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8화 (8/307)

# 8

& 8화. 호화로운 식사

결과적으로 세인은 무장 검사를 하면서 전부를 보는 게 아니라, 일부만 보는 방법을 선택했다.

예를 들어 방한화를 무작위로 뽑아서 가져와 보라는 식이다. 활과 화살도 마찬가지였다. 그 외는 보고서로 기름의 양이나 장작 상태를 점검했다.

“물론 허위 보고를 받는다면 나는 무척이나 화가 날거야.”

“대체 누가 목숨을 걸고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그래 나도 남을 죽이고 싶지 않아서 노파심에 하는 말이다.”

“….”

이제 막 영주 자리에 오른 남자가 하는 말치고는 끔찍한 구석이 있었다.

세인은 방한화 몇십 켤레를 직접 검사했다.

밑창이 제대로 붙어 있나, 끈이 끊어지지 않았나 등을 유의해서 보았다.

검이나 도끼들은 녹슨 것들이 많았다. 그걸 내려다보는 세인은 트집을 잡지 않았다.

이 추운 날에 검이나 도끼를 매일 손질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검날이 손잡이 위에서 삐걱거리지만 않는다면, 눈감고 넘어가 줄만 했다.

앞으로 정말 힘든 일이 벌어진다면, 시키지 않아도 병사들은 검이나 도끼를 손질할 것이다. 자기 목숨이 걸려 있는 일이니까.

활도 풀어놓은 시위만 제대로 검사한다.

대신 창이나 방패는 꼼꼼히 검사했다. 창이나 방패를 소홀히 한다는 것은 정말 문제였기 때문이다.

창은 병사들의 무력을 제일 효율적으로 높여주는 무기이다. 그리고 방패는 목숨을 보호하는 직접적인 수단이었다.

모든 검사를 마친 그는 검은 망토를 뒤집어쓰고 마구간으로 향했다. 그리고 말의 상태를 한번, 죽 둘러본 후 한 마리 위에 올라탔다.

하늘에서 진눈깨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말의 입김이 하얗게 흩어졌다.

세인은 창백한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고삐를 움직여 말에게 신호를 주었다. 그러자 말이 힘차게 달리기 시작한다.

“가자.”

세인은 성벽 옆으로 바싹 달리며, 눈으로 스쳐 지나가는 성벽을 담았다.

하나하나 눈과 손으로 더듬거리며 살펴보는 것만 못하지만, 이러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몸이 위아래로 들썩이는 탓에 목 뒤의 후드가 뒤통수를 건드렸다. 그게 귀찮아진 세인은 후드를 잡아당겨 푹 눌러 썼다. 그러자 그의 붉은 귀가 검은 천에 가려졌다.

말과 그의 입김이 한 방향이 되었을 때, 달리던 속도가 점점 줄어들었다. 그리고 세인의 눈은 검은 벽에 새겨진 글에 멈추었다.

그의 조상들이 조각가를 시켜 성벽에 새긴 글이었다.

방패는 비바람에 무너지지 않는다는 식의 글이다. 그러면서 주의할 것은 방패 밖이 아니라 내부에서 부는 산들바람이란 이야기로 끝맺음을 한다.

지배자는 피지배자들의 공포와 불안을 조율해야 한다는 교훈이 바로, 거기에 새겨 있었다. 이제 말은 스스로 천천히 달리며, 성벽에 새겨진 글귀 한줄 한줄을 주인의 가슴에 다 담도록 배려했다.

천천히 걷는 속도가 된 말과 함께 다시 마구간으로 돌아온다.

그는 말에서 내리며 마구간 지기에게 고삐를 주었다.

하녀들이 다가와 물을 준비하겠다고 했을 때 세인은 이렇게 말했다.

“차가운 물로.”

뜨거운 물을 쓰게 되면 그만큼 장작이 소비된다. 그런 것이 모여 수많은 낭비를 낳는 것이었다. 그는 그런 것을 질색했다.

세인은 장갑을 벗으며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위로 올라가 얼음장 같은 물로 온몸을 씻었다.

목욕하는 와중에 입을 벌리니, 입김이 새어 나온다.

약간 알몸으로 떨며 자신의 방에 가니, 작은 벽난로에 장작이 타고 있다.

원래 영주 방에 머물러야 하는 세인이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체취가 밴 장소에서 드러누워 잔다는 게 끔찍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방은 작았고, 적은 장작으로도 충분히 덥힐 수 있었다.

의자에 알몸으로 앉은 그가 벽난로 앞에서 불을 쬐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리고 생각한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하고 말이다.

세인의 두 눈에 이글거리는 불길이 담겼다. 오래 보고 있으면 시력에 안 좋을 테지만 그는 그 불길에 혼이라도 빼앗긴 듯, 응시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며칠 후 성내가 돌아다니는 하녀들로 분주했다.

세인은 마플과 함께 돌아다니며 검지로 이것저것을 가리킨다.

