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 9화. 금화의 가치 (1)
영지를 다스린다는 것은 어떤 일일까?
솔직히 영주가 신경 쓰지 않아도 성은 잘 굴러간다.
개판이 되긴 하지만 말이다.
개판이 돼도 사람들은 어떻게든 삶을 꾸려나가기 마련이었다.
예를 들어 가끔 이야기에 나오는 게, 이인자가 멋대로 권력을 잡고 영지민을 괴롭히는 것이다. 그래도 영지민은 떠나지 않을 것이며, 영지는 어떻게든 굴러가기 마련이다. 생활 만족도는 바닥을 치겠지만 말이다.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이 펼쳐지더라도 영지민들은 어떻게든 살아가야만 하니까.
문제는 영주의 다른 마음 씀씀이인데…. 영지민이 보다 잘 살기를 바라며, 영지의 형편이 안전하게 굴러가기를 바랄 때이다.
제대로 손을 대려고 하면 한도 끝도 없는 게 영지경영이다.
불과 몇 명이 많은 사람을 책임지려는 것이니까 한계도 존재했다.
더구나 미래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면 흔들리기 쉬운 환경이다.
그 속에서 얼마나 최선을 다할 수 있는가에 대한 한계가 판가름 난다.
서류들을 정리하던 세인은 맥을 호출했다.
불려 나온 맥에게서는 미미하게 술향기가 났다. 하지만 세인은 모른 척해주었다. 그보다는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말했다.
“우리에게는 돈이 필요해.”
“그거야 언제나 그렇죠.”
“병사들 장비 상태도 괜찮고. 군량도 있고. 무기도 있어. 대장장이들도 괜찮은 상태고. 하지만 문제는 영지민과 병사의 만족도야. 전 영주님이 기사에게는 섭섭하게 대하시지 않았겠지만, 그 외의 사람에게 지금의 충성심을 바라기는 어렵지. 좋은 무기가 있어도, 그 무기를 든 사람들의 결속력이 없다면 곤란해. 충성심은 뱃심이 뒷받침해줘야 하는 거고. 그 뱃심은 든든하게 채워진 위장에서 나온다.”
맥은 세인의 말에서, 그가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의 충성심을 당연한 요구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조금 유별나다고 생각했다.
이 시대에 그런 유형의 지배자들은 흔치 않다.
“복지 수준도 그렇고. 외부의 목책도 수리해야 해. 날씨가 점점 더 추워지고 있어서 장작도 들여와야 하는데, 인건비를 충당하기가 쉽지 않다. 결국, 돈이 필요하다는 소리다.”
“제가 해야 할 일을 말해 주십시오.”
“나와 동행하지.”
맥이 숙였던 고개를 들자 세인이 설명했다.
“이웃 영지에 돈을 빌릴 거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토를 달 처지가 아녔다.
지금 자신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동행하겠다고 한다.
그 정도로 적극성을 보이는 일이다.
손가락으로 입을 매만지던 맥이 물었다. 당연히 거기로 가겠거니 하고 말이다.
이웃 영지라고 해봐야 두 개니까.
“디펜더스로 가실 겁니까?”
“아니. 골드 힐로 간다.”
맥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돈을 빌리러 간다는 게 수치스러워서가 아녔다.
그냥 좀 이해가 안 됐다.
“정말 골드 힐요?”
고개를 끄덕인 세인이 일어났다.
설명은 끝났다는 몸짓이다.
머리를 긁적거렸지만 결국 맥도 일어선다.
골드 힐이라니….
거긴 좀….
왜 하필….
* * *
성문을 빠져나온 기마가 외곽을 끼고 돌았다.
공식적인 방문이 아니었고, 예고된 외출도 아니었으므로 깃발과 마차는 없었다.
아주 즉흥적인 외출이었다.
외관상으로 그렇게 보였다.
북부가 원래 실속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괴팍하기까지 했던 전대 영주에 길들여진 맥은 이런 행동에 구태여 토를 달지 않았다. 하물며 이제 눈의 허리띠 지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음에야,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말을 탈 줄 아는 병사 둘과 맥. 그리고 세인은 방패 두 개와 활, 숏소드를 장비했다.
맥의 경우에는 숏소드 말고도 무거운 메이스가 안장에 매달려 있는 상태였다.
