린 게 아주 잔인해 보였어. 내게는 예의 바르게 대했지만 말이야.”
세인은 식사를 마음에 두지 않았다.
코다로가 다짜고짜 세인에게 모욕을 준거라 보긴 어렵다.
물론, 끔찍한 식사였지만 아쉬운 소리를 하러 온 쪽은 바로 이쪽이다.
그는 분명 웃는 얼굴을 유지했고 끝까지 말투에 신경을 썼다. 악수까지 했고 말이다.
금화라는 무게는 결코 가벼운 게 아니다.
더구나 동맹 제안은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아무리 눈의 허리띠의 상황을 생각해도 손은 아무하고 잡는 게 아니다.
지금도 물론, 제대로 잡은 상태는 아니지만.
반대로 누군가가 세인에게 방금 그가 했던 식으로 굴었다면 어땠을까?
오히려 코다로는 이상할 정도로 무례를 잘 받아준 셈이다.
그의 기준으로 보면 말이다.
“썩 나쁘지 않은 만남이었어.”
“….”
고삐 쥔 손을 움직이자.
맥의 가슴 안에서 금화 담긴 작은 주머니가 절거덕거렸다.
* * *
레드는 검은 경사를 타고 있었다.
그가 오르는 산은 높다고 볼 수 없었지만, 주변에 이런 야트막한 산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아침이 지났는데도 산마다 운무가 자욱했다. 그래서 시계가 불량하다.
땀에 달라붙은 회색 머리를 긁적이던 그는 지도를 펼쳐 들었다.
영주 성에서 가지고 나온 것으로, 그런대로 봐줄 만한 지도였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모르겠다.
말은 푸르륵 거리며 콧잔등으로 그의 등을 밀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영리한 녀석이었다. 그런데 이놈에게 줄 당근도 떨어져만 간다.
그는 지도 몇 장을 겹쳐보다가, 짜증난다는 얼굴로 안장에서 물 부대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마개를 돌려 따며 입에 물을 부었다.
“쿨럭! 쿨럭쿨럭!”
레드는 눈을 크게 뜨고 물을…. 아니 술을 뱉어냈다.
‘마플이 다른 기사들에게 하는 것처럼 술을 담아놨나 보군.’
술은 단기적인 힘을 나게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갈증을 부추긴다.
레드는 더욱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무 잘 밀봉돼서 전혀 술 냄새를 맡지 못했다. 그러면 자신의 예상에서 지금 물 한 부대가 비는 거잖아.
끙 소리는 내며 레드는 산을 빠르게 올랐다. 그리고 타고 넘기를 반복했다.
산은 우거진 나무들로 가득했지만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원래부터 이곳이 서늘한 날씨라곤 해도 산을 한두 개만 넘은 것이 아니다.
금세 검은 셔츠는 땀에 절어 몸에 붙고 말도 지쳐갔다.
다시 한참을 걷다가 바위에 앉은 그는 검은 장화를 벗어 거꾸로 들었다.
탁탁 털어대니 흙이 주르륵 쏟아졌다.
그리고 다시 걷기를 반복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폭포를 발견한 것은 행운이었다. 고삐 풀린 말은 뛰듯이 걸어가서 수면에 머리를 처박았고, 레드는 주변을 살펴본 후 옷을 훌훌 벗어 던졌다. 그리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이런 미친….
말도 안 되게 시원했다.
입을 벌려 물을 꿀꺽꿀꺽 마신 그는 몸을 씻어내고 바깥으로 나온다.
바로 그러다가 여자들과 눈이 마주친 것이다.
둘은 레드와 마찬가지로 산을 헤매고 다닌 것인지, 땀범벅인 데다가 부산스러운 갈색 머리를 하고 있었다.
짐승 가죽옷을 입은 두 여자는 입을 헤 벌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중 동생으로 보이는 여자가 입을 열었다.
“어…, 언니. 아무래도 나 너무 오래 굶주렸나 봐. 이제 헛것이 보여.”
“설마 내가 보고 있는 그거니? 이게 꿈이라 해도 좋구나. 좋아.”
그러면서 지저분한 소매로 입가를 슥, 하고 닦는다.
이런 상황에서 호들갑을 떨면 더 난감한 지경이라, 오히려 레드는 천천히 다시 옷을 꿰차 입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그녀들은…. 그걸 구경했다.
활짝 벌려진 손가락들 사이로.
“저는 젠. 쟤는 젬이에요!”
자매는 약초꾼이라고 했다. 경황이 없어 몰랐는데, 등에는 망태기가 있었다.
“보시다시피 길을 잃었는데 민가로 안내해 주겠어?”
“몬스터가 아니라면야 어려울 것도 없죠.”
“친절하군.”
“인간들끼리 돕고 살아야죠.”
레드는 말에 젬을 태우고 고삐를 잡으며 걸었다. 그리고 자매의 안내를 받아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초입에서 지도를 펼쳐 봤는데 역시나 지도에는 없는 곳이다.