그때마다 마플이 화들짝 놀랐다.

특히 그녀가 경기를 일으킬만한 부분은 바로, 벽에 걸린 그림을 가리켰을 때였다.

“예? 설마 이 그림들을 파시려는 거예요?”

그렇다. 현재 세인은 성안의 물품들을 팔려고 손가락질 중이었다.

마플은 목록이 적힌 나무판을 가슴에 끌어안으며 그림만은 안된다고 결사적으로 말렸다.

“가뜩이나 성에 그림도 부족한데, 나중에 손님이 오시면 어쩌시려고요? 흉측한 성이라고 입을 모아 이야기할 거예요. 그런 입방아가 영주님 품위에 손상을 입힌다고요.”

세인은 가만히 서서 마플을 바라보았다.

마플은 영문을 몰라, 세인과 눈을 마주친 채 가만히 있었고 말이다.

지금, 세인이 알고 있는 진실을 마플에게 이야기해준다면…?

그러나 이 여자는 도망갈 곳이 없었다.

이 중년 여자의 삶은 진작, 이 성안에 매몰되어 버렸으니까.

앞으로 절망이 닥쳐올 거라고 이야기해준들 그녀가 갈 곳은 없었다. 그리고 그건 그도 마찬가지다.

“미안해.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

“예?”

“그림을 판다는 소리야.”

“….”

결국, 마플은 한숨을 내쉬며 그림들을 목록에 적어 넣었다. 그리고 고풍스러운 탁자와 몇 안 되는 은 식기도 어김없이 목록에 올랐다.

이러다가 성안에 남아나는 게 없어질 위기가 되자, 마플은 퉁명스럽게 이런 소리까지 내뱉었다.

“도서관은 처리 안 하실 거예요? 거기 있는 책들 값도 꽤 될걸요?”

“무게도 무게지만, 그걸 사줄… 귀족을 구하는 게 문제지.”

그렇게 대꾸하면서도 세인은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바지에 두 손을 넣고 걷던 그는 마음 한구석에 이루어지지 않을 상상을 담았다.

그건 먼 훗날 영지민이 그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관람하는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정말 어림도 없는 공상이었다. 하지만 영주라면 그런 꿈 정도는 마음 한 자락에 품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성안의 물건을 주기적으로 들리는 소형 상단에 팔아버린 세인이 그 돈으로 무엇을 했을까?

오랜만에 성의 주방이 하녀들로 북적거렸다.

하녀들은 뭐가 좋은지 까르르 웃으며 밀가루를 반죽한다. 그러다가 상대의 볼에 손가락 끝으로 하얀 점을 찍는 등 장난을 쳤다.

병사들은 근처를 지나가다 풍겨오는 빵 냄새에 군침을 흘렸다. 하지만 언감생심, 주방을 갸웃거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누구를 위해 만드는 음식인지 알았으니까 말이다.

마플은 하녀들 사이를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서두르라고 야단을 쳤다. 그러면서 크림 파이는 너무 오랜만에 만들어 본다고 투덜거린다.

“마님이 있을 때는 그래도 석 달에 한 번 정도는 만들었었는데, 이제는 레시피를 잊을 정도야.”

어린 하녀들은 크림을 보며 황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건 얼마나 달까? 혀에 조금만 찍어보기라도 하면 소원이 없겠는데 말이다.

초저녁이라고 말하기 힘든 이른 시간, 세인은 아주 긴 식탁의 상석에 앉았다.

여러 낡은 테이블을 홀에 가져와 붙인지라 길이가 기린 목만 했다.

식탁 위에는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많은 음식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추운 성안에서 너무 빨리 식지 말라고 하얀 천들이 덮인 상태였는데, 그 하얀 천 위로 음식 기름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고소한 냄새로 천을 물들였다.

세인은 자신의 앞에 놓인 수프를 수저로 몇 번 떠먹었다. 호두 가루가 들어 있는 수프를 음미하며 다 먹는데 십 분이나 걸렸을까?

그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옆에 서 있던 마플에게 말했다.

“오늘따라 입맛이 없군.”

“남은 건 어떻게 할까요?”

“알아서 처리해.”

사과와 물병을 들고,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는 세인이었다.

그의 등 뒤에서 마플이 허리를 숙여 보였다.

대놓고 물건을 줄 수 없었기에, 우회적으로 선물을 받은 건 비단 하녀들뿐만이 아니었다.

병사들도 술이나 음식 같은 것을 받았다.

군량으로 쓰이는 것 중, 썩어들어 갈지언정 일정량 비축해야 하는 음식들이 있었다. 그런데 세인은 그것도 다 풀어 버렸다.

능금같이 발간 볼의 소녀들은 흥얼거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하녀 복은 곱게 접어서 성에 놔두고 말이다.

그녀들이 든 바구니에는 싱싱한 사과와 빵들 말고도 평소라면 눈에 담기도 힘든 케이크까지 있었다. 게다가 바구니 위쪽에는 성에서 나부꼈던 커튼들이 얹혀 있다.