방패는 나무판 위에 철로 덧댄 방패였고 매우 튼튼해 보였다.
“솔직히 저는 레드경을 데려가실 줄 알았습니다. 그게 더 편하실 테니까요.”
“당신이 기사들의 대표 격이잖아. 당신과 같이 가는 게 맞지.”
말 위에서 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받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진 않다.
마구간에서 갇혀 있던 말들은 밖으로 나오자, 탈출했다고 생각했는지 활기차게 뛰었다. 그 때문에 나무들이 옆에서 바람 소리를 내며 스쳐 지나갔다.
그 속도가 너무 빨랐기 때문에 흥분한 말을 진정시켜야 할 정도였다.
얼음이 얼어붙은 나무 밑동에는 그늘마다 녹지 않는 눈이 있었다.
가끔 보이는 개울들도 졸졸 소리는 내지만, 얇은 얼음 밑에 숨어있다.
말들은 주황색 낙엽들이 얼어붙어 있는 땅 위를 달렸다.
다리를 지날 때도 낙엽들은 푹신한 융단 역할을 했다.
출발자들의 등 뒤에 자리 잡고 있는 성이 점점 작아지고, 그들은 숲의 초입부에 접어들었다.
흙 알알이 굳어 있는 검은 땅. 그리고 하늘 높이 솟아올라, 가지를 활개 치고 있는 침엽수들이 여행자를 반긴다.
골드 힐로 가는 길에 종종 이족보행을 하는 동물들과 마주쳤다.
보라색 눈알을 빛내며 걸어 다니는 코끼리들은 큰 귀를 펄럭이며 나무의 과일을 따 먹는 중이었다.
병사들과 맥은 아주 멀리에서 두 발로 서있는 코끼리를 구경하며, 세인의 눈치를 보았다.
영주가 등에 뿔이 나 있는 코끼리를 습격하자고 할까? 그러면 귀찮아지는데.
그러나 세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동물이잖아.”
동물은 배고플 때만 인간을 습격한다. 그런 놈들을 다 잡았다간 생태계가 무너질 것이다.
말들은 낮에 달리고, 점심때 한번 길게 쉬었다가 달리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다음 날 아침까지 온전히 쉬었다.
밤이 오려는 기색이 보이면 영주와 부하들은 비교적 높은 지대를 찾아 야영지를 세웠다.
그때 펼쳐지는 텐트는 작고 낡았지만, 구멍은 전혀 없다.
단지 여기저기 기우긴 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튼튼해 보인다.
세인은 병사들이 먹는 것과 같은 것을 먹었지만, 병사들이 그걸 알 리가 만무하다. 언제나 떨어져서 먹었기 때문이다.
잠도 따로 자는 것처럼.
그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잠도 같이 자고 식사도 같이하면 더 편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는 귀족이니까. 평민들과 귀족이 붙어 잔다면 긴장한 평민들은 잠을 이룰 수 없을 것이었다. 그건 병사 입장에서 학대가 분명하다.
* * *
며칠이 지나 골드 힐이 가까워지자, 바닥에 깔린 나뭇잎은 모조리 은행으로 변했다. 그래서 이제는 시각적으로 노란 비단길 위를 걷는 것만 같았다.
나무들이 풍기는 냄새도 더 선명해지고, 하늘에는 먹구름이 보였다.
곧 비가 올 것도 같다.
비를 머금은 먹구름 아래, 작게 성이 드러나 보였다.
아주 작게 말이다.
멍하니 정면을 응시하며 말고삐를 잡고 있는데, 맥이 작게 소리쳐왔다.
“영주님. 고블린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세인이 말했다.
“잡자.”
말이 멀리에서 멈추었으나, 고블린들은 말의 노린내를 맡은 것 같았다.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주변을 살폈다.
고블린들은 시력이 좋지 않았지만, 땅딸보였고 근육질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
초록색의 근육은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마치 바위가 매달려 움직이는 것 같았다.
보라색 손톱과 이빨에는 독이 묻어 나온다.
한참을 킁킁거리던 그들은 드디어 주춤주춤 다가오는 병사들의 살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소리쳤다.
“으아아아아!! 으아아아!!”
