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7화 (7/307)

# 7

& 7화. 기사님들이 달라졌습니다.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 중 어떤 이는 발광을 할 것이고…. 폭동을 일으키거나 좌불안석이 돼서 벌벌 떨 것이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내게 왜 이런 일이 닥치는 것인지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열심히 하루하루를 산 사람들은 좀 달랐다.

언제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전혀 달랐다.

“왜 그래요?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행크는 자신의 잠자리에서 일어나, 아내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과거 고왔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푸석푸석하게 부어있는 얼굴을 보니. 과연 장성한 아들을 둔 여자가 맞는구나 싶었다.

“그러고 보니 당신도 많이 늙었군.”

순간 아내가 울컥하는 얼굴을 했다.

아마 부지깽이가 있었다면 휘둘렀을지도 모르겠다.

화가 뻗치는 표정을 지었는데, 행크의 다음 말에서 그 표정이 사라졌다.

“여보 그동안 내가 미안했어. 너무 무심했지?”

“예? 뭐라고요? 당신 체했어요?”

“아무리 영지 일이 바빠도 그렇지. 내가 당신이나 내 아들에게 너무했던 것 같아.”

아내는 우락부락한 행크의 얼굴을 보며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무 낯간지럽고 오글거리는 말을 한 이 사람이 정말 내 남편이란 말인가? 도플갱어 아냐?

“당신 미쳤어? 왜 이래?”

“내가 밤새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그동안 내가 너무했던 것 같아. 미안해. 내가 나쁜 놈이야. 앞으로 영지 일도 열심히 할 거지만, 당신과 아들을 챙길게. 결국, 내 소중한 가족이잖아.”

“….”

부부관계가 오래되면 애정으로 사는 게 아니라….

우정, 형제애 비슷한 동료의식으로 사는 경우가 많았다.

행크의 아내는 소름이 돋았다. 왜냐면 너무 짜증 났기 때문이다. 짜증이 심해지면 소름까지 부르는 것이었다.

지금 아내가 느낀 행크는 그야말로 외간남자처럼 낯설고 느끼했다.

“여보 이리 와봐 한번 안아보자. 우리 마지막으로 포옹했던 때가 언제더라?”

“저리 가! 가족끼리 이러는 거 아냐! 징그럽게! 미쳤어?”

아주 많이 정색하는 아내다.

“….”

그리고 그날 아침 식사 자리에 앉은 행크의 아들은 바위에 얻어맞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예? 뭐라고 하셨어요?”

“낚시나 같이 가자고.”

“영지 일은요?”

“반나절 정도 쉰다고 큰일이 나진 않아. 그동안 내가 너무 무심했던 것 같구나.”

“….”

그러니까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젊은 놈이 빈둥빈둥 빙어 낚시나 다니는 건 쓰레기 같은 짓이라고 화를 냈던 아버지가…? 과연 아버지가 맞단 말인가?

그때 때리려고까지 했잖아?

행크의 아들은 도움을 요청하듯이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기가 질린 얼굴로 어깨만 으쓱거릴 뿐이었다.

느끼한 말투로 생전 하지 않던 행동을 하니, 가족들은 당혹스러웠다. 더구나 저런 애정이 듬뿍 담긴 눈빛….

진짜 부담스럽다.

“가자 아들아! 낚시하러!”

아들은 차마 미치셨냐고 말하지는 못하고 이렇게 물어보았다.

“아버지…, 어디 아프세요?”

“….”

*  *  *

영지의 또 다른 기사인 맥은 오랜만에 주점을 찾아갔다.

대낮부터 주점에 출근한 그를 주인이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탁자 위에서 맥주 한잔을 놓고 몇 시간을 보냈다.

“무슨 근심 있소?”

바닥에 대걸레질하던 주인이 다가와 묻자, 맥이 말했다.

“자네는 내일 세상이 멸망할 걸 안다면 어떻게 할 건가?”

“뭐요?”

“이 사실을 남들에게 알려줘야 할까? 아니 자네라면 뭘 할 건가?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면 말일세.”

