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 3화. 각자의 아침
그날 밤 홀에 기사들이 모였다.
모두 중년에 이른 노회한 기사들이었다.
성벽 위를 조금 전까지 지키다 와서 아직 갑옷을 벗지 못한 인물도 보였다.
얼마 남지 않은 곱슬 잔머리를 가진 근육질의 행크.
가장 나이가 많은 선임기사 맥.
그리고 얼굴이 유난히 긴 더이스.
등등….
그들은 심상치 않은 세인의 표정을 보고 약간 긴장했다. 그리고 원형 탁자 위에 놓인 반짝이는 물건을 보고는 신음했다.
탁자 위에 놓인 것은 큼직한 에메랄드가 박힌 반지였다.
이게 뭐냐면 가난한 아레이즈 영지에서 가장 가치 있는 물건이다. 영주의 상징이니까.
분위기를 눈치챈 인물들 사이에서 더이스가 입을 열었다.
그는 그래도 이들 중 가장 나이가 젊은 인물로 양 갈래의 금발을 가지고 있었다.
얼굴은 아까 설명했듯이 말상이었고 특히 인중이 길었다.
“이렇게요? 여기서요? 아직 영주님의 장례식도 제대로 치르지 않았는데요?”
‘아니 무엇보다 우리는 아직 서먹서먹한 사이잖아!’
더이스의 내심은 이런 비명일 것이다.
세인의 할아버지는 손자를 하도 굴리느라, 기사들과 친해질 시간도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후계자와 영지 내의 기사들 사이인데 말이다.
그때 우락부락한 행크가 팔꿈치로 더이스의 옆구리를 쳤다.
“이제 세인님이 우리의 영주님이셔!”
더이스는 숨 막히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러니까, 시간이 더 필요한 거 아니냐고! 하다못해 세인의 옆에서 저렇게 분위기 잡는 레드와도 이렇게나 서먹한데 말이다.
세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동안 충성을 다해줘서 고맙다. 그것과는 별개로 영지 내의 사정은 절망적이다.”
기사들의 얼굴이 약간 달아올랐다.
이유는 알 수가 없다.
책임감 때문인지.
아니면 영주가 될 자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내용 때문인지.
“제가 신부님을 불러오겠습니다.”
“참관인은 필요 없다.”
소년은 우락부락한 나이 있는 기사들 앞에서 전혀 긴장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는 이런 과정조차 귀찮았다. 오늘이 의미 있는 날이 될지조차 모르는 상황이라고 생각 중이었다.
“나는 가주의 반지를 끼겠다. 녹봉은 챙겨주지. 반대할 사람은 떠나고. 남을 사람은 남고. 마음이 이미 떠나, 떠나고 싶은 사람은 떠나라.”
“예?”
반문하는 기사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싶었다.
귀족의 행사를 이렇게 식은 죽 먹듯 해치우려는 것도 그렇고 언사도 지나쳐 보였다.
그동안 영지에 충성을 다해온 가신들에게 이런 말은 지나치다.
“다른 영지로 가고 싶다면 추천서를 써줄 거야. 오늘 떠나지 않는다면, 마음이야 어떻든 당신들은 내게 충성을 강요받게 된다.”
그리고 세인은 천천히 반지를 들어 올렸다.
그들의 앞에 놓인 촛불이 그들의 마음처럼 심하게 일렁이는 가운데, 에메랄드 반지가 그 빛을 받아 여러 각도로 번쩍였다.
아스터1세가 북부가문들에게 든든한 방패가 되라는 뜻에서 친히 하사하신 보물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그때 맥이 자신이 지키던 침묵을 깨트리고 입을 열었다.
“주인의 손에 주인의 물건이 찾아간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거기에 이의를 제기할 자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굳이 이렇게 굴욕적이고, 날림으로 행사를 진행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세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맥이 말을 덧붙인다.
“모두의 축복 속에서 더욱 온화한 방법으로 진행해도 되는 일 아닙니까? 뭔가에 쫓기는 듯이 추진하지 않고요.”
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기사들은 그가 반지를 내려놓고 뭔가 말을 할 줄 알았다.
맥의 내용에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세인은 앗? 하는 틈도 주지 않고, 그대로 손가락에 반지를 끼어 버렸다.
뭔가 뜸을 들이는 동작이랄까.
그런 것도 없었다.
마치 모반을 일으킨 음모자들이 드디어 자리를 차지하듯.
어두운 밤, 홀에 모여 날림으로 계승식을 하듯이.