그 고함에 자극을 받은 다른 고블린도 소리 지른다.
“으아아아! 으흐아아아아!”
공기가 요동치고, 나무 위에서 놀란 새들이 푸드덕거리며 날아올랐다.
고블린들은 눈을 아주 크게 뜨고 무서운 얼굴로 울부짖었다. 그리고 땅에 박혀 있는 큰 돌을 두 손으로 잡았다.
콰드득! 콰드득!
커다란 돌이 땅에서 뽑혀 나왔다.
진흙이 묻어 있는 그 돌은 고블린에 의해 앞으로 던져졌다.
맹렬히 회전하며 날아오는 돌을, 병사들이 두 손으로 든 방패를 전면에 세우며 막아냈다.
따닥! 팡!
비스듬히 기울어진 방패의 면을 타고 튕겨 나간 돌이 땅을 구른다. 그리고 계속 구르던 돌은 다가서는 맥의 발치까지 도달했다.
맥은 방패를 왼손에 들고 메이스를 뽑아 든 상태였다.
멀리에서는, 말 위에 있던 세인이 그 모든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고 말이다.
나이 든 맥은 이제 공격형의 전사 역할을 하는 것이 좀 힘들었다. 그래서 경험과 숙련에 의지한 방어가 특화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고블린 정도를 공격하지 못해 쩔쩔맬 정도는 아니다.
스스로 분을 못 이긴 고블린들이 앞으로 뛰쳐나오자.
쾅!
소리가 나고 병사 한 명이 뒤로 나뒹굴었다.
무거운 몸집의 고블린은 괴성을 지르며 양손을 마주 잡았다. 그리고 해머로 내리치듯 아래로 찍었다.
그럴 때마다 방패에서 펑펑 소리가 나며 높이가 내려앉는다.
맥은 다가가, 발로 그런 고블린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그러자 고블린의 큰 몸집이 옆으로 나뒹군다. 그리고 금세 일어나 머리를 뒤흔드는 녀석을 향해 메이스가 날았다.
따악!
정확히 메이스가 두개골의 이마 쪽에 맞으며, 고블린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피가 흩뿌려지는 가운데, 맥은 휘청이는 고블린에 시선을 고정하면서도 방패를 옆으로 고쳐 맸다.
쾅!
그러자 약속이라도 한 듯 돌멩이가 날아와 방패를 때렸다.
다시 던져진 돌멩이는 파공성을 내며 날아갔지만, 맥은 그것을 가볍게 피했다.
맥을 스친 돌은 나무에 부딪혔고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굵은 나무 기둥이 반으로 부러진다.
내려앉는 나뭇가지 소리가 요란할 때, 그 긁히는 소리를 뚫으며 맥이 앞으로 나갔다.
그전에 이미 굵은 허리를 풀 스윙으로 돌려, 머리가 부서진 고블린의 얼굴을 박살 내 논 후이다.
남은 고블린 한 마리는 비명을 지르며 다시 돌을 집어 던졌다. 하지만 맥은 방패를 돌리며 계속 막았다.
병사들이 두 손으로 잡고 막았던 것과는 달리, 한 손으로 수월히 막아내던 맥이 거리를 완전히 좁히자. 고블린은 두 손으로 방패를 잡고 빼앗으려고 용을 쓴다.
무서운 힘이다.
소의 뿔도 뽑아낼 정도의 힘이었다. 하지만 맥은 매달린 고블린을 향해 오히려 달려들었다.
꽝!
방패 차지로 뒤편 암석에 부딪힌 고블린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런 녀석의 머리 위로 천벌처럼 메이스가 내리쳐진다.
피와 뇌수. 그리고 눈알이 허공으로 튀었다.
* * *
불유쾌한 조우가 끝나고 속이 울린 병사들이 바닥에 토악질하는 가운데, 맥이 다가오는 세인을 향해 말했다.
그는 말하면서도 골드 힐의 영주라고 부르지 않고 ‘님’자를 붙였다.
다른 영지의 영주는 세인과 대등한 관계일뿐 아랫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골드 힐의 영주님이 근방을 관리 안 하시는 걸까요?”
세인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한다.
“성에서 여기까진 좀 멀어. 애매한 거리라, 관리 안 한다고는 볼 수 없지.”