주인은 코를 팽하고 풀더니 대답했다.

“뭐 바닥을 닦겠죠.”

“….”

맥은 주점을 나와 대장간에 들렀다.

대장장이는 맥을 보고도 못 본 척했다.

보통 대장장이와 기사는 친분을 유지하기 마련인데 이상했다.

그렇다고 안쪽으로 다가서는 맥을 막지도 않는 대장장이였다.

안채로 들어선 맥은 한 젊은 남자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남자는 낫을 수리하고 있었는데, 맥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약간 불만과 자괴감이 어린 얼굴이었다.

“자네는 어른을 보고도 인사를 안 하나?”

“정말 따님과는 끝났습니다. 이제 만나지 않아요.”

“….”

맥은 잠시 팔짱을 끼고 젊은이가 낫을 수리하는 걸 지켜보았다. 옆에서 말이다. 누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불편한 침묵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맥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는 쓰레기야. 나는 그렇게 생각했어. 왜냐면 도박하는 놈들은 나중에 절대 끊지 못하거든. 그런데 필요할 때는 또 그걸 참아…. 그렇게 보면 결국, 참을 수 있는데 도박에 빠진다는 소리 아냐? 그러니까 거짓말쟁이들이야. 도박쟁이는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한다고.”

젊은이는 이미 끝났다고 이야기했는데도 찾아와 이렇게 괴롭히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입을 일그러트릴 듯이 웃으며 그가 말했다.

“그거 혹시 경험담입니까?”

“….”

“정말 끝났습니다. 나가주시죠.”

침묵을 유지하던 맥은 갑자기 말문을 열며 대뜸 말했다.

“내 딸과 결혼하게.”

남자가 놀라 맥을 올려다보자, 맥은 굳은 얼굴로 다시 말했다.

“자네를 좋아한다고 매일 내게 말했어. 적어도 그 애의 말은 진실이야. 두 명이 있다면 두 명 다 진실을 말할 필요까진 없는 거겠지. 그건 내 욕심에 불과할 뿐이란 걸, 나는 최근에 깨달았네. 그 애는 정말 자네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그러니 결혼하게. 내가 별수 있겠나?”

눈을 크게 뜬 남자가 벌떡 일어섰다.

“정말이십니까?”

“내가 거짓말할 사람으로 보이나? 자네처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절대 앞으로는 도박하지 않겠습니다!”

맥은 허리를 숙이는 청년, 빌을 뒤로하고 등을 돌렸다.

사실 씁쓸한 얼굴이었다. 맥은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그 거짓말을 안 믿어…, 라는 말을.

바깥으로 나와보니 대장장이가 서 있었다.

청년 빌의 아버지 말이다. 그도 사실 놀란 표정이었다.

“무슨 일인가? 왜 마음을 바꿨지? 그렇게 반대할 때는 언제고?”

맥은 나오면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우리 사이까지 소원해져야 쓰겠나? 언제 맥주나 한잔하세.”

“….”

“그냥, 우리도 그렇지만. 젊은이들에게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뿐이야. 누구에게나 삶은 짧으니까.”

괴롭게 살 필요는 없는 거겠지. 완벽할 수도 없고. 그냥 이따금 서로의 진심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뿐.

*  *  *

“….”

더이스는 팔베개를 한 채 성루에 누워있다가 긴 얼굴을 찌푸렸다.

생각해보니 또 당번을 서고 있다는 게 어이없었던 탓이다.

춥고, 배고프고. 더구나 술을 못 마신단 말이다.

난 왜 항상 이 꼴이람.

다트판을 가져와 벽에 걸어뒀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이제 다트는 보기도 싫었다.

“아 마음이 이렇게 싱숭생숭할 때는 포도주가 최고인데.”

그러나 근무를 서면서 술을 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그는 시간이 지나서야 성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같이 술 마시러 가자고 붙는 병사를 떨쳐내고, 그는 자신의 방으로 갔다.

그리고 침대에 누웠는데. 문득 달라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계속 같은 좁은 방이잖아!”

