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왕 마검의 주인-5화 (5/307)

# 5

& 5화. 양보

사람들을 헤치며 앞으로 나온 것은 소년과 소드맨들이었다.

검을 찬 남성들은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은 상태였으며 얼굴에 긴장감이라곤 전혀 없었다.

그들의 당당한 얼굴을 마주하며, 세인은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형국인가 하고 종이를 뒤적여 보았다.

모든 사건은 이미 문서로 보았고 언질을 받았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듣지 못했는데?

그때 한 기사가 다가와 세인의 귀에 속삭였다.

“어제 벌어진 일이랍니다.”

그렇군. 고개를 끄덕인 세인은 법 집행관의 입을 바라보았다.

“상충하는 고발 사건입니다. 영주님의 현명함을 바랍니다.”

세인은 장갑을 벗고 손가락을 우두둑우두둑 꺾었다.

“말해봐.”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은 소년은 꺽꺽거리느라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무슨 짐승이 우는 줄 알았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대신 말해줘야만 했다.

소년의 집은 여관이었다.

외부에서 온 상단이 마을에 들렸기 때문에 호객행위를 하며 집으로 인도했다.

그때까진 문제가 없었다.

시설이 안 좋다고 투덜거리긴 했어도 소년의 부모는 흘려들었다.

이런 외지에서 시설 타령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거다. 하지만 밤에 술이 들어가자, 상단의 호위병들이 내려와 시비가 붙었고….

“어머니와 여동생이 수치스러운 짓을 당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까지 살해를 당했는데 소년은 마구간 쪽에 있어서 필사적으로 도망쳤다고요.”

“뒷받침할 증거는?”

“화재가 있었습니다.”

시체가 어디 있냐는 질문에 그런 답변이 돌아왔다.

세인이 턱짓하자 남자들이 소년의 발을 들어 보였다.

밤새 얼마나 거친 길을 뛰었는지 엉망진창이었다.

이게 거짓말이라면 참으로 몸 바친 거짓말이다.

“영주님. 저 소년의 말은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며, 사실이 아닙니다.”

허락도 받지 않고 상단 쪽에서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나섰다.

남자는 중후한 성품을 가진 인물로 보였다. 인상이 너무 좋았다.

“저 소년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저희가 아무리 외부인이라고 해도 금방 알 수 있었고. 이웃 사람들이 증언할 것입니다. 오히려 행패를 부린 쪽은 여관의 주인입니다. 저희는 참아보려고 했으나, 결국 견디지 못하고 쫓기듯이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때 마침 밤하늘에서 화광이 충천했고….”

그리고 줄지어 증인들이 나섰다.

변호인으로 나선 마을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그들이 사건의 전말을 목격했다는 뜻은 아니다.

변호인은 그냥 변호인일 뿐이니까.

이제 기사들의 눈빛은 모두 세인에게로 향했다.

이거 큰일 났군. 이런 건 미처 예상하지 못했는데.

귀족자제는 귀족으로 훈련받으며 자라난다. 혈관 속과 뼛속 깊이 말이다.

세인도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직 미숙한 새 영주였다.

이런 예상치 못한 일에 부딪히면 능란한 임기응변을 바란다는 것 자체가 욕심이었다.

보다 못한 기사, 맥이 나서려 할 때.

레드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왜?’

의아한 시선으로 레드의 얼굴을 바라볼 때. 맥의 뒤통수 쪽에서 세인의 말이 들려왔다.

“그러니까 소년의 말을 뒷받침할 주변인은 하나도 없는 거고?”

그때 소년이 억울하다고 소리쳤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뜻으로 울부짖지 않았나 싶어서 하는 말이다.

잔뜩 쉰 목으로 괴성을 지르는데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그때 법 집행관이 주먹으로 소년의 어깻죽지를 후려쳤다. 살짝 친 것 같았는데도 크게 휘청이다가, 결국 앓는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는 소년이다.

“그렇습니다. 영주님. 저희야말로 억울합니다. 이건 정말 억울한 모함입니다.”

그때 종이를 뒤적이던 세인이 물었다.

“나머지 한 명은?”

“예?”

“한 명이 비잖아. 여기 쓰여 있는 숫자에서 말이야. 마을 어귀에 적었던 방명록의 숫자에서 한 명이 빈다.”

“그는 상단의 물품을 관리하느라 잡부들과 함께 남았습니다.”

“살인 사건이다. 소년이 흉수로 그를 지목했어. 그런데 이 자리에 없으니 그의 변명을 들을 때까지 너희들을 구속해야만 하겠다. 그의 말까지 들어보고 모든 게 타당하다면 금방 풀어줄 테고 말이야. 그럼 이 건은 여기까지 하고….”

그렇게 말하고 다음 사건으로 넘어가려는 세인의 말을 붙잡는 인물이 있었다.

“그것은 곤란합니다. 영주님.”

“아가씨.”

“안됩니다. 아가씨.”

붉은 머리카락의 미인이 말리는 남자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

곡도를 허리에 찬 그녀는 눈썹 끝이 올라간 아름다운 처녀였다.

