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 6화. 왜?
이제 농담이라도 영지 분위기가 좋다고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대놓고 술집에서 떠들지는 못했지만, 베갯잇 위에서는 많은 부부가 속삭였을 것이다.
영주가 좀 정상이 아닌 것 같다고 말이다.
당연히 기사들도 우려를 표시했다.
다만 영지민과 다른 생각이었던 것은, 기사들이 보기에 세인도 할 만큼 했다는 것이다.
거대 상단과 척져서 좋아질 게 없으므로 살인까지 눈감아주려고 했다. 어땠든 결과가 이렇게 흐른 것에 대해서는 유감이었다.
기사 중 맥은 리더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아레이즈에 병력이 많았다면 기사단장 정도의 대표성을 가졌으리라.
그래서 레드에게 넌지시 자신의 의견을 비쳤다.
이번 행동에 대해서 유감이며 걱정된다고, 영지민도 불안해한다고.
레드는 맥의 뜻대로 그런 우려를 세인에게 전달했다.
이 시대에 있어서 영주는 준 통치자이자 국왕의 대리자였다. 전쟁이 벌어지면 그들은 지배자로서 희생을 강요하기도 한다.
그러자면 통치 스타일은 잔혹하지 않되, 주민과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지 않는 게 좋았다.
막상 몬스터들의 이빨 앞에 노출되면 인간의 본능이 도망가라고 소리친다.
그때 뒤에서 인자하게 용병술을 발휘한다고 일이 잘 풀리는 경우가 드물었다.
결국, 영주들은 스스로 영지민을 어떻게 생각하든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필요할 때 잔인해져야만 했으며, 생목숨에게 죽음을 강요해야만 한다.
대의를 위한 소수의 죽음을 말이다.
대신 이런 체계가 굳어지면 당연히 영지민의 의견이 영주의 귀에 다다르기도 어려웠다.
이때 맥이나 레드처럼 구는 게, 바로 중간에서 전달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세인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영지민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리고 그 불안이 비단 영지민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라는 것도 받아들였다. 기사들도 사실 불안할 것이다. 그런데 영지민은 몰라도 기사들이 불안해하면 좀 곤란하다.
레드의 말을 다 듣고 난 그는 짧게 말했다.
“다 집합시켜야 하겠군.”
* * *
어두운 밤.
한기가 도는 성내에 유독 밝게 불이 켜진 곳이 있다.
세인의 집무실이다. 초들이 불타오르는 가운데 건장한 남자들이 제각기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세인은 그들의 중앙에서 손수 호박파이를 권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을 보면, 흉중의 생각이 어떻든 우린 운명 공동체라고 볼 수가 있는 거겠지.”
모인 기사들은 새 영주가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이야기보따리를 풀려고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마 전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서만 논할 줄 알았는데 말이다.
의자의 등받이에서 허리를 떼고 고쳐앉는 가운데.
세인의 옆에서 레드가 일어난다.
그는 미리 준비했던 지도를 펼쳐 보이고는 벽에 매달았다. 단검이 상단에 박히자, 지도가 달랑거린다.
지도에 그려진 것은 대륙 전도가 아니라 북부지방만을 그린 지도였다.
눈금들 속에서 가파른 산처럼 삐죽빼죽 솟아올라 있는 것은 아레이즈를 포함한 세 개의 영지였다.
그 위로 평야가 보이고. 레인저들이 흩어져 있는 눈의 허리띠 지역이 보인다.
그리고 다시 그 너머는 인간들이 지옥이라고 부르는 공간이 펼쳐져 있다.
깊고 깊은 밀림.
넓고 아득한 그곳에는 온갖 괴물들이 모여 산다.
아마 신화에서나 나오는 괴물들도 거기에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좌중은 레드가 새삼스레 저걸 왜 꺼내나 싶었다.
세인이 파이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가운데, 레드가 레인저 생활을 하면서 직접 보고 들은 것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눈의 허리띠 지역에 몬스터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이건 저뿐만이 아니라, 이미 많은 레인저가 직접 탐험하고 정찰한 결과입니다.”
그는 손을 움직여 목탄으로 허리띠 지역 건너편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걸 보면서도 기사들은 설마 하는 기색이었다. 그린 원이 결코 작지 않았다.
지금 저만큼이나 가득 찼다는 소리야?
“몬스터들이 점점 남하하고 있습니다.”
