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 2화. 땅에 대한 충성, 인간에 대한 충성
성내에서 마플의 위치는 하녀장이다.
하녀들을 관리하는 위치인 그녀는 주로 성에 머물렀다.
세인의 할아버지는 기사들에게는 강박적으로 굴었지만, 하녀들에 대해서는 무심했다. 그래서 설령 마플이 마을로 들어가 밤을 보내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가족도 없는 마플은 대부분의 시간을 성안에서 보냈고, 그런 일상이 이제는 모두에게 자연스럽게만 느껴졌다.
오늘도 마플은 계속 어둡고 서늘한 성에 머무르며 밤 당번인 하녀들을 보살폈다.
성에 고용된 하녀들은 돌아가며 밤에 불침번을 선다.
횃불 심지의 기름을 갈아주기도 하고 불씨 관리를 하는 등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 그 외에 경계를 서는 병사들의 간식을 챙기기도 했다.
마플은 살금살금 복도를 걷고 있었다.
벽에 걸린 초상화들은 그런 그녀가 지나갈 때마다 눈을 빛냈다. 마플의 손에 들린 램프의 불빛을 받아서 말이다.
그중에는 세인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초상화도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많이 닮지는 않았다.
이 궁벽한 산지에 머무는 화가라고 해봐야 일반인보다 조금 나은 정도인 것이다.
창가의 커튼이 잘 묶였는지 확인하던 마플은 문득 위쪽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발견했다.
그녀는 흠칫 놀라더니 층계를 밟는다.
그 계단은 영주의 집무실로 이어지고 있었다.
마플이 조심스레 열려 있는 문틈으로 얼굴을 내밀자, 안에 있는 사람이 보였다.
검은 머리의 소년은 이제 성장기의 끝에 다다랐다.
잘생긴 그의 얼굴이 탁자 위에 놓인 초의 불빛을 받아 한가득 붉게 상기되었다. 아버지를 닮아 검은색인 눈동자는 바쁘게 양피지들을 훑는 중이다.
그동안 성의 기록이 낡은 책상 위에 한가득 쌓아 올려져 있는 상태였다.
두꺼운 침의를 걸친 세인은 떡갈나무로 만들어진 펜대를 잡았다. 그리고 끝의 펜촉에 잉크를 적신다.
그렇게 잉크병 위로 손을 들어 올렸던 세인의 눈이 문틈에 있는 마플과 마주쳤다.
“심장마비로 날 죽이려고 그래? 왜 거기에 서 있는 거야?”
당최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묻는 세인을 바라보자, 마플은 그만 머쓱해지고 말았다.
생각해보면 그녀에게 고양이 걸음이 꼭 필요했을까.
“소영주님.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그리고 앉아 있으셔야 할 자리에 앉아 있으신 것을 보니 더욱 기쁘고요.”
마플은 야밤이라 그런지 감성이 터진 듯 눈시울을 붉혔다. 세인은 그런 마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손을 휘젓는다.
그만 들어가 보라는 듯이 말이다.
마플은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뒷걸음질로 사라졌다.
“진짜 유령은 아니겠지.”
그렇게 중얼거리는 세인의 혼잣말을 뒤로하며 그날 밤이 끝났다.
변하지 않은 것은 세인뿐만이 아니었다.
마플도 여전했다.
* * *
생각해보면 소영주가 돌아왔다는 소문이 퍼져나가지 않을 리가 없었다.
성내의 병사들 입이 무겁냐 안 무겁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낮과 밤에 성을 오가는 하녀들이 있었다.
마플의 수완이 아무리 좋아도 이 촉새들의 입을 단속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또 여자들에게서 수다라는 낙을 빼앗는 것은 가혹한 일이다.
당연히 소문은 급속도로 퍼져나갔고, 오래지 않아 성벽 내의 마을은 물론이고 바깥의 마을도 소영주의 귀환을 알게 되었다.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세금이 오를까 벌써 걱정하는 노인들도 있었고, 기대에 찬 눈빛을 던지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사실 세인처럼 은폐된 케이스도 드물었다.