말을 가지고 있고 옷차림도 고급스럽다. 게다가 장검. 지도까지 가졌으니, 언니인 젠은 레드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 현상금 사냥꾼인가요? 우리 마을에 범죄자는 없어요.”
“난 그냥 떠돌이 용병이야. 그런 귀찮은 건 안 해.”
무뚝뚝하게 대답한 레드는 마을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날 하루를 마을에서 묵었다.
그 마을이 시작이었다.
산 곳곳에 여러 마을이 흩어져 있었다. 허름한 오두막부터 토굴까지 다양했는데, 주민들의 영양 상태가 몹시 나쁘진 않았다.
다만 힘겹게 살아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사람들은 의심의 눈길을 보내면서도, 레드의 무기를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드는 마을 사이를 분주히 돌아다니며 다른 마을의 존재를 캐묻고, 지도에 표시했다. 그런 행동을 하니까, 당연히 불청객이 찾아 왔다.
“떠돌이 용병이라고? 도저히 용병으로 안 보이는 걸? 용병이 뭐 주워 먹을 게 있다고 여기로 와?”
짐승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은 남자의 체구는 엄청나게 컸다. 그리고 아주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초록색으로 염색한 머리였다.
“넌 누구냐?”
레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그의 무기를 눈여겨보았다.
커다란 둔기였다.
저기에 잘못 빗맞으면 두개골이 박살 날 터이다.
일행이 있는 줄 알고 더 기다려 봤으나, 레드 혼자인 걸 알고 이제야 나타난 놈이었다.
“잠깐만요! 레드는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우리에게 아무 짓도 안 했다고요!”
“닥쳐!”
달려드는 젬을 남자가 발로 걷어찼다.
힘없이 옆으로 나뒹군 젬은 복부를 잡고 신음한다.
“누구냐고 물었다. 이 새끼야!”
“내가 누구냐가 중요한 게 아니야. 네가 누군가가 중요한 거지.”
“나? 내 이름은 무에타이라고 하는데?”
그걸 보고도 평정심을 잃지 않은 레드는 천천히 일어나 검 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 * *
아레이즈의 성문이 열리고, 병사들이 나와서 마을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영주가 일할 사람을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모여든 사람들은 동전과 점심을 받았다.
그들은 나무를 나르고 다리를 보수하는 등의 일을 했다. 벌채하는 것도 모자라 나무꾼들에게서 묵은 나무를 사들였는데, 그 장작들은 영주 성 뒤편에 차곡차곡 쌓였다.
사람들은 많은 양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돌로 된 성을 난방하려면 저렇게 나무가 많이 들어가나 보다 생각했다.
이제 와서 영주가 좀 등 따듯하게 지내겠다는데 뭐라고 말릴 사람도 없다.
“영주님이 올겨울을 단단히 준비하시는군.”
성이 갑자기 활기를 띠기 시작했지만, 사람들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모른다.
그저 돈을 주니 일할 뿐이었다.
병사들은 뭘 하는 것인지, 집에 들르면 허겁지겁 빵을 집어 먹기 일쑤였다.
당나귀들이 끄는 수레가 돌아다니고 짐을 옮기는 사람들이 뛰다시피 했다.
평소와 다르게 분주해진 거리에서는 애꿏은 닭들만 손해였다.
닭이 옆으로 날아다니면서 깃털이 날리는데, 그 깃털이 옷에 달라붙는지도 모르고 걷는 남자가 한 명 있었다.
무거운 안색으로 걷던 그는 마을에서 유일한 신부였다.
세인트 레이크 출신으로 여기, 북부 오지까지 오기에는 정말 많은 사연이 있었다.
이제 40대 중반에 접어든 신부의 안색이 좋지 않은 이유는, 바로 영주의 호출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게 없는데.”
그는 사람들이 인사를 건네는 줄도 모르고 중얼거렸다.
“대체 왜 나를 불렀을까?”
본디 권력과 종교는 앙숙지간이었다.
정확히 왜 불렀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좋은 일로 호출한 것은 아닐 것이다. 더구나 아레이즈의 새 영주가 잔인한 사람이라고 소문이 퍼진지 오래였다.
신부도 물론 그가 여자를 죽이는 장소에 있었고 말이다.
그는 물욕이 없는 사람으로 헌금을 심하게 걷지도 않았다.
그가 세운 교회라는 것도 여관으로 쓰다가 버린, 허름한 건물일 따름이다. 그리고 주일마다 애들과 어른들을 모아서 글을….
“잠깐. 글을 가르치는 것 때문인가?”
신부는 덜컥 자리에 멈춰섰다.
성 앞에 도서관 건물이 있긴 해도, 그건 현재 영주가 세운 건물이 아니다.
전대 영주가 세운 거니까, 지금 영주가 글을 가르치는 것에 달가워할 거라는 보장이 없잖아.
“그렇구나, 누군가가 귀띔을 해준 거야. 영지민이 쓸데없는 것에 눈을 뜬다고…! 불쾌해하는 것일는지도 몰라.”