이 천이라면 옷을 지어 만들어도 부드러울 것이다.

콧노래를 부르며 오솔길을 지난 한 소녀는 낡은 오두막집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작은 램프 하나에 의지해 사는 그녀의 가족들이 있었다.

어머니는 침모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늘을 들고 램프 가장 가까이에 앉아 있었다.

남동생들은 문을 열고 들어선 그녀보다도, 그녀의 바구니에 올빼미 목이 되었다.

“그게 웬 거냐?”

어머니가 깜짝 놀라는데, 소녀가 웃으며 말했다.

“영주님이 먹고 남은 거예요.”

“막내인 네가, 그렇게나 많이 받아왔어?”

미심쩍은 눈길로 훔친 게 아니냐는 표정을 짓던 어머니 앞에서, 소녀는 안심하란 듯이 더 웃어 보였다. 그리고 바구니를 남동생들 앞에 놓으니, 아이들이 엄마와 누나 눈치를 보면서도 달려든다.

한창 자랄 때라, 먹고 나서 돌아서기 무섭게 다시 배고픈 나이다.

어머니 곁에 앉은 소녀는, 술에 취해서 짚더미 위에 곯아떨어져 있는 아버지를 힐끗 바라본다. 그리곤 어머니의 무릎에 두 팔을 포갰다.

그러자 어머니는 딸이 대견하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도 걱정스러운 말을 내뱉었다.

“영주님 성격이 거칠다고 들었는 데 문제는 없니?”

그러자 소녀는 진심을 담아 고개를 저었다.

“상냥하신 분 같아요. 저것만 봐도 그래요. 보세요.”

아이들이 바구니 안의 음식을 보고 놀라서 환호성을 지르는 가운데, 어머니는 안쓰러운 눈길을 소녀에게 던졌다.

소녀 성격상 영주가 거칠게 굴어도 티를 안 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녀가 정말로 문제없다는 듯이 다시 말했다.

“전보다 훨씬 편해요. 정말로요.”

“….”

*  *  *

세인에게는 당장 두 가지 길이 있었다.

첫째는 그의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두려움에 떨며 그것을 숨기곤 영지민과 병력을 쥐어짜는 길이었다.

두 번째는 지금처럼 덤덤한 마음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다.

사형수 입장이 된다면 시시각각 줄어드는 시간에 공포를 느낄 수 있었다. 혹은 그 제한된 시간 안에서 뭔가 의미 있는 일을 찾거나.

다음날이 되자, 세인은 하녀들이 머무는 숙소에 신경을 기울였다.

그녀들이 괜찮은 곳에서 생활한다는 느낌을 주려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게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장작이다.

일단 몸에 온기라도 돌아야 잘 움직일 것 아니겠는가.

장작을 많이 산 그는 병사들이 경계를 서는 곳도 그렇고, 하녀들의 처소에 잔뜩 쌓아놓게 했다.

옷감도 사서 외투를 돌렸다.

“아무리 그래도 일 인당 하나씩은 너무 많은 것 아닌가요?”

펄쩍 뛰며 좋아해야 할 마플까지 이렇게 말했을 정도다. 그런데 세인은 그런 마플을 고개를 들어 빤히 바라본다.

“몰라서 그렇지 다른 성에서는 이런 게 흔한 거야.”

“그, 그런가요?”

정작 세인도 다른 성의 형편은 잘 몰랐다. 하지만 이렇게 된 거 옷이라도 따듯하게 입고 다니라고 해주고 싶었다.

충성을 받고 싶다면, 일단 가는 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결과이기도 했다.

“성안의 물건은 다 내 것이야. 그렇다면 물건을 판 대금도 내 것이고…. 내 돈을 쓰는 것에 방해를 받아야 할 이유는 없지.”

그러면서 이불 상태는 어떠냐고 물었다. 그리고 결국, 이불도 두껍게 바꾸는 거로 한다.

병사들에게는 귀마개나 모자 같은 것이 지급되게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병사들에게 있어 가장 좋은 것은 따로 있었다.

“창고에 술이 너무 많군.”

소독용이라고 하기에는 구비된 술이 너무 많았다.

세인은 술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보온용이라는 명목 아래 거의 다 풀어 버렸다.

덕분에 근무 시간이 끝나면 코가 빨개져서 돌아다니는 병사들이 늘어났다.

사실 술은 보온과 정 반대 역할을 하는 물건이었다.

일시적으로 몸이 따듯해지지만, 그거야말로 정말 일시적인 것이고 오히려 열 손실이 더 많이 일어난다.

실질적으로 체온은 더 내려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보온용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구실에 불과했다.

당연히 근무시간에 술을 마실 수는 없으니까, 집에 가서 즐기라는 소리다.

기강이 해이해지는 것까지 걱정하기엔, 평소 아레이즈의 분위기가 너무 삭막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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