“일정이 촉박합니다. 게다가 그는 변질되기 쉬운 물품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봐.”

“영주님 저희의 형편을 헤아려 주십시오. 네이블가로 향하는 길목입니다. 지금도 예기치 않은 일로 여정이 지체되었습니다. 이건 무고한 모함입니다. 저희는 이미 재판에 참석하는 거로 할 바를 다했습니다. 더는 지체하기 어렵습니다.”

“….”

“저희의 협조는 여기까지입니다.”

“하루면 되는 일이다. 저 소년의 증언뿐이지만, 그래도 나로서는 이럴 수밖에 없다.”

“정말 곤란합니다. 영주님.”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영주님. 저희야말로 죄송합니다.”

돌림 노래가 따로 없었다.

결국, 그녀는 못을 박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웅성거릴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새 영주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 상단이 이렇게 나오는 것도 이해는 간다. 후작 가문과 연관이 있는 상단이기 때문이다.

네이블가는 북부 가문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거기에 관련된 상단이라면 쉽게 생각하기 어려웠다.

필시 대형 상단일 테고 어쩌다 보니 여기를 경유하게 된 것일 텐데.

“영주님. 이미 아시겠지만, 대형 상단과 엮이면 안 됩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맥이 다가와, 급하게 속삭였다.

물론 세인도 그가 왜 이러는지 알고 있었다. 작은 상단이면 몰라도 대형 상단은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이익에만 충성하는 족속들이며, 경쟁자나 장애물을 해치우기 위해서는 악마가 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 말은 수틀리면 아레이즈 영지에 어떤 보복이든 할 수 있다는 소리다.

세인은 약간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아가씨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영주님. 후작님께서 저희를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서 유감이지만, 저희도 사정이란 게 있습니다. 헤아려 주십시오.”

“이미 늦었는데 하루 정도를 더 기다리지 못한단 말인가?”

“그 하루가 천금 같은 시간입니다. 저희에게 있어서는 말이죠.”

여자는 당당했다.

뭐 그건 다른 남자들도 그랬다.

영지민은 주눅이 들어 있었고, 법 집행관도 그들을 감히 구속하지 못했다. 영지 사정을 아니까 말이다.

아레이즈가 그들과 직거래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다른 상단에 압력을 행사할 수도 있었다.

귀족 가문끼리라든가. 일반인들끼리라면 통하는 상식이 무너질 때가 종종 있는데. 상인집단이 바로 그렇다.

그들은 전쟁통에 무기를 팔아대는 족속들이다.

이익이라면 인간의 영혼마저 팔며, 거래한다.

그 저울을 움직이는 것은 오로지 산수적인 눈금일 뿐. 그 높낮이에는 수치도 명예도 없다.

소드맨들이 검집을 휘두르자, 영지민들이 분분히 물러섰다.

상단의 사람들이 등까지 보이자, 세인은 그래도 이건 좀 과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디선가 새파랗게 젊은 놈이 영주가 된다고 하니, 찔러보는 것일 수도 있겠지.

지나친 상상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블랙 라이어드. 상단.”

그의 부름에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세인과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다.

제대로 소년을 보자, 이상한 위압감이 그의 몸을 감싼다.

사실상 콧수염의 남자가 실질적인 리더였으므로 그가 멈춰 서자 다른 사람들도 멈춰섰다.

“나는 이제 갓 영주가 된 풋내기야. 그에 비하면 너는 경험이 많은 상인이겠지? 산전수전 다 겪어 보았을 테고 말이야.”

세인은 자리에 앉은 상태로 말을 꺼냈다.

콧수염의 남자는 눈을 빛내면서도 답하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그의 무례를 지적할 사람은 없다.

무려 네이블과 거래하는 상단이라지 않는가.

“이름이 뭔가?”

이름까지 물어오자, 못 이기는 척 콧수염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고든입니다.”

“왜 내 호의를 무시하나?”

“예?”

세인은 일어서서 주저앉아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의 더럽혀진 손과 발. 그리고 얼굴. 그 모든 게 진실이 되어, 세인에게 웅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인은 그것을 따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이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냥 다 털어놓아 보지. 저 소년이 거짓을 하기 위해서 밤새도록 맨발로 들판을 달렸겠어? 진실은 나도 알고. 자네도 알고 있어. 저 철부지 아가씨도 알고 있을 테고. 네 동료도 알고 있을 테지. 위증을 한 놈들도 말이야.”

“….”

“사람을 빼돌린 것이나, 기타 등등 걸고넘어지자면 말만 길어져. 그래도 나는 양보했잖아. 자네는 내게 처단 의지가 있었다고 보나?”

“….”

이제 기사인 맥은 나서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분위기가 너무 무겁게 얼어붙었다.

도저히 누가 끼어들 수 있는 타이밍이 아니었다.

그도 영지민도, 숨을 죽이고 허공에서 불꽃이 튀는 지점을 바라보았다.

바로 고든과 세인의 시선이 만나는 지점이었다.