본인이 외부에 나서기를 즐기지 않았고 그의 할아버지도 그런 것에는 질색하는 위인이었던 탓이다.
대중에게 있어 은폐된 후계자가 바로 세인이었다. 그 도가 지나쳐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성격도 모른다.
그래도 마을 사람들은 앞날에 대한 이런저런 추측 정도는 해볼 수 있었다.
“곧 다시 영주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르겠지.”
“설마 장례식 비용도 아낄까?”
“그분이 평소 구두쇠이긴 했지만…. 손자가 그것까지 닮았을 리는….”
추운 지방이지만 그 날씨가 언제까지고 시체의 부패를 막는 것은 아니다.
제아무리 솜씨 좋은 장의사라도 한계가 있다.
여기에서 눈의 허리띠 지역까지는 거리도 멀었다.
사정을 아는 사람들이라도 마냥 세인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 세인의 할아버지는 격식에 맞춰 땅에 묻혔다기보다는 급하게 매장되었다고 보는 게 맞았다.
물건 파묻듯이 말이다.
아무리 삭막하고 실용성을 중시하는 게 북부인이라 하더라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당연히 상식이 있는 사람들은 후계자가 곧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르고, 본인의 영주 계승식을 할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미리 옷장에서 좋은 옷을 꺼내어 세탁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세인의 머릿속에는 장례식 같은 것이 들어있지도 않았다.
그는 낮에 실컷 쉬고 사색에 잠겨 성내를 거닐었다. 밤에는 양피지들을 들춰봤고 말이다.
현재는 식사를 하는 중이다.
서늘한 중앙홀에는 벽난로가 숨을 죽인 채 잠들어 있었다.
불씨가 없는 탓에 아래쪽 한기가 돌바닥을 타고 흐르다가, 위쪽의 서늘한 공기를 만나 의미 없는 힘겨루기를 했다.
그런 거대한 방 안에서 레드와 세인은 빵과 오이를 씹었다.
레드도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세인은 기사들이 즐겨 입는 검은 옷을 입었다.
몸에 착 달라붙는 기본 복장은 원래 겹쳐 입는 갑옷을 고려해 만들어졌다.
그 때문에 질기고 보온성도 최고였다. 깃을 세우면 턱 아래까지 웃도는 한기를 막을 수 있고 말이다.
세인은 허리 아래에 흘러내린 털외투에 아랑곳하지 않고, 접시에 올려져 있는 보리빵을 나이프로 잘라 먹었다.
농담이라도 고소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우유와 함께 먹으니 그럭저럭 이다.
물론 푸성귀와 우유 모두 차디차다.
오늘따라 마플이 레드와 세인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러는 게 아니라, 그들은 평소대로 식사하고 있을 뿐이었다. 검소한 식단은 아레이즈 영주의 기본이다.
“많이 심각합니까?”
앞뒤 생략하고 던진 레드의 말을 세인은 잘도 알아들었다.
그동안 그는 성내의 기록들을 모조리 살피며 과거를 살피는 작업을 했다. 그래서인지 인상이 많이 굳어져 있었다.
그런 것치곤 입술에서 나온 말투는 대수롭지 않았지만.
“뭐 전과 변한 게 하나도 없어. 할아버지 성격 알잖아. 그대로 운영해온 거야. 군비 외에 아무것도 돌보지 않았지. 그래서 최악이야.”
레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묵묵히 식사에 열중했다.
게걸스럽게 갈색 소시지를 뜯었다는 소리다.
레드가 다시 입을 연 것은 그 소시지를 껍질에서 다 발라먹고 난 후였다.
“장례식은 계획에 없으신가요?”
세인은 한숨을 쉬며 등받이에 몸을 파묻었다. 그리고 오른손 안에서 냅킨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한다.
“식후 운동이나 할까?”
“….”
식사 외에도 여러 가지 면에서 검소함을 물려준 세인의 할아버지는 여러모로 대단한 위인이었다.