다들 세인을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부에 보고는 했습니까?”
더이스가 묻자, 레드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실에서도 알 거고. 네이블 성의 후작님이나 측근들은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그리고 보고가 역으로 내려올 테니, 하다못해 옆 영지의 영주님들도 알고 있겠죠.”
“왜 우리들은 새까맣게 몰랐죠?”
“영지민과 마찬가지로 알아봤자 혼란만 가중될 것이고, 일단 너무 머니까요. 게다가 여러분들조차 흔들리면 영지가 남아나겠습니까? 가능한 보안을 유지하는 건 당연하죠. 알려고만 한다면 알 수도 있는 거지만…. 그 알려고 한다는 게 불편한 거니까요. 점점 좁혀지고는 있지만, 여기서 더 큰 문제는 남하하는 몬스터들이 아닙니다.”
“그럼 문제가 뭔가요?”
“너무 몬스터가 안 내려와요. 그게 문제인 겁니다.”
“예?”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몬스터가 너무 안 내려와서 문제라니? 혼란을 잠재우려는 듯이 레드의 덤덤한 설명이 이어졌다.
“직접 극지까지 가서 확인하니, 미지의 영역에 불빛이 가득 차 있습니다. 아주 많은 숫자입니다. 지평선을 뒤덮고 있어요. 하지만 그 숫자들은 움직이질 않습니다. 너무 깊고 어두운 곳이라, 뭘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들의 반만 내려와도 여기는 쑥대밭이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매년 몬스터들이 분명 증가하는 추세인데 움직이질 않아요. 마치 누군가가 벼르고 그들을 지휘하는 것처럼.”
한 번에 밑을 제대로 치려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그게 더 무서운 것이었다.
“….”
“감정과 본능에 휘둘리는 야수들이 아니라. 마치 집단 지성을 가진 많은 개체가 공동의식을 가지고…. 스스로 억누르는 듯이 보입니다. 그리고 분명 언젠가 폭발하겠죠.”
사람들은 저마다 생각에 잠겼다.
세인도 말이 없었다.
레드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집무실은 여전히 따뜻한 빛에 가득 차 있었지만, 공기는 전보다 무거워졌다.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고 침묵을 깬 것은 세인이었다.
“묻고 싶은 게 있나?”
맥은 종종 세인에 대해 이질감을 느끼곤 했다.
소년의 모습을 가지고 저런 침착성을 보이는 것에 대한 의아함이다.
반발까지는 아니지만 분명 묘하게 호기심을 자극하곤 한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 쓸 계제가 아닌 것 같다.
그는 다른 기사들처럼 눈치를 보지 않고 속의 말을 털어놨다.
“국왕님이 우리의 철수를 명령하실까요?”
“답은 알고 있잖아. 영토가 줄어드는데 왜? 그리고 가이더는 큰 나라가 아니야. 우리가 미리 물러난다면 그건 절대 용납받을 수 없는 일이다. 설령 용납된다고 해도, 위에서 작정하고 밀려오면 도망칠 곳은 없어. 아예 일찍 국경을 떠나, 남부로 대피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설령 가이더가 기적적으로 없어지지 않고 살아남는다 해도, 여기는 필히 멸망한다. 눈의 허리띠 지역에 붙어 있는 아레이즈는 최전선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게 바로 객관적인 진실이었다.
맥이 손을 들고 질문했다.
“내려오기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직접 위쪽에서 생활해 보셨으니까,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전면적인 행동을 보인다면 그나마 추측할 수 있지만, 포진해 있기만 하니 솔직히 예상할 수 없다. 몇 년째 저런 상태야. 수는 점점 불어나고 있지만,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저들이 아예 움직이지 않는다고 상상하는 건 낙관에 불과할 것 같다. 결국, 언젠가 여기는 공격 받는다. 언제까지나 앉아 있지만은 않을 테니까.”
세인은 상념과 함께 일어나, 단검을 벽에서 떼어낸 후 지도를 둘둘 말았다. 그러면서 그 끝을 탁탁, 책상 모서리에 쳤다.
“결국, 작은 일에 신경 쓰지 말라는 소리야. 너희는 이미 뜻을 밝혔고 2대에 걸쳐 충성을 맹세한 셈이 되어 버렸다. 의구심이나 불안을 접어. 일단 하루하루를 어찌하면 가치 있게 살지, 터전을 하루라도 더 잘 지킬지 생각해라. 지금 질 나쁜 대형 상단에 불안해할 시간이 아니다.”