“자네도 바보가 아니니까, 내가 왜 영지민 앞에 섰는지 알지? 저 철부지는 몰라도 자네라면 알 거야. 자네 상단이 콩가루 상단이 아니라면 제대로 된 인물을 행수로 쓸 테니까 말이야.”

졸지에 철부지가 된 아가씨는 분한 듯 얼굴을 붉혔지만 그게 다였다.

고든이 침묵하는 가운데 세인이 앞으로 나섰다.

“나는 충분히 양보했어. 집요하게 캐지도 않고 끝까지 추궁하지도 않았지. 그동안 하도 발바닥만 핥아대는 귀족을 만나느라, 감이 흐려진 모양인데. 나는 최후의 선까지 물러난 거야. 그러면 구석까지 몰지 말았어야지. 내가 그렇게 시늉을 하면 옆에서 눈치껏 말리던가. 너는 알 만큼 아는 녀석이잖아.”

“영주님.”

“나라고 이렇게까지 해서 내 체면을 지키고 싶겠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생명을 거는 가치에 무관심할 수는 없잖아.”

영주의 자존심은 귀족의 자존심이었다. 그 자존심은 영주가 다스리는 모든 사람의 무게다. 그래서 세인, 개인의 기분과 별개로 수호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세인은 친구처럼 다가왔다.

목소리도 그랬다.

긴장감은 없었다.

긴장감이나 위화감이 있었어도 사실 아무도 막지 못할 것이다.

적어도 멀리에서 다른 기사들과 함께 그걸 지켜보던 레드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세인이 뭘 하려는지 알았지만 막지 않았다. 막을 수도 없었고.

의전용 검이라고 해서 날붙이가 아닌 것은 아니다.

검 끝이 찌른 곳은 바로 붉은 머리의 아가씨였다.

그녀의 목덜미에 검날이 박혔다. 그리고 주르륵하고 피가 가슴 섶으로 흘러내리기 전에 세차게 검을 뽑았다.

세인은 이번에는 여자의 배를 찔렀다.

너무 번개 같은 움직임이라서 다들 입을 헤 벌리고 지켜만 보고 있었다.

이거 꿈이겠지? 그렇겠지?

고든은 입을 더 크게 벌렸다. 그리고 뻐금거렸다.

그걸 배를 찔린 아름다운 여자도 따라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입을 영영 다물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점점 입이 벌어지고 있었다.

세인이 검을 천천히 빼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이 순간을 즐기라는 듯이.

너무나도 비상식적인 광경이 도래했다.

세인은 마지막으로 꺽꺽대는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땅으로 밀쳤다. 그리고 검을 휘둘러 무를 자르듯이 목을 벤다. 그렇게 피가 세인의 얼굴에 튀었고, 그 광경을 주저앉은 소년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었다.

소년의 눈앞에서 여자의 머리가 땅 위를 굴렀다.

고함이 울려 퍼지고, 뒤늦게 상단의 사람들이 검을 뽑아 들었을 때. 병사들이 창을 겨누고, 기사들도 검을 뽑아 들었다.

숨 막히는 대치상태.

“안돼! 안돼에에!!”

고든이 발작적으로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세인이 말했다.

“귀한 아가씨를 세상 구경시켜주러 나온 모양인데, 고든이라는 멍청한 놈이 눈치가 없어서. 금이야 옥이야 키운 철부지가 개돼지처럼 죽은 거야. 훗날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러 온 상단 사람은 그녀의 죽음을 설명하기 위해, 네가 한 바보 같은 짓을 상부에 구구절절 고해바쳐야만 할 거다. 그러다 보면 다들 네가 얼마나 얼간이었는지 깨닫게 되겠지. 그게 바로 네가 죽은 후의 네 평판이야.”

“당신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아!?”

새된 고든의 비명 속에서 세인이 중얼거렸다.

“무슨 걱정이야? 나보다 네가 먼저 더욱 비참하게 죽을 텐데? 살인을 눈감아주려고 해도 정도가 있는 법이야. 아무리 떠먹여 주려고 해도 당최 처먹지를 않으니 그 꼴을 당하는 거야. 죽은 저 여자는 대체 뭔 죄냐? 기껏해야 너희들이 범죄를 저지를 때 눈감아준 죄인가?”

레드는 세인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상단 사람들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발광 직전이었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병사들이 창을 겨누고 있었으니까.

법 집행관이 상인 사람들을 몰아대는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때 세인이 그에게 말했다.

“진술을 받아내라.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일단 대답을 하긴 했는데 법 집행관은 정말 그래도 되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란 말은 지하 고문실을 이야기한다.

상단 사람들의 운이 정말 잘 풀린다면, 반쯤 죽어서 나오는 곳이다. 그러나 세인은 그것조차도 바라지 않는 것 같았다. 그의 차가운 말투를 들어보면 말이다.

어차피 엎지른 물, 주워 담으려는 모습 따윈 없었다.

“뭐 어쨌든…, 어리지만 믿음이 가는 영주님. 덕이 많은 영주님이란 인상은 물 건너갔군요.”

기가 질린 듯 얼굴이 탈색된 더이스가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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