단점도 많았지만, 그것조차 대단하긴 했다.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잠시 과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
그는 슬하의 자식을 잃었다. 아들이 죽은 것이다.
영주로서 보면 직속 후계자를 잃은 셈이다.
그 경위는 바로 레인저로서 활동하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보통 상식적으로 그런 사고를 당하면 남은 후계자를 감싸고 돌기 마련이다.
더구나 세인을 낳느라 며느리가 죽은 것까지 고려하면 말이다. 하지만 이 이상한 위인은 오히려 절벽을 향해 몇 걸음 더 내딛는 행동을 취해버렸다.
세인에게 경험을 쌓게 한답시고, 레인저 부대에 넣은 것을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자식이 죽은 곳에 손자를 밀어 넣는 짓은 보통 하기 힘들 텐데…. 그는 그렇게 해버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영지의 병력 외에 일절 신경을 안 쓰던 그는 그 불균형만큼이나 세인에게 집착하며 몰아붙이기도 했다.
“너는 피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그런데 그 피에 익숙해지는 과정이 좀 남달랐다.
아홉 살도 안 된 세인은 복면을 쓰고 도살장을 밥 먹듯이 드나들었다.
거기에서 온갖 짐승들이 역한 냄새를 내며 쓰러지고, 발광하는 것을 지켜보았던 것이다.
피로 물든 진흙, 그리고 흘러내리는 내장들.
그뿐만이 아니었다. 교수형이라도 벌어지는 날에는, 맨 앞자리 명당이 바로 세인의 차지였다. 언제나 두건을 쓰고 있어서, 사형 집행인의 아들로 오해를 받았지만 말이다.
검술 교사들을 초빙해 세인을 단련시켰고, 아이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잔혹한 임무가 주어지기도 했다.
예들 들어 사냥터에 있는 야산을 알몸 상태로 올라가, 단검 하나 들고 짐승을 잡아 오기 같은 것이다.
거기에 훌륭히 부응한다 해도 할아버지가 보내는 것은 끄덕임, 한 번뿐이다.
이상한 표현이지만 할아버지와 그 사이에 사적인 교류는 전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뭐 따져보면 가문의 방위에만 미쳐있었던 것은 비단 할아버지뿐만이 아니다.
지리상 아레이즈의 조상들이 다그랬지만 유독 그의 할아버지는 남달랐다. 때문에 영지민들은 안 그래도 척박한 환경 속에서 더 곤혹스럽게 살고 있다.
레드는 세인이 일층 테라스를 훌쩍 뛰어넘어 정원을 가로지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소년의 움직임은 경쾌했다.
그 안에 도사린 무서움은 레드만이 알고 있었다.
현재로선 말이다.
오랫동안 그의 곁을 보필해온 레드는 어느 날 모든 의문을 접어 버렸다.
그 의문은 세인의 불가사의한 강함이었다. 의문을 접은 이유는 그 의문에 굳이 답을 구할 필요가 없다는 깨달음, 그 외에도 그 자신이 편해지기 위해서다.
세인은 털외투를 얼어붙은 정원 바닥 위에 집어 던졌다. 그리고 단궁을 들어 올려 활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곧이어 시위가 팽팽하게 뒤로 당겨진다. 뒤로 다가오는 레드를 바라보지도 않은 세인의 입술에 화살 깃이 닿았다.
화살 끝은 나무가 가득한 숲을 향하고 있다.
나무들의 상태는…, 난잡했다. 뭐 정원사를 고용할 형편은 안되니까.
“지금은, 날 레인저 부대로 보낸 전 영주를 조금 이해할 수 있어. 레인저가 되어서 돌아다니지 않았더라면 외부 상황을 직시할 수 없었을 거야. 보고서로 보는 것과 직접 눈으로 보는 건 큰 차이가 있으니까 말이야.”
세인과 레드는 어두운 밤.
눈의 허리띠 너머 넘실거리는 불빛들을 발견하곤 했다.