양 볼에 거친 두 손을 대고 소리치는 그의 얼굴은 엽기 그림 같았다.

발치에 굴러다니는 포도주병에 손을 댈까 말까 고민하던 그는, 몇 시간 후 일어났다.

그리고 걸었다.

남이 보면 무작정 골목을 걷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분명 고집하는 방향이 있었다.

가뜩이나 추운 영지에서 벌벌 떨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얇은 홑옷을 걸친 여자들이었다.

자기 직업을 고수한다는 게 그래서 어려운 거다.

어설픈 화장을 하고 팔짱을 낀 채 서로 몸을 붙이고 있는 여자들에게 다가간다.

몸을 파는 여자에게 외로움을 달래 보려는 것일까?

곱슬머리의 여자가 다가오는 더이스를 보고 안색을 굳혔다.

“천한 년이랑 다시는 안 보겠다고 하셨잖아요.”

더이스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르고 맑았다.

이렇게 올려다보니 마치 호수 같았다. 그렇다면 자기나 다른 인간들은 그 호수 안에서 거기가 호수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물고기일지도 모른다.

“정말 그럴 가능성이 있군. 강 속의 물고기들은 강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거 아니야. 바깥으로 나가본 적이 없었으니.”

물고기를 물 위에서 내려다보는 인간이 있다면, 저 하늘 위에서도 인간들을 내려다보는 존재들이 있을까? 그렇다면 그 인간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갑작스러운 더이스의 말에 여자가 반문했다.

“예?”

더이스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냥. 생각해보니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내 편견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어. 부질없는 거 같아. 그런 것은 우리 짧은 인생 앞에서는 그리 중요한 것 같지 않아. 무엇보다 나는 당신을 잘 알고 있어. 당신도 그렇지? 초라한 나를 잘 알고 있잖아. 그것보다 더 확실하고 중요한 게 뭐가 있겠어?”

이게 대체 뭔 개소리야?

여자가 당혹스러운 얼굴을 할 때 더이스는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이 너그러운 여자라는 것을 아는 내 교활함을 이용해서 말하건대. 나는 당신이 결국 나의 폭언을 용서해줄 것을 알아. 하지만 거기에 더해서 더 큰 걸 여기에서 바라건대. 부디 나와 결혼해줘.”

그리고 더이스는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나와 결혼해줄래?”

*  *  *

한편 한숨 자고 일어난 세인은 마플에게 뭔가를 부탁했다.

명령이 아니고 부탁이다.

그 부탁이란 장부 같은 것을 볼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장부요?”

“가계부 같은 것이라고 보면 돼. 쓴 게 있어?”

“예. 있긴 있지만 저만 알아볼 수 있게 쓴 거라 알아보시기 힘들 텐데요.”

주저하는 마플 앞에서 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꼼꼼한 그녀 성격에 적어 놓았구나 싶었다.

생각해보면 그녀는 일개 하녀장일 뿐이었고, 직접 작성할 의무도 없었다.

주먹구구식이라고 해도 다른 바쁜 일이 많으니까 말이다.

“가져다줘. 필요해서 그래.”

이윽고 마플이 가져온 것은 전문적인 기록이라기보다는 성의 자질구레한 내부 사정이 적혀 있는 뭉치였다.

구매에 대한 것 외에도 하녀들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는데, 누가 도벽이 있는지. 누구 가정 형편이 나쁜지, 가장 신용 있는 하녀에 대한 것이라든가, 하다못해 병사들에 대한 험담까지 쓰여 있었다.

전 영주가 바라는 것을 제외하면 마플은 꼼꼼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 세인이 보는 것은 전 영주가 전혀 관심 없어 하던 것들이었다.

그는 이것을 통해 성의 내부 사정을 알아가려 한다.

“이 하녀는 월급을 돈 대신 장작으로 받았군?”

“예. 그 집 아버지가 장작 대는 나무꾼들이랑 사이가 안 좋거든요. 그래서 대신, 이렇게 융통해 주었죠.”

