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 1화. 소영주의 귀환
“그만둬.”
레인저들의 주둔지는 광대한 산맥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곳 또한 그중 한곳이었다.
노란 램프의 불빛이 밝히는 오두막 안은 따스했다.
사람이라면 이곳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 게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 몸을 일으킨 남성. 레드의 입장은 달랐다.
그가 세인과 함께 레인저의 주둔지로 왔을 때 많은 레인저가 의아해했었다.
징집병이라고 하기에는 모호한 인상이었기 때문이다.
외부와 단절된 이곳에서 그들의 정체에 대해 내기가 벌어지기도 했지만, 결국 진실을 밝혀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봐 레드. 아무리 자네라도 위험해. 바깥에 눈이 내리고 있어. 이미 굵기가 감자 씨알만 해. 그리고 더욱 몰아칠 거야. 그만두라고.”
카드를 치고 있는 레인저 중 한 명이 그를 말렸지만, 레드는 말없이 장검을 등에 메고 단검을 허리띠에 찼다. 그리고 외투를 몸에 둘렀다.
그는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였고, 세월과 뒤엉킨 전투의 흔적은 각진 그의 얼굴에 잘 새겨져 있었다.
보이는 모든 것이, 그가 노련한 전사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두막을 나서는 레드의 넓은 등, 그리고 굵은 허리를 보며 남자가 혀를 쯧쯧 찼다. 하지만 합류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전우애를 고집하기엔 바깥 날씨가 영 만만치 않은 까닭이다.
아니나 다를까. 오두막을 나서니 칼바람이 몰아쳤다. 그러나 레드는 파란색의 눈을 서늘하게 빛내며 장화를 문틈 밖으로 내밀었다.
“레드님. 정말 지금 산에 오르시려는 거에요? 그만두세요. 큰일 납니다.”
위병소에 서 있던 신출내기 레인저조차 그에게 경고했지만, 그는 듣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발걸음을 옮길 뿐이다.
그의 등 뒤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무모함에 대한 표현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이미 충분히 기다렸어.’
그가 아는 세인이라면 잘못될 수가 없었기에 계속 기다렸다. 하지만 이제 와보니, 무슨 사고가 생긴 게 틀림없었다.
교대자 인 아델과 세인 모두, 주둔지로 내려오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레드는 세인을 찾아 홀로 설산을 올랐다.
무려 목숨을 건 걸음이다.
이쯤 되면 그와 세인의 관계가 궁금해진다.
* * *
하늘에서 눈이 펄펄 날린다.
그 하얀 눈은 자신의 색깔로 땅 위를 온통 물들였다.
눈이 부실 정도로 가득 찬 설원 속에서 소년은 앉아 있었다.
그의 검은 머리 위에는 하얀 눈이 수북이 쌓였다.
미형의 얼굴에 박힌 검은 눈만이 반짝이고 있을 뿐이었다. 입술은 보라색으로 질렸고 곧 파란색이 될 조짐을 보였다.
소년, 세인은 커다란 바위 위에 올라가 있는 상태였다.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그는 휘파람을 불었다. 그리고 그 휘파람 소리가 얼어붙을 조짐을 보일 때쯤, 화답을 받은 것이다.
멀리에서 다가오는 검은 점이 보였다.
그 점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더니, 세인의 앞에 다다랐을 때 레드의 형상이 되었다.
그는 성큼성큼 세인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시선을 아래로 주었다.
“눈트롤과 싸우셨습니까?”
세인은 레드의 음성이 가라앉고 얼어붙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세인을 찾아 얼마나 헤매고 다녔을까? 하지만 미안함 같은 것은 없었다.
상황이 반대였다면 그도 그렇게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교범대로 하셨어야죠.”
눈트롤을 만나면 도망치란 게 레인저들의 교범이다.
레드는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돌무더기 같아 보였던 트롤을 감상했다.
트롤은 피로 젖어 있었다. 그리고 굵은 손가락 틈으로 금색 털 뭉치 같은 것이 보였다.
“아델은 좋은 녀석이었어.”
“….”
아델은 눈 트롤에게 당했다.
그것이 바로 세인이 도망칠 수 없었던 이유였다. 그렇다 해도 인간 혼자서 눈트롤을 잡았다니…. 이런 이야기를 남에게 한들 과연 누가 믿어줄까?
레드는 천천히 트롤의 몸을 타고 올라가, 세인의 앞에 섰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세인님. 일어나셔야 할 시간입니다.”
“….”
그때 세인의 검은 눈과 레드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순간 기묘하게도 허공의 눈송이들이 잠시 멈춘듯한 착각이 일어났다.