그 불빛의 존재도 그렇지만, 숫자가 더더욱 큰 의미로 가슴안에 들어왔던 차가운 밤.
세인은 활시위를 놓았다. 그러자 무서운 소리를 내며 날아간 화살이 나무에 틀어박혔다.
가지가 흔들리고 바늘 같은 잎들이 우수수 땅으로 떨어진다.
세인은 몇 번 더 활을 쏴 보더니, 궁을 레드에게 던져 주었다.
그것을 받아든 레드는 속사로 화살을 쏘았다.
건장한 어깨와 수평을 이룬 팔이 움직일 때마다 바람 소리를 내며 화살이 날아간다.
세인은 그런 그의 곁에서 조용히 레드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동안 그가 느낀 점을 가감 없이 말해 주었다.
“할아버지는 영지를 전혀 돌보지 않았다. 아니 그분은 그분의 방식대로 돌봤다고 생각하시고 하늘로 가셨겠지. 덕분에 창고에는 화살과 창들이 쌓여 있다. 군량도 마찬가지. 문제는 그것을 사용할 병사들의 사기와, 충성심이지만 말이야. 병사가 아닌 사람들의 마음은 더 바닥일 테지.”
“….”
레드는 활을 내리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의 이마 아래로 흘러내린 하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말이다.
“난 몇 년 동안이나 이 성을 비웠어. 안 비웠더라도 마찬가지야. 너 외에 누구도 믿을 수 없다. 그런 형편이야. 그리고 가이더는 모르겠지만 아레이즈는 분명 쑥대밭이 될 거다. 발버둥을 쳐도 그건 변하지 않아.”
“소영주님.”
“미래는 결정되어 있다. 어떤가, 레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잘 생각해봐. 가슴 말고 머리로 말이야. 이곳을 떠나고 싶어? 아니면 남고 싶나? 내가 떠나고 자네가 남는 것도 좋겠지. 아니면 반대가 되어도 좋고. 둘 다 떠나는 것도 좋을 거야.”
그리고 세인은 레드의 손에서 활을 낚아챘다.
이제 와 이야기하는 거지만, 가끔 세인은 이렇게 악마처럼 굴기도 했다.
마음을 떠본다고 하기에는 내용이 지나쳤다. 이런 대화 자체가 기사의 본분에 벗어난 모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제 세인은 활을 들어 내키는 대로 화살을 쏘았다.
뭔가를 맞춘다기보다는 그냥 답답한 속을 푸는 행위 같은 것이었다. 그 때문에 화살은 허공을 날아 나무 그늘 속으로 사라져갔다.
맹렬한 파공음이 둘 사이를 가르고 갈랐다.
하지만 레드는 소영주가 이곳을 떠나고 싶어 한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지나친 상상이었다.
적어도 레드의 상식으론 말이다.
“당신의 손가락에 에메랄드 반지가 없다 해도, 저는 이미 당신에게 충성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렇게 못 박았다. 나는 영지가 아닌, 세인이라는 당신 개인에게 충성한다고 말이다.
원래 대화 자체가 무거운 내용이긴 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둘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레드 너라면 내게 변함없는 충성을 바치겠지. 하지만 그건 내 입장에서의 최선이고, 너로서는 어떤 게 최선일까? 넌 이미 충분히 내게 우정과 충성을 보여줬는데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는 세인이 얼굴을 들어 시린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얀 구름은 그 파란 하늘 속에 박제된 것만 같았다. 그렇다 해도 아름다운 고정이다. 그래, 시간 같은 것이 저렇게 계속 고정되어 있다면 참 좋을 텐데.
그때 눈이 동그래진 마플이 쟁반을 들고 다가왔다.
쟁반 위에는 반으로 쪼개진 붉은 사과가 담겨 있었다.
껍질도 벗기지 않았지만 좋은 간식거리다.
“뭐에요? 이런 분위기는?”
“별거 아냐. 남자끼리 이야기 좀 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