물론, 세인은 마플이 하녀에게 월급의 가치보다 훨씬 많은 장작을 안겨준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런 것으로 그녀를 나무라지 않았다. 하녀장이 자신의 사람인 하녀들을 과도하게 챙기는 것이 흠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가져온 기록은 그녀만의 은어로 작성된 부분이 반이 넘었다. 글자에 대한 교육을 받긴 했지만, 그건 너무 오래전이었다. 책상 위에 잔뜩 쌓인 뭉치는 최근 기록에 가까워질수록 특이한 기호나 숫자로 가득 했다.

초를 옆에 두고, 세인은 마플에게 그 기호들을 가리키며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마플은 그 옆에서 더듬더듬하며 내용을 말해주었다.

세인은 그걸 들으며 필요한건 머릿속에 넣으려고 했고 말이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 마플이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

“이거 왠지 치부를 들킨 느낌인데요”

“글을 잘 모른다는 게 수치스러운 건 아냐.”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마플이 묻자 기록을 유심히 살펴본 세인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성의 형편 외에도 여러 부가적인 정보를 파악하는 중이라, 사실 정신이 없었다.

하녀뿐만이 아니고 병사들의 특징에 대해서 쓰여 있었는데, 최근의 것을 보자면 그들이 무엇 때문에 곤혹스러워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살기 바쁜데 글까지 어떻게 신경 써? 글을 꼭 알아야 하는 신분만 아니면 숫자만 알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해.”

“그래도 제가 조금이나마 아니까 이렇게 편하잖아요.”

그건 부정할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인 세인은 손에 든 뭉치를 내려놓았다.

성 밖에 있는 도서관에, 생전 할머니의 바람대로 사람들이 넘쳐흐른다면…. 물론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힘든 이야기였다.

글은 보온을 도와주지 않고, 글은 몬스터를 물리쳐주진 않으니까.

검이 펜보다 훨씬 강하다.

“어쨌든 잘 알았어. 내일도 시간이 되나?”

“이걸 다 읽으시려고요?”

굳이 꼼꼼히 그럴 필요가 있을까? 영주 자리가 할 일 없는 자리도 아닌데 말이다.

마플이 놀라며 눈을 크게 뜨자, 세인은 그렇다고 말했다.

그의 생각에 이곳 영주가 이런 시시콜콜한 일에 관심을 가진다고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

마플은 비밀을 지켜줄 거니까.

세인은 하녀와 병사들을 파악하는데 일주일 이상을 투자했다. 그러면서 가끔 정원으로 나와 활을 쏘는 것 외에는 몸을 단련하지 않았다.

그렇게 마플과 시간을 보내고 난 후, 그가 다음으로 한 일은 더이스를 부르는 일이었다.

맥을 시키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으니까.

“부르셨습니까?”

“그래.”

“무슨 일로?”

“무장 검사를 하고 싶어서 말이야.”

그러자 더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 영주도 자주 하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태연히 물었다.

“창고까지 말입니까?”

“그래.”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더이스는 몸을 돌렸다. 성내 공터에 천막을 펼쳐놓고 무기나 방어구를 늘어놓기 위해서 말이다.

무장 검사를 제대로 하자면 보통 삼 일정도 걸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창고까지 한다니까 일주일 정도는 고려해야 할 것 같았다.

그때 나가려는 더이스를 세인이 불러 세웠다.

용건이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이번에는 병사들을 추운 날씨에 세워둘 필요 없어.”

“예?”

“물건들도 다 꺼내놓을 필요 없고.”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무장 검사라는 것은 천막을 널어놓고 모든 것을 그 위에 놓는 것이다. 그리고 검사를 받는다.

병사들도 파수병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모여, 무장 상태를 영주에게 보이는 것이다.

큰 성 같으면 거기에서 훈련 상태나 제식도 점검한다.

제식 상태는 군기와도 관련이 있으니까.

힘들여서 기간을 길게 잡고 하자면 한도 끝도 없는 게 무장 검사였다.

영역도 확대하자면, 말이나 성벽 보수 상태까지 들어가기 때문이다.

설마, 여기에서 더 심화해 조사한다는 것인가?

더이스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면서 세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