레드는 세인의 발목이 부러졌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적어도 여기서 일어나는 것만은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일어나셔야 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결국, 세인은 비틀거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레드가 내미는 손을 마주 잡았다.
레드는 세인의 손을 잡아당겨 자신의 등에 그를 업었다.
그리고 한결 더 무거워진 발걸음으로 산에서 내려간다.
“트롤을 해치운 것은 분명 대단한 일입니다. 믿을 수 없기도 하고 대단한 일이죠. 그래도 너무나도 무모했습니다. 등을 보여야 할 때는 망설이지 마십시오. 그게 검술 교관으로서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충고입니다.”
“….”
산에서 내려가면서도 레드는 세인이 잠들까 두려워 계속 말을 걸었다.
“등을 돌려야 한다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어차피 인생은 그 자체로서 수치와 비겁함의 연속이니까요.”
“….”
“제 말을 듣고 계십니까?”
“아델은 착하고 좋은 녀석이었어…. 그렇게 가면 안 되는 것이었는데….”
“….”
이윽고 두 남자의 목소리는 눈에 파묻혀 전혀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정확히 두 달 후.
세인은 할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그것은 그가 더는 레인저로서 생활할 수 없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 할아버지가 다스리던 아레이즈의 소영주였기 때문이다.
* * *
대륙 북부에 위치한 나라.
가이더는 주로 겨울에 잠겨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추운 곳은 ‘눈의 허리띠’라고 불리는 지역이었다.
기형적으로 얼어붙은 이 지대는 좌우로 길게 이어져 있었고 설원 주위에 유독 높고 험준한 산이 많았다.
그곳에서는 레인저들이 부대를 이루며 살았다.
그들의 임무는 바로 눈의 허리띠 너머에서 출몰하는 괴물들을 감시하는 것이다.
대규모 무리를 감시하는 척후병. 그들이 바로 레인저들이었다.
그 아래에는 북부 귀족 가문들이 성을 만들고 들어가 살았다.
아레이즈는 바로 그런 가문 중 하나였다. 그리고 아레이즈 가문은 그중에서도 가장 고약한 위치에 있었다.
위쪽으로 돌출된 꼭짓점 모양으로 두드러진 곳에 앉아 있다. 침략자들 입장에서는 딱 보자마자 감이 온다.
저곳을 먼저 공략해야겠다는 감 말이다. 저곳을 공략하지 않으면 이 땅을 넘어설 수 없겠다는 예감, 게다가 검은 암석으로 만들어진 성도 평범한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성벽의 안쪽에서 중심을 잡은 것이 아니라, 성벽을 좌우로 끼고 바깥쪽으로 향하는 모양새였다.
성이 수문장이 되고 안쪽에 여러 개 마을을 보호하는 형세다.
* * *
검게 늘어선 성벽 너머, 산림을 뚫고 성으로 향하는 말 두 필이 있었다.
말은 소년과 중년인을 태우고 있었는데, 각기 세인과 레드를 태우고 있었다.
둘은 비와 바람을 피하느라 망토에 달린 두건을 푹 눌러쓰고 있는 상태였다.
영주가 죽었으니 소영주였던 세인은 이제 영지의 주인이 된다.
가볍지 않은 의미였음에도 불구하고 환영나온 인파는 없었다. 둘 다 그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성안의 극소수만이 소영주의 귀환을 알고 있었다. 그것도 정확한 날짜는 모르는 셈이었다.
세인은 고삐를 당겨 말을 세운 채 성을 올려다보았다.
작은 창문들이 달린 검은 성벽 위로, 다시 검고 우직하게 솟아오른 돌기둥들이 보였다.
그 기둥들은 폭이 매우 좁아, 하늘로 향하는 추의 끝처럼 보였다.
성은 투박하고 밋밋했으며, 멋이라고는 한 점도 없었다. 대신 완고함. 물러날 수 없는 의지. 결사적인 저항력을 가졌다.
두건을 넘긴 세인의 눈으로 종루 끝에 달려 나부끼는 국기가 들어왔다.
아레이즈의 국기는 가문의 깃발보다 언제나 위쪽에서 펄럭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깃발이 나부끼는 쪽을 보면 풍향을 알 수가 있다. 그 방향은 궁수들에게 좋은 전보가 된다.
레드는 투레질하는 말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잠시 딴청을 피웠다. 그렇게 잠시 기다려 줌으로서 소회에 젖은 세인을 배려했다.
그의 말이 제자리에서 몇 바퀴나 돌았을까?
세인은 고개를 돌려 레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럼 가지.”