그날을 기준으로 이제 하루만 지나면 골드 힐 성에 진입이었다.
먹구름이 낀 하늘에서 빗방울이 쏟아질 때. 맥은 따로 떨어져 바위 위에 앉아 있는 세인에게 다가섰다.
세인은 후드를 푹 눌러쓰고 점점이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감상 중이었다.
회색 하늘 아래, 점점 선명한 색을 되찾는 겨울 개나리를 보고 있다.
“영주님. 내일이라도 저 혼자 들어가겠습니다. 굳이 같이 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맥의 말에 세인이 고개를 흔들었다.
“기왕 여기까지 온 김이야. 같이 들어가야지.”
돈을 빌리러 가는 길이다.
물론 들어가서 다짜고짜 그렇게 말을 하진 않겠지만, 어떻게 포장을 해도 목적은 돈이다. 게다가 골드 힐의 영주 품성은 아주 유명했다.
맥은 점점 걱정스러워졌다.
굳이 영주가 모욕을 당할지도 모르는 순간을 감내할 필요가 있을까?
자기 혼자 들어간다고 해도 만나주지 않을까?
세인은 속이 진정된 병사가 천막을 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내가 간다면 돈도 그렇지만, 더 좋은 것을 얻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골드 힐의 영주는 세인 또래의 남자였다. 그런데 그의 성격은 모질기로 유명했다.
또 그는 귀족적인 사람이었는데…. 어떨 때는 너무 천박하게 굴어서 비 귀족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의 윗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여기 북부로 오기까지 수치스러운 역사였다.
복수와 관련해 영지전이 발발했는데, 그의 조상이 상대 귀족에게 끔찍한 짓을 해버렸다.
영지전 선포 후 평야에서 일렬로 서서 전투를 하는 방식을 지킨 게 아니었다.
기습에 기습을 이은 전략으로 이겨 버렸다.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공성전으로 이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는 분명히 공성전까지 노리고 가서 잔인하게 상대 성의 사람들을 학살해 버렸다.
당연히 상위 귀족들의 분노는 물론이고 국왕 쪽의 노여움도 극에 다다랐다. 그래서 처음에는 중앙 권력에서 밀려나, 쫓기듯이 북부로 나온 것이다.
인간들끼리 뒤통수를 치고, 머리를 굴려 가며 씨를 말려 버리면….
몬스터라는 공동의 적 앞에서 스스로 망치는 길이 될 뿐이다.
귀족은 상인집단이 아니었다.
필요나 이윤에 의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행동하다 보면, 그들이 다스리는 영역은 언제 지옥이 돼도 이상하지 않았다.
물론 세상에 부패한 귀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정도란 게 있는 법이다.
그들의 세계에는 책임감이 있고, 그것에 바탕이 된 룰이 있다.
미운털이 단단히 박혀 북부로 온 골드 힐의 영주는 대를 이을수록 회개는커녕, 점점 이상한 짓만 했다.
그래서 다른 성의 영주들은 물론, 웬만하면 북부의 모든 가문을 보듬어 안고 포용해야 할 네이블 가문조차 질색하는 편이었다.
‘골드 힐의 새 후계자도 아버지와 조상을 닮아, 변태에다가 못 말리는 사람이라고 하던데.’
‘왜 그들에게 명예가 돌아가야 하는지 모르겠어. 잇속만 챙기잖아. 그들이 과연 수호 가문이라고 할 수 있나? 모든 기사가 존중해야 할 필요가 있느냐는 말이야. 그냥 시류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북부로 도피한 약삭빠른 족속이 아닌가. 그 도피한 지점조차 그들에게 유리한 부분이었을 뿐이야.’
이렇듯 귀족들의 평가도 박했다.
그런 평가를 떠나 객관적으로도 골드 힐의 현 영주는 삐뚤어졌으며 망나니이다.
지금 세인은 이런 인물에게 돈을 빌리러 가는 것이다.
골드 힐의 영주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기본적인 예의를 깨고 큰 모욕을 줄지도 모른다.
평판에 한해서라면 더 잃을 게 없을 테니까.
출발했을 때와는 달리. 맥은 골드 힐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불안해졌다.
자기라면 몰라도 세인이 수치를 당하면 어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