그렇게, 해치워 버렸다.
김이 빠진듯한 기사들의 시선을 받는 가운데 세인이 입을 열었다.
그라고 의도적으로 모욕을 주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어쨌든 이들 모두는 영지를 지켜왔던 인물들이다. 우직하게 말이다.
세인, 개인에 대한 충성 여부는 몰라도…. 적어도 이들은 고향 땅에 충성을 바칠 것이다.
단지 예의를 차리거나, 이것저것 돌려 말하기에는 모든 게 여의치 않았던 것뿐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이다.”
* * *
“으으….”
영지의 기사인 더이스는 지긋지긋한 방에서 깨어났다.
언제나 들어오기 싫은 좁은 방.
돌로 만들어진 방이었다.
북부는 춥고, 그런 북부에서 돌로 만들어진 방은 물론 더 춥다. 그런데 왜 굳이 돌로 방을 만드냐면, 튼튼하기 때문이란 거지.
“빌어먹을…. 푸엣취!”
양 갈래로 흘러내린 금발 머리가 거추장스러웠다.
몸도 으슬으슬한 게 간밤에 심하게 뒤척인 게 원인인 듯 싶다.
그는 짚이 깔린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커튼을 열어젖혔다.
아침 햇살이 말상인 더이스의 얼굴을 훑고 내려간다.
창밖으로 아레이즈가 내려다보였다.
더이스가 간밤에 잠든 곳은 바로 성루였다.
집보다도 여기에서 자주 잠드는 이유.
그는 기사 중 가장 젊었고, 야간 당번은 아무래도 젊은 피가 전담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기사 중 유일한 미혼이다.
야간 당번을 서서 좋은 점이 있다면, 다른 기사의 부인들이 그에게 따뜻한 음식을 많이 가져다준다는 것이었다. 더이스 덕분에 밤에 남편이 집에 들어올 수 있으니까 말이다.
“포도주도 못 마시니 수도승이 따로 없네. 이런 생활이 언제나 끝날까.”
투덜거리는 더이스는 경갑옷을 꿰차 입고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나선형의 계단이 나타났다.
이십 대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이제는 이런 계단들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아이고 무릎이야. 한 것도 없는데 삭신이 쑤시네”
그는 투덜대며 한 계단 한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몇십분이 지나 층계를 다 내려오자, 잡초가 무성한 연병장이 그를 반긴다.
장화로 몇 번 잡초를 차보던 더이스는 침을 뱉으며 정문 쪽으로 향했다.
마을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려는 것은 아니다.
밤 당번을 섰는데도 아직 할 일이 남았다.
* * *
나무로 된 성문 앞에는 수레와 병사들이 모여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가장 앞에는 더이스의 직속 선임이나 마찬가지인 행크도 보인다.
행크는 양치질을 하는지, 입을 오므리고 음음음 소리를 내다가 물을 바닥에 뱉었다.
“여어, 잘 잤나. 더이스?”
“내리 일주일째에요! 잘 잤겠어요? 제가?”
어깨를 으쓱거린 행크는 수레와 연결된 당나귀의 궁둥이를 쳤다. 그러자 당나귀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 때는 한 달간 꼬박 성루에서 지냈던 적도 있었어. 칭얼대지 말고 따라와.”
더이스는 투덜거리면서도 행크의 뒤에 따라붙었다.
기사가 많은 영지의 기사들은 편할 것이다. 왜냐면 동료가 많으니까 말이다.
당연히 불침번도 드문드문 돌아가면서 서겠지.
더 나아가 풍족하고 큰 영지라면 땅을 위임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 천국이었다. 소작농들 사이에서 거들먹거려도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소설책에서처럼 때마침 소작농의 아름다운 딸이 있으면 쿵짝쿵짝이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모두 다 아레이즈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솔직히 떠난다는 기사가 있었다면 제가 죽였을 거예요. 안 그러면 제가 죽을 테니까요.”
“말 좀 가려서 해 이 사람아.”
행크는 인상을 쓰면서도 더 뭐라 하지 않았다.
막내인 더이스가 까부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그들은 영주의 벽보를 붙이러 나가는 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기사가 두 명이나 동원될 리 만무하다.
오늘 낮 내내 마을들을 돌아다녀야 하는 처지가 여기 둘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뭔가 노동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팔짱을 끼고 병사들이 벽에 종이를 붙이는 것을 구경할 뿐.