말 두 마리는 힘차게 달려 성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영지민들은 눈의 허리띠 쪽에서 소영주가 귀환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소영주가 기사 수업을 위해 외부로 나가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게 설마 북쪽일 거로 생각하지는 않았었기 때문이다.
소영주를 발견하기 위한 그들의 눈과 귀는 온통 반대 방향으로 향한 상태였다.
요약하자면 본의 아니게 레드와 세인이 그들의 뒤통수를 쳐버린 모양이다.
“소영주님.”
성문을 지나 마구간 쪽으로 향하니, 낡고 검은 옷을 입은 중년 여자가 헐레벌떡 달려와 세인을 맞이했다.
그녀는 하녀장인 마플이었다.
“오래간만이야.”
“언제 도착할지 전서구라도 날리지 그러셨어요.”
“소중한 새를 그런 작은 일에 쓸 필요는 없지.”
“작은 일이라뇨.”
마플은 시큰둥한 얼굴로 말 고삐를 기둥에 묶는 세인의 옆모습을 보았다.
거친 야전 생활에도 불구하고 세인은 변함없었다.
괴팍하고 음침했던 소년, 그러나 그것이 바로 마플에게 익숙한 모습이다.
환영 인파를 만들도록 하고, 그사이를 지나오는 세인의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마구를 내리는 레드와 눈을 맞추고 소리 없이 인사를 했다.
레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인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러고 보니 이 우직한 기사도 여전하군그래.
“전갈이라도 주셨으면 하다못해 목욕물이라도 받아놨을 것인데…. 식기라도 꺼내 놓거나….”
“목욕물과 식기 때문에 훈련받은 새를 날린단 말이야?”
피곤한 얼굴이 된 세인은 내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런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기둥의 그림자가, 전보다 머리 하나만큼 커진 소년을 반겨주었다.
이 기둥 중 한 곳을 찾아보면 과거 그의 키를 표시했던 흔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다시 몸을 대어보면 그 가로금은 한참이나 낮아져 있겠지.
세인은 성에 들어오자마자 할아버지의 시신을 찾지 않았다.
눈물을 펑펑 흘리며 할아버지가 안치된 곳을 찾는 대신 그는 무던한 얼굴을 유지했다. 그러면서 옷과 장갑을 벗고 목욕을 즐겼다. 그리고 마플이 가져다주는 간단한 식사를 마친 후. 방안에 틀어박혀 삼 일을 보냈다.
마플이 추측하기에, 내리 잠만 자는 것 같다.
아니면 여독에 기절했거나.
레드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소영주가 잠든 방문 앞을 지켰다.
솔직히 경계라기보다는 마플의 침입을 막는 역할을 했다.
“그래도 식사는 하고 주무셔야죠!”
“푹 쉬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식사를 하고 푹 쉬시란 말이에요!”
“….”
세인은 계속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깍지를 낀 두 손을 배 위에 올려놓은 채, 방문 밖에서 벌어지는 작은 다툼을 다 들었다. 하지만 굳이 참견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냥 낡은 천장을 바라보며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무기력하게 다리를 벌리고, 베개에 뒤통수를 파묻은 채로 말이다.
방문 밖에서 벌어지는 소란이 먼 나라 일인 것만 같았다.
아레이즈는 분명 가난한 영지지만, 좋게좋게 생각해 보자면 당연히 없는 것보다는 낫다. 그리고 얼굴에 철판을 깔고 산다면 솔직히…. 풍족하게 살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이제 영주나 다름없으니까.
내키는 대로 여자를 안을 수도 있다.
손가락질받겠지만 뭐 어떤가? 적어도 그의 얼굴 앞에서 그러지는 못할 텐데.
달콤한 아첨을 즐기며 종일 술잔과 함께 뒹굴 수도 있었다.
그것을 막을 존재는 분명 영지 내에 없다.
“….”
하지만 왠지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넓지만 차가운 집이 아니라 멀리 도망치는 거다.
그는 영광이나 명예에 집착하는 남자가 아니었고, 자리에 연연하는 성격은 더욱 아니었다.
그러므로 여기의 모든 것이 부담스럽고 무겁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이건 책임의 문제다.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사회에 속해있고, 좋든 싫든 그 안에서 책임의식을 가지고 활동해야만 한다.
세인은 한쪽 팔을 올려 자신의 눈두덩이 위에 올려놓았다.
팔 아래 그림자 속에서 눈이 깜박인다.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질 때까지 말이다.
“안됩니다.”
“식사는 하셔야 할 것 아니에요!”
그런데 문밖에서 레드와 마플의 실랑이가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아직도냐?
고민 좀 하게 내버려 두라고!
결국, 세인은 베개를 문 쪽으로 집어 던져 버렸다.
거참 성질나게 하네.