나이 어린 소년에게서 이런 말을 들으니, 어째 기분이 묘하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상단에서는 이런 사실을 모를까요? 생각해보면 극비도 아닌 것 같은데. 관심 가지자면 얼마든지 알 수 있을 텐데요.”
“무슨 상관이야. 우리 코가 석 자인데.”
물론 여기가 아주 불안한 지역이라는 것은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언젠가 절대적인 끝이 다가온다고 생각하니….
회피할 수 없는 칼날이 목덜미에 겨누어져 있다고 하니, 그 느낌이 남달랐다.
“저 밀림 속에는 신화 속의 괴물도 있겠죠?”
“저 밀림 자체가 세계수니까, 신화 그 자체인 거지. 뭔들 없겠어.”
기사들은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한지, 각자 일어나 묵례를 해 보이고는 자리를 떠났다. 맥이 일어나 세인에게 입을 연 건 돌발적인 상황이었다.
“돌아가신 영주님도 이 사실을 알고 계셨겠죠?”
“….”
“그렇다 해도 용서를 하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저는 그분이 용서를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가혹하게 훈련을 시킨 것을요.”
“….”
“주제넘었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야. 그만 가봐.”
기사들이 떠난 후 레드는 술을 가져왔다. 그리고 둘은 말없이 위스키를 홀짝홀짝 마셨다. 그렇게나 마셨는데도 동이 터오려면 아직 멀었다.
취기가 머리끝까지 올랐을 때 레드가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그들은 왜 오려는 걸까?”
“네?”
눈을 반쯤 감은 세인이 말했다.
“생각해보면 이상하잖아. 거기야말로 침입 불가의 낙원이나 마찬가지일 텐데 말이지. 인간 중 아무도 그곳에 갈 수 없어. 엄두조차 내지 못하지. 그렇다고 기후가 나쁘기를 하나? 허리띠 지역만 춥지 그 위는 밀림이야. 그들에게 천국이라고. 그렇다고 거기가 좁아서?”
“좁은 건 아니겠죠. 확실히.”
“그렇지.”
세인이 끄덕였다. 둘은 거기가 얼마나 광활하고 넓은지, 한 단면을 엿보았다.
비록 한 자락에 불과했지만 끔찍하게 넓은 공간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지옥이지만, 거기는 그들의 천국일 텐데 왜 오냐는 말이야. 굳이 아래쪽까지 말이지. 인간들을 괴롭히며 벌주고 싶어서? 글쎄.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뭔가 이유가 있겠죠. 인간의 법도 그쪽에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 일 겁니다.”
“그래 뭔가 이유가 있겠지.”
픽, 하고 웃는 세인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레드는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홀로 남겨진 세인은 생각한다.
- 왜 여기로 오려는 것일까?
- 왜 오려는 거야? 그렇게나 무서운 상태로?
- 굳이 왜.
* * *
그는 도서관에서 역사책들을 뒤적여 봤다.
물론 마왕이 존재하던 시절에는 괴물들이 대륙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들은 혼돈의 근원이었고 피아를 가리지 않았다.
그저 끔찍한 광기와 증오의 자식들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아주 오래전 일이다. 말 그대로 신화가 되어버린 시절의 이야기.
사람들은 천사가 몬스터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눈의 허리띠 지역을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글쎄….
“그 전에도 사실 남하하는 세력들은 없었어.”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내려온 것들은 예외로 치자.
지금 그가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끔찍한 것들이다.
군대를 이루며 엄청난 힘을 지닌 것들.
아까 누군가가 말한 신화 속의 존재 중에서는 분명, 드래곤도 있을 것이다.
너무나도 두려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무서운 생물.
그런 것들이 날뛰면 어느 성이고 견뎌내지 못할 테지.
튼튼한 성은 인간과 엇비슷한 군대엔 강하지만, 그런 괴물들이 날뛰면 끝은 불 보듯 뻔했다.
역사책을 뒤져봐도 저렇게 대규모 병력이 모여 벼르던 분위기는 없었다.
그런데 하필 이제 와서 왜?
“이유가 뭘까? 원인이 뭘까? 만약 그 이유를 안다면….”
세인의 중얼거림은 점차 낮아졌다. 그러다가 고른 숨소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