이른 아침부터 병사들이 몰려나와 벽에 뭔가를 붙이기 시작하자, 당연히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런 현상은 시장에 가까워지자 더욱 심해졌다.
까막눈인 사람들은 차마 기사에게 묻지 못하고, 병사보고 읽어달라고 졸랐다. 그러면 병사들은 더듬거리면서도 내용을 읽어주곤 했다.
그럴 때마다 지체되는 시간이 꽤 되었지만, 더이스와 행크는 나무라지 않았다.
그냥 멀찍이 서서 영지민을 구경한다.
두껍지만 낡은 옷을 입은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다들 궁곤에 찌든 얼굴이다.
물론 잘사는 축도 찾아보면 나오겠지만, 그리 많지는 않다.
“뭔가 당한 기분이지만, 지금 영주님은 충분히 이럴만해. 그 당시 우리 모두 못 본 척 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무슨 소리예요. 우리에겐 선택권이 없었다고요. 우리가 어떻게 선대 영주님이 하시는 일에 끼어든단 말입니까?”
우르르 몰려든 사람들이 벽보 앞에서 호기심에 물든 얼굴을 하자. 기사들의 눈치를 보던 병사 중 한 명이 아예 나무통 위에 올라가서, 포고문 내용을 크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새 영주 자리에 오른 세인에 대한 내용이었다.
저 사람들은 얼마나 당혹스러울까? 취임식도 없이 이렇게 글로 소식을 전해 들으니 말이다.
얼핏 생각해보면 웃음이 나올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더이스와 행크는 안색을 굳힌 후였다. 진지한 이야기 중이니까.
“윗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도 부하의 도리야. 솔직히 어렸을 적 세인님이 당한 건 학대였지. 철저히 고립되고 고통을 받았으니까. 나는 아직도 그게 훈련을 빙자한 고문인지 헷갈린다고. 결국, 우리를 못마땅해하는 것도 당연해.”
“지금은 전 영주님이 고인이 되셨으니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막상 그때로 거슬러 올라가, 서슬푸른 영주님 앞에 서봐요. 그 말이 나오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그걸 누가 말립니까? 더구나 그건 가족 간의 일이라고요. 혈연요.”
행크는 피곤한 듯 솥뚜껑 같은 주먹으로 눈두덩을 문질렀다. 그러다 불만이 가득한 더이스의 얼굴을 보고 벌리던 입을 닫았다.
더이스는 꽤 까칠해져 있는 상태였다.
하긴, 밤을 새워서 그런 것만은 아니겠지.
“더이스. 이곳을 떠나고 싶었지?”
“….”
“우리야 이미 아레이즈의 생활에 인이 박혔지만, 자네는 아직 젊잖아. 삼십 대 중반. 좋은 나이지. 안 그래? 게다가 미혼이고 말이야. 홀가분하잖아? 그런데 왠지 당한 거 같으니, 약이 오르지?”
단검을 허리춤에서 뽑아내어 허공에 던졌다 받기를 하던 더이스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 물론 한두 번쯤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홀가분하게 어딘가로 떠나는 생각을 말이다.
선대 영주님은 기사들을 놔줄 성품이 아니었지만, 돌아가신 후 중간에 공백기도 있었고….
세인이 어린 영주라서…, 드는 상상도 있었다.
“천만에요.”
“왜? 놓아줄 때 이런 척박한 곳을 떠나면 좋잖아.”
더이스는 단검을 다시 허리춤에 꽂았다. 그리고 전방을 향해 소리 질렀다.
나무통 위에 올라가 있던 젊은 병사가 사람들의 쏟아지는 질문에 곤혹스러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봐! 언제까지 미적대고 있을 거야? 오늘 사방을 다 돌아다녀야 한다고! 이동한다!”
그리고 빙글 돌며 행크에게 등을 보인 더이스가 말을 흘렸다.
“북부를 떠나면 어떻게 살아도 그냥 기사질이지만, 여기에 있으면 저는 애국을 하는 거잖아요. 나라를 지키고 있다고요.”
행크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사실 어젯밤 내내 술을 마셨다.
그라고 번민이 없었겠는가? 아무리 고향 땅이라지만 이곳은 너무 힘들고 위험했다.
농담이라도 살기 좋은 곳은 아니다. 하지만….
“그래, 우리가 바로 가이더의 방패지. 그건 굉장한 명예야.”
수레와 병사들. 그리고 기사 두 명은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여기에 있으면 고향이라서 느껴지는 익숙함뿐만이 아니라, 정말로 기사로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체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