넓적다리 부분을 ‘탁’ 친 신부는 그제야 감을 잡은 것만 같았다.
사실 그가 글을 가르친 이유는 성경을 읽게 하기 위함이었는데 말이다.
그 후로 열심히 변명거리를 생각하며 성으로 향하는 신부였다.
도중에 병사들의 검문을 받고, 마플이 걸어 나와 옷에 묻은 닭털을 떼어내 줄 때도 그는 정신이 없었다.
오로지 영주님 앞에서 어떻게 핑계를 댈 것인가에 골몰해 있었기 때문이다.
층계를 오르는 신부의 다리가 떨렸다.
남이 본다면 아무리 그래도 모든 것에 초탈해야 할 종교인이 참 유난을 떤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신부의 사정이란 것도 있었다.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그는 여러 유형의 사람을 보았다.
꼭 강렬한 첫인상 때문만이 아니라. 그런 그의 경험이 말해주고 있었다.
‘과거에 골드 힐의 영주가 진짜 잔인한 사람이라고 느껴졌었지.’
신부가 보았을 때, 골드 힐의 영주는 광기에 물든 사람이었다.
먼발치에서 보면서도, 고개를 저어가며 피했던 그이다. 하지만 아레이즈의 영주는 뭐랄까….
그와는 비교도 안 되는 섬뜩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게 바로 신부가 받은 느낌이었다.
눈 하나 깜작이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였다.
고문하는 것을 벗어난 단계.
그렇다고 완전히 미친 것 같지도 않다.
사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매우 드물고 그만큼이나 위험했다.
* * *
세인은 가장 높은 성루에서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바라보는 곳에는 아레이즈의 깃발과 가이더의 국기가 펄럭이는 중이었다.
가이더의 국기는 아레이즈의 깃발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서 나부끼는 중이었다.
국기는 붉고, 아레이즈의 깃발은 푸르렀다.
그는 한참 오래전부터 여기에 앉아, 이런 대비 됨을 구경했다.
그러다가 인기척이 나서 고개를 돌려보니, 신부가 와있었다.
“영주님을 뵙습니다.”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이군.”
목이 바싹바싹 타들어 간 신부는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그런 그를 유심히 바라보는 세인이었고 말이다.
“종교인은 비밀유지의 의무가 있지?”
“예.”
고해성사할 때만이지만, 영주 앞에서 그런 것까지 시시콜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에게는 이 성이 짐처럼 느껴진다. 이 성은 모두의 애국심을 인질로 삼아, 이렇게 버티고 있지. 우린 여기에 붙박인 존재야. 기사들과 사람들은 이 상징물에 자신들의 모든 기치를 걸어두었지.”
“….”
“가끔은 말이야. 이 깃발들을 배반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훌쩍 떠나고 싶어. 하지만 이런 나의 본심은 남들에게 필요 없는 것이지. 남들이 생각하는 본질을 배반하는 것이야.”
진심으로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속이 답답해서, 누군가 사람에게 이야기하긴 해야겠는데…. 그렇다고 대꾸를 원하는 건 아니다.
경험상 어떤 류의 이야기인지 눈치챘으므로 신부는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세인도 제대로 들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정작 어디로 떠나고 싶은지도 말하지 않았다.
“배덕자가 되지 않으려면 결국, 여기에 내 뼈를 묻어야 하겠지.”
그런 말을 하며 세인이 다가왔다.
신부의 입은 더욱 바짝 말라 들어갔고 말이다.
그때였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 그의 발치에 떨어졌다.
그것을 바라본 신부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뭐지? 이걸 왜?
“홀리 레이크 출신이라고?”
“예? 예! 그렇습니다.”
“성국이라. 정말 좋은 곳이라고 들었어. 그 먼 곳에서부터 이런 곳까지 왔으면, 정말 고생 많이 했겠군.”
신부는 조심스럽게 세인이 던져준 돈주머니를 받아들었다. 그 안에는 은화가 잔뜩 들어 있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허리를 굽히고 있자. 세인이 덧붙인다.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기사들에게 들었다. 교회가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라더군. 신의 집을 보수해. 그리고 그의 사랑을 우리 주민들이 많이 알게 하길 바란다. 당신은 타락한 종교인과는 다르겠지. 성국 출신이니까.”
“성주님, 이건. 저기… 제가 한 달에 받을 수 있는 헌금의 양은 정해져 있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더듬거리는 신부 앞에서 세인은 자기 할 말만 고집했다.
“고생만 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기둥이 되면 더 좋겠지만, 그게 무리라면…. 그들에게 최소한의 안식처라도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 그만 가봐라.”
그리고 세인은 등을 돌렸다.
그는 다시 깃발들을 올려다보며 자신만의 생각에 골몰하는 듯했다.
이렇게 되면 도무지 말을 걸 분위기가 아니었다.
뒷걸음질 치며 그 자리를 빠져나온 신부는 영주의 호의에 혼란스러워했다.
이건 그가 예상했던 그림이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